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꼬 이야기
몇해 전, 급하게 일본말 구사 능력을 키워야 했기에, 일본인 선생님을 모시고 집중단기 과외를 했습니다.
그 일본인 선생님은 한국남자와 결혼함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아이들 낳아 키우는 저와 비슷한 연배입니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특정종교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군이 간단한 인사말 외에는 일본어를 전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선생님 이름이 나오꼬인데,
시작은 사제(?) 간이였지만, 인연은 계속 이어져 간혹 만나서 속내 이야기를 하는 친구가 되었지요.
그땐 같은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나오꼬는 수업이 취소되거나 하는 망중한이 생기면 우리집에 차 마시러 왔어요.
우린 인척관계도 아니고, 학연이나 지연이 얽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편들이나 아이들이 아는 사이도 아니기에,
마음 친구가 되자 아무한테나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어요.^^;;
남편 흉, 시댁어른들에 대한 섭섭함, 아이 키우는 고충, 일을 함으로 생긴 얽힌 인간사... 다 말할 수 있는 사이지요.
더불어 나오꼬는 어떤 갈등이 생겼을 때,
단순히 언어 소통이 안 된 건지 문화차이인지 감정의 문제인지를 저랑 대화하면서 판단했는데,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가 그녀의 직접적인 삶에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제3자인 나오꼬에게 제 문제를 말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곤 했어요.
제가 지난 2월 서울로 이사 온 후, 서로 일상에 치여 그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하나 귀한 마음친구입니다.
배경 설명이 길어졌는데, 나오꼬는 일본어를 배우려 하지 않는 남편과 십수년을 살다보니,
의사소통에 있어서 별별 일이 많았다고 해요.
간혹 대화 도중에 경험담을 말해 주는데, 본인들은 곤혹스러워도 저에겐 시트콤입니다.
1.
나오꼬가 결혼 초에 무엇 때문인지 남편과 크게 다투었다고 해요.
그때만 해도 나오꼬도 한국어가 영 서툴렀으니, 부부는 조곤조곤 설명할 수 없어 더 답답하고 더 열 받지요...
손짓 발짓에 어설픈 영어까지 총 동원해서 대충 수습하고,
앞으로 어찌하자고 건설적인(?) 다짐도 해가면서 마무리했는데...
나오꼬가 상황에 동의하면서 혼자 중얼거린 “トライ(try) する”가 급반전을 가져 왔답니다.
갑자기 남편이 불같이 화를 내며 펄펄 뛰는데,
무섭고 당황한 나오꼬는 무릎 꿇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엉엉 울면서 싹싹 빌었답니다.
짐작 가시지요? 나오꼬의 남편은 중얼거린 “トライ”를 “또라이”로 들은 겁니다.
의견 조율한 자기에게 어떻게 또라이라고 욕을 할 수 있냐면서 속된 말로 완전 꼭지가 돈 거였지요. ^^
한참 뒤에, 나오꼬의 "トライ"는 시도해 보겠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되고 오해는 풀렸지만.....
그녀에겐 마냥 웃을 순 없는 일이지만, 저는 웃다 못해 울었습니다. ^.~
2.
다시 몇 년이 흘러, 아이들 낳아 기르면서 한국어가 많이 능숙해져,
어처구니없는 일은 많이 줄었지만, 사투리나 뉘앙스 등등은 여전히 벽과 같답니다.
나오꼬가 남편을 위해 손수 스웨터를 짰다고 해요. 최신판 일본 뜨게책을 참고해서.
재킷 속에 입을 수 있도록 가볍고 따뜻한 실로 투박하지 않게 예쁘게 잘 만들었고,
남편도 아주 흡족해 하며 바로 다음날 입고 출근했답니다.
근데, 퇴근한 그를 보니 그 스웨터를 입고 있지 않더랍니다.
그 스웨터 어딨냐고, 왜 안 입고 있냐고 묻자, “스웨터를 버려 버렸다.”고 하며 미안해 하더랍니다.
