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wing Apple with the Macintosh: The Sculley Years
Tom Hormby
2006.02.22
존 스컬리의 어린 시절은 스티브 잡스의 완전 반대였다. 그의 아버지는 완고했고, 아들에게 상당히 높은 기준을 요구하였다. 그래서북동부의 공화당원들이 보내는 폐쇄적인 사립학교인 성 막스(St. Marks) 학교에 입학하였다. 스컬리는 그곳에서 학업으로나교우관계로나 성공을 거두기는 하였으며, 축구팀 수장을 하기도 하는 동시에 성적도 대단히 좋았다.
하지만 교우관계가 쉬운 일은 아니었고, 스컬리는 사교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을 훈련시켰다. 자서전, Odyssey에서 보면, 그는 말더듬는 것을 극복하고 상당한 연설가가 되려 하였고, 실제로 그리 되었다. 연설 중의 적절한 몸짓을 배우기위해, 그는 영화를 전전하며 배우들의 포즈를 공부하고는 모두 기억시켰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일생에 있어서 스컬리의연설기술은 완벽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군중을 두려워했고, 위축됐었다. 그는 종종 애플 내의카페테리아에서 동료가 올때까지 혼자 땅콩 버터 샌드위치를 먹곤 했었다.
성 막스 이후 스컬리는 와튼에서 학업하였고, 결국에는 펩시콜라 사장인 돈 켄달(Don Kendall)의 딸과 결혼하였다. 둘은곧 이혼했지만, 스컬리는 전 장인어른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여, 펩시콜라 내의 브라질 스낵부를 맡게 되었으며, 브라질 스낵부는펩시 내에서 곧 제일 이윤을 높이 끌어올리는 부서가 되었다.
Marketing
스컬리는 매우 엄격한 펩시의 분위기에 적응하여, 빠르게 승진하였다. 그는 음료수부의 제일 젊은 책임자가 되었고, 음료수부에서그의 진가를 발휘하였다. 그는 펩시의 마케팅전략 30년을 이끌게 될 대규모 마케팅 캠페인을 두 번이나 지휘하였다. 텍사스의 펩시제조협회의 주관으로 코카콜라로부터 시장을 빼앗기 위한 게릴라 광고 캠페인이 그중 하나이다. 눈을 가리고 어느 것이 더 맛있냐는켐페인이었고, 이는 "The Pepsi Challenge"라 불렸다. 소비자들은 거의 언제나 펩시를 더 선호하였다. 따라서펩시는 코카콜라로부터 시장을 빼앗는 데에 성공하고, 스컬리는 이 캠페인을 전국적으로(심지어는 전세계적으로) 확장시켰으며, 반응도좋았다.
스컬리가 1980년대에 추진한 또 하나의 캠페인은 "펩시 세대(the Pepsi Generation)"이다. 이 슬로건을 붙인첫 광고는 해변에서 젊은이들이 파티를 벌이는 광경이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Come alive,you're in the Pepsi Generation!"
이 초기 광고로부터 펩시는 점점 더 생활 광고를 확장시켰고, 결국 코카콜라마저 비슷한 광고를 내게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코카콜라제조법까지 수정시켰다.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많지만 펩시는 미국에서 제일 커다란 음료수 제조업체로 성장하였다. 코카콜라보다0.04% 앞선 점유율이었다. 아뭏든 이러한 시장점유율의 상승덕분에 스컬리는 사장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그는조바심을 냈다.
Courted by Apple
스컬리는 사무실에서 애플 II를 사용하려 노력하였지만, 애플 II는 그에게 있어서 너무 복잡했다. 그래서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그래도 첨단 기술에 흥미는 있었다. 어린 시절에, 그는 소니가 트리니트론 디스플레이를 특허한지 불과 몇 주일 후에 컬러 화면을만든 적이 있었다. 1982년, 스컬리는 윙구쓰(Ed Winguth)라는 헤드헌터의 연락을 받았다. 윙구쓰는 스컬리를 애플컴퓨터의 다음 CEO로 추대하려 했었다. 그 외에도 매주마다 스컬리와 접촉하려는 헤드헌터들이 많았지만, 스컬리는 언제나거절하였다.
당시 애플 CEO 후보는 IBM PC를 만들어낸, 체스(Chess) 프로젝트를 이끈 돈 에스트리지(Don Estridge)였다.IBM보다 400% 높은 급여를 제안받았지만, 에스트리지는 거절하였다. IBM에 충성한다는 이유였다. 윙구쓰는 또한 전에NSA를 이끌었던 보비 레이 인만(Bobby Ray Inman) 제독도 접촉하였지만, 마케팅에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거절당하였다.
당시 애플은 창립자로서 마이크 마큘라(Mike Makkula)가 CEO도 맡고 있었다. 마큘라는 애플이 소비자 업체이며, 따라서기술보다는 마케팅에 역량을 갖춘 CEO가 더 필요하다고 결정내렸다. 헤더헌터 회사인 Heidrick and Struggles은새로운 CEO 후보목록을 제시하였고, 그 최상단에는 스컬리가 올라 있었다. AT&T의 사장과 IBM의 최고 마케팅 중역도거절한 뒤, 헤드헌터 회사의 대표인 개리 로슈(Gary Roche)는 스컬리와 접촉했고, 스컬리가 마우이에서의 영업 회의에서돌아온 뒤, 쿠퍼티노의 애플에서 스컬리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스컬리는 자신이 애플에 흥미가 없다고 말하려 했으며, 실제로도아직은 별 흥미가 없었다.
쿠퍼티노에 도착한 스컬리는 기술계의 거장, 스티브 잡스가 자신을 환영하는 데에 놀랐다. 급여나 임무 같은 지루한 이야기 대신,잡스는 당시 애플이 만들고 있었던 매킨토시의 데모를 스컬리에게 보여주었다. 매킨토시 엔지니어들은 펩시병이 화면에서 뛰노는 장면을보여주었고, 스컬리는 이 데모 프로그램과 인터페이스에 대단히 흥미를 나타냈다. 결국 스컬리는 잡스와 함께 뉴욕에서 만나서 같이뉴욕을 돌아보기로 하였다. 잡스는 당시 맨하탄의 한 콘도를 구입하려 하고 있었다.
