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의인상·상록재단… "베풀며 살아라" 어머니 뜻 평생 지켰다
전수용 기자
입력 : 2018.05.21 03:06
[구본무 회장 별세] 구본무 회장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사회적 책임)'를 실천해온 대기업 오너다. "자기를 속이는 사람은 더 이상 속일 데가 없다"면서 정직을 강조했다. 고인은 물론 LG그룹도 불미스러운 구설에 오른 적이 거의 없었던 것도 고인이 늘 권력과 거리를 두고, 기업 경영에서 '정도(正道)'를 실천한 결과다. "편법·불법을 해야 1등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1등을 안 하겠다"는 게 고인의 지론이었다.
구 회장은 LG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우는 과정에서는 '냉철한 승부사' 기질을 보였지만, 평소에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기반한 온화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신용을 쌓는 데는 평생 걸리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말을 자주 했던 고인은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꼭 지켰다. 공식 행사든 사적 약속이든 늘 20~30분 정도 먼저 도착, 상대방을 기다린 것으로 유명하다.
고인은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승용차가 갓길을 운행하거나 적당히 위반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직원을 아낀 인재 경영은 고인의 철칙 중 하나였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대규모 적자가 났을 때도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면서 인위적 감원을 하지 않았다. 고인이 취임한 뒤 LG그룹에서는 '노사 분규'라는 단어가 생소해졌다. 그는 협력업체 대해 "우리는 '갑을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권위주의와 담을 쌓고, 검소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대기업 총수에 대한 편견을 바꿨다. 연세대 재학 중에 육군 현역으로 입대해 보병으로 만기 전역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저녁 자리가 늦어지면 운전기사를 먼저 보내고, 택시를 잡아타고 귀가하기도 했다. 큰딸 연경씨나 아들 구광모 LG전자 상무의 결혼식도 가족들만 모여 조촐하게 치렀고, LG 경영진에게도 '작은 결혼식'을 권했다. 신문에 회사 직원들이 부고 내는 것도 금지하고, 협력업체에서는 경조금도 받지 못하게 했다. LG 고위 인사는 "아랫사람 누구에게도 반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불필요한 격식도 싫어했다. 주요 행사에 참석하거나 해외 출장 때 비서는 꼭 필요한 한 명만 수행하도록 했고, 주말에 있는 지인의 경조사 등 개인적인 일을 할 때는 비서 없이 혼자 다녔다. LG그룹이 매년 여는 인재 유치 행사에서 400명이 넘는 참가 학생 모두와 일일이 악수를 하고, '셀카' 요청에도 흔쾌히 응하며 격의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구 회장은 2016년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서는 '소신 발언'으로 화제가 됐다. 당시 '앞으로도 (박근혜 정부 때처럼) 명분만 맞으면 정부 요구에 돈을 낼 것이냐'는 국회의원 질문에 "불우이웃을 돕는 일은 앞으로도 지원하겠다"고 했고, '앞으로도 이런 자리(대통령 면담)에 나올 것이냐'는 물음에는 "국회가 입법으로 막아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질문자였던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청문회장에서 만난 그분은 이 시대의 큰 기업인이었다"고 했다.
고인은 "남들에게 베풀고 살라"는 어머니 고(故) 하정임 여사의 뜻을 평생 실천했다. "국민이나 사회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면 영속할 수 없다"면서 LG복지재단, LG연암문화재단, LG연암학원 등 복지·문화·교육 분야 공익재단 이사장 및 대표이사로 사회 공헌 활동에 투자와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고인은 특히 2015년 "세상이 각박해졌어도 국가와 사회정의를 위해 희생한 의인(義人)에게 기업은 사회적 책임으로 보답해야 한다"며 'LG의인상'을 만들었다. 그동안 소방관·경찰관·고교생·크레인 기사·선장 등 72명이 의인상을 받았다. 작년 강원도 철원에서 빗나간 총탄에 아들을 잃고도 "어느 병사가 총을 쐈는지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고 한 아버지나, 2015년 비무장지대에서 지뢰 사고를 당한 병사는 사재를 내어 도와줬다.
