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백색의 겨울 설산이 산행을 즐기는 등 산객을 유혹하고 있다. 올해는 윤난히 눈이 내리지 않아 도시에서는 눈을 구경조차 할 수 없지만 하얀 눈으로 뒤덮인 계곡에는 허벅지가 빠질 정도의 눈이 쌓여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지난 해 9월, 20년 만에 개방된 남설악 흘림골과 흩림골과 이어져 있는 주전골은 그동안 내린 눈이 고스란히 쌓여 멋진 겨을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20년 만에 선보이는 흘림골.
44번 국도를 따라 홍천을 지나 인제 방향으로 달리기를 1시간여, 겨울철 별미로 잘 알려진 빙어의 본고장인 인제군 남면을 지나서야 도로 주변에 쌓인 눈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곳 인제에서 한계령 길에 이르는 구간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여 설국을 연상하게 했다.
급경사 한계령 길에 접어들면서 설경은 더욱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전날 내린 눈으로 세상은 온통 하얀 설국 그 자체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하얀 눈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육중한 산봉우리에도 나름의 형상을 지닌 눈 조각상으로 탈바꿈했다. 이번에 찾아갈 오지는 지난해 9월, 근 20년 만에 개방된 흘림골이다. 오랜 휴식년제를 끝내고 개방되었는데, 워낙오랜 시간동안 세상으로부터 단절돼 있던 곳이라 웬만한 산사람 아니고는「흘림골」이라는 이름조차도 낯설게 다가을 정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난 20년 동안 흘림골 일대의 자연은 원시적인 모습과 건강함을 되찾았다.
▲설악 주전골에서 보이는 한계령 휴게소
지난가을에는 흘림골이 개방됐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든 사람들이 제법 많았지만 겨을로 접어들고 기온이 떨어지면서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한계령 휴게소에서 약 2km, 도로 좌우에 쌓인 눈 때문에 흘림골 주차장을 찾기조차 쉽지 않았다. 흘림골 주차장이 도로가에 위치해 길눈이 밝지 않은 사람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한계령 휴게소에서 양양 방향으로 약 10분 정도 내려 오다보면 왼쪽으로 제법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 주차를 하고 길 건너편 흘림골 입구로 들어가면 된다. 흘림골 입구에서 등산로를 올려다보니 지난 주 내린 대설에 등산로가 막혔다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조금 더 내려가 주전골에서 산행을 시작하라는 말까지 덧붙여져 있다. 하는 수 없이 조금 더 내려와 주전골 용소폭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쪽도 눈이 많이 쌓여 산행이 힘드니 오색지구에서 산행을 시작하라는 공원 직원의 말에 차를 되돌려야 했다. 도시에서는 눈이 없어 삭막하기만 한데 이곳에서는 눈이 많아서 문제다. 어른 허리춤까지 눈이 쌓여 산행이 통제되고 있었다. 오색지구로 내려와주차를 하고서야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되었다. 오색지구에서 주전골, 흘림골로 향하는 산행은 트래킹에 가까을 정도로 평평한 코스로 이뤄져 산행이 그만큼 쉽다. 다만흘림골에서 시작해 주전골로 내려오면 내리막이라 보다 쉽다. 매표소 직원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네자 그는 주전골 십이폭포까지만 개방된다는 말을 내뱉는다. 십이폭포를 지나 흘림골 방면으로는 눈이 많이 쌓여 통제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하는 수 없었다. 그래도 나선 길이라 주전골 산행을 고집했다. 은백색의 겨을 설산은 산행에 나선 등산객의 마음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계곡의 바위들은 하얀 눈을 뒤집어서 마치 무덤 같았다. 주변의 나무가 없다면 계곡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많이 쌓였다. 휘하고 지나는 바람에 나무 위에 쌓인 눈은 힘없이 흩어져 눈송이가되어 날리기도 한다.
▲참숯가마 체험
■설경 감상하기 좋은 주전골, 은백색으로 반짝이는 겨울 설산
오색약수 · 용소폭포 · 십이폭포까지를 주전골 계곡으로 분류한다. 십이폭포에서 한계령까지는 흘림골이다. 주전골은 주변 산세를 구경하며 걸어도,왕복 2시간 반 거리이면 충분히 오색지구로 되돌아을 수 있다. 흘림골까지 가려면 4시간은 족히 걸린다. 주전골은 옛날 조선시대 도적 무리들이 숨어들어 몰래 엽전을 만들다 발각됐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그래서 골의 이름이 오늘까지 도주전이다. 오색약수를 지나 조금만 오르면 성국사에 이른다. 지금은 성국사라 부르지만 그 전에는 오색석사라 불렀다. 오색석사는 오색약수를 발견한 승려가 머물렀다는 작은 사찰로 보물 497호로 지정된 오색리 3층 석탑이 경내에 서 있다.
이곳에서부터는 겨우 한 사람이 지날 수 있을 정도의 길만 나 있어 산행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길이라고는 하지만 온통 눈밭이라 헛디딜 경우 계곡으로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사가 심한 곳에는 난간과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제 계단이 마련돼 있어 등산로를 구별할수 있다. 눈 덮인 산길을 걷기를 약 50여분, 커다란 바위가 기울어 만들어진 금강문에 닿는다. 이 금강문을 지나야만 비로소 진짜 설악에 접어들었다고 믿는다. 금강산에서도 금강문을 지나야 비로소 금강산을 봤다고 하는 것과 이치다. 금강문을 지나면 길은 두 갈래로 나눠진다. 우측으로 가면 향하면 용소폭포, 좌측으로 가면 십이폭포로 향하게 된다. 용소폭포까지는 불과 17분 내외로 용소폭포를 보고 되돌아와 십이폭포로 향하면 된다. 십이폭포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의 산행과는 달리 다소 힘든 편이다. 오르막이 있어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눈이 많이 내린 날에는 이마저도 통제되기 일쑤다. 십이폭포를 지나 곧장 가면 흘림골인데 오늘이 길은 이미 통제되어 출입할수 없었다. 되돌아오는 길은 고개를 들고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더욱 여유가 있다. 다만 눈덮인 산길을 걷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진이 빠지는 듯하다. 산행의 피로는 오색온천에서 마무리하면 좋다.
■ 빙어 축제의 현장
인제 빙어낚시는 꽁꽁 언 얼음판에 구멍을 뚤고 견지낚시로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빙어를 잡는 이색 체험이다. 백담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과 내린천이 합수되는 청정 호수인 소양호 일대에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빙어낚시가 시작된다. 빙어낚시는 방법과 장비가 무척 간단해 초보자라도 쉽게 즐길 수 있다. 낚싯대와 미끼를 사서 빙판 구멍에 줄을 늘어뜨리면 끝. 빙어는 6~10도 정도의 맑은 물에서만 서식하는 냉수종으로 여름에는 물 속 깊은 곳에서 살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겨울철에 잘 잡히는 것이다. 겨울에는 먹이를 잘 먹지 않아 몸이 투명한 것이라고 전한다. 고서에서는 빙어를 과어(瓜魚)라고 했는데 몸에서 오이의 향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천에서는 속이빈 것처럼 보여 공어 (空魚)로도 불린다.
▲인제 빙어낚시
빙어낚시터 맞은편 남면 남전리의 강원 참숯에서는 참숯을 구워내고 난 빈 가마를 이용한 찜질 체험이 가능한 곳이다 후끈거리는 숯가마의 열기에 노폐물이 쏙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생활 참숯을 판매하기도 한다.
■ 교 통
양평에서 44번 국도를 이용하거나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해 원주 · 홍천을 지나 인제까지 가는 방법이 있다. 빙어축제 행사장은 신남휴게소와 38휴게소 사이 소양호에 자리한다. 국도이용 시 서울에서 약 3시간, 영동고속도로 이용 시 약 2시간 소요.
■ 산행 코스
흘림골은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겨울철에는 자주 입산이 통제되기도 한다. 흘림골 산행을 하고자 할 때는 미리 연락해 본 다음 찾아가는 것이 좋다. 한계령 휴게소를 지나 조금 더 가면 흘림골 입구가 나온다. 흘림골에서 주전골로 이어지는 산행이 적당하다. 겨울 산행을 할 때는 아이젠 · 스패츠 등 장비를 갖춰야 안전하다. - 국립공원 설악산 사무소 ☎ 033-636-7700
■ 참숯가마 체험
참숯을 구워내는 숯가마를 식히기 위해 잠시 비워둔 틈에 사람들이 들어가 찜질을 하는 것이다. 비록 시설은 낙후되어 있지만 도시의 한증막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찜질 효과가 뛰어나다. 저녁 7시까지, 입장료 3,500원. - 강원참숯 ☎033-463-4931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유명한 용평리조트. 최근엔 TV 드라마 ‘금쪽같은 내 새끼’, ‘반올림’과 ‘논스톱’, 영화 ‘얼굴없는 미녀’ 등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성가를 높이고 있다. 드라마 ‘슬픈연가’의 마지막 장면도 5일 이곳에서 촬영할 예정이다. ‘신화’ ‘거북이’ 등 가수들도 뮤직 비디오 촬영지로 이곳을 자주 찿는다. 장수자가 많이 사는 중산간 지역이어서 기분이 상쾌한 데다 흰 눈밭, 발왕산 정상으로 끝없이 오르는 곤돌라, 발왕산 정상의 주목들은 방문자의 얼을 뺏고도 남는다.
◆발왕산 =관광 곤돌라로 해발 1458m 발왕산 정상에 오르는 길엔 온 세상이 발아래 가득하다. 힘찬 강원의 산들은 아득히 멀고 넓어서 거침이 없다. 일망무제(一望無際). 시야가 시원하다. 강원의 산들은 봄과 가을 풍경이 다르고 눈꽃이 핀 겨울 빛이 또 다르다. 사랑이야기의 전설이 깃든 발왕산 꼭대기는 안개와 바람으로 객을 맞는다. 사진 찍기에 그만이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들도 늠름하다. 여기에 겨울연가의 아련함이 덧붙여지니 금상첨화다.
드래곤피크 인근에는 ‘겨울연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겨울연가’ 2회에서 준상(배용준)과 유진(최지우)이 눈사람을 만들고 첫 키스를 하던 곳을 ‘눈사람 만들기’ 공원으로 조성했다. 한쪽에는 두 사람을 실물 크기로 재현해 놔 이곳을 찾은 스키어들과 관광객들의 단골 기념사진 촬영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리조트 입구 호텔 정문 건너편에는 ‘겨울연가’에서 준상과 유진이 커피를 마시던 카페 ‘처음’이 있다. 이곳에서는 커피나 녹차, 폴라리스카드, 교복 촬영(3000원)을 묶어 ‘겨울연가’ 상품으로 판매한다.
드라마와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는 것 말고도 용평리조트는 사계절 휴양지로 손색이 없다. 눈이 녹을 무렵부터는 산악자전거, 산악썰매, 서바이벌 게임, 등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스키 시즌이 끝난 뒤 이곳을 찾으면 저렴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어 더욱 좋다. 용평리조트는 골퍼들에게도 천국이다. 소수 회원 위주에서 비회원 입장을 꾸준히 늘리고 있는 용평골프클럽, 누구나 부담 없이 골프를 즐길 수 있는 대중골프장, 국제대회를 치르는 버치힐골프클럽이 있어 골퍼들을 유혹하고 있다.
◇발왕산 정상에 재현해 놓은 배용준·최지우 상.
◇발왕산 정상에 조성된 ‘눈사람 만들기’ 공원에서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발왕산 정상 드래곤 피크의 카페에는 ‘겨울연가’ 포스터와 함께 관광객과 스키어들이 소원을 적어놓은 폴라리스 카드가 수북이 쌓여 있다.<사진왼쪽부터>
◇김희선 , 권상우 주연의 ''슬픈연가'' 용평스키장 촬영 장면.
