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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가 사라진다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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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를 외치며 2월 1일부터 밤샘농성에 들어갔지만 이를 바라보는 대다수 국민들의 시선이 예전과 달리 싸늘하군요. 그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멀지 않은 지난 세월 영화계가 영화계 스스로의 양극화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모순을 범해 수많은 영화 애호가들을 실망시켰던 것일 것입니다. 특히 일부 성공한 영화인들의 사치스럽고 방만한 사생활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현대판 노예와 같은 처참한 생활을 해 온 영화계 저변 종사자들을 위해 스크린쿼터와 비슷한 최저생계비를 보장하라고 주장하는 것을 우리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총체적 국익을 위해 스크린 쿼터를 축소해야할 것입니다. 사자가 새끼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언덕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듯이 우리는 한국의 영화인들을 광야로 내몰아야 합니다. 그래서 살아남은 자들만이 한국 영화계의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주인공들이 되게 해야 합니다. 벌써 십 수 년 전부터 정부에서는 스크린쿼터 축소를 수차 예고해 왔습니다. 미디어의 홍수 시대입니다. 한국 영화는 영화관이 아니어도 인터넷·DVD·케이블TV 등을 통해 얼마든지 애호가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작품이 좋아야하겠지요. 영화인들은 스크린 쿼터가 축소되면 한국의 상업영화가 멕시코처럼 소멸되고 말 것이라고도 주장합니다. 물론 최악의 경우엔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총체적 국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정부가 영화계를 감싸고 돌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또, 저는 설사 최악의 경우, 그렇게 된다고 해서 크게 상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업영화는 한국인들이 문화 예술적 기질을 표현하는 한 장르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상업영화가 쇠퇴하면 예술영화·독립영화·연극·뮤지컬·드라마 같은 인근 장르에 불이 옮겨 붙을지도 모르지요. 2차대전 이후에 공산국가였던 폴란드에서는 정치적 이유로 서구 세계와 같이 방송을 발전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다른 장르에서 특별한 발전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일례로 폴란드는 20세기 후반에 포스터 미술 부문에서 질적으로 또 양적으로 세계최고의 수준을 이룩하기도 했습니다. 거시적인 시각으로 국가의 운명을 내다보고 유연하게 대처해나가는 지혜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제 오히려 한국의 영화인들은 구차한 변명과 구걸을 멈추고 강하고 담대하게 한국적인 영화예술의 사상과 방법을 구축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친구'·'실미도'·'웰컴 투 동막골'·'왕의 남자' 등의 성공은 한국 영화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회수가 불투명한 무리한 투자를 해서 할리우드 대작들을 흉내 내려 할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비티를 착실하게 구축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스타들이 거리로 나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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