處士 淸州宋公 諱 淰 墓碑銘
古史에 이르기를 必有根本은 必有不滅이라 如木根枝하고 如水源流라하니 그 根源이 微賤하면 어찌 枝葉이 茂盛하며 또 流長하겠는가? 故로 能歸根하고 追源한 까닭이니 況且 德業의 土臺가 功熱로 드러난 名門으로 不遷位의 後孫된 者 그 누가 追慕의 道理를 잊겠는가? 淸州宋氏는 金海의 名門閥族이다. 始祖 淸州君 諱 有忠은 麗末의 功勳과 食邑으로 得貫하였고 三世 成均館大司成公은 靖亂의 禍로 挈家隱德하여 金海에 始居한 祖宗이며 參軍公은 文德이 卓節하여 濯纓金先生과 鄕約을 共著하였고 八世 參判公 諱 賓은 壬辰亂에 倡義한 義兵將의 嚆矢로 守城殉節하니 그 褒贈한 功은 至今도 表忠祠의 不遷祭享으로 이어지며 進士公 諱 廷伯 또한 거듭 義兵將에 推戴되어 郭忘憂堂과 同苦하였고 后에 鄭桐溪의 輓詞에서 北黨에 心不變한 名句는 아직도 膾炙된다, 十世 處士公 諱 齊賢은 父母病中에 便조차 愼察하며 그 差度를 가름한 孝行이 邑誌의 記錄이니 곧 父祖의 다른表象인 것이요 兄弟가 齊聖 齊文 齊元인데 齊聖은 僉樞公의 後嗣를 이어 그 後孫 또한 數많은 族黨을 이루었으니 上考하건데 그 表德한 根源과 美麗한 歷史야말로 굳이 安順菴과 李錦帶의 文章이나 史錄이 아닐지언정 어찌 泯滅하며 또 斷絶되겠는가? 公의 諱는 淰이요 字는 龍瑞이니 始祖 淸州君의 十一世요 處士公 諱 齊賢의 子이다. 公 또한 至行이 高潔하여 子姪訓育에 斯文之道하니 公의 子 諱 道復 亦是 學行兼德하여 當時 表忠祀毁撤에 名文의 家狀으로 心琴한바 끝내 道儒訴를 이끄니 鄕黨의 稱君子로 이어졌고 十七世의 字는 夢弼 諱는 棋泰로 그 行實 또한 篤實勤儉하고 和睦族黨하여 그 德誦이 遠近에 藉藉하였다하니 살피건데 이 또한 首尾가 하나라 果然 一連한 繼代가 마치 幼苗가 巨木이 되듯 山灘이 大河로 이어짐과 같도다. 아! 그러나 幾百의 歲月에 突然한 風俗은 一瞬 그 生業과 價値를 달리하니 閥門인들 多少의 美醜와 盛衰가 없겠는가? 大族黨의 宗孫으로 數百年을 支撑하고 또 물림하며 左顧右眄한 渦中에 그나마 間或 榮達의 傍孫과는 달리 惟獨 宗家의 勢는 疏遠하니 及其也 到處에 散居한 先塋마저 保全難堪이라 敢히 前例를 繼承하는 業조차 壯談하기 어렵도다. 이에 數次 族議를 거쳐 이곳 盤龍山 先塋의 同原에 公으로부터 二十世 處士公 諱 諄復에 이르는 考妣의 墓所를 異域하고 將次 後代까지 祖孫이 함께할 幽宅을 定했으니 可히 家禮를 잇는 報本의 精誠이요 時禮를 따르는 宿願의 成就리니 이 또한 慶事가 아니리요? 宗孫 裕章氏가 大事를 主導하고자 遺事를 들고 銘을 請하기로 나는 鹿寫兎畵가 될 뿐 不適이라 거듭 固辭하나 不許라 不得已 들은 것을 幹略敍述하고 삼가 銘에 寸言을 덧붙인다. 無源水不揚이요 無祖人不賢이니 不揚卽不新하고 不賢卽不達이라 此明理不外니 焉後裔不振가? 欲行無不成커늘 難一時不妬리요? 幽擇盤龍山하니 天神亦保佑라 祖孫欣感應이니 百代勢無窮이로다.
己丑 閏 五月 下澣
傍孫 春復 謹撰
處士 淸州宋公 諱 淰 墓碑銘 (비문 한글해석)
고사에 이르기를 근본이 있는 것은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 한다 하였고 나무는 뿌리와 가지가 같으며 물은 원천과 흐름이 같다 하였으니 그 근원이 미천하면 어찌 지엽이 무성하며 또 그 흐름이 길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그 뿌리를 돌아보고 근원을 쫒는 까닭이니 하물며 덕업의 토대가 공열로 드러난 명문으로 불천위의 후손된 자 그 누가 추모의 도리를 잊겠는가?