◆봄 스키=3월이 되면 스키 마니아의 한숨이 깊어진다. 스키 시즌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기 때문. 하지만 한숨을 쉬기엔 아직 이르다. 적설량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 용평스키장에선 4월 초까지 스키를 즐길 수 있다. 3월 중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스키를 즐긴다는 것은 아직 우리에겐 낯선 풍경이지만, 이맘때 용평 스키장에선 반소매 옷을 입은 스키어들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색 풍경을 반영하듯 12, 13일 이틀 동안 ‘용평 크레이지 스키·보드 대회’도 열린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이 행사는 만 16세 이상의 남녀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고, 입상자에게는 내년 시즌권과 상품권 등 다양한 상품이 주어진다. 홈페이지(www.yongpyong.co.kr)를 통해 선착순 접수(참가비 2만5000원)하며 참가자에게는 객실과 리프트권을 할인해 준다. (02) 3270-1122
◆인근 가볼 만한 곳=용평리조트를 충분히 즐겼다면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먼저 삼양 대관령 목장을 빼놓을 수 없다. 3월 중순까지는 눈썰매와 설경을, 3월 하순 이후엔 사륜 오토바이나 서바이벌 게임 등을 즐길 수 있어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계절에 상관없이 강원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 대관령 목장 역시 영화 ‘연애소설’, 드라마 ‘가을동화’ 등의 촬영지로 알려져 있다.
◇눈 쌓인 오대산 월정사에서 한 가족이 한가로이 사진을 찍고 있다.
오대산 월정사는 바람이 적당히 불어야 운치를 느낄 수 있다. 눈을 살며시 감고 주변 전나무들이 “쏴∼쏴∼” 하며 바람에 쓸리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도시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깨끗이 씻긴다. 월정사에 다다르기 전에 나오는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늘어선 전나무 숲길은 산책하기 좋은 장소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상원사에 오르는 것도 좋다.
강릉에서 7번 국도(구 동해고속도로)를 타고 삼척 방향으로 가다 보면 정동진에 못 미쳐 오른쪽에 하슬라아트월드가 나온다. 이곳은 자연을 테마로 한 공원으로 소나무 정원, 시간의 광장, 바다의 정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강릉대 미술학과 최옥영 교수 부부가 정동진 등명 인근 3만여평에 조성한 하슬라아트월드는 야생화, 옛길 등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안내에 따라 1시간 정도 관람한 뒤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월출을 감상하다 보면 여행의 피로는 말끔히 사라진다.
찾아가는 길
▲용평리조트:영동고속도로 강릉 방면→횡계나들목, 우회전→용평리조트(서울에서 약 3시간).
▲대관령 목장:횡계나들목, 우회전→횡계시내 로터리까지 직진→로터리에서 좌회전→대관령목장 이정표 따라 진행. (033)336-0885
용평리조트에서는 하이랜드(횡계) 옆 교량을 지나 오른쪽 샛길로 내려가 좌회전, 굴다리를 빠져나가 비포장도로를 7㎞쯤 달리면 된다(25분).
겨울 숲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연의 힘’을 체험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또 속도의 강박증에 걸린 채 살아온 고단한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겨울 숲으로 떠나보자. 오관을 열고, 숲 향기 숲 소리에 취해보자. 올 겨울 가볼 만한 숲 5곳을 꼽아봤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바라본 겨울 잡목숲
어떤 사람들은 “꽃도 단풍도 없는 겨울 숲을 뭐 하러 찾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숲이라곤 가본 적이 없거나, 등산할 시간조차 마련치 못하는 게으른 사람들의 핑계일 뿐이다. 서릿발을 밟으며 듣는 대지의 소리,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계곡 물 소리, 창공을 가로지르는 겨울 숲 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겨울 숲은 수묵(水墨)의 세계다. 파스텔화처럼 청신한 신록이나 유화처럼 현란한 단풍을 즐길 수는 없지만 회갈색 톤의 절묘한 농담으로 표현되는 겨울 숲엔 겨울 숲대로의 아름다움이 있다. 겨울 숲의 진수는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에서 찾을 수 있다. 잎을 떨군 곧추 선 줄기의 단정함과 엄동설한을 이겨내는 강건한 숲의 모습은 겨울이라는 계절의 적막과 잘 어울린다.
겨울 숲의 또 다른 진면목은 숲을 지나는 찬바람에서 찾을 수 있다. 숲을 지나는 겨울바람은 매섭지만 비장함이 있어서 좋다. 찬바람과 맞설 수 있는 강건함과 자연의 운행 속도에 순응하는 냉정함은 매너리즘에 젖어 있는 우리네 일상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물질문명에 찌든 정신을 곧추세운다.
겨울 숲은 산업문명의 틀 속에 안주해오는 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적막함, 강건함, 냉정함, 비장함을 체험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겨울 숲은 한적하다. 숲을 찾은 시간엔 찾아오는 사람도 만나야 할 사람도 없다. 숲을 찾는 길에선 효율성을 숭배하고 속도의 강박증에 걸린 채 살아온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다.
숲에는, 특히 겨울 숲에는 편리함이나 안락함은 없다. 대신에 자연의 순결함과 원기가 충만해 있다. 겨울 숲의 적막함, 강건함, 냉정함, 비장함을 속속들이 가슴에 담고 싶다면 숲을 찾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두고 가야 할 것과 가지고 떠나야 할 것들을 챙기는 일이다. 두고 가야 할 것은 세상살이에 대한 근심이나 걱정이다. 고단한 일상을 잠시 잊어야만 자연이 주는 즐거움과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겨울 숲에 들어서기 전에 새롭게 챙겨야 할 것은 감성의 그릇이다. 산업문명은 보다 강렬하고 현란한 것에 익숙해지도록 우리의 감성을 변화시켰다. 인공의 감성 대신 자연의 감성을 가득 담고 떠나보자.
그렇다면 겨울 숲의 매력을 한껏 맛볼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우선 오대산과 대관령이 손꼽힌다. 겨울 오대산에선 잡목숲의 적막함과 전나무가 연출하는 역동적인 활력을 맛볼 수 있다. 대관령 휴양림에서는 강한 북서풍에 맞서는 겨울 소나무의 강건함을 느낄 수 있다. 강원도 삼척 중경릉의 소나무 숲과 한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전남 장성의 삼나무 편백 수해(樹海)에서도 겨울 숲의 백미를 느낄 수 있다. 겨울철 색다른 풍취를 원한다면 제주 비자나무 숲을 찾을 일이다.
오대산의 잡목숲과 전나무 숲
오대산 월정사 주변의 전나무 설경.
‘雨中月精 雪中五臺(비 오는 날은 월정사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최고요, 눈 오는 날은 오대산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최고)’라는 구절은 겨울 오대산의 풍광이 예사롭지 않음을 암시한다. 예로부터 월정사 스님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 이야기는 오대산의 겨울 숲 풍광에 그대로 적용된다.
수은주가 떨어지고 눈마저 쌓이기 시작하면 높은 산의 풍경은 보다 단순해진다. 자연은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회색톤의 추상화로 거듭 태어난다. 상원사 앞뜰에서 남동쪽으로 시선을 돌릴 때 눈에 들어오는 잡목숲이 바로 그런 숲이다. 탁 트인 시야로 눈앞에 나타나는 잡목숲의 풍광은 자연만이 창조할 수 있는 그림이다. 그 간결한 구성에, 그 소박한 절제에 압도될 수밖에 없다.
잡목숲이 연출하는 이런 간결함과 소박함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겨울 숲을 찾아 나선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다. 겨울 숲이 연출하는 적막함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청량제 구실을 한다. 찬 북서풍은 온갖 방향으로 날뛰던 원색의 욕망을 잠재우고, 눈앞에 펼쳐진 광대한 풍광은 세속에 찌든 심신을 새롭게 소생시킨다. 자연의 영성과 인간의 영혼이 만나는 순간이다.
상원사 앞마당은 우리 숲의 진면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진귀한 조망대 역할을 한다. 상원사 앞마당이 특히 주목을 끄는 이유는 한곳에 서서 고개만 조금 돌리면 전혀 다른 숲의 아름다움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쪽을 향해 서서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잡목으로 이루어진 회갈색의 나목들이 능선에 늘어선 적막한 풍경을 접할 수 있고,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역동적인 전나무 숲의 아름다운 활력을 느낄 수 있다.
월정사의 겨울 전나무 숲은 오대산 숲의 백미다. 오대산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어디 전나무뿐이랴만, 겨울 오대산을 지키고 선 전나무의 의젓함과 당당함을 보면 누구나 이런 느낌을 갖게 된다. 특히 일주문에서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1km의 전나무 숲길의 설경은 이 땅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풍광을 선사한다. 부도밭 주변의 겨울 전나무 숲에서는 신성마저 느껴진다. 부도(浮屠)란 스님의 사리나 유물을 묻는 석물을 말한다. 세 줄로 나란히 서 있는 부도 주변을 에워싼 전나무 숲의 겨울 풍광은 절 아래 전나무 숲과는 다른 무엇을 느낄 수 있다. 고승의 유택이기에 숲에도 엄숙함이 배어 있나 보다.
대관령 휴양림의 소나무 숲
대관령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당당히 맞선 금강송.
‘한국의 3대 아름다운 소나무 숲’ ‘문화재 복원용 소나무 공급 기지’. 대관령 휴양림의 소나무 숲을 상징하는 말이다.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대관령에 오르면 동쪽으로 멀리 강릉과 동해가 한눈에 들어오고, 발 아래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융단처럼 펼쳐진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 산림청은 이곳에 1988년 전국 최초로 자연휴양림을 조성했다.
대관령 옛길을 따라 해발 841m의 제왕산까지 400ha에 걸쳐 펼쳐진 이 소나무 숲이 사람이 만든 숲이란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산림청의 기록에는 정확히 1922년부터 26년 사이에 사람이 일일이 솔씨를 뿌려 숲을 만든 것으로 나와 있다. 종자를 직접 임지에 뿌려서 만든 흔치 않은 숲인 것이다.
대관령 자연휴양림의 소나무.
소나무는 이 땅에서 가장 흔한 나무다. 그래서 소나무와 관련된 우리의 정서는 유별나다. 장관급 벼슬을 가진 정이품 소나무도 있고,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석송령(石松靈) 소나무도 있다. 600여년 전 조선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목멱산(木覓山)에 심었던 나무도 소나무고, 애국가 가사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나무 이름도 소나무다.
그러나 겨울 대관령의 소나무 숲을 한번 둘러보면 지금껏 봐왔던 왜소한 소나무, 굽은 소나무에선 느낄 수 없었던 감흥을 갖게 된다. 장대한 소나무 숲 사이에서 비굴해지고 왜소해진 자신을 걷어내고 잠시나마 당당한 자아를 되찾을 수 있다. 겨울 솔숲이 가진 강건한 기개와 꺾이지 않는 기상이 우리들 가슴속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대관령 솔숲의 이런 강건한 기개와 꺾이지 않는 기상은 거저 생긴 것이 아니다. 백두대간을 휘몰아치는 찬 북서풍에 한순간도 꺾이지 않고 80여년 동안 당당히 맞서왔던 대관령 소나무의 강단 덕분이다. 왜소하거나 굽은 소나무를 찾아볼 수 없는 강건한 숲의 자태가 경이로울 정도다.
장성의 삼나무 편백 수해
장성의 삼나무 숲 속
전남 장성의 삼나무 편백 숲은 임종국씨가 조성한 인공림이다.
수해(樹海)란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숲의 바다를 일컫는 말이다. 눈길 가는 곳에 산이 있고, 산이 있으면 으레 숲이 있으니 우리들 대부분은 숲에 대해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겨울 숲 하면 앙상한 가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한겨울에도 녹색으로 바다를 이룬 장대한 숲을 찾을 수 있다. 전남 장성군 북하면에 있는 삼나무, 편백 숲이 바로 그곳이다.
이 숲은 인간의 의지와 집념이 국토의 얼굴까지도 변모시킬 수 있음을 생생하게 전하는 현장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까지는 우리 모두에게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나무심기에 쏟은 한 개인의 의지 하나로 북하면 일대는 황량한 임지에서 생명이 넘치는 땅으로 변모했다. 그 주인공은 장성 출신의 임종국씨다. 임씨는 ‘20세기 국토녹화 위업’을 빛낸 인물로 선정됐고, 그가 만든 숲은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22세기를 위해서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다.
주변의 산하가 온통 회색빛으로 물들 때, 녹색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짜릿하다. 희망과 번영, 자연을 상징하는 장성의 녹색 숲은 현대문명병을 치유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묘약일지도 모른다. 한겨울에도 푸름을 간직하고 있는 수해에서 빠름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하루하루 속도전에 내몰리고 있는 우리네 삶을 되돌아보자.
