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라는 동네는 정말 희안하다.
2천년이 넘는 전통도시면서 지금은 다른 도시의 위성도시고, 시내가 그리 큰 것도 아닌데 두 개로 나뉘기까지 한다.
조선시대 전라도 관청이 있었던 원래의 나주와 서해의 해산물이 모여들었던 영산포가 물과 기름마냥 따로 놓여있다.
심지어 1914년부터 1981년까지는 아예 '나주읍'과 '영산포읍'이라는 지명으로 따로 존재할 정도였다.
행정 중심이었던 나주읍내와는 달리 경제적인 중심은 수 백년동안 영산포가 담당하고 있었다.
영산강하구둑이 완공되기 전 저 멀리 흑산도 앞바다의 물고기를 영산포까지 실어 나르고,
반대로 나주평야의 맛좋은 곡물과 특산물을 영산포에서 외지로 실어 날라 언제나 풍요롭고 사람이 많은 고장이었다.
하지만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되던 그 해 하구둑이 들어서 뱃길이 끊겼고 그 이후로 빠른 쇠퇴롤 맞았다.
수 백년의 역사를 자랑했던 영산포시장과 영산포 뱃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영산포를 기반에 두어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다른 일을 찾아 먼 타지로 나가야만 했다.
배, 철도, 도로가 모두 모였던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는데 뱃길은 1981년에, 철길은 2001년에 사라지면서
영산포의 옛 영광을 유일하게 알려주는 흔적은 버스터미널밖에 남아있지 않다.
경제가 몰락하고 인구가 크게 줄었어도 마치 꺼지지 않는 장작처럼, 마지막 남은 불씨를 살려주는 유일한 존재이다.
2009년 여름 어느 날.
야간열차에 택시에 버스까지 삼중고를 겪으면서 어렵게 어렵게 영산포에 찾아왔다.
푸르른 나주평야와 영산강 사이로 슬며시 떠오르는 해를 보니 답답했던 마음이 스르륵 사라진다.
옛 포구의 정취를 조금이나마 느끼고 영산포터미널이란 낯선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주시내의 두 터미널 중 강남(江南)을 담당하는 조그만 버스터미널로서, 광주를 오가는 160번과 서울행 고속버스의 종점이다.
누가 아니랄까봐 금호고속 두 대가 빨간 불빛을 이른 아침에 조용히 비춰주고 있다.
남쪽 방면을 담당하는 버스터미널답게 180-1, 180-4번도 나란히 제 자리에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광주행 시내버스의 상징과도 같은 160번이 불을 켜고 조용히 서 있다.
모두 광주를 가기 위해 조용히 승객들을 싣고 있는 중이다.
북적이는 나주터미널과 달리 영산포터미널엔 사람 한 명 없이 썰렁했다.
(구)대전, 벌교 등 다소 오래된 터미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창문형 벽도 있고,
때가 잔뜩 낀 네모난 기둥과 빨간 의자, 두 가지 다른 조명이 고요한 아침을 맞고 있었다.
SK텔레콤, GS25 등 버스터미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점들도 안에 있다.
현재 매표소는 운행을 하지 않고 있다.
이미 다른 곳에서 임시 컨테이너로 한 번 옮겨왔다가 컨테이너마저 문을 닫은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옆에 놓여있는 두 대의 자동발매기만이 버스를 타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이다.
나주나 영산포나 터미널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광주에서 전남 남해안으로 가는 버스들의 중간 경유지로서 주로 해남, 완도, 강진을 주축으로 수많은 노선이 운행을 한다.
다만 1번국도를 따라가는 광주-목포 완행버스는 영산포를 들리지 않는다.
180번 지선 시리즈가 영산포에서도 산산히 흩어진다.
나주터미널이 -1,-4 단위로 큰 그릇처럼 나누어 안내했다면
영산포터미널은 좀 더 세밀하게 마을 단위로 알려주어 보기는 좀 불편해도 시간표 알기는 간편하다.
이 동네에 살지 않는 나에겐 하루 1회 있는 '영암'이라는 글자만 눈에 띈다.
일명 '삼한지테마파크'라 하는 주몽촬영지로는 따로 안내를 해두고 있었는데,
지금은 드라마 주몽이 끝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아직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지는 모르겠다.
윗동네 나주와 마찬가지로 서울가는 버스도 여기에서 탈 수 있다.
이 때는 하루 6회였지만 지금은 더 줄어 4~5회 선에 그친다.
이 곳 영산포가 종점으로서 나주터미널을 들렸다가 호남고속도로로 강남까지 올라가는 꽤 긴 노선이다.
대합실에 있는 동안 기사님과도 간단한 얘기를 나누고, 상쾌한 기분으로 건물 밖으롤 나온다.
마지막 운행을 마친 160번 버스 두 대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
각각 현대의 '큰 차'와 '작은 차'가 번갈아 다니는 모습을 보니 신선하면서도 꽤 재밌다.