1983년 1월 초, 잡스와 스컬리가 만났다. 당시 마큘라는 은퇴하려 했었기에, 잡스는 스컬리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공세를펼친다. 둘은 뉴욕을 관광했다. 메트로폴리탄 아트뮤지움과 센트럴파크, 링컨센터를 거닐며 그들은 컴퓨터 업계의 미래에 대해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침내 잡스는 맨하탄이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 콘도에 스컬리를 초대하였고, 그 유명한 제안을 하게 된다."Do you want to spend the rest of your life selling sugared water, ordo you want a chance to change the world?"
잡스에게 홀린 스컬리는 제안을 받아들였고, 켄달로부터 애플로 가겠다는 허락도 받아놓았다. 1월 19일 애플 주주회의가 열리기 며칠 전, 잡스는 마큘라를 포함한 애플 직원들과 함께 뉴욕에서 돌아왔다.
리사의 기자시사회후, 스컬리는 Four Seasons' Pool Room에서 펩시에서의 경험담과 애플 전략에 대해 저녁을 들며 논의를 가졌다.이날 밤은 X 세대가 어떻게 해서 "애플 세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스컬리의 연설로 클라이맥스에 올랐다.
마큘라는 잡스의 선택을 승인하였고, 일찌기 들어본 적이 없었던 230만 달러의 연봉도 승인한다. (여기에는 보너스와 주택이포함되어 있었다.) 애플 이사진의 승인도 나왔고, 드디어는 4월 8일, Bandley 8 빌딩에서 열린 애플 중역회의에서마큘라가 스컬리를 소개하였다. 그날, 펩시와 애플은 인사이동에 대한 언론보도문을 같이 발표하였다.
1983-1984
스컬리의 첫 번째 CEO 회의는 1983년 4월 13일날 있었다. 스컬리가 연설을 하기도 전에 흥미를 잃은 애플 베테랑들이많았다. 그의 옷때문이었다. 애플 직원들 대부분은 캐쥬얼하게 입은 반면, 스컬리는 양복과 넥타이를 갖춰입고 있었다. 스컬리는애플이 IBM과 경쟁하기 위해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연설을 했지만 그리 카리스마가 있지는 않았다. 그는 애플이모험자본가 정신을 유지하면서 새 시장을 확장시켜야 한다 말했다. 또한 수입을 완전히 애플 II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애플을다변화시키고 싶어 하였다.
직원들 대부분은 스컬리가 추구하는 목표에 기뻐하였지만, 그의 기술에 대한 식견에는 별 인상을 받지 못하였다. 4월 13일회의에서 한 엔지니어는 스컬리에게 애플이 커넥티비티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겠냐 질문하였다. 스컬리는 비서에게 몸을 기울여커넥티비티가 무엇이냐 물어보았다. 실로 스컬리는 엔지니어들이 하는 일을 이해하는 데에 힘든 시간을 보냈고, 일단은 제품이무엇인지, 심지어는 엔지니어링 참고 자료까지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애플 직원들과 통교할 수 있었다.
초기 시절, 스컬리는 수석 중역들과 잡스를 대부분 따랐다. 1983년 당시 애플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당시 업계 분석가들은애플 II 매출량이 줄어들리라 예언했지만, 심지어 그 해에는 애플 III조차도 10만 대가 팔려나갔다. 1982년도의 세 배에달하는 수치였다. 스컬리의 카리스마 덕분인지, 그는 인터뷰를 자주 하였고, 잡스와 함께 사실상의 컴퓨터 업계 대표자가 되었다.잡스와의 관계도 좋았다. 둘은 긴 산책을 하였고, 가끔은 쿠퍼티노 교외의 산으로 같이 하이킹을 하러 가기도 하였다. 스컬리는잡스를 잘 가르쳐서 5년 뒤에는 그에게 더 강력해진 애플을 넘길 심산이었다. 매킨토시가 처음 선보일 시절의 한 저녁 파티에서스컬리는 이렇게 말했다. "애플에는 리더가 한 명 있죠. 스티브와 저입니다. "
스컬리와 잡스의 관계는 매킨토시의 발표로 절정에 달했다. 사실 스컬리는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매킨토시는잡스의 프로젝트였고, 애플 II로 버는 수입을 잡아 먹는데도 불구하고 잡스는 매킨토시를 강력하게 방어하였다. 스컬리는 그가일하기로 되어 있던 매킨토시의 일부인 광고 캠페인마저도 통제력을 갖지 못하였다. 그난 1984 광고를 좋아하지 않았다.(이사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는 뉴스위크에 들어간 스무 페이지짜리 광고를 빗대어, 애플 잡지에 뉴스위크가 부록으로들어갔다며 농담을 하였다. 그래도 1984와 뉴스위크 광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성공을 거두었다.
존 스컬리가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기여한 점이 두 가지 있다. IDG에서 나오는 매킨토시-테마 잡지인 맥월드에 대한 비밀스러운지원, 그리고 맥 가격을 2495 달러로 책정한 점이었다. 이는 55%라는 이윤마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고, 이를 위해 1500달러를 더 높인 가격이었다.
The Macintosh Launch - and Crash
그런데 잡스의 행운이 날라가기 시작하였다. 매킨토시의 발족은 정말 훌륭했다. 초기 판매량도 정말 높았다. 잡스는 1985년까지애플이 200만 대의 맥을 판매하리라 예언하였지만, 실제로는 25만 대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이는 마케팅의 실패때문이었다.매킨토시는 원래 기업 사용자 대상이었지만, 하드드라이브나 고품질의 프린터가 없이는 기업 시장에 별 쓸모가 없었다. 소비자들은가격 때문에 매킨토시를 멀리 하였으니, 결국 매킨토시를 위한 시장은 없었다.
더구나, 애플 II 판매량이 급감하기 시작하였다. PC 호환기 시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던 반면, 애플 II 성장세는떨어졌고, 1985년도에 20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더 안 좋은 일도 있었다. 매킨토시의 경쟁자들이었다. 최초로 성공적인데스크톱 운영체제 CP/M을 선보였던 Digital Research는 GEM이라 불리는 유사-매킨토시 제품을 작업하고 있었다.또한 VisiCalc의 제작사, VisiCorp는 완전한 사무용 프로그램을 번들시킨 그래픽 인터페이스, VisiOn을발표하였다.