준경릉의 소나무 숲
정이품송과 결혼한 한국 제일의 미인송
한 시인은 ‘聖의 의미를 되씹고 싶을 때엔 준경묘에 가라’고 준경릉의 소나무를 예찬했다. 강원 삼척시 미로면에 자리잡고 있는 준경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를 모신 능으로 주위는 장대한 소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다. 준경릉 숲은 조선 태조의 조상을 모신 데다 교통이 좋지 못한 오지인 덕분에 500여년 동안 토종 소나무의 유전적 원형을 그대로 지켜올 수 있었던 귀한 솔숲이다.
준경릉의 소나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나무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 토종 소나무의 원래 모습이 볼품없이 굽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쭉쭉 뻗은 곧고 우람한 모습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 바로 준경릉의 솔숲이다. 준경릉의 한 소나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신부 소나무로 간택되어 작년에 정이품송과 결혼식(꽃가루받이 행사)을 올렸고, 올해는 자식(종자)을 생산하는 영광도 누렸다.
겨울 숲의 또 다른 매력은 숲 소리다. 겨울 숲이 만드는 소리 중에서도 솔숲이 만드는 소리는 격이 다르다. 소나무 숲은 쉽게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한번 목청이 터지면 웅장하고 아름다운 가락과 화음을 만들어낸다. 찬바람이 솔숲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지는 ‘쏴아’ 하는 솔바람 소리는 영혼을 흔들고 자연을 깨우는 소리다.
준경릉의 수호신장 소나무.
다른 나무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소나무는 바람이 있어야 제값을 나타낸다. 한 시인은 솔바람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라야 별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솔바람 소리가 오죽 영묘하면 밤하늘 별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신묘한 귀를 가져야만 들을 수 있다고 했겠는가. 솔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우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이며, 바로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인 것이다.
준경릉의 솔밭에서 오관을 열고 솔바람 소리를 듣는 것은 시베리아를 지나온 바람이 머금은 장대한 풍광을 가슴에 담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조상들은 송성(松聲)이니 송운(松韻)이니 하면서 겨울 솔바람 소리를 특히 아꼈는지도 모른다.
박희진 시인은 준령릉의 소나무 숲을 보고 이렇게 노래했다. “준경묘 본 뒤 뇌리엔 자나깨나 금강 長松林/ 나 못 잊겠네 죽죽 뻗은 그 자태 하늘 향하여/ 백년 또 백년 오로지 上昇 한 길 神松 될 밖에/ 하늘 땅 솔이 합심해 이룩해낸 神聖의 영역/ 상상만 해도 고개가 숙여지네 반만년 老松.” 소나무가 상징하는 지조·절조·절개와 같은 덕목들이 거저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곳이 준경릉의 솔숲이다.
색다른 정취의 제주 비자림
비자나무와 비자나무 열매(아래).
제주의 비자나무 숲에선 뭍에서 쉽게 체험할 수 없는 이국적 정취를 느낄 수 있다. 한겨울 수묵화를 두루 섭렵한 뒤에 한번 찾아가볼 만하다. 이곳에선 2500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아왜나무, 비목, 팽나무, 무환자나무, 자귀나무, 예덕나무, 때죽나무, 덧나무 등과 어우러져 자라고 있다.
제주 비자나무 숲이 간직한 장점 중 하나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거닐 수 있는 산책로가 준비돼 있다는 점. 평탄한 지형을 이용한 숲길은 인공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래 전부터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길로 느껴진다.
산책로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면 수십 종류의 지피(地被) 식생이 어울려 살고 있는 생존경쟁의 현장을 볼 수 있고, 덩굴식물이 다른 식물의 줄기나 가지로 눈을 옮기며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관찰할 수도 있다.
비자나무가 일찍부터 제주의 중요한 토산품으로 이름을 얻은 까닭은 비자나무 열매가 구충제로서의 약효를 가진 점과 비자나무가 재목으로서의 아름다움를 지녔기 때문이다. 특히 구충제로 쓰이는 비자나무 열매의 약효는 특출하다. 하루에 일곱 알씩 7일간 복용하라는 처방전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빠름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하루하루 속도전에 내몰리고 있는 우리네 삶에서 자연을 관조하면서 그 미묘한 변화에 관심을 두는 것은 무의미한 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숲을 비롯한 자연에는 공리적으로 셈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온갖 만물이 그물망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는 생태학적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우리 곁에 겨울 숲이 있다. 겨울 숲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광대한 풍광을 벗삼아 가슴을 활짝 펴보자.
‘세계의 숲으로 가다’ 지구촌 ‘산과 사람’의 생생한 현장 보고서
“산은 인간을 위한 멋진 선물이자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장소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하며 남긴 말이다. 신이 주신 이 특별한 장소가 훼손되고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 유엔이 정한 ‘세계 산의 해’다. 동아일보는 2002년 1월부터 8월까지 32회에 걸쳐 ‘산과 사람’이라는 기획 시리즈를 게재했다. 26명의 기자들이 북미, 유럽, 남미, 오세아니아, 아시아, 북구, 아프리카 등 6대주에서 서른한 개의 산을 올랐고 그 기록을 엮어 ‘세계의 숲으로 가다’(동아일보사 펴냄)를 펴냈다.
이들은 단순히 세계 명산을 기행한 것이 아니라 산과 어우러져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취재했다. 개발의 톱질에 사라지는 아마존의 원시림,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에베레스트, 숲을 태워 목장을 만든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뉴질랜드의 속살을 보여준다. 자연과 하나 돼 무욕의 삶을 살아온 히말라야의 네팔인들도 1990년대부터 환경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 도벌 단속 활동을 하고 있는 까미 도르지는 “나무가 잘리면 사람도 살 수 없다는 인식에 공감하면서 3년 전부터 도벌이 크게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연간 1억명이 찾아도 쓰레기가 없는 후지산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본은 1950년대부터 ‘국토녹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해 대대적인 식목운동을 펼쳤다. 일본의 산림보존 개념은 ‘언제까지나 사람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산’이었고, 이를 토대로 ‘후지산에 자연 숲을 만드는 모임’ 등 민간단체만 581개가 활동중이다. 삼림욕의 발상지 아카자와도 400여년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부터 ‘보호림’으로 지정돼 편백 숲을 이루고 있다.
부자 나라의 숲이 일찍이 관리와 경영의 대상으로 보호를 받았다면, 가난한 나라의 숲은 20세기 후반에서야 간신히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숲은 인간의 간섭을 싫어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새롭게 가꿀 수밖에 없는 숲도 있는 법이다.
내가 '낭만적' 여행으로 제목을 삼은 것은 보통 철원은 비운의 도시, 거기를 가면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애써 이런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고의로 붙인 것이다. 낭만적이라고까지 하면 비판을 받을지 몰라도 이제 우리도 이런 굴레에서 벗어나 보자.
궁예의 한이 서려 있을 것만 같은 곳 그리고 땅굴, 백마고지, 민통선, 주인 잃은 철모, 녹슨 기차 등 우리들 가슴을 무겁게 하는 낱말을 생각나게 하는 그런 곳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철원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금강산에 심취했던 겸재 정선이 금강산을 오가다 들러 진경산수를 그렸다는 三釜淵瀑布(삼부연폭포), 아치형 모습을 하고 있는 承日橋(승일교), 옛날에 임금까지 와서 노닐고 아직도 임꺽정이 살아 숨쉬고 있는 孤石亭(고석정) 그리고 호족문화의 진수를 보여 주는 到彼岸寺(도피안사) 등은 본래 철원의 모습을 말하여준다.
▲ 철원입구에 있는 표지 돌/금강산 76km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철원에 접어들면 '금강산 76km'라 표시되어 있는 큰 표지 돌이 세워져 있다. 금강산이 거리 상으로나 마음속으로도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예전에는 서울-원산을 잇는 경원선과 별도로 서울-철원-금강산 장안사-원산을 잇는 철도가 있어 철원이 분기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삼부연폭포
철원에서 제일 먼저 들를 만 한 곳은 삼부연 폭포다. 이름도 예사롭지 않지만 겸재 정선의 스승인 김창흡이 머문 곳이다. 김창흡은 여러 차례 벼슬이 주어졌지만 모두 사양하고 평생 철원 삼부연, 설악산 영사암 등지에 몸을 숨기며 지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었고 그가 추구한 시의 세계는 진경시였으니 겸재의 진경산수는 스승의 예술정신을 그림 세계에서 구현한 것이기도 했다.(화인열전1 에서 인용) 김창흡은 금강산을 좋아하여 생애 6번을 금강산에 다녀왔는데 겸재도 그의 영향을 받아 금강산에 심취한 끝에 생애 대작인 금강전도를 그리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겸재는 금강 2차 기행 때 돌아오는 길에 철원 삼부연도를 그리게 되는데 지금은 전하지 않아 볼 수 없지만 겸재의 다른 작품을 보면 능히 상상하여 볼 수 있다.
▲ 삼부연폭포 전경
▲ 여산폭포도/국립박물관
삼부연 폭포는 물줄기가 세 번 꺾어져 떨어지며 가마솥 같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겸재의 폭포 그림 중에 폭포 위쪽이 굽이쳐 돌려져 있는 여산폭포도가 비슷하지 않을까? 삼부연을 그림으로 감상해 보면 좋겠다는 욕심에 이런 생각을 하였다.
승일교/고석정
고석정으로 가다 보면 뜻밖의 멋진 다리를 만나게 된다. 지금은 차가 다니는 다리는 따로 있고 그 옆에 운치 있고 제법 오래 돼 보이는 다리가 승일교다. 아치형으로 한탕강의 수려한 풍광과 잘 어울리는데 '승일교'이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얘기가 있다.
▲ 승일교/아치형이 운치가 있다
그 한가지는 김일성이 짓기 시작해 이승만이 완성해서 승일교라 했다는 것이고 또 한가지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순직한 박승일 연대장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이 유력하지만 이유가 어찌 되었던 남북이 반반씩 만든 아름다운 다리임에는 이견이 없다.
승일교를 건너 조금 더 가면 철원 제일이 명승지인 고석정이 있다. 고석정은 신라 때는 진평왕이, 고려 때는 충숙왕이 찾아 노닐었던 만큼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이 수려한 풍광과 더불어 고석정을 유명하게 한 것은 조선시대 의적 임꺽정의 은거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 고석바위
그런데 어떻게 이 곳이 임꺽정과 관련되었는가에 대한 유래는 없다. 다만 이 고장 사람들은 고석정의 중간 부분에 임꺽정이 은신하였던 자연석실이 있고 강 건너편에는 석성이 남아 있어 임꺽정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 고석정 전경
고석정 입구에는 임꺽정 상이 고석정의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게 서 있지만 이 고장 사람들의 믿음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밉지 않게 다가왔다.
▲ 임꺽정 상/고석정 풍광과 어울리지 않지만 밉지는 않다
도피안사
"우리 나라에도 이런 곳이 다 있었네"라고 감탄을 하는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로 하여금 철원을 다시 찾게 하는 도피안사로 향했다. 도피안사 방향으로 길게 나 있는 길 양 옆으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예쁜 장흥초등학교가 보인다. 그 뒤 멀리 아직 잔설이 보이는 산이 보이고 철새들이 북쪽으로 되돌아가려는 듯 떼지어 날고 있다.
장흥초등학교는 가을이면 더 예쁜 모습을 한다. 노오란 은행잎과 붉은 벽돌....앞에는 누런 벼가 익어가고 멀리 보이는 산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든다. 철원을 얘기할 때 더 이상 '비운'이라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 도피안사 가는 길/멀리 예쁜 학교가 보인다
길을 재촉하여 도피안사에 다다를 즈음 오른쪽으로 철원미곡종합처리장이 있다. 바로 직전에 지나쳐온 길 왼쪽으로는 동송미곡처리장이 이것보다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철원은 강원도 쌀 생산의 1/6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면 이런 미곡 처리장이 있다는 것이 금방 이해가 간다. 철원미곡처리장 벽면에는 아주 조그맣게 의미 심장한 내용의 글귀가 적혀 있다.
농업은 생명창고
농민은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다. 우리 나라가 돌연히 상공업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입니다.