밖에서 바라본 영산포의 모습은 너무도 썰렁했다.
영산포공용터미널이 이 일대에서 가장 클 정도로 높은 건물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꽤 큼직한 예식장을 연상케 하는 모습에 입구까지 있지만, 이 곳을 찾는 사람은 보기가 힘들다.
터미널을 찍은 후 다른 곳에 가려고 영산포 시내를 구석구석 훑었는데,
사진으로는 찍지 않았지만 적잖은 문화충격을 받았었던 것 같다.
왠만한 소도시라도 2~3층의 낡은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있으면서 어딘가로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장터엔 할머니 할아버지로 가득하여 물건을 파는 모습이 보일 것인데, 영산포에서는 그런 것마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예쁘게 꾸며놓은 터미널 옆의 주택지구는 입주도 되지않아 거의가 밭으로 활용될 뿐이었다.
터미널 주변은 나름 정비가 잘 되어있었다.
하지만 도시 변두리의 휴게소같은 느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차도 보기 힘들어서였을까. 무언가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강 아랫쪽 영산포의 인구는 1만명 정도.
옛 영산포역이 있었던 영강동까지 합쳐도 1만 5천명밖에 되지 않는다.
읍 승격기준이 2만명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시내임에도 면 수준의 인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미 1937년에 읍으로 승격했었으니 그 전에 2만명을 넘었다는 얘기일텐데,
지금의 인구는 일제시대보다도 못하다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온다.
영산포 뱃길이 있었을 당시엔 일본식 관청이 따로 존재했을 정도로 크고 북적였다고 하고,
실제로 대도시 번화가처럼 붐비는 옛 사진도 근처 박물관에서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영산포 뱃길이 끊기고 서해 문물의 발길이 닿지 않아서인지 지금은 너무도 조용하게만 남아있을 뿐이다.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허구의 존재 '종이새'처럼 희미한 흔적만을 보여주는게 안타깝기 그지없다.
옛 영광을 되찾지는 못해도 다시 어느 정도 활기를 찾아서,
높은 건물도 많이 들어서고 영산포터미널도 사람과 버스들 틈에 정신없이 치이는 모습을 그려보기를 소망한다.
첫댓글 썰렁하지만 제게는 정겨운 영산포의 모습이군요..
잘 보고 갑니다.
늘 수고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예 그렇군요.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
저기가 13번 국도에 있지 않나요? 해남 가는 버스가 사진의 장소 앞을 지나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에서 나주까지 승차했던 금호고속 트랜스타 1403호에 승객이 저 혼자 뿐이었던 기록도 제 승차권모음에 남아 있고요.
땅끝마을로 이어지는 13번국도 맞습니다. ^^ 트랜스타에 혼자 탑승하셨던 기록이 남아있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제는 상상도 못할 일이네요 ㅎㅎ
시간대가 시간대인지라 썰렁한것이지 저 동네는 사진에 나온것 처럼 인적이 드문 동네는 아닙니다. 잘못하면 오해할수도 있겠네요.
물론 모든 시간대가 항상 저렇지는 않겠죠.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 갔을 때의 상황과 관점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니 오해는 말아주세요~ ^^
금성시와 영산포시 였던것 같은데요 아무튼 잘 보고 갑니다
영산포시가 존재했던 적은 없고 나주읍+영산포읍을 묶어서 금성시로 승격을 시켰었죠.
1981년에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묶어서 금성시로 승격 시켰습니다. 나주하고 영산포하고는 원래부터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있기에 다른 동네입니다. 도시의 크기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죠. 물론 영산포역은 강 건너 영강동에 있긴 했지만서도.. 영산포에 전남외고도 있고 전남미용고도 있죠. 많이 쇠퇴했지만 아직도 크긴 큽니다. 나주에 호남원예고도 있고 전남과학고도 있고 그렇긴 하군요.
영산포읍도 원래는 영산면이었는데, 흑산도 근처에 영산도라는 섬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영산도에 잦은 왜구의 출몰로 거주민들을 현재의 영산포지역으로 옮긴 것이 그 유래라고 합니다. 영산포에 잡히지도 않는 홍어가 특산물인 이유가 있죠. 물론 옛날 서남지방 해산물들의 집산지가 영산포인 것도 있지만요.
나주와 영산포의 원래 성격과 역할이 달랐기에 아예 다른 동네이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아선 굳이 구분을 짓지 않아도 될까 싶습니다.. 영산포 홍어에 관한 유래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영산포의 지명까지도 흑산도 근방에서 따왔다는건 처음 듣는군요. 좋은 설명 고맙습니다.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를 합쳐서 전라도라고 정해졌다던데...지금은 위성도시가 되어버렸네요...
한적하지만 왠지 끌리는 터미널입니다..
한적한 만큼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는 곳이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