그러나 최대의 경쟁자는 다름아닌 IBM과 마이크로소프트의 OS/2, 그리고 윈도우즈 소식이었다. 애플 이사진들은 또다른 실패작을막고, 경쟁사로부터 애플을 보호하기 위해 스컬리보고 잡스를 "격리"하라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스는 맥팀을 주도하면서불운의 매킨토시 오피스와 매킨토시의 후계자, 빅맥(BigMac)을 준비하고 있었다. 매킨토시 오피스의 첫 번째 발표작은하이엔드의 네트워크가 가능한 레이저 프린터인 레이저라이터(LaserWriter)였다. 어도비 시스템즈의 소프트웨어에 기반한레이저라이터는 고품질의 인쇄물을 만들 수 있었고, 애플토크 네트워크를 통해 여러대가 같이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발표물은 나오지 않았다. 매킨토시 오피스의 제일 중요한 요소로서 인트라넷 서버인 파일서버를 들 수 있겠지만파일서버는 전혀 나오지 못하였다. 1989년, 애플은 애플셰어(AppleShare)를 내놓지만, 이 제품은 결코 히트작이 되지못하였다. 또한 빅맥은 완전히 중단됐다. 기존 매킨토시 소프트웨어는 유닉스로 대체될 예정이었고, AT&T로부터 유닉스라이센스까지 구매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유닉스 상의 매킨토시 환경 개발은 중단됐다. 가치 없는 유닉스 라이센스에 수 백만달러를 지출해놓고, 이 프로젝트는 취소됐다.
Ousting Jobs
스스로 잡스의 사부로 착각을 했던 스컬리는 이제 잡스가 창립한 회사에서 잡스를 축출할 임무를 떠안게 되었다. 잡스는 여전히 사장직함을 달고 있었으며, 여전히 애플 주식 15%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 외에 할당된 직위는 없었다. 잡스의 사무실은 애플캠퍼스에서 거의 쓸쓸한 곳으로 이전됐고, 잡스는 그곳을 시베리아라 불렀다. 잡스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자기가 만든 회사였다.잡스는 중역들과 공모하여 스컬리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 하였다. 그는 지원을 받기 위해 최고 중역들과도 공모를 시작하였다. 쟝 루이 가세(Jean Louis Gassé )는원래 잡스와 잘 어울리지 못했기에, 가세는 잡스가 공모를 건 마지막 중역이었고, 그즉시 가세는 스컬리가 중국을 방문하려 할 때잡스의 음모에 대해 말해주었다. 스컬리는 중국 방문을 취소하고, 애플로 되돌아와 1985년 4월 10일 이사진 회의를소집하였다.
스컬리는 잡스의 어리석음과 음모에 대해 격노하였다. 등뒤로 칼을 꼽는 행위는 펩시에서는 전혀 없었다. 모두들 치열하게 경쟁하기는했지만, 그래도 야망에 대해서는 솔직했었던 곳이 펩시였다. 게다가 잡스는 스컬리가 애플에 들어간지 5년 뒤인 1987년 물러나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컬리는 어린 시절 버릇처럼, 말을 더듬으면서까지 화를 내면서 잡스가 부정직하다고 열변을 토했다.
잡스는 이사진들에게 누가 애플을 맡겨나갈지 정하게 하자며 스컬리에게 도전하였고, 이사진은 익명 투표를 하여 스컬리가 남도록하였다. 이로써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나게 된다. 몇 주일 뒤, 잡스는 (아마 분풀였을 것이다) 자신의 사임 편지를 언론에공개하였다.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애플 주식은 치솟았고, 잡스는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잡스는 애플고위직 직원들 여러명과 같이 나가서 넥스트를창립하였다. 넥스트는 고급교육용 컴퓨터를 만들 회사였다. 애플과 넥스트는 매킨토시 소프트웨어 라이센싱과 함께, 넥스트 지분10%를 애플이 매입함으로써 관계가 좋은 듯 해 보였다. 하지만 그 간극이 너무나 컸는지, 두 회사는 곧 서로를 고소하였다.(합의를 하긴 하였지만.)
Reorganization
스컬리는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훨씬 더 필요해진 구조조정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애플은 제품별로 부서가 배치되어있었다. 각 부서는 스스로 마케팅팀을 짜고, 독립적으로 디자인을 하였다. 잡스가 떠나기 이전, 매킨토시와 리사는 하나의 단일부서, Apple SuperMicros로 합쳐져 있었다. 애플 내부에 있는 다른 두 곳의 큰 부서로는 애플 II부와 애플III부가 있었다. 이 부서는 서로간에 거의 전쟁 분위기였다. 엔지니어들 서로 얘기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고, 그때문에 낭비적인프로젝트가 굉장히 많았다. 더 안 좋은 점은, 마케터들도 서로 얘기조차 안했다는 데에 있다. 이때문에 똑같은 소비자들(애플III와 애플 IIe, 그리고 리사)을 두고 제각기 프로젝트가 실시되었다. 살제로는 서로들 경쟁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를 수정하기 위해, 스컬리는 기능에 기반하는 좀더 전통적인 구조조정을 시켰다. 모든 제품 개발을 한 부서에서 하도록 하고,엔지니어들은 마케팅부의 마케터들과 협력하도록 하였다. 제품의 제조와 판매는 두 개 이상의 부서에서 실시하였다. 각 부의 수장은스컬리와 직접 연결되었고, 이 조직화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돌아오는 1997년까지 애플을 먹여살렸다.
당시 중역진들 중에서 제일 중요한 인물은 새로운 COO였던 델 요캄(Del Yocam)이었다. 요캄은 1979년에 애플에입사하였고, 정말 유명했다. 초기 시절 요캄은 부족이나 잉여가 나지 않도록, 제조 부문에 질서를 유지시켰다. 그는 가는곳마다녹색 공책을 들고다니면서 약속을 받아적는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공급과 수요가 만나도록 미시경영을 하는 데에 있어서까다로웠다. 이론상 누구라도 그에게 보고를 할 수 있었지만, 장 루이 가세, 그리고 후의 마이클 스핀들러와는 맞지 않았다.
