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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댕기머리!!”
쾅-
문을 때려 부술 기세로 경찰청에 쳐들어온 자는 바람을 휘날리며 대회의실로 뛰어 올라왔다. 말에서 알겠지만 그는 계단을 이용했다. 도저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올 정도의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남자, 강혁은 손에 든 종이를 흔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른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댕기머리, 책임질래 안 질래!!”
“…….”
경찰청 중앙본부의 대회의실에 바글바글 몰려 있던 수많은 경찰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문 쪽으로 쏠렸다. 작금의 심각한 상황에 찬물을 끼얹어도 아주 제대로 끼얹은 상대를 향해, 원망과 분노를 담아 번개의 시선을 날려주시는 그들이다.
물론 그 안에는 차 형사와 청장도 있었다- 라고 한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 지 예측 못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터.
청장은 각 진 턱으로 문을 가리키며 짧게 명했다.
“처리해.”
“예.”
자리에서 일어난 서린은 펄럭이는 넥타이를 정리하며 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는 기력을 실지 않은 주먹으로 강혁의 배를 때린다.
퍽!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지는 강혁, 이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조금은 좋지 않은 방법으로 방해꾼을 처리한 서린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회의는 진행됐다.
“전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의 시간으로 2013년경에 사형집행제도가 부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부활했는데요? 살인을 저지르고도 콩밥 먹으면 그만이라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부활한 제도 아닌가요? 그런데 현실은 어떻죠? 그 이후로도 살인은 계속 되고, 사형집행제도 역시 계속 되고 있습니다. 악순환이 악순환을 낳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나라의 국민을 살리려면 살인의 원인을 찾아서 파훼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린은 자신의 의견을 모두 전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청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의 보드마카용 하얀 칠판에 마카로 줄을 하나 긋는다.
반대에 한 표 추가.
청장은 들고 있는 보드마카로 칠판을 툭툭 두드린 뒤 입을 연다.
“사형집행제도 제폐지가 5표, 유지가 495표. 다수결의 의견에 따라 우리 경찰청의 의지는 유지임을, 국회의사당에 전하겠다. 오늘의 비상회의는 여기서 끝! 모두 해산.”
드르륵- 하는,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회의실 전체에 울렸다.
일제히 일어난 경찰들은 인사를 한 뒤 양옆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물론 그 중 하나의 문은 침입자 때문에 열려 있었다.
제일 먼저 그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서린은 강혁을 어렵지 않게 등에 업고는 강력수사반 제 1사무실로 내려왔다.
그녀의 뒤를 정 순경이 이었다.
“차 형사님, 이거요.”
“뭐에요?”
“윤 사장님이 떨어트리신 거예요. …아까 맞으면서.”
축 쳐진 강혁을 탁자 위에 길게 눕힌 서린은 정 순경에게서 종이를 받아 바라봤다.
“풋!”
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지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또 한 장의 사진을 들고 도끼눈을 뜨고서 노발대발 하고 있었다. 문제는 사진 안의 사진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는 얼굴에 있다.
하지만 표정은 다르다. 큰 사진은 도끼눈을 뜨고 있다면, 그 안의 작은 사진은 너무 놀라 말문을 잃은 얼굴이다.
서린은 사진을 보며 이틀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이는 3주 전 강화유리 사건이 아니다. 강화유리 사건 이후 공동명의의 2층 주택에서는 또 다시 소동이 일었었다.
발단은 간단하다. 커피가 떨어진 것이다.
마침 비번이라서 집에 있던 서린은 슈퍼마켓으로 가서, 커피와 프리마, 설탕이 모두 조절되어 있는 커피믹스 130개짜리 스페셜 세트를 사왔다.
하지만 직접 비율 맞춰서 커피를 타 먹는 강혁이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 그는 대번에 바꿔오라며 성을 냈고, 서린은 자신에게는 커피를 직접 타서 마실 시간이 없다는 말로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강혁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서린마저 짜증을 냈다.
이틀 전부터 비가 그치고 해가 쨍쨍해서 무척 더운 관계로, 안 그래도 짜증지수 60%이던 사람을 강혁이 건들고 말았다, 라고나 할까.
“그럼 직접 가서 바꿔오면 될 거 아냐! 사내새끼가 그런 걸로 쪼잔하게 일일이 따지고 깐죽거릴래? 확 패는 수가 있으니까 입 닥쳐!!”
“…….”
거친 욕을 들어버린 강혁은 너무 놀라 침묵을 유지했으나 사태는 종결되지 않았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정 순경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버린 것이다.