-윤봉길 의사 농민독본중에서-
▲ 철원미곡종합처리장/최전방 청결미가 유난히 크게 보인다
미곡처리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도피안사가 나온다. 도피안사라,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한 절 집. 고석정에서 오는 길이 우리 속인에게는 피안의 세계 같다. 예쁜 학교, 알맞게 높은 산, 철새들의 군무, 넓은 평야, 넉넉한 곡식....속세를 넘어 이상의 세계에 도달하는 곳 말이다.
도피안사는 865년(경덕왕 5) 당대의 고승 도선국사가 1,500여명의 대중과 함께 철불을 조성하고 삼층석탑을 세워 창건한 유서 깊은 고찰이다. 새로운 조류의 선사상이 유행처럼 번져 지방호족들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가 성립되던 때였다.(답사여행의 길잡이 9 경기북부와 북한강에서 인용) 이 곳의 삼층석탑(보물223호)과 철조비로자나좌불상(국보 63호)은 이런 호족문화의 산물이다.
▲ 삼층석탑
삼층석탑은 세련미 보단 촌스러운 미가 흐르는데 마치 시골 총각이 바짝 쳐 올린 머리에 바지는 배꼽까지 끌어올려 입은 듯한 모습으로 보인다. 불상은 어떤가? 철원 호족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다. 이웃집 아저씨와 같은 인상을 풍기고 철불에 금분을 입혀 촌스러운 멋을 더해 준다.
▲ 철조비로자나좌불상
국보급 문화재와 보물을 보는 즐거움에 취해 도피안사의 현대판 보물을 놓치기 쉬운데 요사 뒤에 연꽃무늬로 한껏 멋을 내고 기와로 예쁘게 쌓아 올린 굴뚝같은 것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보일러실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보일러실이 또 있을까?
▲ 세상에서 제일 예쁜 보일러실이다
▲ 기와연꽃/진짜꽃 보다 더 예쁘다
돌아오는 길에 미곡처리장을 다시 한번 보았다. 농업은 생명창고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고 있었다.
ㄹ’자 받침이 들어가는 나이에서 ‘ㄴ’자 받침이 들어가는 나이로,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 보다는 떠나보내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큰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따스한 봄기운에 녹아내리기 전에 겨울이 보고 싶었다. 곧 TV 브라운관에서도, 신문에서도 조용히 사그라질 그 겨울을 보고 싶었다.
지난 주말 적막한 강원도의 고속도로를 들어서면서 "아직 눈을 볼 수 있을까?"하는 조바심을 차창 밖으로 보냈다. 주위 산에는 솜사탕처럼 눈이 얹혀 있다. 멀리 불빛 받은 스키장에도 하얀 눈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몇 해 전 처음으로 가본 ‘해맞이 공원’엘 다시 갔다. 뒤쪽으로는 아직도 하얀 눈이 가득한 설악산이 있다. 차를 타고 오면서도 차에서 내려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아름다운 겨울산을 보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만난 친구처럼, 곧 멀리 떠나보낼 친구처럼 여러 마음을 가지고….
겨울바다, 파도에 반했던 그 곳에는 몇 해 전의 그것처럼 잊지 않고, 떠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반가움이 있다. 방파제 끝으로 가 말없이 유난히 파란 하늘과 바다를 안는다. 바다도, 바람도, 파도도 나에게 와서 안기고 보듬는다. 겨울 산을 업고 겨울 바다를 안은 나는 비로소 겨울과 마음껏 포옹했다.
▲ 설악산은 다행히 아직 겨울이다.
▲ 파랗게 다가와 하얗게 부서지는 겨울 바다
영동고속도로를 통해 횡계 나들목을 나와 옛 영동고속도로를 찾아들었다. ‘대관령 옛길’이라는 정겨운 이름의 그 길은 살짝 얼어 있고 주위로는 온통 눈이다. 길 한편에 내가 찾아가는 양떼 목장의 이정표가 있다. 하얀 눈 언덕에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선 예쁜 이정표가 내 얼굴에 웃음을 준다.
양떼 목장은 ‘옛 대관령 휴게소’ 뒤편에 있는데 하얀 눈 장식을 한 나무들 사이로 미끌미끌 눈길을 종종걸음으로 다가서야 했다. 오후가 되어가는 목장의 산과 나무에는 눈꽃 대신 사람들의 웃음꽃이 맺혔다. 겨울의 따뜻함을 나는 이제야 알겠다. 시린 바람과 무색·무표정의 저 흰 눈 속에 담긴 겨울의 따뜻함을 이제야 느끼겠다.
▲ 서부 영화의 OK 목장에서는 느끼지 못할 ‘예쁜 마음’이 느껴졌다.
▲ 방목지에는 양 대신 눈이 가득하다.
눈으로 가득한 양떼목장, 양들은 가는 겨울을 아쉬워할까? 오는 봄을 기다리고 있을까? 울타리에 갇혀 지내는 양들은 방목장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문객들이 집어주는 건초더미를 받아먹고 있다. 양들은 서둘러 푸른 풀들이 돋아나는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텐데, 세상에는 또 다른 양들이 있을 텐데, 내 아쉬움으로 다른 사람의 세월까지 붙잡고 싶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것이다.
휴게실을 지난 눈 언덕에는 눈썰매를 타는 아이들과 잠시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간 어른들이 있다. 쉬익 하고 미끄러지는 눈썰매 위로 눈발이 날려 내 얼굴을 감싼다. 시린 손과 얼굴을 비벼가며 늦겨울의 정취를 만끽한다.
언덕 위에는 통나무로 지은 창고가 있다. 양떼목장을 소개하는 잡지나 사진에서 자주 보던 그 창고는 겨울과도 잘 어울린다. 울타리가 눈에 잠겨 하얀 들판이 되고, 들판 위에 창고가 서 있고, 뒤로는 겨울나무와 산들이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 양들도 내 마음처럼 겨울을 아쉬워하고 있을까?
▲ 가끔씩 불어오는 매서운 눈보라가 얼굴을 할퀸다.
휴게실 한쪽 구석에 앉아 한 알 한 알 옥수수를 입에 넣고, 그간 담아온 겨울을 마음에 담았다. 눈 에도 누워보고, 겨울에도 안겨보며 목장 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새삼 얼어있는 대관령 옛길이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떠난 사람이라면 그 구불구불한 길을 넘으며 맞던 추억을 한 두 장면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난 김에 옛 앨범을 꺼내 볼까?
▲ 하늘은 봄을 그리워하고 있다. 가로등과 구름이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찾아가는 길 영동고속도로 횡계 나들목 - 425번 지방국도 - 대관령 옛길 - 대관령 휴게소(대관령 양떼목장(033-335-1966))과 선자령으로 가는 표지판.
‘편안하게 넘어가는 곳’을 일러 ‘영월(寧越)’이라 했다는데, ‘소나기재’를 넘는 길은 마음이 그렇게 편치만은 않다. 이 고개는 구름도 울음보를 터뜨리고야 만다는 눈물 고개이기 때문이다. ‘단종의 슬픈 사연’이 소나기재를 ‘눈물 고개’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고개 정상에서 서강을 굽어보면 ‘선돌’이 서 있는데, 그 굽이도는 물길이 청령포(淸泠浦)로 이어진다. 푸르른 물길을 보니 마음은 벌써 청령포로 달려가고 있다.
소나기재 정상에서 서강 쪽을 내려다 보면 선돌이 보인다.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소나기재를 내려서면 홍살문이 보이는데, ‘여기서부터 충절의 고장 영월입니다’라는 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오는 듯하다. 고개 아래 왼쪽에 단종(端宗)이 묻힌 ‘장릉(莊陵)’이 있지만,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냥 지나쳐 청령포로 향한다.
영월읍에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청령포가 있다. 서강의 물줄기가 동, 남. 북 삼면으로 에둘러 흐르고, 서쪽은 험한 산줄기가 절벽을 이루어 배가 아니고는 건너갈 수가 없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창살 없는 감옥인 유배지로는 아주 적격인데, 경치 또한 기가 막히게 아름다워 천혜의 명승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U자 형으로 굽이도는 서강의 초록빛 물길을 가르며 배를 타고 들어가면 흰색 자갈밭이 먼저 발끝에 차인다. 그 길을 걸어 올라가면, 울창한 소나무 숲의 청정한 바람 끝에 묻어오는 공기가 삽상하다.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초록빛 물, 흰색 자갈밭, 다시 초록빛 소나무 숲이 삼색의 띠를 이루고 있는 빛의 파노라마 가운데 서 있는 형국이 된다. 내 눈길은 그 삼색의 빛에 머물지 않고 서둘러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소나무 숲 속에 돌로 쌓은 담벽과 기와집이 눈에 잡힌다.
저기, 바로 저기가 유배 시절 단종의 거처가 아니겠는가. 그 순간 내 눈을 휘어잡는, 처절하다 못해 가슴이 메어지도록 경건해지는 광경이 하나 있었다. 벽 바깥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한 그루가 잔뜩 허리를 굽혀 담 너머 안 마당에 오체투지(五體投地)로 몸을 던져 읍소를 하고 있다.
그 소나무는 밑둥이 한 아름도 안 되는 굵기인데, 아무리 수령을 어림잡아보더라도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할 때는 없었던 나무가 분명하다. 그런데 뒤늦게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어찌하여 단종의 거처를 향하여 몸을 던져 오열(嗚咽)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 나는 머리끝이 쭈뼛해지면서 혹시, 경기도 남양주군 사릉(思陵)에 묻혀 있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씨의 혼령이 여기까지 날아와 소나무로 생환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 것이다. 묘호(廟號)조차 생각 사(思) 자를 쓸 정도로 평생 단종만 생각하다 세상을 떠난 송씨의 혼령이 이곳 청령포로 소나무 씨앗이 되어 날아오지 말라는 법 또한 없다고 억측을 해보는 것도, 비운의 삶을 살다 간 두 사람의 안타까운 인생을 더듬어보는 안쓰럽기조차 한 나그네의 속내가 아니겠는가.
단종이 거처하던 곳으로 담을 덤어 뻗어들어간 소나무. 마치 허리를 잔뜩 꺾고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문종(文宗)이 재위 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12세의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된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에 유배당하였다. 이때 정순왕후 송씨도 ‘부인(夫人)’으로 강등되어 평생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 땅을 바라보며 한을 달래다가 세상을 떠났다.
내가 담 안으로 굽어든 소나무를 바라보며 정순왕후의 한을 생각하는 사이에 발길은 어느 새 마당 안으로 성큼 들어서서, 활짝 열려진 문을 통하여 단종의 자태를 보고야 말았다. 그것은 눈 하나 깜빡일 줄 모르는 모형을 방 한가운데 앉혀놓은 것에 불과하였지만, 나는 문득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었다.
단종이 거처하던 방으로, 모형을 만들어 재현해놓은 모습.
건물 밖으로 나와 다시 소나무 숲을 거니는데 수령 600여 년을 자랑하는 관음송(觀音松)이 우뚝하니 솟아 있다. 나무 밑둥의 둘레가 5미터, 1.2미터 위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두 가지의 둘레가 각기 3.3미터와 2.95미터나 된다. 높이도 30미터나 되어 청령포 소나무들 중 가장 우뚝하다.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 소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말을 타듯 올라가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관음송’이란 소나무 이름이 범상치 않은데, 유배생활을 하던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볼 견(見) 자가 아니라 볼 관(觀) 자라는 것이 또한 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관(觀) 자는 ‘부엉이가 어둠 저쪽을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 즉 보이지 않는 마음속을 헤아릴 줄 안다는 말인데, 저 관음송이 과연 단종의 어지러운 마음속을 헤아려볼 수 있었단 말인가.
수령 600년이 넘은 관음송. 단종의 유배시절을 보고 들은 유일한 소나무다.
단종은 이 관음송 아래서 시름을 달래다 한양 땅에 두고 온 정순왕후 송씨가 그리워지면 단숨에 내달려 서북쪽 절벽에 이르곤 하였다. 길을 따라 올라가보니 ‘노산대’란 안내판이 붙어 있다. 80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 서강이 늘펀하게 누워 있다. 강 저쪽에 풍요로운 곡식이 익어가는 들판과, 그 뒤에 겹겹으로 둘러싸인 산들과, 계곡과 계곡 사이사이로 숨어든 작은 마을들이 한눈에 잡혀온다. 아찔하도록 깎아지른 절벽과 강이 한데 어우러진 그 풍경은 절묘한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놓고 있다.