The New Team
쟝 루이 가세는 애플 유럽의 산하회사인 애플프랑스를 대성공시킨 열정적인 프랑스인이었다. 1983년 쿠퍼티노로 들어온 가세는 매킨토시 마케팅팀을 맡았었다. 커푸티노에서 그는 매킨토시의 유럽 발족식을 도왔다. 소설 1984를잘 모르는 유럽인들이 많기 때문에, 그는 슬로건을 바꾸었다. "Il était temps qu'un capitalistefasse une révolution." 이 캠페인 역시 대성공을 거두었고, 수 년간 지속되었다. 1984 캠페인보다도 훨씬길게 말이다.
스컬리의 대규모 구조조정이 있은 후, 재품개발은 가세가 이끌었으며, 가세는 직원들에게 충성심을 요구하였다. 스컬리는 가세가애플의 새로운 심장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한 가세도 열정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자임하였다. 애플 로고를 빗대어 가세는가끔씩 "피를 여섯 색깔로 섞어라"고 말했었다. 엔지니어들도 가세를 모두 존경했었다. 가세가 엔지니어들에게 자부심과 떳떳함을심어주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의 일정보다 앞선 완수로 받는 5000 달러 보너스는 흔한 일이었다. 어떨 때는 프로젝트 팀 전체가멕시코에서 같이 휴가를 보내거나, 한 번은 유럽에서 휴가를 같이 보낸 적도 있었다. 엔지니어들은 가세의 맡겨두는 관리 스타일도좋아했다. 가세는 물리학 전공이었지만, 그는 엔지니어가 아니었고, 프로젝트에도 보통 참여하지 않았다. 엔지니어들이 시장이 없는제품을 만들어도 내버려 두는 스타일이었다.
영업부 중역으로는 "코치"인 빌 캠벨(Bill Campbell)과 마이클 스핀들러가 있었다. 캠벨은 원래 스탠포드 대학교 대학미식축구팀 코치였다. 그 후 애플 미국 판매부를 맡았었고, 매킨토시와 애플 II 라인의 판매를 비약적으로 향상시켰고, 직원들의평가도 좋았다. 캠벨은 적극 개입형 관리자였다. 때때로 그는 부하직원들과 전국을 누볐다.
스핀들러는 코치와 매우 달랐다. 스핀들러는 애플유럽을 통해 승진하였고, 유럽과 아프리카, 중동을 맡는 애플유럽 지사장으로올라갔었다. 개입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던 스핀들러는 자잘한 경영은 부하들에게 맡겨버리고 전략에만 몰두하는 형이었다. 스컬리는 그의전략, "다지역화"를 마음에 들어하였다. 스핀들러는 제품과 홍보를 시장에 맞게 수정하였다. 마치 그 지역 회사가 애플 제품을파는 것처럼 말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넘치는 스핀들러는 아이디어를 설명할 때에는 흥분하여 터질 지경이었다. 숨을거칠게 몰아쉬면서 빠르게 말하는(가끔은 알아듣기 힘든 독일 억양이 섞여 있었다) 스핀들러는 화이트보드도 알아볼 수 없게 막그려대면서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스타일이다. 일하는 시간도 많았다. 그때문에 별명이 "디젤"이었다. 스핀들러는 스트레스때문에문제를 겪기도 했으며, 한 번 이상 스트레스 때문에 책상 아래로 숨기도 하였다.
잡스가 애플을 떠난지 수 개월 후, 스컬리는 쿠퍼티노 안 애플 캠퍼스의 모든 직원들에게 감동어린 연설을 계속 하였고, 그 결과자신의 명성을 다졌다. 스핀들러는 애플 직원들을 격앙시켰고, 심지어는 애플 캠퍼스 안에서 스핀들러가 들어간 옷도 유행시켰다.직원들은 스핀들러의 연설에서 따온 말을 써넣은 티셔츠를 만들어서 입고 다녔다. 그 티셔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ONEAPPLE"
Apollo
빅맥의 죽음을 벌충하기 위해, 애플은 고난에 허덕이고 있던 웍스테이션 제조업체인 아폴로(Apollo)와 접촉하였다. 당시아폴로는 강력한 선 마이크로시스템즈에게 파상공세를 받고 있었다. 아폴로는 초창기에 있어서 성공을 거둔 웍스테이션 제조업체였지만1980년대에 썬의 저가형 대량 생산 웍스테이션때문에 시장을 잃고 말았다. 이제 아폴로는 생존을 위해 노력중에 있었고,매킨토시도 썬 제품과의 차별화가 필요했다. 아폴로는 자사의 운영체제 Domain/OS(유닉스 기반이었다)에 매킨토시 인터페이스라이센스를 받고 싶어했다. 그러면 애플은 브랜드를 바꾼 아폴로 웍스테이션을 하이엔드 디자이너와 대기업에 팔 수 있을 터였다.
대다수의 작업은 아폴로가 하였고, 결과도 꽤 성공적이었다. 수 개월 후, 매킨토시 소프트웨어가 Domain/OS 상에서 잘돌아갔다. 심지어 매킨토시보다 훨씬 더 빨랐다. 물론 기존의 Domain/OS용 애플리케이션도 잘 돌아갔다. 아폴로는 제한적인자원을 갖고 매킨토시를 포팅시켰지만, 그럼에도 썬에게 빠르게 시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에 놀란 애플은 갑작스레 동의서를 취소시켜버렸다. (가세 때문이었다.) 아폴로는 결국 부도로 몰리게 되고, 1989년 HP가 아폴로를 인수하게 된다. 가세는 이에 매킨토시 II의 제작을 개척하게 된다.
