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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선삼매경 상(上)/오정심관(五停心觀)|
오정심관(五停心觀)
만일 음욕이 많은 사람이라면 부정(不淨)의 법문으로 다스리고, 만일 성냄이 많은 사람이라면 자심(慈心)의 법문으로 다스리며, 만일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이라면 인연의 이치를 사유하고 관찰하는 법문으로 다스리고, 만일 분별작용이 많은 사람은 호흡을 염(念)하는 법문으로 다스리며, 만일 구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염불(念佛)의 법문으로 다스린다. 이와 같이 다종다양한 병을 갖가지 법문으로 다스린다.
1) 부정관(不淨觀) - 탐욕을 다스림
음욕이 많은 사람은 부정관(不淨觀)을 읽힌다. 다리에서부터 머리털까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머리카락, 털, 손톱, 이(齒), 얇은 가죽, 두꺼운 가죽, 피, 살, 근육, 맥박, 뼈, 골수, 간, 폐(肺), 심장, 비장, 신장, 위장, 큰창자, 작은창자, 대변, 소변, 콧물, 침, 땀, 눈물, 때, 먼지, 고름, 뇌(腦), 세포, 쓸개, 물, 미세한 살가죽, 지방(脂肪), 뇌막(腦膜) 등25) 몸 속에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깨끗하지 못한 것들이 있다. 또한 부정관(不淨觀)이란 청어(靑瘀, 푸르딩한 살), 봉창(봉脹), 파란(破爛), 혈류도만(血流塗漫), 취농담식(臭膿?食), 다함없이 뼈가 부서지고 타서 그을린 것을 관찰한다. 이것을 부정관(不淨觀)이라 이른다.
다음으로 음욕이 많은 사람은 일곱 가지에 애착한다. 혹은 호색(好色)에 집착하고, 혹은 단정함에 집착하며, 혹은 몸가짐의 태도(儀容)에 집착하고, 혹은 음성에 집착하며, 혹은 날씬하고 미끈함에 집착하고, 혹은 중생에 집착하며, 혹은 모든 것에 애착한다.
만일 호색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청어(靑瘀) 관법을 익혀야 한다. 누렇고, 붉고, 깨끗하지 않은 색깔 등도 또한 이와 같다. 만일 단정함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봉창신산(봉脹身散) 관법을 익혀야 한다. 만일 의용(儀容)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신사혈류도골(新死血流塗骨) 관법을 익혀야 한다. 만일 음성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인색명단(咽塞命斷)의 관법을 익혀야 한다. 만일 날씬하고 미끈함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뼈가 들어나고 비쩍 마르는 병의 관법을 익혀야 한다. 만일 중생에게 집착한다면 마땅히 여섯 가지 관법을 익혀야 한다. 만일 모든 것에 애착한다면 일체를 두루 살피는 관법을 익혀야 한다. 어느 때는 갖가지를 만들고 다시 다른 관을 만든다. 이것을 부정관(不淨觀)이라고 한다.
(문) 만일 몸이 더럽고 냄새나고 썩은 시체와 같다면 어찌하여 그것에 집착심을 일으키겠는가?
(답) 만일 청정한 몸에 집착한다면 냄새나고 썩어 문드러진 몸에도 역시 마땅히 집착해야 할 것이다. 만일 냄새나는 몸이나 깨끗한 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또한 마땅히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두 몸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두 가지 진실하고 깨끗함을 모두 찾는다면 한꺼번에 얻을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 미치고 미혹해서 뒤집힌 마음으로 뒤덮이게 되어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한 것으로 헤아리게 된다. 만일 뒤집힌 마음을 깨트리면 문득 실상법(實相法)의 관법을 얻게 되고, 게다가 더럽고 텅 비고 거짓이며 진실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또한 다음으로 죽은 시체는 더운 기운도 없고 생명도 없으며 인식작용이 없어 갖가지 근(根)이 있을 수 없다. 사람이 이것을 잘 알면 마음에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몸에 따스함이 있고 생명이 있고 인식작용이 있어서 갖가지 기능을 완전하게 구비하였기에 마음이 뒤집히고 미혹하여 집착하게 된다.
다음으로 마음이 색(色)에 집착할 때 그것을 깨끗하다고 말하더라도 애착하는 마음을 쉬면 바로 깨끗하지 않은 것을 안다. 만일 이것이 진실로 청정하다면 마땅히 항상 청정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강아지가 똥을 먹는 것을 일러서 깨끗하다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매우 더럽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몸은 안팎으로 한 곳도 깨끗한 곳이 없다.