그 사진은 강화유리 때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장식했고 강혁은 사진을 뽑아서 경찰청에 찾아왔었다. 이를 정 순경이 자기 실수라며 무마하고 나섰지만, 제 2차 충격이 강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일의 회상을 모두 끝낸 서린의 정신은 현실로 돌아온다.
“이건 또 누구 짓이랍니까?”
“죄송해요. 마침 그 자리에 저랑 같은 학교를 나온 기자 녀석이, 취재 거리를 건지고 싶다면서 왔었던 터라.”
“좋~은 기사거리 하나 멋지게 제공한 셈이네요.”
“…….”
정 순경은 양 어깨를 들썩였다. 서린이 말꼬리를 살짝 늘일 때는 화가 조금 치밀어 올랐을 때 나오는 말버릇임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에 흘러나온 행동이다.
“정보수사반의 능력을 총동원해서, 이 기사가 더 이상 퍼지지 않도록 막으세요, 얼른.”
“예!”
정 순경은 고개를 끄덕인 뒤 후다다닥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또 무슨 일이야.”
정 순경이 내려간 것을 확인한 오 반장이 서린 옆으로 다가왔다. 화가 났어도 다른 곳에 화풀이할 인물이 아님을 알기에 다가설 수 있는 그다.
옅은 한숨을 내쉰 서린은 사진을 오 반장에게 건넨다.
“정 순경의 친구 기자가 자리에 있었나 봐요. 류안의 대표이사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며 좋아했겠죠.”
사진을 보던 오 반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강화유리 때문에 경찰청에 쳐들어온 윤 사장 모습 아닌가?”
“그 때는 1차로 끝났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진 속의 표정도 다르고요.”
간략히 대답한 서린은 강혁의 뺨을 짝짝 때렸다. 세대를 맞고 나자 강혁은 정신을 차린다.
“주접 그만 떨고 회사 가요. 대표이사가 이렇게 자리 함부로 비워도 되요?”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차 형사와 정 순경 아니냐고요!”
긴 탁자 위에 드러누워 있는 강혁은 자기가 어디 있는 지도 모르고 투덜거렸다. 기어이 서린의 이를 갈게 만드는 것이다.
“커피 믹스 못 먹겠다고 생떼 쓴 사람이 누구죠? 130개짜리 사왔으면 된 거 아니냐고요!”
꽥 소리 지른 서린은 넥타이를 끌어내리며 사무실을 나갔다. 이미 해산 명령이 떨어진 마당에 사건도 없는데,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전히 남아 있던 오 반장은 강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윤 사장, 지금 10시도 안 됐어. 근무시간에, 그것도 대표이사가 함부로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얼른 회사 가보게.”
“예, 예.”
자신의 뺨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는 강혁은 순순히 탁자에서 내려왔다. 물론 그 이유도 모르는 그다.
류안.
“언제 나가셨어요? 뺨은 또 왜 그래요!”
잠시 비서실을 비웠던 터라 강혁이 나간 것도 모르던 진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강혁을 보고는 입을 쩍 벌린다.
강혁은 왼손으로 뺨을 매만지며 되묻는다.
“뺨? 뺨이 왜.”
“시뻘건 손바닥 모양이 나있잖아요, 양쪽 다. 몰랐어요? 그렇게나 자국이 남을 정도면 엄청 아팠을 텐데?”
“그게 의문이다. 차 형사가 나타난 것까지는 알겠는데, 전혀 기억이 안 나니 이거야 원. 나는 왜 강력수사반 제 1사무실에 있었던 걸까? 그것도 탁자 위에 누워서! 난 분명히 대회의실에 쳐들어갔었는데 이유가 뭘까?”
“…….”
이유를 알 것 같은 진우지만 아무 말도 안 했다. 그 이유를 입 밖에 냈다가는, 여자한테 그 꼴 당한 게 자존심 상해 할 게 뻔해서다. 뭐, 여태까지도 팍팍 무너진 자존심, 아직도 그 끈덕지가 남아있을 지는 모르겠다만.
뒷머리를 슥슥 긁은 강혁은 이내 투덜댄다.
“에이, 모르겠다. 아, 왜 자리를 비웠었어?”
“회장님의 비서이신 노 비서님께서 부르셔서요. 회장님, 물 가득한 길을 뛰어가시다가 미끄러지셔서 오른쪽 발의 인대가 늘어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강혁은 후다닥 올라가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윤 회장은 발목에 가벼운 깁스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회사 운영에는 이상이 없지만 장시간 서 있거나 하는 외출은 금지라고 한다. 몇 가지 대신해야 할 일들을 듣고서 자신의 사무실로 내려온 강혁.