“마음에 안 들면 안 든다고 하지 왜 버렸냐?”
“아니야, 정말 마음에 들었어. 그렇게 버리게 될지 몰랐다.”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하지 왜 버렸냐?”
“누가 버리고 싶어서 버리냐, 실수였다.”
“실수로 그걸 버릴 수 있냐?”
“미안하다. 나도 정말 마음에 드는 옷인데, 나도 속상하다.”
“미안한데 그걸 왜 버렸냐?”
“어쩔 수 없었다. 나오꼬의 정성이 깃든 옷이기에 더 미안하다.”
“그런데 왜 내 정성을 버렸냐?”
“정성을 아니까 더 미안하고, 옷을 버려서 미안하다.”...................
한참 맥락 안 맞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주고 받다 보니, 서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남편이 말한 “버렸다”는 “よごれる(오염되다)”로 옷을 더럽혀 벗어 두었다가 잊고 귀가했던 겁니다.
나오꼬가 말한 “버렸다”는 “すてる(버리다)”로 말 그대로 필요없어 내다 버린 것으로 이해한 겁니다. ^^
3.
시작은 우리집에서 비롯됩니다. ^^ 제 남편은 바닷가 가까운 곳에서 자라서 수산물을 참 좋아해요.
전... 있으면 먹지만 없다고 전혀 아쉬울 것 없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저 먹자고 사는 수산물은 마른 멸치와 김이 전부입니다.
그래도 아내니까, 남편의 식성을 존중해서 수산물을 자주(?) 해 줍니다.
제가 수산물과 친하지 않으니까, 마트 생선코너에서 물어보거나, 요리책, 주변 사람의 조언을 많이 참고합니다.
제 기억 속에 친정아버지는 무를 깔고 자박하게 조린 병어조림을 참 좋아하셨어요.
왜 그랬는지, 아버지가 좋아했으니까, 남편도 좋아할 것이라 넘겨 집고 간혹 병어조림을 해 왔지요.
작년 겨울 어느 날, 병어도 조리고 나물도 무치고 해서 저녁을 먹는데,
문득 남편을 보니까 병어조림을 그닥 열심히 먹는 걸 같지 않아요.
그래서 무심히 물어봤어요. “왜 병어가 싱싱하지 않아요? 간이 안 맞아요?”
남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만, “주경, 나 솔직히 이거... 병어라 했나? 그래 이 병어 별로야.
나는 회는 쫄깃한 것이 좋고 구이나 조림은 단단한 생선을 좋아해.”
아, 결혼 10년이 넘어 남편이 병어류의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는 구나...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호가 있는 것이라지만 뭔가 서운했어요.
“사실 병어처럼 부드러운 생선을 싫어하지만, 당신이 해준 병어조림은 맛있어.”
이런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 다음날인가 나오꼬를 만났는데, 이 이야기를 해 주며, 섭섭함을 토로하고
덧붙여 “상처 받아서, 다시는 병어 안 살 거에요.” 했어요.
그러자, 나오꼬가 정색을 하면서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어요.
우선 물 좋은 병어를 구입해서 어슷하게 칼집 넣고,
데리야끼(진간장과 설탕이 베이스가 되는) 소스를 여러 번 발라가면서 그릴에 정성껏 구우랍니다.
그러면 살도 단단해 지고, 얼마나 맛난지 모른다고...
남편에게 병어가 이렇게 맛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다음에, 다시는 해 주지 말랍니다. -.-
문화차이인지 성격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오꼬는 저랑 확연히 다르더군요.
그.러.나. 저는 그 이후, 한번도 병어를 사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 작곡가 히사이시 조가 직접 연주하는, ‘‘summer(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의 ost)"로 뭔가 살랑살랑 즐거워지는 음악입니다
딴소리+사족)
기쿠지로의 여름(Summer Of Kikujiro)
50대의 무개념 전직 야쿠자 아저씨(기쿠지로)와
어린이라고 하기엔 너무 철이 들어버린 소년(마사오)의 여행 이야기입니다.