New Focus, New Markets
(적어도 지금은) 강력한, 그리고 협조적인 중역들과 함께 스컬리는 그해 손실을 기록한 애플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한다. 손실은애플 역사상 최초였다. 앨더스 페이지메이커가 1985년에 나오자, 애플의 전통적인 시장인 SOHO(소형 사무실과 가정) 사용자외에도 사무용과 데스크톱 출판업자들이 쓰기에도 좋은 제품이 나오기를 희망하였다. 스컬리는 새로운 시장으로 맥을 홍보하는 것이상을 해냈다. 개발자들을 적극적으로 고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잡스는 써드파티 개발자들에게 매킨토시를 홍보하기 위한에반젤리스트를 육성시킨 바 있다. 에반젤리스트 프로그램의 수장인 가이 카와사키(Guy Kawasaki)는 매킨토시로 새로운프로그램을 들여오는 데에 수십 만 달러를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런 전략은 색달랐다. 베타 프로그램을 사서 소매점의 맥데모로 돌린다든지, 카와사키가 직접 소프트웨어를 갖고 오거나 개발자들에게 최신 맥을 갖다 주기도 하였다.
그래도 제일 중요한 매킨토시 개발사는 마이크로소프트였다. 아직은 백만장자에 불과했던 빌 게이츠는 잡스와 함께 긴밀히 협력하여마이크로소프트 워드와 멀티플랜을 매킨토시용으로 개발하였다. 스컬리도 게이츠가 계속 맥용 제품을 내주기를 희망하였다. 따라서스컬리는 게이츠에게 따로 협정 체결을 요구하였다. 2년간 맥 외의 다른 플랫폼용으로 워드나 멀티플랜을 내놓지 않겠다는내용이었다. 하지만 대신 매킨토시에 있는 것과 똑같은 디스플레이를 마이크로소프트가 사용할 수 있었고, 더군다나 향후 윈도우즈버전에 있어서 매킨토시와 유사한 인터페이스 요소를 사용할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었다.
스컬리와 다른 중역들은 이 조항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경쟁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되, 마이크로소프트가 법적인기반 없이 원하는 어떠한 플랫폼에서도 맥을 베낄 수 있는 권리를 줬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다. 그들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매우 괜찮은 워드프로세서와 스프레드쉬트를 협력하기로 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에반젤리스트들의 노력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프레임메이커와 매쓰메티카, 쿼크 익스프레스와 같은 제품도 자신의 시장을만들어냈다. 대단히 이윤마진이 높은 제품을 구입할 의사가 있는 하이엔드 구매자들을 유지하기 위해, 가세는 매우 비싸고 강력한맥을 만들어낸다. DOS를 피하기 위해 어떤 돈이라도 낼 사용자들을 겨냥한 제품이었다. 그 결과 1989년에 아홉 가지 모델이나왔으며, 3000 달러 이하의 맥은 전혀 없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매킨토시 IIfx가 나온 (가세가 마음껏 자기 전략을추구하던) 1990년에 극에 달했다.매킨토시 IIfx는 이제까지의 모든 맥보다 비쌌으며, 키보드와 마우스, 모니터와 같이 구매할경우 9870 달러였다.
이러한 전략이 기존의 기반이 성장을 거듭할 때는 효과가 있었다. 1984년 애플은 30만 대 미만의 맥을 팔았지만, 1989년애플은 300만 대 이상의 맥을 팔았다. 그러는 동안 스컬리는 공격적으로 언론에 맥을 홍보하였다. 그는 종종 요캄과 가세가애플의 진짜 얼굴이며, 자신은 홍보마담격이라 말했었다. 애플은 이제 전세계 최대 규모의 PC 제조업체가 되었다. (IBM은여러가지 실수를 저질렀었다.) 따라서 스컬리는 컴퓨터 업계의 대표자로 추대됐다. 그는 Bandley 가에 있는 애플 소유의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한 달에 두 번씩 인터뷰를 가졌다.
Invisible Quagmire
비록 스컬리가 떠난 뒤 수 년이 흐르고 나서야 애플의 비효율성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경영 결정 대부분을 부하들에게 일임하는스컬리의 스타일은 비효율적이었다. 이러한 실수 중 첫 번째는 소프트웨어부를 분사시켜서 기업공개까지 시킨 정책이었다. 스컬리는매킨토시 소프트웨어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업체가 하나 있기를 바랬다. 이를 위해서는 개발자들과의 관계도 희생시킬 마음을 먹었다.애플 미국의 수장, 빌 캠벨이 이끄는 클라리스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그러나 클라리스의 기업공개 계획은 실패하였다. 상당히좋은 평가를 받은 제품들이 있긴 했지만 클라리스는 평범한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고 말았다.
Cigna에서 IT부장을 역임했던 앨런 로렌(Allan Loren)을 고용한 스컬리는 그를 캠벨 후임으로 지명했다. 스컬리가그렇게도 원하던 기업들에 대한 대량판매를 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로렌은 매력도 없었고 영업도 잘 하지 못했다. 한 영업직사원이 제일 중요한 매킨토시 구매자인 모토로라로 그를 데려간 적이 있었다. 로렌은 모토로라로 가서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을 이기기위해서 모토로라가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다. 모토로라는 로렌에 대해 너무 화가난 나머지, 그를 데려온 사원에게한 번만 더 모토로라로 로렌이 왔다가는, 모토로라 내에 있는 모든 매킨토시를 처분해버리겠노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아마도 더안좋았을 텐데, 로렌은 부하직원들에게 무례했다. 그는 프리젠테이션 도중에 졸았고, 깨어 있을 때는 프리젠테이션을 찢곤 했다.프리젠테이션 하는 직원들을 몇 번이고 울린 로렌은 애플 내 최대 부서인 영업부를 돌릴 역량도 없었다.
간부들은 모두 혼란에 빠졌다. 모두들 요캄이 나서리라 두려워했다. 이들은 요캄이 스컬리 다음 CEO가 되리라 예상하였다.1989년, 파리에서 회계년도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인력부 부사장인 케빈 설리반(Kevin Sullivan,)은 스컬리에게 자기자신과 가세, 스핀들러, 로렌은 요캄과는 일하지 않겠노라 말할 정도였다.
Windows Competition
애플도 문제에 휩싸였다. 1988년 초,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즈 2.03을 내놓았던 것이다. 윈도우즈 1과는 달리, 윈도우즈2.03은 매킨토시처럼 창을 겹쳐서 보여줄 줄도 알았으며, 훨씬 빨랐다. 더 중요한 점은, 이제 윈도우즈 버전의 마이크로소프트워드와 엑셀(멀티플랜의 후계자였다)이 나왔다는 것이었다.외부 개발자들은 윈도우즈 1을 질색하고 런타임 환경으로서 GEM을 더좋아했다. 하지만 이제 개발자들은 그래픽 프로그램을 만드는 쉬운 방법으로서 윈도우즈에 묶여 있었다. 선두주자는 앨더스였다.앨더스는 윈도우즈 버전의 페이지메이커를 선보였다.