아무래도 유배 생활을 하던 단종에게는 그 절경이 더욱 안타까운 그림움만 쌓이게 만들었을 성싶다. 눈물에 가려 절경은 보이지 않고, 절벽 같은 절망만 마음속에 가득 차지 않았을까.
노산대에서바라본 절경.
다시 발길을 돌려 청령포를 뒤로 하고 배를 타고 나오면, 왼쪽 편 소나무 숲에 ‘왕방연 시조비’가 있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단종의 유배와 사형을 집행하였던 인물로, 사약을 가지고 와서 어명을 받들고 돌아가는 길에 이 언덕에서 청령포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었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사약을 받고 죽은 어린 단종을 생각하며 읊은 시조다. 이 시는 구전되어오다가 1617년 김지남이 한시로 옮겨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 단종이 사약을 받은 관풍헌(觀風軒)으로 가야할 차례다.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은 그곳이 홍수로 침수되는 바람에 영월읍내 한 복판에 있는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관음송’과 ‘관풍헌’, 둘 다 볼 관(觀) 자가 붙어 있다. 그리고 하나는 소리 음(音)으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는 바람 풍(風)과 결합되어 있다. 소리를 보는 소나무(松)와 바람을 보는 추녀끝(軒)이다. 여기서 그 소리와 그 바람 속에 단종의 숨결이 들어 있음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단종의 숨결이 바람결에 들리는 관풍헌. 그러나 나는 관풍헌 문간을 넘어서는 순간 실망하고 말았다. 아무리 시내 한 복판이라 하지만, 관풍헌 지붕 저 너머에 ‘낙원장’이란 여관 건물이 보인다. 단종의 애간장 타는 슬픔이 서려 있는 관풍헌과 ‘낙원장’이란 여관은 너무도 어밸런스였던 것이다. 여관이 있다는 것만 해도 눈꼴사나운 일인데, 그 여관 이름이 ‘낙원장’이라니, 이것은 대놓고 ‘관풍헌’을 야유하고 있는 꼴이다.
단종이 사약을 받았다는 관풍헌 뒤로 보이는 '낙원장' 여관 간판이 너무 낯설다.
나는 그 ‘낙원장’이 보기 싫어, 관풍헌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얼른 눈길을 오른 쪽에 있는 ‘자규루(子規樓)’로 돌렸다. 이 누각은 각기 다른 이름의 현판이 두 개 붙어 있다. 큰길가 쪽의 현판에는 ‘자규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그 반대편의 관풍헌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쪽에는 ‘매죽루(梅竹樓)’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도로에서 담 너머로 바라본 자규루.
관풍헌 쪽에서 바라본 매죽루.
이 매죽루는 세종10년(1428) 영월군수 신숙근(申潚根)이 창건한 누각인데, 단종이 관풍헌에 머물 때 이 누각에서 ‘자규사(子規詞)’와 ‘자규시(子規詩)’를 지었다 해서 그 이후부터 ‘자규루’라고 부르게 되었다. 선조38년에 큰 홍수로 허물어진 것을 정조15년에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관풍헌에 머물 당시 단종이 ‘자규’를 주제로 지은 시 2수가 『장릉지(莊陵誌)』에 전하고 있는데, 그중 ‘자규사’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달 밝은 밤에 두견새 두런거릴 때(月白夜蜀魂啾) 시름 못 잊어 누대에 머리 기대니(含愁情依樓頭) 울음소리 하도 슬퍼서 나 괴롭구나(爾啼悲我聞苦) 네 소리 없다면 내 시름 잊으련만(無爾聲無我愁) 세상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寄語世上苦榮人)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愼莫登春三月子規樓)
이 시는 단종이 누각에 올라가 두견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신세를 읆은 것이다. 다음의 ‘자규시’ 역시 귀양살이를 하는 자신의 외로운 심사를 풀어 놓고 있다.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떠난 뒤로(一自寃禽出帝宮)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속을 헤맨다(孤身隻影碧山中)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假面夜夜眠無假)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窮恨年年恨不窮) 두견 소리 끊어진 새벽 산봉우리 달빛만 희고(聲斷曉岑殘月白) 피를 뿌린 듯한 봄 골짜기에 지는 꽃만 붉구나(血流春谷洛花紅)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애달픈 하소연 어이 듣지 못하는가?(天聲尙未聞哀訴) 어찌하여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고(何奈愁人耳獨聽)
자규루에 올라가 ‘자규시’를 읊던 단종의 심경을 생각하며 오동나무 사이로 가려진 관풍헌 앞마당을 바라본다. 1457년 10월 단종은 세조의 명을 받고 내려온 금부도사 왕방연이 보는 가운데 저 마당에서 사약을 받고 17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언뜻 관풍헌 추녀끝을 바라보니, 바람 한 자락 머물지 않고 한적한 마당가에 가을 햇살만 한가롭게 어른대고 있다. 자규루 역시 두견새 우는 소리 들리지 않고 찻길로 지나가는 자동차 엔진 소리만 귀에 시끄럽다.
단종이 사약을 받아 죽고 나서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영월의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가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산속으로 도망가다가 노루가 한 마리 앉아 있던 곳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시신을 내려놓았다. 마침 눈이 왔을 때였는데 노루가 앉아 있던 곳만 흙이 드러나, 그곳이 명당이라 생각하여 흙을 파고 시신을 묻었다. 현재 영월읍내로 들어서는 입구 왼쪽에 자리 잡은 장릉은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묻은 바로 그 자리다. 단종의 무덤은 중종11년(1517) 임금의 명에 의하여 찾게 될 때까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숙종 때인 1698년에 비로소 능묘를 단장하여 ‘장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단종이 묻힌 장릉. 조선 시대 임금의 능묘로는 그 규모가 너무 작다.
단종의 무덤에 얽힌 또 하나의 일화는 중종26년(1541)에 영월 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에 대한 것이다. 그가 군수로 부임하기 전에 7명의 군수가 원인 모르게 죽었다. 그러데 부임 첫날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임금의 명을 받고 왔다며 그를 숲속으로 안내하였다. 숲속에는 어린 임금을 모시고 있는 6명의 신하가 둘러앉아 있었다. 임금이 어린아이에게 끌려온 그를 처형하라고 명하였으나, 세 번째 앉은 신하가 살려두자고 하여 처형을 모면하였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이 꿈속에서 본 사람들이 단종과 사육신임을 알고, 그날부터 단종의 묘소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그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후손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 단종의 묘소가 있는 자리에 가보았다. 과연 꿈속에서 본 바로 그 장소여서 묘소를 수습하고, 그때부터 격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밖에도 영월 인근에는 단종에 얽힌 전설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영월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동강 ‘어라연’이라는 절경이 있다. 사약을 받고 죽은 뒤 단종의 혼령이 어라연으로 가서 신선이 되려고 하였다. 그러자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 ‘태백산 신령이 되어야 한다’고 간곡히 진언하는 바람에 태백산으로 가서 신령이 되었다고 한다.
단종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동강의 절경 어라연.
이러한 어라연 전설을 뒷받침해주는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당시, 전 한성부윤 추익한(秋益漢)이 태백산 머루를 따다 자주 진상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그가 산과를 따서 영월로 가지고 가는데, 곤룡포를 입고 백마를 탄 단종이 태백산을 향해 가더라는 것이다. 꿈속에서도 이상하게 여긴 그가 영월에 당도해 보니, 이미 단종이 그날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난 뒤였다고 한다.
추익한의 꿈처럼 단종이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는 전설에 따라, 1955년 태백산 망경사(望鏡寺)의 죽암 스님은 절 바로 위쪽 산자락에다 ‘조선국 태백산 단종대왕지비’라는 단종비각(端宗碑閣)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 비문과 현판 글씨는 당시 오대산 월정사에 있던 탄허 스님 친필이다.
태백산 정상 바로 아래 위치한 단종비각.
이처럼 제대로 된 단종 유배지 탐사는 태백산 단종비각에서 끝을 내야 한다. 그러나 일정이 허락지 않는다면 영월에 있는 청령포와 관풍헌, 자규루, 장릉 등을 돌아보는 것으로 유배지 기행을 끝내도 좋다.
<단종은 누구인가>
조선 제6대 임금인 단종은 세종의 손자이고, 문종의 아들이다. 세종은 아들만 18명을 두었는데, 맏아들인 세자(후에 문종이 됨)에게 원손이 없어 애를 태우던 끝에 뒤늦게 셋째 현덕빈 권씨에게서 원손을 얻었다. 그가 바로 단종이다. 그런데 단종은 태어나면서부터 비운의 인물이 되었다. 그가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어머니가 죽었으며, 아버지 문종이 재위 3년 만에 세상을 떠난 뒤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단종 즉위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여 상왕(上王)이 되었다가, 다음 해인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에 의한 복위 계획이 탄로 났다. 이때 여섯 명의 충신들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 사육신(死六臣)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인 1457년 10월에 관풍헌에서 세조가 내리는 사약을 받고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행안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원주 인근의 만종 I.C.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갈아탄다. 다시 제천 I.C.로 빠져나와 국도를 타고 제천,영월 표지판을 따라 가다가 제천 못 미쳐서 영월로 가는 도로를 갈아타면 된다. 서울에서 영월까지는 승용차로 넉넉잡아 3시간 거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새벽에 일찍 떠나면 하루 코스로도 다녀올 수 있다. 영월에서 단종 유배지를 둘러보고 1박을 한다면 어라연 계곡을 다녀올 만하고, 사자산(獅子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법흥사(法興寺), 무릉리 마애여래좌상, 방랑시인 김삿갓 유적지 등을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더 시간이 허락된다면 영월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태백으로 가서 태백산 등산을 해보는 것도 좋다.
태백산 정상에서는 매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로 천제를 지낸다.
태백산 정상에서 문수봉으로 가는 길에 자작나무 숲이 어우러져 있다. 해발 1500미터 이상되는 고지대다 보니 꼿꼿해야 할 자작나무가 구부러진 채 키조차 잘 자라지 않는모습이다.
차는 강원도의 동해 바다를 끼고 돌며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시작한 여행이어서 그럴까, 나도 모르는 사이 깜빡 잠이 들었다. 갑자기 조용해져서 주위를 둘러보니 운전을 하던 사진작가가 고개 마루에 차를 세운 채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마침 새로 건설한 도로가 있었는데, 길을 내느라 가파른 고개를 V자 모양으로 절개하여 도로 양쪽에 3단으로 계단을 만들어 잔디를 심어놓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시멘트로 된 계단이 도로에서 하늘이 보이는 공제선까지 가파르게 놓여 있었는데, 사진기자는 그 계단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차를 몰고 고개를 넘을 때 나는 또 잠시 졸았다. 그 바람에 공양왕릉이 바로 그 고개 밑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우리는 한참이나 지나쳐갔다. 주유소에서 길을 물어 다시 되돌아오니, 오른쪽(고개에서 내려올 때는 왼쪽편임) 마을버스정류장 앞 아주 작은 표석에 ‘공양왕릉 입구’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 화살표를 따라 얼른 오른 편을 바라보니 큰길에서도 능이 보였다.
공양왕릉은 초라하기 그지없어서, 주차장 오른편에 삼척시에서 세운 안내판이 없다면 그냥 이름 없는 무덤으로 생각하고 지나치기 쉬울 정도였다. 전에는 더 초라했을 터인데, 그래도 삼척시에서 돌계단을 만들고 봉분을 정비해서 보통 무덤보다 월등히 크기 때문에 한눈에 보아도 예사 무덤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삼척시에서 공양왕릉 입구에 세워놓은 안내판.
마침 마을 사람이 가까이에 있어 큰길에 안내판 하나 제대로 없어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했더니, 얼마 전까지 새로 만든 안내판이 있었는데 트럭이 들이받아 없어졌다고 하였다.
