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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문화와 북학사상의 산실, 석실서원 |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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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서원의 역사는 1654년(효종 5)에 건립된 석실사(石室祠)에서 기원한다. 석실사는 김상헌, 김상용 형제를 모신 사당이었는데,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성이 함락되자 자결했고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기를 거부한 척화파 인물이었다. 이후 김상헌은 청나라의 파병 요구를 반대하다가 심양으로 잡혀가 6년 동안 볼모생활을 했고 고국으로 돌아온 후 석실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 때 김상헌은 자신의 별호를 '석실(石室)'이라 지었다. 김상헌이 사망한 직후에 세워진 석실사는 2년 후 석실서원으로 확대되었고, 1663년(현종 4)에는 국가에서 공인하는 사액서원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 정국은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가운데 기회가 엿보아 청을 공격하여 중원을 회복시키자는 북벌론이 우세했는데, 석실서원은 이러한 시대 이념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장소로 부각되었다. 1672년에 송시열이 석실서원의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지으면서 김상헌 형제의 의리를 부각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석실서원의 숙종 대에 들어와 전성기를 맞았다. 이 때 석실서원의 교육은 김상헌의 증손인 김창협, 김창흡 형제가 담당했는데, 그들의 문하에서는 이재, 어유봉, 이병연과 같은 학자들이 교육을 받았다. 진경산수의 대가인 정선은 김창흡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석실서원 출신인 이병연과 친분이 깊었는데, 그가 한강에서 바라본 석실서원의 전경을 그린 것도 이런 인연이 있어서였다. 이무렵 석실서원에는 김수항, 민정중, 이단상, 김창협이 추가로 배향되었는데, 이는 서인 노론계가 당시의 정국을 장악한 것과 관계가 있었다. 경종 대에 세력이 위축되었던 석실서원이 다시 전성기를 맞은 것은 영조 대였다. 이때의 교육은 김창협의 손자인 김원행이 주도했는데, 그는 서원의 학습 규정을 새롭게 마련하고 학생들이 숙식할 건물을 추가로 지었으며, 학생들에게 경세학에도 관심을 가질 것을 강조했다. 김원행의 문하에서는 박윤원, 홍대용, 황윤석 같은 학자들이 교육을 받았는데, 홍대용과 황윤석은 청의 발달된 문물을 도입하자는 북학론을 주장하는 학자가 되었다. 김원행의 아호인 '미호(渼湖)'는 석실서원 앞을 흐르는 한강의 별칭이었다. 석실서원은 18세기 진경문화와 북학사상의 산실로 기능하였다. 석실서원이 발전한 데에는 노론계 학자의 중심지라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지만, 한강 수로를 따라 서울에 쉽게 갈 수 있다는 접근성과 주변의 산수가 아름답다는 환경적 요인이 작용한 측면이 있었다. 1747년 봄에 김원행은 미호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여주까지 여행했는데, 주변의 경치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아침에 석실사(石室祠)를 출발하여 이곳(미호)에서 배에 올랐네. 석실서원은 철종대에 김창흡, 김원행, 김이안, 김창집, 김조순 등이 추가로 배향되면서 안동김씨의 가묘(家廟)로 성격이 변화했다. 1868년에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석실서원을 폐쇄한 것도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이후 1900년에 금곡에 홍릉이 조성되면서 그곳에 있던 조말생의 묘소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석실서원 터는 현재 남양주시 와부면 수석동에 있는데, 토평 인터체인지에서 덕소 방향으로 가다가 조말생 묘소 표석이 있는 쪽으로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된다. 필자는 지난 연말에 이곳을 방문했는데 주변의 풍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석실서원과 관련된 자취는 전혀 보이지 않고 모장산 끝자락에 1987년 9월 17일 경기도에서 세운 '석실서원지' 표석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 표석의 앞쪽에는 양주 조씨의 사당인 영모재(永慕齋)가 세워졌고 뒤쪽으로는 조말생을 비롯한 조씨 일가들의 산소가 자리 잡았다. 한강변에는 음식점과 카페가 들어서고 있는데 10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보다 숫자가 늘어났다. 석실서원은 조선후기의 이름난 학자들을 배출한 산실이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제는 이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드문 것이 못내 아쉬웠다.
북학파(北學派) 실학자의 한 사람이며,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하는 등 조선 후기 과학사상의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홍지(弘之).
할아버지는 대사간 용조(龍祚)이며, 아버지는 목사 역(櫟)이다. 일찍이 당대의 석학이자 노론학파의 중심적 인물인 김원행(金元行)에게서 주자학을 배웠다.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한 가운데 박학다식한 학문적 소양을 쌓아나갔다. 1765년(영조 41)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가는 숙부 억(檍)을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따라가 3개월 동안 베이징[北京]에 체류했다. 이때 중국인 학자 엄성(嚴誠)·반정균(潘庭均)·육비(陸飛) 등과 친교를 맺고, 독일계 선교사로 흠천감정(欽天監正)인 A. 폰 할러슈타인(중국식 이름 劉松齡)과 부정(副正)인 A. 고가이슬(鮑友管) 등과 면담하면서 청나라 고증학과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 사상체계에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의 베이징행은 북학파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당시 교우관계에 있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 등에게 영향을 주어 북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돌아와 3년간 중병을 앓은 후, 1774년 음보(蔭補)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곧 세손익위사시직(世孫翊衛司侍直)이 되었다. 1777년(정조 1)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1778년 태인현감(泰仁縣監), 1780년 영천군수(榮川郡守)가 되었다. 1783년 모친이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 곧바로 중풍에 걸려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