“나 부산 가야 하네?”
“예, 내일부터 2박 3일 일정입니다. 에이~ 이게 뭐에요~ 제주도 다녀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왜, 정 순경 못 만나게 돼서 아쉽냐?”
정곡을 찔려버린 진우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얼굴만 붉힐 뿐.
얼굴의 뺨 자국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강혁은 진우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최 비서, 얼굴이 왜 빨개.”
“몰라요.”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린 진우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유를 짐짓 알 것 같기도 한 강혁은 사무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진우가 붙잡는다.
“저기 사장님.”
“?”
“우리, 휴가 언제부터에요?”
“어, 6일부터 10일까지. 공시 안 떴나? 안 뜬 거 같으면 공시 띄워 놔라.”
“어? 10일이면 금요일이고, 11일 토요일은 둘째 주 토요일이네요.”
“음, 일명 <놀토>지. 그래서 좋냐?”
“아니요. 한편으로는 걱정이에요. 다들 1주일씩이나 놀고 와서 뭘 근무해야 하는지 다 까먹는 거 아닐까요?”
진우의 걱정을 들은 강혁은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는다.
“심지어는 출근시간에 맞춰서 출근 못 하는 사람도 있을 지도 모른다.”
강혁으로서는 분명히 우스갯소리였다.
비상만 걸리지 않으면 오는 수요일까지 휴가다. 하지만 연중무휴 경찰에게 휴가가 어디 있을까 하냐마는, 휴식시간이 생긴 것만은 확실하다.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틀고서 소파에 배를 깔고 드러눕다시피 한 서린, 정보수사반에서 모아준 30년간의 사건일지를 하나 둘 살피기 시작했다.
100개인 서류 집을 언제 다 살펴보나, 하는 걱정 따위 집어치운 지 오래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이곳 한국에 홀로 남겠다고 결정하게 만든 가장 커다란 이유이기 때문이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사건기록을 살피기에 바쁜 서린은 시간이 8시가 넘어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갑자기 저녁 약속이 잡혀 먹고 오느라고 늦은 강혁과 진우는 그 시각에 도착했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서린은 자연스레 입을 연다.
“왔어요.”
“아, 예. 저녁 먹고 오느라.”
강혁은 대답을 남기고 2층으로 올라갔다. 오늘따라 이래저래 피곤함을 느끼는 그다. 아마, 아침부터 뺨과 배를 얻어맞은 것 탓일지도 모른다.
저녁?
고개를 슥 들어서 시간을 확인한 서린은 화들짝 놀란다.
“세상에! 지금 이게 몇 시야!”
“8시잖아요, 왜 놀라세요?”
주차하고 온다고 늦게 들어온 진우는 질문을 한 것에 대한 대답을 다른 방향으로 들을 수 있게 된다.
꼬르르르르르륵.
“풋! 여태 식사도 안 하신 거예요, 차 형사님? 몇 시에 들어오셨는데 그러세요?”
“오늘은 일찍 들어왔어요, 사건이 없어서. 10시인가 그럴 걸요?”
“그럼 그 때부터 쭉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예. 아, 배고파요.”
청장의 호출을 받고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했으니 더 그럴 것이다.
씩 웃으며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간 진우는 냉장고를 살폈다. 반찬이 이것저것 남아 있다. 김밥 재료가 있는 것을 본 그는 얼른 달걀을 풀었다.
20분에 걸쳐 김밥을 모두 싼 진우는 라면도 하나 끓였다.
“밥 먹으러 들어오세요, 차 형사님.”
진우의 말소리를 들은 서린은 반갑다는 듯 웃으며 얼른 식당으로 들어갔다.
“김밥과 라면이에요. 우리나라 주 분식이죠.”
“그렇군요.”
“김밥을 라면 국물에 퐁당! 빠트렸다가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요.”
“그래요? 잘 먹을게요! 최 비서, 정 순경이 최 비서 좋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요.”
“푸훗!”
때마침 물을 마시던 진우는 깜짝 놀라, 서린의 얼굴을 향해 입 안의 물을 몽땅 뿜었다.
“허-.”
예기치 않은 봉변을 당해버린 서린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휴지를 뽑아 얼굴을 닦았다.
“전 저녁식사 준비해달라고 말한 적 없거든요?”
“죄송해요.”
서린의 투덜거림을 들은 진우는 멋쩍은 듯 웃었다.
그래도 김밥과 라면을 향해 떨어진 건 없기 때문에 식사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때문에 서린은 더 이상 따지지도 않고 식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