스컬리도 윈도우즈 2.03을 돌려 보고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윈도우즈가 매킨토시만큼 좋은 제품은 아닐지 몰라도, 많은이들에게는 적합하리라 생각했다. 가세는 윈도우즈 2.03에 분노했다. 분명히 매킨토시에서 빌려온 것이 분명한 여러가지 인터페이스요소를 윈도우즈가 사용했기 때문이다. 메뉴바는 거의 똑같았고, 레이블도 동일했다. 가세는 애플이 보복해야한다 주장했다.
1988년 3월 17일, 애플은 드디어 마이크로소프트와 HP를 고소한다. 애플 법무팀은 189 곳의 비쥬얼 디스플레이가 리사,매킨토시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한다 주장하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애플이 1985년 동의서에서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소프트웨어를라이센스했었다. 1989년 7월 25일, 판사는 이전 라이센스에 의해 윈도우즈가 사용하는 열 군데의 디스플레이가 합법적이라판결내렸다. 애플은 항소를 두 번(한 번은 9회 순환 항소법원과 대법원) 더 냈으나 모두 기각당했다.
설리반과 가세, 스핀들러, 로렌은 모두 이 사실을 요캄에게 보고하였고, 이들은 모두 분노하였다. 로렌은 전형적인 A형 인간으로서옹졸했다.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들은 왜인지를 요캄에게 설명해야 했다. 다른 이들도 스컬리가 1988년 8월 애플에서요캄을 해고하려 한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이 모두가 요캄의 불운을 만들어버렸다. 요캄을 내쫓으려 한 장본인인 설리반은 총대를매고,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이 구조조정은 합리적이지가 않았다. 가세의 부서인 Apple Products는 제품 개발과 함께마케팅까지 책임을 맡았다. 스핀들러는 훨씬 거대한 애플 유럽 지사장을 맡았고, 로렌은 애플 미국을 맡았다.
요캄의 역할은 훨씬 불투명해졌다. 요캄은 교육판매부와 태평양부를 맡았다. (환태평양 지역과 호주가 대상이다.) 하지만 설득력이부족했고, 스컬리조차 요캄의 새 위치를 합리화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PR부는 온갖 치례를 하여 언론보도문을 작성해냈다. 하지만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자리를 받은지 며칠 후, 요캄은 사임하였다.
이번 구조조정에 대해 애플 직원들은 충격을 받고 격분하였다. 예전 구조는 기존의 맥시장을 3년만에 50만 대에서 225만 대로늘렸었다. 또한 애플은 이제 마이크로소프트의 수 배에 달하는, 40억 달러의 매출량을 올리는 기업이었다. 분기보고서의 표현을따르면, "이제는 외부인이 와서 대형화된 애플을 현재보다 더 혁신적이고 융통성 있으며, 지역대표성을 강화하도록 하기 위해 더평평하게 조직 조정"을 한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애플은 이제 비효율적이고 능력없는 중역들이 지도하는 회사가 되어버렸다. 모든이들이 권력투쟁에 돌입하였고, 스컬리는 이를 허용해버렸다.
애플은 이제 공개적으로 허덕이기 시작했다. 가세는 터무니 없이 높은 마진을 고집스레 유지시켰다. (한 때 다른 업체들의 두 배가넘는 60%의 마진을 기록하기도 했었다.) 그 결과 그는 로우엔드 매킨토시에 필사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런 제품이 나올경우 애플제품간의 경쟁은 물론, 자신의 부서 예산이 줄어들을 것을 염려해서였다. Apple Products부는 완전히 제멋대로였다.가세는 엔지니어들이 만들 만한 제품을 만드는지 신경쓰지 않았고, 일정조정도 직원들에게 맡겨버렸다. 애플은 일 년에 연구용예산으로 5억 달러를 배정하였지만, 연간 나오는 신제품은 여섯 개 정도였다. 대부분의 돈은 확실치 않은 목표에 많은 인원이 만든쓸모없는 제품에 투입됐다.
Aquarius
그런 프로젝트 중에 가세 뿐만 아니라 스컬리의 마음도 사로잡은 프로젝트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Aquarius이다.1980년대가 저물어가자, 매킨토시는 이제 기술적인 주도권도 잃기 시작하였다. 68k 라인은 한때 모든 웍스테이션 업체들의선택이었지만, 이제는 Clipper나 SPARC, Alpha와 같은 회사별 RISC 칩에게 교체당하고 있었다. 애플Advanced Technology Group 엔지니어들은 모두들 애플이 직접 나서서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디자인할 수 밖에 없노라생각하였다. 바로 그 프로젝트가 Aquarius였고, Aquarius는 완전히 실행불가능했다. 애플은 마이크로칩 회사가아니었으며, 그럴 자원이 없었다. 우선은 마이크로프로세서 디자인에 친숙한 인재를 고용해야 하고, 디자인구현에 필요한 장비를 산다음, 최종 제품을 제조(혹은 후지쯔나 히타치에 외주를 주더라도)해야 했다. 인텔과 모토로라와 같은 회사들은 마이크로프로세서디자인과 제조에만 수십 억 달러를 지출하는 회사들이었다. Aquarius은 곧 사라졌다. 마이크로프로세서에만 쓸 수십 억 달러가없었다.
처음 이 아이디어를 제안한 샘 홀란드(Sam Holland)는 Aquarius 프로젝트도 이끌었었다. 그러나 애플 내 다른엔지니어들은 여기에 반발하였다. 그중에는 Aquarius 프로젝트를 무산시키기 위해, 가세를 개인적으로 움직인 스티브사코만(Steve Sakoman)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세는 자원을 낭비하는 프로젝트에 주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크레이 수퍼컴퓨터 구입비용 1500만 달러를 승인하기도 하였다. 꼬리를 감추기 위해 가세는 투자자들에게 이 크레이 머신은 애플하드웨어 모델링을 위해 쓰인다고 답하였다.