공양왕릉에는 네 개의 봉분이 있었다. 이 능은 그 전까지 궁촌 사람들이 벌초 정도나 해주던 것을 1977년 당시 삼척 군수와 근덕 면장이 주선하여 새롭게 단장하였고, 매년 3월 근덕면 봉찬회에서 날짜를 잡아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공양왕릉은 제법 봉분이 크게 조성되어 있었다. 그 옆으로 다시 세 개의 봉분이 있는데, 바로 옆의 봉분은 공양왕의 정비인 순비(順妃) 노씨(盧氏), 또 하나는 세자 석(奭), 그리고 나머지 가장 봉분이 초라한 것은 시녀나 말(馬)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삼척시에서 새로 조성한 공양왕릉. 계단석을 만들고 봉문 밑에 돌을 쌓아 제법 면모를 갖춘 묘가 되었다.
고려 마지막 왕으로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공양왕은 유독 눈물이 많은 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 세력을 축출하고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차례로 폐위시킨 뒤 꼭두각시로 앉힌 왕이 바로 공양왕이었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고 그의 아들 창왕을 세웠으나, 곧 두 부자가 사실은 공민왕(恭愍王) 아닌 당시 정치권력을 좌지우지하던 승려 신돈(辛旽)의 핏줄이라 하여 폐위시킨 것이다. 이때 고려 20대 신종(神宗)의 7세손인 왕요(王瑤)를 찾아내 34대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역사 기록으로 볼 때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핏줄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왜냐하면 우왕은 신돈의 비첩(婢妾)인 반야(般若)의 아들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고 나서 혜비(惠妃), 익비(益妃), 정비(定妃), 신비(愼妃) 등을 두었다. 그가 이처럼 많은 여자를 비로 둔 것은 대를 이을 아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한 그는 홍륜, 한안 등 측근의 신들로 하여금 비밀리에 그녀들을 능욕하도록 명령하였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당시 개혁을 주도하던 권력자 신돈이 자신의 비첩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쳤다. 반야는 공민왕의 사랑을 받아 아이를 잉태하였고, 마침내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이는 신돈의 집에서 자라났다.
신돈이 역모죄로 유배되었을 때, 공민왕은 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신돈의 집에서 기르고 있는 반야의 아들이 바로 자신의 핏줄이라고 공개하였다. 이때부터 그 아들은 ‘우(禑)’라는 이름으로 세자가 되어 왕실에 들어왔으며, 나중에 공민왕은 자신이 살해되기 직전에 세자의 어머니가 사실은 반야가 아니라 익비 한씨(韓氏)라고 번복하였다. 그러나 신하들 중 누구도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실제로 조선 세종의 명으로 정인지, 김종서 등이 지은 <<고려사>>에 보면 우왕과 창왕의 이름을 ‘왕우’나 ‘왕창’이 아닌 ‘신우’나 ‘신창’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조선왕조에서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그렇게 지칭한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정황으로 볼 때 우왕이나 창왕은 공민왕의 핏줄이라기보다는 신돈의 피를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이성계는 공민왕 이후 두 번에 걸쳐 왕씨가 아닌 신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것을 문제삼아 다음 욍위에 공양왕을 앉혔다. <<고려사>> 기록에 보면, 공양왕은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 날 밤 너무 근심이 되어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왕위에 오르고 나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일평생 입을 것 먹을 것과 시중할 사람이 모두 풍족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이렇게 중대한 책임을 지게 되니 어떻게 할 바를 모르겠다.”
공양왕은 매우 우유부단한 성격이었으며, 그래서 그 많은 왕씨 핏줄 중 이성계 세력에게 꼭두각시 왕으로 선택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계 일파인 신흥 사대부들은 공양왕 3년에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그것이 이른바 ‘과전법(科田法)’이다. 이는 기존 권력자들, 즉 기득권 세력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신흥 세력들이 경제 기반을 닦는 요체가 되었다.
과전법을 시행하기 전인 공양왕 2년에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모두 몰수하여 불태웠는데, 산더미 같은 문서들이 사흘 밤낮 동안 타올라 개성 하늘이 연기로 가득하였다고 한다. 이때 공양왕은 그 연기를 보며 고려왕조의 몰락을 예감하고 남몰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국 나이 45세에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재위 2년 8개월만에 이성계에게 양위하였다. 역성혁명으로 고려왕조가 막을 내리고 이때부터 조선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고려왕조가 멸망하자 왕(王)씨들은 후환이 두려워 전(全), 옥(玉), 용(龍), 전(田) 씨 등으로 성을 바꾸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공양왕은 왕비와 세자, 시녀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간성으로 옮겨지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나서 삼척으로 다시 유배지를 옮긴 지 한 달 만에 살해당했다.
이러한 공양왕의 최후를 생각하며 양지바른 능 곁에 쪼그려 앉아 있으려니, 바로 등 뒤의 바닷가 쪽에서 소금기가 밴 비릿한 냄새와 함께 어떤 기척이 들렸다. 돌아보니 언덕 위에 시누대가 무성한 숲을 이루어 수런거리는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다.
공양왕릉 언덕 위에서 본 바다가 저 멀리 수평선으로부터 밀려들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밀려든 파도소리가 어느새 모래밭에 하얀 물거품을 토해내며 밭은기침처럼 재채기를 하고 있었다.
유배시절 공양왕도 저 바다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 바다를 느껴보기 위해 '궁촌'으로 향했다. 공양왕릉에서 언덕을 넘으면 바로 마을이지만, 길이 없어 차를 타고 돌아서 바닷가에 닿았다.
‘궁촌(宮村)’이란 마을은 공양왕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했다. 왕이 잠시나마 머물던 촌이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임시로 왕이 거주하던 궁궐이 있던 촌이라는 뜻이다.
‘궁촌해수욕장’으로도 잘 알려진 바닷가 모래밭에는 다른 동해안 해수욕장과는 달리 수천의 갈매기들이 내려앉아 조용히 읍(揖)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동해안 갈매기란 갈매기들은 다 몰려와 작은 궁촌리 앞바다 모래사장에 머리를 박고 있는 것일까. 그때 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고려가 멸망할 때 죽은 충신들의 원혼이 저 갈매기들로 환생하여 공양왕릉을 향해 어깨 흔들며 온몸으로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궁촌 앞바다와 모래사장에 내려앉은 갈매기들.
그래서 다시 공양왕릉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니, 그곳이 바로 궁촌 뒷동산이었다. 바다를 향해 바라볼 때 왼쪽으로 궁촌 해변을 끼고 돌아가면 숨어 있는 절경이 나오는데, 산 아래 깎아지른 절벽 밑에서는 흰 이빨을 으르렁대며 바위를 물어뜯는 성난 파도가 눈길을 휘어잡는다. 조용한 궁촌해수욕장과는 달리 이곳에선 파도가 잠시도 쉬지 않고 절벽에 자신의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아마 공양왕도 시름에 겨우면 이곳에 와서 저 깎아지른 바위 절벽과 시도 때도 없이 앙탈을 부려대는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저 절벽과 파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으므로 공양왕이 느끼던 숨결을 나 또한 저 하얗게 일어서는 포말에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분노였다. 밖으로 표출하는 분노가 아니라 애써 안으로 삭이느라 가슴만 타들어가는 안타까운 그 무엇이었다. 그래서 저 바다의 포말은 절벽을 타고 기어오르지 못하고, 그 절벽의 발끝만 물어뜯으며 앙탈을 부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궁촌 인근의 절경. 바위 절벽 아래로 펼쳐진 풍광이 숨은 비경을 연출하고 있다.
나는 발길을 돌려 공양왕이 살해되었다고 해서 그곳을 ‘살해재’로 부른다는 고개를 찾아가보기로 하였다. 궁촌에 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바로 공양왕릉에서 바라다 보이는 아스팔트 도로가 난 고개가 ‘살해재’라고 한다. 도로를 만드느라 고개를 V자 협곡으로 만든 바로 그 고개를 말하는 것이다.
궁촌으로 넘어오기 전에 사진작가가 잠시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던 바로 그 고개를 향해 우리는 다시 차를 몰았다. 고개 위에 차를 세우고 바라보니 살해재를 넘어오는 차들이 속도를 늦춘 채 힘겨운 운행을 하고 있다. 옛날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의 명에 의하여 이 고개에서 공양왕 일가가 살해당하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당시는 오솔길이었을 것이며, 산이 험하여 거의 아무도 다니지 않던 고개였을 것이다.
공양왕 일가가 죽임을 당한 살해재. 지금은 새로운 아스팔트 도로가 생겼다.
나는 당시 살해당한 공양왕 일가의 시신을 궁촌 사람들이 몰래 옮겨다 마을 뒷산에 장사지내는 장면을 상상 속에서 떠올리며 고개를 뒤로 하고 다시 차에 올랐다.
여기서 부기할 것은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에도 있다는 것이다. 문화재 당국은 <<세종실록>>에 나오는 “안성군 청룡에 봉양했던 공양왕의 초상을 고양군의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원당에 있는 ‘고릉’을 공양왕릉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다. 공양왕은 태종 16년에 다시 왕으로 복위되었는데, 이때 궁촌 뒷산에 묻혀 있던 시신을 원당으로 옮겨 고릉을 조성한 것인지, 아니면 살해 당시 증거로 삼기 위해 목을 잘라서 상부에 보인 뒤 원당에 묻고 몸은 궁촌 뒷산에 묻히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양왕 고려 제29대 충목왕 원년(1345)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瑤)다.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에 의해 우왕과 창왕이 폐위되고 나서, 그는 불혹을 넘긴 45세의 나이에 제34대 왕으로 추대되었다. 어려서부터 성질이 유순하고 결단성이 없었다고 하며, 재위기간 2년 8개월 동안 꼭두각시 노릇을 하다가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고려 마지막 왕이 된 비운의 인물이다.
*여행안내 경부나 중부를 이용하여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까지 가서 동해안 국도를 따라 계속 달리면 삼척이 나온다. 삼척에서 공양왕릉이 있는 궁촌까지는 약 17킬로미터. 새로 단장한 도로를 따라 고개(살해재)를 넘으면 왼쪽에 조그만 바닷가 마을(궁촌)이 보인다. 삼척 정라진항에는 미수 허목이 삼척 부사로 왔을 때 세웠다는 ‘척주동해비’가 있으며, 또 삼척 시내의 오십천 절벽 위에 서 있는 ‘죽서루’가 아름답다. 삼척에서 도계 쪽으로 가다보면 ‘천은사’가 들어가는 길이 나오고, 도계 쪽으로 계속 더 가면 ‘환선굴’이 있다. 삼척에서 하룻밤 자고 나서 일출을 보고 싶으면, 아침 일찍 추암해수욕장으로 가보는 것이 좋다. 촛대바위를 배경으로 한 일출 장면이 장관이다. 등산을 하려면 무릉계곡의 경치가 빼어나고, 좀 긴 코스를 택하려면 두타산 등정을 해보는 것도 좋다.
미수 허목이 삼척 부사로 왔다가 해일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척주동해비'로, 원래 두 개를 만들었는데 먼저 세운 것은 허목 다음으로 온 정치적으로 반대파인 부사가 비석을 없애버렸다고 한다. 그러자 다시 해일이 일어 마을이 큰 손실을 보게 되자 전에 허목이 만들어둔 다른 비석을 찾아내어 다시 세우자 그 다음부터 해일이 마을을 덥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았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삼척시내에 있는 죽서루.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아름다운 누각이다.
삼척에서 가까운 추암해수욕장에서 바라본 동해 일출이 장관이다. 이곳의 촛대바위는 절경으로 꼽힌다.
삼척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알려진 '환선굴' 입구. 양쪽 산을 사이에 두고 저 뒤에 보이는 바위들이 범상치 않다. 그 바위 언저리에 선녀가 환생했다는 '환선굴'이 있다.
환선굴 속의 종유석. 자연이 만든 뛰어난 예술품이다.
늦가을로 접어든 산색이 겹겹으로 층을 이루며 아름다운 정취를 자아낸다.
삼척의 등산로로 유명한 무릉계곡의 병풍바위. 특히 이 계곡은 암반 위로 흐르는 물길이 아름답다. 그야말로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풀경들이 등산로 좌우로 계속 이어진다.
38번 국도는 대한민국 대표 국도중 하나다. 동해안을 남북으로 잇는 7번 국도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아름답기로 따지면 이에 못지않다. 충남 서산과 강원 동해를 잇는 370여㎞의 길이도 만만치 않거니와 서해안 대호방조제부터 목계, 박달재, 진소마을 등 중부권 관광지와 동·서강, 강원랜드, 태백산 등 강원의 명소가 몰려 있다. 38번 국도를 타고 가다 내키는 곳에 내리면 바로 관광지가 될 정도다.