새와 숲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고인은 "후대에 의미 있는 자연유산을 남기고 싶다"면서 1997년 12월 국내 최초로 환경 전문 공익재단인 LG상록재단을 세웠다. 공익사업으로 경기도 곤지암에 5만여 평 규모의 '화담숲'을 조성해 수목 보전과 연구 지원에 힘썼다. 화담숲의 '화담(和談)'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으로, 구 회장의 아호(雅號)이다. 새 울음을 듣거나 날아가는 모습만 보고도 새 이름을 척척 맞혀 '새 박사'로 통했다. LG 트윈타워 빌딩 집무실에 대형 망원경을 설치해 여의도 밤섬 새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2000년 조류학자들과 함께 국내 최초의 조류도감인 '한국의 새'라는 책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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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인간 구본무
조선일보 박정훈 논설위원
입력 2018.05.21 03:16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어린 시절 진주의 조부모 집을 오가며 자랐다.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물 동냥 왔다가 소년 구본무와 마주쳤다. 스님은 소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허, 저기 돈 보따리가 굴러다니네." 부자들로 넘쳐나는 재계에서도 그의 얼굴상은 으뜸으로 쳐줬다. 허영만의 만화 '꼴'에서도 돈이 따라붙는 만석꾼 관상으로 등장한다.
▶스님의 관상풀이대로 구 회장은 평생을 돈 보따리를 끌어안고 살았다. 하지만 일상은 남을 먼저 배려하는 소탈한 에피소드로 넘쳤다. 무조건 20분 전엔 약속 장소에 나가는 습관이 유명했다. 먼저 와 있는 구 회장을 보고 상대방이 황송해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음식점 종업원에겐 만원짜리 지폐를 꼬깃꼬깃 접어 손에 쥐여주곤 했다. 골프장에 가면 직접 깃대를 잡고 공을 찾아다니며 캐디를 도와주었다. 아랫사람에게도 반말하는 법이 없었다. 옳은 일 한 의인(義人)이 나타나면 개인 재산을 털어 도와주었다. LG 의인상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유교적 가풍(家風)을 이어받은 경영자였다. 온화한 가부장 같은 리더십으로 직원들 마음을 샀다. 10년 전 금융 위기 때 그가 내린 지시가 화제였다. "어렵다고 사람을 내보내면 안 된다." 그는 눈앞의 이익보다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다. 휴대폰 사업이 거액 적자 냈을 때도 LG전자는 감원 없이 버텼다. 덕분에 그의 회장 취임 후엔 노사 분규가 거의 사라졌다. 직원들 애사심도 유별나다. 투박하지만 끈끈한 기업 문화를 만들었다.
▶그는 평생 책을 딱 한 권 기획해 펴냈다. '한국의 새'라는 조류 도감이다. 그의 탐조(探鳥) 취미는 유명했다. 여의도 집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하고 틈만 나면 한강변 철새들을 관찰했다. 새를 통해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것일까. 그는 바람에 순응해 하늘을 날듯 순리를 좇는 삶의 방식으로 일관했다. 남과 다툴 일을 만들지 않았고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았다. 그 흔한 비리나 구설수 한번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랬다.
▶천하의 덕장(德將) 구 회장도 분노를 참지 못한 일이 있었다. IMF 때 강제 '빅딜'로 반도체 사업을 빼앗겼을 때다. 그날 밤 구 회장은 "모든 것을 버렸다"며 통음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다시 일어섰다. 기업인이 존경받지 못 하는 오늘, 정말 옆집 아저씨 같던 재계 총수를 떠나보내며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느낄 사람이 무척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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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가는 길도 소탈… 故 구본무 LG그룹 회장 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