무료한 어느 여름방학, 먼 곳에서 돈 벌고 있다는 엄마를 찾아나서는 마사오에게
‘치마폭이 12폭인’(우리 속담이래요. 오지랖이 태평양이라는 소리지요.) 동네아줌마가
옆에 있어봤자 별 도움 안되는 남편인 기쿠지로를 보호자(?)로 딸려 보냅니다.
사실, 누가 누구를 보호해야 하는지...
B급 영화적인 요소가 다분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제목이 마사오의 여름이 아니라, 기쿠지로의 여름인지 알게 됩니다.
"화엄경" 입법계품이 떠올려지는 로드무비입니다.
물론 불교를 전혀 다루지 않고 있지만, 유치해 하며 낄낄거리면서 다 보고 나면
빙그레 웃으며 가슴이 따뜻해 지며 어떤 울림이 있습니다.
(저는, 딸이랑 둘이 봤어요.)
덧붙여, 감독과 기쿠지로의 역할을 맡은 기타노 다케시는 유명한 개그맨(?)이자 배우, 감독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일본 연예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지요.
배우나 개그맨을 할때는 비트 다케시로, 영화감독으로 일할 때는 기타노 다케시라 합니다.
혹 시간이 있다면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를 읽어 보세요. 북스코프(2009)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첫댓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나오꼬상 남편분 일본어 좀 배우시면 좋겠는데요. 그 이상 더 큰 아내사랑이 있을까요? 나오꼬가 한국어 배우는만큼만 배우면 될 터인데 말입니다. 하긴 그렇게 한 발 떼기가 쉽지 않겠지만요. 우리는 웃지만,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나오꼬상 정말 고생많았군요.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재미있는 글입니다. 나무아미타불
아마 남편(한국인)은 일본어를....부인(일본인)은 한국어를 배우려고 들면...어쩌면 더 혼란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어설픈 일본어와 어설픈 한국어가 더 충돌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부부가 하나의 언어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도 좋을 듯합니다. 또라이 대목이 압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선생님하고 제가 코드가 비슷하군요. 저는 또라이 류의 이야기 듣는 거 너무 좋아해요.^^;;;
부부 사정은 제가 모르지만, 나오꼬 남편의 외모가(직접 본적은 없고 핸폰 사진으로만..)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훌륭해요!! 핸폰의 사진을 보자 모든 것이 다 용서되었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이렇게 재미있는 글을......사이버 테러사건으로 인해 뒤숭숭한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주시는 군요. 그나저나 저같으면 사이버수사대에 사건 의뢰했을텐데 받아들이는 감각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아직은 제가 바탕이 덜 자란 걸까요..
역시나...는 아니구요.^^ 바탕이 덜 자란 것이 아니라, 글쎄요....관점이 다른 거지요. ^ㅡㅡ^
아내의 모국어를 배우는 것은 사랑입니다. 아내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의사소통의 효율성 이상의 문제라고 봅니다. 남편분이 좀더 배려하는 마음으로 다가갔다면 나오코 씨는 훨씬 더 편하게 살아왔을 것같네요. 낯선 나라에 와서 고생 많았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네, 언어문제에 얽힌 배려 부분 때문에 힘들게 살아왔고 여전히 다소 힘들어해요.
우리는 우리말 일본어 뒤죽박죽 섞어서 대화를 하는데, 나오꼬가 일본어를 할 때는 굉장히 사랑스러워요.
구사하는 어휘도 이쁜말을 골라 쓰고, 억양이나 표정도 러블리 그 자체입니다.
근데, 우리말 할때는 딱딱하고 툭툭 던지는 듯한 말투입니다.(전 그녀의 남편의 말투가 이렇지 않을까 추측만 합니다.) 표정도 어색하고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말투 같다고 할까요...
그녀의 남편이 일어를 조금만 한다면(저도 썩 잘하는 일어가 아니므로..) 부인의 사랑스러운 말투를 늘 들을텐데 싶어서...제가 다 아쉽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