청주송씨는 김해의 명문벌족이다. 시조 청주군 휘 유충은 고려 말의 공훈과 식읍(거느리는 고을과 땅)으로 본관을 득하였고 삼세 성균관 대사성공은 정치변란의 화로 가족을 이끌고 덕을 숨겨 김해에 처음 살게 된 선조이며 참군공은 문장과 덕이 탁월하여 탁영 김일손선생과 고을의 향약을 공저하였다. 팔세 참판공 휘 빈은 임진란에 창의한 의병장의 효시로 성을 지키다 끝내 순절하니 그 기리고 추증한 功은 지금도 표충사에서 불천위의 제향으로 이어지며 진사공 휘 정백은 거듭 의병장에 추대되어 곽 망우당과 함께 고생하였고 후에 동계 정온 선생의 만사에 “북당에 마음변하지 않은 사람 남국에 한사람 남았네!”라는 명구는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십세 처사공 휘 제현은 부모병중에 그 변까지 삼가 정성으로 살피며 차도를 가름한 효행이 읍지의 기록이니 곧 선대의 또 다른 표상이다. 아우로는 제성 제문 제원이며 제성은 첨추공의 후사를 이어 그 후손 또한 수많은 족당을 이루었으니 생각하건데 그 표덕한 근원과 아름다운 역사야말로 굳이 순암 안정복 금대 이가환의 문장이나 역사의 기록이 아닐지언정 어찌 닳아 없어지며 또한 단절되겠는가?
공의 휘는 심이요 자는 용서이니 시조 청주군의 십일세요 처사공 휘 제현의 子이다. 공 또한 志行(뜻과 행실)이 고결하여 子姪(자식과 조카)을 훈육함에 있어서 유학의 道로서 가르치니 공의 자 휘 도복 역시 학행과 겸한 덕으로 당시 표충사 철거령에 명문의 가장을 올려 심금을 울린바 이 문장으로 끝내 남도유림의 상소를 이끌었으니 향당에서 군자라 칭하게 되었고 십칠세의 자는 몽필 휘는 기태로 그 행실 또한 독실하고 근검하며 화목한 족당을 이루어 그 덕의 칭송이 원근에 자자하였다하니 살펴 보건데 이 또한 처음과 끝이 하나라 과연 하나로 이어진 계대가 마치 새 싹이 큰 나무가 되듯 산골 여울이 큰 강으로 이어짐과 다를 바 없도다.
아! 그러나 몇백년 세월에 돌연한 풍속은 한순간 그 생업과 가치를 달리하니 명문벌족의 가문인들 다소의 좋고 나쁨과 성하고 쇠함이 없겠는가? 대족당의 종손으로 수백 년을 지탱하고 또 대물림하며 좌고우면(이쪽저쪽을 다 살핌)한 와중에 그나마 간혹 영달하는 방손들과는 달리 유독 종가의 세는 성글어지니 급기야 도처에 흩어진 선영마저 보전난감하고 감히 전례를 계승하는 업조차 장담하기 어렵도다.
이에 수차 족의를 거쳐 이곳 반룡산 선영의 한 언덕에 公으로부터 이십세 처사공 휘 순복에 이르는 고위 비위의 묘소를 옮기고 장차 후대까지 조손이 함께할 유택을 정했으니 가히 가문의 예를 잇는 보본의 정성이요 시대의 예에 따르는 숙원을 이루었으니 이 또한 경사가 아니리요? 종손 유장씨가 큰일을 주도하고자 유사를 들고 비명을 청하기로 나는 사슴을 그리면 토끼가 될 뿐 적임자가 아니라 거듭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부득이 들은 것을 간략서술하고 삼가 명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근원이 없는 물은 출렁이지 않으며 조상이 없는 이는 현명하지 못하니
출렁이지 않으면 새로움이 없고 현명하지 않으면 영달하지 못 한다네!
이처럼 밝은 이치는 벗어남이 없으니 어찌 후예들이 떨치지 않겠는가?
하고자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거늘 한때의 어려움을 탓할 것인가?
반룡산에 유택지를 가려잡으니 하늘의 신도 역시 돕고 지킬 것이라!
祖孫이 함께 기뻐하고 감응하니 그 세력이 백대에 무궁할 것이로다!
己丑 閏 五月 下澣
傍孫 春復 謹撰
※참고
1. 탁영 김일손 선생은 김종직의 수제자로 연산군 때 단종조 세조찬위의 부당성을 지적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록 사초에 실은 죄(무오사화)로 처형된 영남의 대표적 선비. 濯纓(탁영)이라는 號는 춘추시대 초나라 屈原(굴원)의 어부사란 시에서 인용한 내용으로 「세상이 맑은 물이면 갓끈을 씻고 벼슬에 나아가고 세상이 흐린 물이면 발을 씻고 집에 들겠다.」는 선비의 올곧은 마음가짐을 드러낸 뜻.
2. 동계 鄭선생은 선조, 광해군, 인조의 3대에 걸쳐 벼슬한 선비의 대명사 문간공 동계 정온으로 남명 조식의 학파를 이은 대북의 영수 정인홍의 수제자이며 정인홍이 참형을 당하자 정치적 길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관복을 벗어 시신을 수습하여 의리를 밝혔으며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며 자결까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3. 순암 安선생은 영조 정조 때의 실학자 안정복이며 성호 이익의 문인으로 조선중기의 대표적 금기인 역사서 저술에 도전하고 동사강목 18권 등 많은 역사서를 편찬하여 현재도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당시에 뛰어난 문장가로 임진란에 순절한 참판공의 행장을 굴원의 國殤(국상)을 인용하여 지었음.
4. 금대 李선생은 성호 이익의 從孫으로 정조 때 형조판서를 역임한 성호 실학의 적통 이가환이며 다산 정약용, 연암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와 교류하며 시대를 앞서가는 실학의 선구자로 서학(천주학)을 연구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종, 이승훈 등과 함께 처형되었음. 참판공의 신도비명을 지어 담안 첨모재 입구에 세워져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