만일 몸의 껍데기에 집착한다면 몸 밖에 전신의 얇은 가죽을 취하여 가까스로 죽은 나무를 얻는 것과 같이 이 또한 깨끗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찌 하물며 몸 속의 서른여섯 가지 물질을 말할 것인가? 또한 몸의 인연을 미루어 보더라도 가지가지로 깨끗하지 않다. 깨끗하지 않은 부모의 정혈(精血)이 모여 이미 몸을 이뤘으니 항상 깨끗하지 않은 것을 방출한다. 의복과 침상과 요도 역시 냄새가 나고 더럽다. 어찌 하물며 죽는 곳을 말할 것인가? 이로써 마땅히 생사의 안팎 모두가 더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관(觀)에는 또한 삼품(三品)이 있다. 초습행(初習行), 이습행(已習行), 구습행(久習行)이다. 만일 초습행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 살가죽을 찢어버리는 생각을 지어서 더러운 것을 없애버리고, 마땅히 벌거벗은 뼈만 남은 사람을 관찰하라. 마음을 매어놓고 관행(觀行)하되 생각을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반연을 생각하면 그 생각을 추슬러 돌아가게 한다.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 생각은 살가죽과 살을 버리고, 모두 머리뼈(頭骨)를 관찰하여 생각을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반연을 생각하면 생각을 추슬러 돌아가게 한다.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 몸 속의 아주 작은 마음으로 살가죽과 살을 제거하여 정수리, 이마, 미간, 코끝, 마음 등 다섯 곳에 마음을 매어둔다. 이와 같이 다섯 곳에 마음을 머물게 하여 뼈를 관찰하되 생각을 바깥으로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반연을 생각하면 마음을 추슬러 돌아가게 한다. 항상 마음을 관찰하되 마음이 벗어나면 제어한다.
만일 마음의 고달픔이 지극하면 생각을 소연(所緣)에 머물게 하되, 바깥을 버리고 머무르게 해야 한다. 예컨대 원숭이가 기둥에 매달려 있으나 매우 편하게 쉬고 있는 것과 같으니, 소연은 기둥과 같고 생각은 새끼줄이나 자물쇠와 같으며, 마음은 원숭이에 비유할 수 있다. 또한 유모(乳母)가 항상 젖먹이를 살펴서 떨어지지 않게 하듯이 수행자가 마음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 점차 마음을 제어하여 대상에 머물게 해야 한다. 만일 마음이 오래 머물게 되면 이것이 선법(禪法)이다.
만일 선정(禪定)을 얻게 되면 곧 세 가지 양상이 나타난다. 신체가 화열(化悅)하고 유연하며, 가볍고 편안하며, 백골(白骨)이 빛을 뿌리는데 마치 빛이 흰 마노(瑪瑙)와 같으며, 마음이 고요하게 머무는 것을 얻는다. 이것을 관정(觀淨)이라 한다. 이때 문득 마음을 색계 가운데에서 얻는다. 이것을 처음 선법(禪法)을 배워서 색계(色界)의 마음을 얻는다고 한다. 마음이 선법에 상응한 즉 이것이 색계의 법이다. 마음으로 이 법을 얻으나 몸은 욕계(欲界)에 있으며, 사대가 지극히 크고 유연하고 쾌락해지며, 색깔이 윤택해지고 청결하며, 빛이 넘치고 온화하고 기쁨에 들뜨게 되는 것을 열락(悅樂)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이전의 백골관은 백골의 모습 속에 광명이 두루 비치는데 맑고 하얀 색이다.
세 번째, 마음이 한 곳에 머물면, 이것을 정관(淨觀)이라고 한다. 살을 제거하고 뼈를 관찰하기 때문에 정관이라고 한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양상은 모두 스스로 아는 것이라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다. 이상 삼품 중에 초습행은 아직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습행은 세 번 내지 네 번 몸으로 수행했으며, 구습행은 백년 동안 몸으로 실천 수행한 것이다.