홀란드는 4-코어 프로세서를 만들려 했었다. 프로세서 네 개인양 행동하면서 진정한 멀티태스킹을 이루려는 목적이었다.1987년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프로세서 네 개를 직접 달면 열량도 엄청나게 높아지고, 단일-코어 프로세서보다 훨씬 내부가복잡하기도 하였다. 즉 실수가 많아진다. 그러나 진전이 거의 없자, 홀란드는 떠났고, 애플 펠로우인 알 알콘(AlAlcorn)이 Aquarius 프로젝트를 맡는다. 알콘은 업계의 전설이었다. 그는 Pong 컴퓨터 게임을 발명하였고,Atari에서 스티브 잡스를 기술자로 고용했던 인물이었다. 알콘은 진정한 칩 전문가, 휴 마틴(Hugh Martin)을고용한다.
스컬리는 이제 Aquarius가 얼마나 돈을 낭비하는지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엔지니어들을 사무실로 불러서 어떤 진전이있었는지 들어보려 하였다. 이에 마틴은 그에게 이 프로젝트가 "유치하다"고 답하였다. 애플은 모토로라나 인텔과 경쟁할 수 없다는의미였다. 그 대신 애플은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하드웨어에 특화를 해야 했다. 스컬리는 그를 무시했지만, Aquarius는어찌됐건 실패하였다. 1989년, 알콘은 이 프로젝트를 해산시키고, 크레이 수퍼컴퓨터는 매킨토시 본체 디자인을 하는디자이너들에게 주어졌다.
Newton and Looking Glass
또다른 불운의 프로젝트가 있었다. 1987년 Aquarius 프로젝트에게 저주를 내린 사코만은 매킨토시의 후계자의 제조에 관심이있었다. 그는 몇 가지의 성과 없는 프로젝트를 작업한 다음 스스로를 역량있는 엔지니어라 평하였다. 그래서인지 가세도 그에게타블렛 연구 프로젝트를 허용하는 데에 별 이의가 없었다. 그는 Bubb Road의 한 빌딩으로 이주하여 이 프로젝트를 뉴튼이라 하였다.
가세는 엔지니어들에게 아니오라 말한 적이 없었다. 동일한 목적을 갖는 또다른 프로젝트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Looking Glass로서 마크 포랏(Marc Porat)이 이끌었다. 여기에는 앤디 허츠펠드(Andy Hertzfeld )나빌 앳킨슨(Bill Atkinson,)과 같은 전설같은 인물들이 투입되었고, 무선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을 하는 타블렛을 목표로삼고 있었다. 네트워크 상에서 정보를 모으는 "에이전트" 프로그램이 있었고, 여기에 따라 활동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가령,증권매매인이 특정 주식의 주가를 알아보는 에이전트를 만들어서 특정 지점에 떨어뜨리면 자동으로 이메일을 보내주는 형식이었다.
가세가 이런 타블렛 프로젝트를 모두 승인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의 보스인 스컬리도 타블렛에 집념을 갖고 있었다.스컬리는 1990년대의 컴퓨터가 노트북이나 데스크톱이 아니라 타블렛이 되리라 강하게 믿고 있었다. 그는 KnowledgeNavigator라는 모형제품 두 개를 만드는 데에만 500만 달러를 승인할 정도였다. Knowledge Navigator는11"X17" 크기의 접히는 형식이었으며, 노트북과 비슷했다. 이 디바이스는 컬러 터치스크린과 마이크,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게다가 인공지능도 갖추고 있었다. 화면상의 에이전트가 약속을 잡고 제품을 주문하며, 요구에 따라 리포트도 작성했다. 수십 년내에 이런 디바이스를 만들기란 불가능했지만, 스컬리는 자신의 비전을 담은 프로젝트라면 언제나 OK였다.
The TrueType Story
스컬리는 시장점유율이 더 많은 소비자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개발자들도 끌어모을 수 있다고 강하게 믿었다. 가세는 이에열정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시장에 매킨토시만큼의 품질을 가진 제품이 없기 때문에 개발자나 사용자들이나 매킨토시에서 멀어질 수없다 여겼다. 그 결과, 제조담당 수석인 데비 콜만(Debi Coleman)이 "비서 매킨토시"를 애플이 만들어야 한다고주장했을 때, 가세는 그즉시 그녀를 파면했다. 다행히도 그당시에는 맥의 대안이 없었다.
1989년 애플은 소비자들과 정말 중요한 개발사 모두를 배반하게 된다. 어도비의 출력용 언어인 포스트스크립트가 없었다면매킨토시는 데스크톱 출판에서 결코 강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애플은 어도비 초창기부터 최대 고객이기도 했다. 어도비소프트웨어는 모든 매킨토시와 레이저라이터에 실려나갔고, 덕분에 사용자들은 진정한 WYSIWYG 출력을 만들 수 있었다.포스트스크립트가 모든 형태와 서체, 색상을 단일 문서에서 정의내려서 정확하게 출력되도록 한 것이다. 포스트스크립트의 평가는 매우높았고, 가격 또한 매우 높았다. 레이저라이터의 개발시기, 잡스는 250만 달러를 투자하여 어도비사의 지분 15%를 사들였었다.그러한 대투자(이에 따라 애플은 어도비의 대주주가 되었다)에 이어, 어도비는 레이저라이터에 실려나가는 서체값으로 300 달러를요구하였다. 표준 포스트스크립트 소프트웨어용 요금과는 별개였다.
가세는 이윤 마진이 아닌, 가격을 낮추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어도비만 없애도 상당히 절약이 가능했다. 가세는 침착하기 그지없는어도비의 공동창립자이자 CEO인 존 워녹(John Wornock)을 Good Earth Café에 초대하고는 애플이 로우엔드맥에서 어도비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지 않겠노라 말해주었다. 애플 자신의 서체 기술을 만들겠다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워녹은 화를냈다. 그는 거의 울면서 분개(憤慨)하며 까페를 나섰다. 그러자 가세는 프린터 한 대 팔 때마다 수 백 달러씩 어도비에게 갖다바치게 되는, 기존의 타입 A 포스트스크립트 서체를 교체하기 위해 Royal 프로젝트를 발족시켰다.