지난해말에는 제천~영월 20㎞구간이 4차선으로 확장개통되면서 중부권에서 강원도로의 접근이 용이해졌다. 이 구간에서만 50분대에서 30분대로 주행시간이 단축됐다. 영월~태백~삼척을 잇는 76㎞ 구간의 4차선 공사는 진척이 더디지만 수년내 완공된다면 중부권에서 강원도를 가는 시간이 한시간 이상 단축될 전망.
서울에서 2시간30분이면 도착하는 영월은 단종 무덤인 장릉(莊陵)과 유배지인 청령포, 서강의 기암괴석 선돌, 한반도지형으로 생긴 선암마을 등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또 38국도를 타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김삿갓유적지, 하동장승공원, 고씨동굴, 조선민화박물관이 있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동강의 어라연이 자태를 드러낸다.
영월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볼 수 있는 곳은 장릉이다.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1457년 봄에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고 그해 10월 사약을 받고 죽었다. 단종이 죽어도 시신을 거두는 이가 없자 영월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모신 곳이 바로 장릉.
겨울에 보는 장릉은 유독 쓸쓸하다. 소나무만이 옛 주인을 기억하는 듯 푸르다. 꼿꼿해서 절개의 상징이라는 소나무가 장릉 주변에서는 모두 고개를 숙였다. 생·사육신이 소나무가 되어 옛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굽어 있는 모습이 절을 하는 듯하다.
장릉 옆에는 단종과 관련된 역사적 사료를 수집·전시해 놓은 단종역사관이 있다. 생·사육신은 물론 조선의 형벌기구, 궁중복식 등을 재현해 놓았다.
장릉에서 남쪽 방향으로 10분만 차를 타면 청령포가 나온다. 청령포는 하늘이 내린 창살 없는 감옥. 삼면은 서강이 휘감아 흐르고 육지와 이어진 한쪽면은 수직절벽으로 이뤄져 있다. 섬은 아니되 섬인 곳. 배를 타야 그 섬에 도달할 수 있지만 겨울엔 얼음 위로 조심조심 걸어간다.
이 조그마한 섬에도 위로 시원하게 뻗은 소나무가 가득하다. 청령포 한가운데에 위치한 관음송은 600살 먹은 30m 높이의 소나무. 당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觀) 들어(音) 관음송이라 불렸다. 청령포 숲은 지난해 11월 산림청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천년의 숲’에 뽑혔다.
그러고 보니 단종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소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절개를 지킨 신하들이 그리웠을까. 관음송에 걸터앉아 눈물을 훔친 단종이 눈에 선하다.
멀지 않은 곳에 선돌이 있다. 선돌은 말 그대로 서있는 돌. 일명 신선암이라고도 불린다. 밑에서 굽이굽이 흐르는 서강줄기와 어우러지면서 한국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해서 붙은 이름이다. 아침에는 강안개에 젖어, 오후에는 석양에 잠겨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밑에서 본 선돌도 색다르다. 59번 국도를 타고 평창쪽으로 가다 영월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처음 나오는 골목길로 들어가 북쌍교를 건너면 서강줄기가 나온다. 강을 따라 올라가면 서강의 풍만한 전경과 함께 선돌이 보인다. 서강은 동강의 유명세에 가렸지만 래프팅에 파괴된 동강에 비해 원형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동강이 남성이라면 서강은 여성이다. 물줄기가 부드럽게 계곡을 쓰다듬고 나온다. 삐쭉한 계곡도 툭 튀어나온 바위도 모두 품는다.
선돌을 봤다면 88번 국도를 타고 주천면쪽으로 가다가 선암마을에 들러보자. 영월 남면 선암마을엔 우리땅을 그대로 복원한 듯한 한반도 지형이 있다. 책박물관에 못미처 비포장도로를 따라 가다 보면 선암마을을 보는 전망대가 숲 한가운데에 있다. 신기하게 동고서저의 지형까지 비슷하다. 굽이굽이 흐르는 서강 줄기가 3면을 바다로 만들었다. 한반도. 감동은 짧지만 인상은 깊다. 지리산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백두대간의 등고선을 숲 위에 그려본다. 저 백두산까지.
오후 느지막이 별마로 천문대로 발길을 돌린다. 별과 마루(정상), 로(고요할 로)의 합성어로 ‘별을 보는 고요한 정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산을 20여바퀴 휘감으며 곡예운전을 하면 간신히 800m 산정상에 도착한다. 오후 6시부터는 800㎜ 반사망원경으로 우주의 모습을 관찰한 수 있고 직접 천체사진을 촬영할 수도 있다. 꼭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보지 않더라도 산꼭대기에 쏟아지는 별을 보며 호젓한 낭만을 즐길 수 있다.
하루로 부족하다면 김삿갓 유적지와 고씨동굴을 찾을 수 있다. 책박물관, 곤충박물관, 민화박물관, 국제현대미술관도 관광객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 주천면에는 법흥사 적멸보궁이 천년을 버텨왔다. 영월은 쉽게 끝을 드러내지 않는다.
▲영월 길잡이
▶교통
서울에선 영동고속도로에서 만종분기점으로 빠져 중앙고속국도를 타고 가다 제천IC에서 38번 국도에 합류한다. 부산은 남해지선을 타다 내서IC에서 구마고속도로 후 중앙고속도로로, 광주는 88고속도로에서 대구금호분기점으로 빠져 중앙고속도로에 합류할 수 있다. 대전은 36번 국도를 타고 청주를 지나 38번 국도에 합류, 충주~제천을 지나면 된다. (지역번호 033) 영월 시외버스 터미널(374-2451), 영월역(373-7788), 영월군청 문화관광과(370-2542)
▶숙박·음식
영월읍에 30여개의 숙박시설이 몰려있다. 가든장(373-5794), 리버텔(375-8801), 그랜드파크장(373-6110) 등이 있다. 영월군에서 추천하는 장수마을의 매운탕(374-1110), 황구의 염소·삼계탕(373-2121), 주막식당의 아구탕(374-5492) 등이 유명하다. 영월 참기름(373-8787), 참숯(378-3038), 느타리버섯(378-1549), 두메벌꿀(372-4144), 더덕·더덕술(372-1855) 등 농특산물도 판매한다.
▶볼거리
5일장이 선다. 덕포시장은 4·9일, 주천시장은 1·6일에 있으며 영월중앙시장과 서부시장에서도 지역특산물을 볼 수 있다. 하동장승공원엔 인간문화재 박찬수씨가 만든 장승 100점이 서있다. 아이들 교육차원에서 각종 박물관을 돌아보는 것도 좋다.
월 중순, 남녘의 대지는 봄을 노래하지만 대관령 고원은 아직 한겨울이다. 특히 동해에서 넘나드는 습한 바람이 눈꽃으로 바뀌는 대관령의 2월은 유독 눈이 많은 때로 평창 일대 백두대간 자락은 설국(雪國)의 풍치가 장관이다. 가는 겨울이 아쉽거든 겨울이 겨울답게 남아 있어 더 낭만적인 한국의 알프스, 대관령을 찾을 법하다. 알프스의 한가로운 풍광을 떠올리게 하는 양떼목장의 설경과 하얀 눈을 이고 늘어선 횡계리 황태덕장의 목가적 정취, 그리고 천년고찰 월정사 등. 운치 있는 겨울 풍경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양떼목장=대관령 양떼목장은 '이땅에도 이런 곳이 있었던가' 싶을만큼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다가온다.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횡계3리. 해발 832m 대관령 정상부 백두대간 서사면에는 양들의 보금자리가 펼쳐져 있다.
널찍한 초지는 양떼들의 천국. 하지만 겨울이면 키높이까지 쌓이는 하얀눈이 목장의 주인이다. 흰눈이 초지에 내려앉아 그려낸 부드러운 능선 군데군데 박힌 키다리 낙엽송과 나목의 자태는 마치 코트깃 세운 나그네의 뒷모습처럼 한껏 분위기가 살아 있다.
요즘 양떼목장을 찾으면 설경 말고도 즐길거리가 적지 않다. 양들에게 '건초 주기 체험', 추억의 '비료 포대 썰매', 그리고 '목장길 산책' 등이 대표적. 양떼목장은 6만2000평 면적에 둘레가 2.5㎞ 규모의 아담한 규모로 초지에는 200여마리의 양들이 뛰논다. 주변 대규모 소 목장에 비해 스케일은 작지만 이국적 분위기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 [上] 양들에게 건초주기 체험은 아이들이 곧잘 좋아한다. [中] 비료포대 눈썰매장은 최고의 인기 코스. 눈밭을 뒹구는데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下] 눈덮인 산책 코스를 오르면 산 정상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으로 가슴 속이 후련하다.
옛 대관령길, 지금은 문닫은 상행선 대관령휴게소 뒤쪽 선자령 갈림길에서 좌회전해 오프로드길을 400m 가량 오르면 아담한 목장이 나선다. '양떼 목장'의 본래 이름은 '풍전목장'. 수년전 부터 관광객들이 편하게 부르며 오늘의 이름이 굳어졌다.
작은 알프스 동산과도 같은 목장을 일궈낸 주인 전영대씨(53)는 "이만큼 만드느라 그간 '대관령 산짐승'처럼 살아왔다"며 거친 손을 내민다. 목가적 풍광뒤에 감춰진 지난한 현실은 멋스러운 울타리에도 배어 있다. 그간 강원도 일대 고물상을 뒤져 사들인 1만2000여개의 철지주를 80cm 깊이로 박아 철책을 치는데만 꼬박 4년이 걸렸다. 이곳 양들은 뉴질랜드 원산의 코리데일 종. 털과 고기 생산용으로 암수 모두 뿔이 없고 하얀 양털이 탐스럽기만하다. 십수년전 전북 남원시 운봉면양종축장이 문을 닫으며 이곳에 새보금자리를 튼 녀석들의 후예다.
양떼목장에서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건 '건초주기'와 '비료포대 눈썰매타기'. 입장료 대신 받는 건초(어른 2500원, 학생 2000원)를 축사에 있는 양들에게 먹이는 것은 색다른 체험이다. 축사에서 눈덮인 능선을 감상하며 비탈진 눈길을 잠시 걸어오르면 가파른 언덕배기에 펼쳐진 무료 눈썰매장이 나선다. 영화 '화성으로 간 사나이'의 세트장으로 활용됐던 작은 귀틀집에 비료포대 수백장이 마련돼 있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어른 아이 할 것없이 비료 포대 한장을 깔고 언덕을 미끄러져 내리며 질러대는 환호는 마치 삶의 묵은 때를 씻어 내는듯 후련하게만 들린다. 누구나 동심이 되어 눈밭을 뒹구는 사람들, 그리고 혹여 연인이 다칠세라 걱정 가득한 총각들의 눈초리 까지도 모두가 행복 가득한 모습이다.
눈썰매로 한바탕 땀을 뺐다면 능선길 트레킹에 나설 차례. 눈덮인 목장길을 따라 완만하게 이어진 1.3㎞ 산책 코스는 산정에서 불어오는 매콤 청량한 겨울바람이 있어 더 통쾌 시원하다. 목장 정상부(해발 950m)에서는 가슴 후련한 설경이 펼쳐진다. 겹겹이 쌓인 대관령 주변의 눈덮인 산줄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두어시간 겨울의 진수를 만끽하고 내려오면 난로가 절절 끓는 휴게실에서 언 몸을 녹일 수 있다. 찐옥수수(2개 3000원)와 호박죽(2000원), 솔잎차(2000원) 등 산촌의 미각을 맛볼 수 있다.
양떼목장의 최고 장점은 철마다 또다른 아름다움을 담아낸다는 것. 특히 봄이면 파릇파릇 새순 사이 노란 민들레가 만발하고, 5월이면 탐스런 민들레 홀씨가 바람결에 흩날린다. 그 사이를 어린 양떼와 아이들이 뒤섞여 한편의 천진난만한 산골동화를 엮어 나간다.