2) 자심관(慈心觀) - 성냄을 다스림
만일 성냄이 치우치게 많으면 마땅히 세 가지 자심(慈心)법문을 배워야 하니, 초습행, 이습행, 구습행이 있다. 만일 초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인자함은 친애에 미치는 것이다. 무엇을 친애함이 서원(誓願)에 파급되어 친애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 하는가? 수행자가 만일 가지가지 몸과 마음의 쾌락을 얻는다면, 즉 추울 때 옷을 얻고 뜨거울 때 시원함을 얻으며, 배고프고 목마를 때 음식을 얻고, 빈천(貧賤)할 때 부귀를 얻으며, 수행이 지극할 때 지식(止息)을 얻는 등 이와 같은 온갖 즐거움이 친애를 원하면 마음을 묶어서 인자함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게 한다. 만일 달리 여러 가지 반연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추슬러 돌아가게 한다." 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인자함은 보통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다. 무엇을 보통 사람에게 미쳐 즐거움을 준다고 하는가? 수행자가 만일 가지가지 몸과 마음의 쾌락을 얻는다면 보통 사람이 마음을 묶어 인자함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를 원해야만 한다. 여러 가지 반연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하면 그것을 추슬러 돌아가게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인자함이 원망과 미움에 미친다. 무엇이 그에게 미쳐 그 즐거움을 준다고 말하는 것인가? 수행자가 만일 가지가지 몸과 마음의 쾌락을 얻는다면 원수가 미울지라도 친한 이와 더불어 같게 되기를 원해야만 하며, 함께 한마음을 얻으면 마음이 크게 청정해진다. 친애함이 원망들 가운데에 널리 세계로 파급되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들이 모두 즐거움을 얻고 시방세계에 두루 나누어 가져 동등하지 아니함이 없고 크게 마음이 청정해진다. 시방의 중생을 바라보되 모두 자신을 보는 듯이 하고, 마음으로 눈 앞의 현상들을 분명하게 보아서 쾌락을 얻어 받으면, 이 때 바로 자심(慈心)삼매를 얻는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보통 사람을 친애(親愛)하여 즐거움을 얻기를 원하지만, 나뿐 사람은 원망스럽고 미운데 어떻게 불쌍히 여겨 다시 즐거움을 주라고 원하겠는가?
(답) 마땅히 그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그 사람은 다시 여러 가지 좋고 청정한 법의 씨앗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이제 어찌 하나의 원망 때문에 그 착함을 빼앗길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생각하건대, '이 사람은 지나간 세상에서 아마도 나와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지금의 성냄 대문에 다시 원망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내겠는가? 내 마땅히 그에게 참으면 이것이 나에게 좋은 이익일 것이다. 또한 수행법을 생각하되 인덕(仁德)의 수용력이 크고 인자함의 힘이 헤아릴 수 없어 이것을 잃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다시 생각하여 말하기를, "만일 원망과 미움이 없다면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인욕은 원망으로 말미암으니 원망이 곧 나의 좋은 친구이다. 또한 성냄의 과보는 가장 무거우며, 여러 가지 악 가운데 으뜸으로,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 중생에게 성을 내면 그 해독은 없애기 어렵다. 비록 그를 태워 버리고자 하더라도 사실상 이것은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다시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바깥으로 진리의 옷(法服)을 걸치고 안으로 인욕행(忍辱行)을 익히면 이것을 사문(沙門)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찌 나쁜 소리를 하고, 제멋대로 변색(變色)하고 마음이 성급해질 수 있겠는가? 또한 오수음(五受陰)이란 뭇 고통의 수풀이며 악을 받아들이는 과녁이다. 고뇌와 싫음이 다가오면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는가? 가시로 몸을 찌르는 것과 같이 고통의 가시가 헤아릴 수 없다. 뭇 원망이 너무 많으면 제거할 수 없다. 마땅히 스스로 지켜내어 인내의 가죽신을 신어야만 한다."라고 한다. 부처님의 말씀과 같다.
성냄으로써 성냄에 보답하면 성냄은 여전히 그것에 집착한다.
성냄으로 보답하지 않으면 능히 대군(大軍)을 깨트릴 수 있다.
능히 성내지 않으면 이것이 대인(大人)의 법이다.
소인이 성을 내는 것은 움직이기 어려운 산과 같다.
성냄은 무거운 독이니 해치고 해롭게 하는 것이 많다.
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해롭게 하여 멸망케 한다.
성냄은 커다란 어둠이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성냄은 티끌과 먼지이니 청정한 마음을 오염시킨다.
이와 같으므로 성냄은 마땅히 서둘러 없애야 하나니,
독사가 방안에 있을 때 제거하지 않으면 사람을 해치는 것과 같으리라.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성냄의 독은 헤아릴 수 없으니,
마땅히 자비로운 마음(慈心)을 닦으면 성냄을 멸하여 없애버린다.
이것이 자애로운 삼매의 문(慈三昧門)이다.
3) 인연관(因緣觀) - 어리석음을 다스림
만일 어리석음이 치우칠 정도로 많으면 마땅히 세 가지 사유하는 법문을 배워야 하니, 초습행, 이습행, 구습행이 있다. 만일 초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태어남은 늙고 죽음으로 말미암고 무명(無明)은 행(行)에서 연유하니, 이와 같이 사유하여 바깥으로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라. 바깥으로 여러 가지 반연을 생각하면 그것을 추슬러 돌아가게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행은 식(識)에서 말미암고, 식은 명색(名色)에서 연유하며, 명색은 육입(六入)에서 연유하고 육입은 촉(觸)에서 연유하며, 촉은 수(受)에서 연유하고, 수(受)는 애(愛)에서 연유한다. 애는 취(取)에서 연유하고 치는 유(有)에서 연유한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생각을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게 한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대상을 생각하여 그것을 추슬러 돌아가게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무명은 행에서 연유하고, 행은 식에서 연유하며, 식은 명색에서 연유하고, 명색은 육입에서 연유한다.
육입은 촉에서 연유하고 촉은 수에서 연유하며, 수는 애에서 연유하고, 애는 취에서 연유하며, 취는 유에서 연유하고, 유는 태어남에서 연유하며, 태어남은 늙고 죽음에서 연유한다.35) 이와 같이 사유하여 생각을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게 한다. 바깥으로 여러 가지 반연을 생각하면 그것을 추슬러 돌아가게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문) 일체의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밝음(明)을 지닌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밝음이 없다(無明). 여기에서 무엇을 무명이라 하는가?
(답) 무명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이름한다. 그 중에서 무명은 후세의 존재(有)를 만들 수 있다. 존재(有者)란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無者)은 있다. 여러 가지 선함을 버리고 여러 가지 악함을 잡는다. 실상(實相)을 파괴하고 허망함에 집착한다. [무명상품(無明相品)] 속의 설명과 같다.
밝고 유익한 법을 밝히지 않고 도덕(道德)의 업을 모르고
결사(結使)의 원인을 만드니 불이 송곳과 부싯돌에서 생기는 것과 같다.
악법이나 마음으로 집착하고 선법(善法)을 멀리 버린다.
중생의 밝음을 빼앗는 도적은 가고 오는 밝음도 빼앗는다.
상(常), 락(樂), 아(我), 정(淨)의 생각을 오음 속에서 헤아리니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 거룩한 진리도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번뇌의 험난한 길을 맹인이 들어가서 걸어가니,
번뇌 때문에 업이 쌓이고 업 때문에 고뇌가 흘러서 돈다.
마땅히 잡지 말 것을 잡고 잡아야 할 것을 오히려 버린다.
어둠 속을 달리며 도(道) 아닌 것을 쫓으니,
나무 뿌리에 채이고 땅에서 넘어진다.
눈이 있으나 지혜가 없으니 그 비유도 이와 같다.
이런 인연이 없어지기 때문에 지혜의 밝기가 태양이 뜬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간략하게 무명을 설명하니, 늙음 내지 죽음도 그렇다.
(문) 불법(佛法) 속의 인연이 매우 깊다. 어떻게 어리석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연을 관찰할 수 있겠는가?
(답) 두 가지 부류의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 첫째는 소나 양과 같은 사람이다. 두 번째는 여러 가지 사견(邪見)으로 의혹을 품고 가리며 숨기는 사람이다. 부처님께서는 사견을 지닌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하여 마땅히 인연을 관하여 삼매를 수습하라고 말씀 하셨다.
4) 호흡(안나반나)36)관(觀)37) -분별작용을 다스림
만일 분별하는 작용(思覺)38)이 치우치게 많다면 마땅히 안나반나삼매의 법문을 익혀야 한다. 세 부류의 배우는 사람이 있으니 초습행(初習行), 이습행(已習行), 구습행(久習行)이다. 만일 초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한마음으로 생각하여 들숨과 날숨을 헤아려야 한다. 길든 짧든 하나에서 열까지 헤아린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이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하나로부터 열까지 헤아려야 하며, 호흡이 들어가고 나옴에 따라 염(念)39)과 호흡을 함께 마음의 한곳에 멈추게 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구습행이라면 마땅히 가르쳐서, "수(數), 수(隨), 지(止), 관(觀), 전관(轉觀), 청정(淸淨)의 안나반나삼매의 여섯 가지 문을 열 여섯으로 나눈다."라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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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안나반나(安那般那): ana-apana의 음사이다. 안반(安般)이라고도 하며, 호흡(息)이라는 의미이다. 안나(安那)는 들숨, 반나(般那)는 날숨을 말하며, 이 두 의미가 합성된 말이다.
38) 사각(思覺)은 각(覺)이라 하며, 심(尋) 일으킨 생각(vitarka)이라고 하며, 추리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39) 염(念 smriti): 마음챙김, 마음집중, 깨어있음, 기억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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