◆ 그밖의 볼거리
◇황태덕장=양떼목장 인근 횡계리 일대 광활한 황태덕장에서는 수백만마리의 황태가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디며 익어가고 있다. 횡계는 일교차가 심하고 통풍이 잘 되는 곳으로 천혜의 황태덕장 입지를 갖추고 있다. 때문에 인제 용대리와 함께 국내 대표적 황태 산지로 통한다. 하얀 눈을 이고 있는 황태덕장의 풍경이 장관.
12월 크리스마스 무렵에 널기 시작한 황태는 2월말까지 대관령의 눈보라와 햇살을 번갈아 맞으며 시나브로 맛을 더해간다. 얼고 녹기를 되풀이한 끝에 이윽고 노릇노릇 보푸라기처럼 속살이 잘게 찢어지는 맛난 황태로 태어난다. 덕장에서 만난 이 마을 박영숙씨(63)는 "올해 황태 작황이 아주 좋다"며 희색이다. 예년에 비해 춥고, 눈도 적당이 내려 유독 황태가 잘 마르고 있다는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횡계리에서 오대산 방면으로 30분 가량 차를 몰면 신라고찰 월정사에 이른다.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수백m 아름드리 전나무숲길이 압권. 특히 눈 내린 직후 설경속 숲길 산책은 마치 꿈길을 걷는 듯 황홀감에 젖게 한다. 경내 적광전 앞 팔각구층석탑(국보 제48호)이 대표적 유물.
◆ 여행 메모
▶먹을 곳-묵을 곳=양떼목장에서는 제대로된 식사를 할 수 없다. 인근 횡계리는 용평스키장을 찾는 스키어들이 붐비는 곳으로 식당들이 많다. 송천회관(033-335-5942), 황태회관(033-335-5795) 등은 황태해장국-찜-구이 등 황태요리 전문집. 오대산 월정사 초입에는 오대산가마솥식당(033-333-5355ㆍ사진) 등 산나물 백반 집들도 많다. 횡계리와 영동고속도로 진부IC를 나서면 진부면소재지에 여관들이 많다. 대관령 양떼목장(033-335-1966)에서도 단체 40명까지 숙박이 가능하다.
▶가는 길=영동고속도로 횡계IC~456번 지방도 따라 우회전, 횡계리 못미쳐 좌회전, 직진~대관령 옛 휴게소 주차장~안내 입간판 따라 400m~양떼목장
'금과 대자연의 만남'. 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강원도만큼 동굴이 많은 지역이 있을까. 하지만 정선의 화암동굴은 다르다. 종유석은 물론 실제 금광맥을 채굴했던 금광동굴. 가을 문턱에 접어든 강원도의 비경 감상과 함께 국내 유일의 금광맥 테마공원을 찾아보자.
암석 속 군데군데 누른 빛을 발하고 있는 금광맥을 직접 확인하고 굴착기로 채굴의 진동을 느껴볼 수 있는 정선의 화암동굴은 국내 유일의 금광맥 테마공원이다.
땅 을 딛고 힘겹게 오른 모노레일이 산허리를 돌자 사방 경계가 시원하게 드러난다. 사람 키보다 10배는 더 클 듯한 낙엽송과 소나무 군락. 시원한 바람을 타고 실려오는 피톤치드 향이 왠지 상큼하다.
지난 5월 첫 개통된 모노레일은 화암동굴의 새 명물. 산악 등반용으로는 전국 처음으로 도입됐다고 정선군청이 은근히 자랑한다. 케이블카와 달리 레일을 따라 오르는 재미가 크고 실내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정선아리랑도 제법 구성지다.
동굴 입구까지는 520여m. 아리랑 한 곡이 끝날 무렵이면 어김없이 입구에 닿는다. 모노레일을 개통하기 전까지는 개찰구 뒷쪽으로 연결된 산길이 유일한 출입로였다고 한다. 지금도 일부러 호젓한 산길을 즐기며 오르는 관람객들이 적지 않다.
동굴은 금광갱도와 천연 종유석굴이 공존하는 이중형. 폐광 이후 처음에는 종유석굴만 관광용으로 개방했으나 오히려 금광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지면서 이를 서로 연결한 뒤 테마공원으로 새로 조성했다. 이때문에 지금도 입구와 출구가 다르다.
먼저 산 중턱의 입구로 들어서면 금광갱도를 따라 1.8㎞의 금광갱도 여행이 시작된다. 금광갱도는 모두 5가지의 테마관으로 다듬어졌다. 첫 막은 역사의 장. 지난 1930년대 금광을 채굴했던 천포광산의 일대기부터 당시의 장비와 시설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어렴풋이 빛을 내고 있는 금광맥을 육안으로 직접 확인하고 굴착기로 채굴의 진동을 느껴보는 것은 화암동굴만의 이색 체험거리. 좁고 험난한 암반 협곡 사이로 층층히 쌓아올려진 나무 사다리와 동바리도 암울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읽어준다.
동굴은 어느 순간 갑자기 천길만길 수직으로 뚝 떨어진다. 지금부터 '금맥따라 365'의 구간. 365는 계단의 숫자를 뜻한다. 동굴의 수직 깊이는 무려 200여m. 군청이 설치한 철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좌우로 당시의 나무 계단 흔적이 또렷하다.
밑바닥은 넓은 공터다.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두어번 깜박거리면 왼쪽으로 호랑이가 큰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들 기세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는 자연이 빚어낸 동굴 속의 바윗돌. 당시 광부들은 이를 노다지 동굴을 지키던 수호신으로 여겨 고사도 지냈다고 한다.
수호신을 지나면 이번에는 도깨비가 동굴의 또다른 문을 지킨다. 어린이를 위한 '동화의 나라'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라고 한다.
금광맥의 마지막 순서는 '금의 세계'다. 금광의 생성부터 종류,제련과정,금의 역사 등을 입체의 디오라마 형태로 보여준다. 이집트의 황금 파라오 가면과 금부처 등 다양한 금 제품도 여기서 구경할 수 있다. 초대형 석순과 석주가 가득찬 '대자연의 신비'관도 볼거리다. 900평 규모의 넓은 광장 속에 다양한 형태의 종유석이 자라고 있으며,광장의 오른쪽 벽면의 '황금 유석폭포'는 28m의 높이로 동양 최대 규모. 동굴 탐험은 상·하층부 모두에 2시간이면 족하다.
동굴 여행이 끝나면 이번에는 지난 7월 개관한 천포금광촌과 정선향토박물관이 기다린다. 천포금광촌은 당시의 금광촌을 축소시켜 놓은 일종의 민속촌으로 규모는 크지 않다. 당시의 살림집과 선술집,황금연못,그리고 정선 특유의 돌집이 제법 짜임새있다.
읍을 거쳐 북면으로 향하면 정선아리랑의 유래지인 아우라지와 오장폭포를 만난다. 아우라지는 구슬픈 아리랑의 전설과 달리 무척 정겹고 평온하다. 몽돌밭이 넓게 펼쳐진 강가에 서면 왠지 물수제비라도 던지고 싶어진다. 강 건너 정자 앞의 아우라지 처녀 동상과 몽돌밭의 노래비도 눈길을 끈다.
오장폭포는 길이 209m의 일자형 수직 폭포. 생각보다 훨씬 장엄하며 세차게 내려뻗는 폭포 옆으로 깊게 주름진 습곡이 또한 볼만하다. 아우라지에서 노추산 방향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최근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는 '메주와 첼리스트' 된장마을(033-562-2710)은 아우라지에서 20여분 거리. 자연에 묻혀 살겠다며 정선에 들어온 돈연스님과 첼리스트 도완녀가 10년 넘게 메주를 빚어 된장을 만들고 있는 작업현장으로 색다른 풍경이 즐겁다.
연포분교 / 선생 김봉두
'촌지선생' 김봉두의 시골학교 이야기가 영화의 줄거리. 정선 신동읍 연포분교가 선생 김봉두에 등장한 바로 그 산내분교다.
학교는 영화 촬영 전부터 폐교됐으나 주변 경관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없이 아름답고 고즈넉하다.
분교 앞으로 흐르는 동강 줄기인 사행천과 높게 층을 이룬 고성산성도 함께 둘러보면 더욱 알차다.
민둥산 억새 / 동승
도념이 초부와 함께 억새가 우거진 멧부리를 걷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다름아닌 정선의 민둥산이 영화의 배경. 이름과 달리 해발 1천118m의 높이에 14만평 가량의 고원분지가 장관을 이룬다. 부산지역에는 덜 알려졌지만 민둥산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억새 명소.
매년 10월이면 억새풀 축제도 열린다. 주차장에서 억새밭까지 30~40분. 발구덕 마을 입구에서 민둥산 주차장까지는 자동차로 닿을 수 있다. 화암약수 쪽으로 내려오면 화암동굴도 둘러볼 수 있다.
아우라지 / 봄날은 간다
자연의 소리를 찾는 남자가 영화 속의 주인공인 상우(유지태)다. 상우와 라디오방송국 PD인 은수(이영애)가 물소리를 찾아 떠난 곳이 정선의 아우라지.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는 지점의 아우라지는 호젓한 강변과 주변 풍광이 무척 애잔하다. 조선시대에는 서울로 원목을 운반하기 위해 뗏목을 띄웠고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애만 태웠던 두 남녀의 슬픈 사랑이 정선아리랑으로 녹아나기도 했다.
아우라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209m 높이의 장대한 '오장폭포'도 함께 구경하는 것이 좋다.
새비재 / 엽기적인 그녀
차태현과 전지현이 재회를 약속하며 서로의 편지를 나무 밑에 묻은 장소가 정선군 신동읍의 새비재다.
새가 날아가는 형상을 닮았다는데서 유래했는데,영화처럼 경사진 고갯마루에 소나무 한 그루가 얼씨년스럽게 서 있고 산 아래까지 풀밭이 펼쳐지는 풍경이 이색적이다.
큰 기대를 하기보다 여유를 갖고 언덕을 오르면 의외로 아름답게 펼쳐진 정선의 아름다움을 고갯마루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선 화암동굴] 여행수첩
곤드레 산나물밥.
정선 여행은 승용차가 유리하다. 부산에서 경부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 제천 나들목을 빠져나온 뒤 평창을 거쳐 들어가면 정선읍까지 5시간.
읍에서 화암동굴까지는 20분이면 충분하다. 대중교통은 시외버스가 사실상 유일하다. 부산종합터미널(금정구 노포동)에서 부산~정선 구간을 운행한다. 모두 5차례(08:30 10:40 13:00 15:10 17:00)로 3시간30분 걸린다. 요금은 1만7천700원.
열차는 부산~정선 직행이 없다. 부전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경북 북부로 올라간 뒤 정선행 열차를 갈아타는 방법이 있으나 당일 연계가 어렵고 시간도 너무 많이 걸린다. 부산종합터미널(시외버스) 051-508-9400. 한국철도 부산지역본부 051-440-2178.
정선은 산나물과 국수 등의 독특한 먹거리가 많다. 특히 깔끔하고 향긋한 맛을 내는 곤드레 산나물밥은 미식가들이 즐겨찾는 음식. 된장과 고추장,간장 등 3가지 소스 중 하나를 골라 비벼먹는 재미도 크다. 가격은 4천~7천원. 정선읍의 동박골식당(033-563-2211)과 싸리곡식당(033-562-4554)이 가장 유명하다.
콧등치기 국수도 정선의 명물이다. 메밀국수의 일종인데 면발이 너무 쫄깃해 먹을 때 콧등을 친다는데서 유래했다. 가격은 1인분 4천원으로 정선읍의 한치식당(033-562-1068)과 동광식당(033-563-0437)을 찾아보자. 정선군청 관광문화과 관광기획계 033-560-2361.
숙박은 정선읍과 카지노로 유명한 사북읍에 집중돼 있다. 호텔은 사북읍의 강원랜드호텔(033-590-7700)이 유일하나 장급 여관은 제법 흔하다. 사북읍 지역이 새 건물이 많지만 교통편을 감안하면 정선읍이 유리하다. 요금은 객실(2인 기준)당 3만원 선.
여유가 있다면 펜션(민박형)을 예약하는 것도 괜찮다. 화암동굴 방면의 몽촌빌(033-563-1182 )과 정선래스빌(033-562-7797)이 추천 대상. 그 밖의 자세한 내용은 정선군청 홈페이지(www.jeongseon.go.kr)를 참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