그런데 마이크로소프트 또한 윈도우즈 3.0과 OS/2용으로 쓰기 위해 저렴한 출력 기술을 쇼핑하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기술을개발하는 대신, 마이크로소프트는 Bauer Enterprise를 인수하여, TrueImage라는 포스트스크립트 경쟁자를얻어냈다. 바우어사의 직원들 중에는 애플로 떠나서 Royal이라는 이름의 새 서체 기술을 작업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제는 거의완성됐다 싶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력된 페이지의 형태와 이미지 렌더링 기술은 아직 없었다. 그리고TrueImage에는 서체 기술이 없었다.
가세는 저렴한 기술을 맥에 넣고 싶어했다.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와 협의를 하여 TrueImage와 Royal을 라이센스하기로동의하였다. Royal은 TrueType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매킨토시 시스템과 윈도우즈에 모두 들어가기로 하였다. 이 협의의발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시볼드 데스크톱 출판 컨퍼런스에서 스컬리가 행하였다. 이 프로그램 자체는 스컬리에게 있어서 상당히놀라웠다. 애플 최대의 원군인 어도비에게 가세가 일격을 날리고, 그것도 룩앤필 재판 와중에 마이크로소프트와의 계약을 가세가성사시켰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어서였다. 그는 화를 냈다.
워녹도 매한가지였다. 워녹은 연설을 통해 트루타입 기술과 포스트스크립트를 비교하였다.(트루타입의 열악한 출력을 보여주었다) 그럴만했다. 오랜 원군인 애플이 어도비 주가를 50%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어도비에 투자한 자금(애플도 포함된다)이 반토막나버렸다. 애플은 지분을 팔고는 투자자금으로 7900만 달러를 회수하였다.
이런 법속 통에, 애플은 트루타입을 재빨리 저버렸다. 트루타입 프린터는 결코 좋은 품질의 출력물을 내지 못했고, 제일 싸구려에제일 이윤 마진이 낮은 프린터에만 들어갔다. 거의 얻은 것이 없었던 애플은 제일 가치있는 개발사까지 배반하였다. 둘은 화해를하긴 하지만, 애플이 개발자들을 엿먹이고,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무료로 애플 기술을 줘버렸다는 평판이 난 이후였다.
More Gassée Mistakes
가세는 시스템 소프트웨어부를 둘로 나눔으로써 또 한 차례의 실수를 저질렀다. 한 그룹은 현 맥오에스의 개발부였고, 다른 한그룹은 차세대 운영체제 개발부였다. 이 팀은 제각기 블루와 핑크로 불렸다. 자연스레 엔지니어들은 모두 핑크로 가려 했고 블루를떠나려 했다. 블루의 팀장인 기포드 칼렌다(Gifford Calenda)와 실라 브래디(Sheila Brady)는 경험이 미천한엔지니어들을 고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문에 다트머쓰 졸업반 전체가 블루로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프로젝트 전부 기일을넘겼고, 결국은 후에 자원을 갉아먹으며 실패하고만다.
1989년, 가세와 로렌은 최대의 실수를 저지른다. 고객에 대한 애플의 좋은 평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대실수였다. IBM의폐쇄적인 PS/2 라인이 실패하면서, PC 시장은 크게 자라났다. PC 시장은 대호황이었다. 그때문에 DRAM 칩이 부족해졌고,가격이 급속도로 치솟았다. 하지만 애플은 마진이 워낙 두터웠기에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애플에게 불행하게도,가세와 로렌은 이윤마진을 전혀 낮출 생각이 없었으며, 오히려 가격을 높였다. 애플은 가격을 낮출 절호의 기회를 잃었고, 더심각하게도 소비자들의 신뢰를 잃었다. 1984년 이래 최초로 판매량이 마이너스가 되었고, DRAM 칩 가격이 점차 안정되자,애플의 명성은 손상을 입게된다. 결국 가세는 수요 예측을 못하고 소비자 충성도를 잃었다는 죄로 해임된다. 1989년, 그는대부분의 직책에서 해제됐으며, 그로부터 1년 뒤, Be를 창립하기 위해 애플을 떠나게 된다.
가세가 떠난 뒤, 또다른 구조조정이 일어난다. 스핀들러를 새 COO로 앉히고, 로렌은 HP의 전 중역, 보브 퓨에트(BobPuette)로 바뀐다. 퓨에트는 HP에서 PC부를 일궈냈고, 존경도 받고 있었지만, 애플 스타일의 직원은 아니었다. 그래도요캄처럼 제조를 신경썼으며, 인물이기는 인물이었다.
QuickTime
DRAM 값 파동과 애플-마이크로소프트 간의 법정소송 직후, 제일 중요한 매킨토시 소프트웨어 개발이 시작된다. 퀵타임이다.뉴튼과 매킨토시, 애플 II처럼 퀵타임도 회사 구조 바깥의 그룹이 만든 기술이었다. 부르스 릭(Bruce Leak)이 퀵타임프로젝트를 재조정하였다. 핑크나 빅맥처럼 경영진이 좋아하는 프로젝트는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었다. 초기 애플 영상을 보면퀵타임은 비압축 비디오 재생을 허용하도록 특정 하드웨어를 부가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한 특별한 하드웨어를 따로붙이지 않고서도 비디오 파일을 저렴한 하드웨어상에서도 돌리기 위해 릭은 비디오파일을 압축시켰다. 그 결과 비디오 화질이 대부분의컴퓨터상에서는 별로 좋지 않았다. 단, DSP 칩을 갖고 있다면 그 화질이 급속도로 좋아졌다.
Looking for a Way Out
외형적인 성장세에도 불구하고(1990년 당시 애플은 제일 대규모의 PC 제조업체였다), 스컬리나 모두들 그 성장세가 지속가능하지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젊은 중역인 댄 아일러스(Dan Eilers)는 애플의 지배적인 위치를 강화시키기 위해 매킨토시시장점유율을 늘릴 필요가 있다는 프리젠테이션을 하였고, 시장점유율을 늘리기 위한 대책으로 이 프리젠테이션은 네 가지 방법을제시하였다.
- 맥오에스의 라이센스
- OEM
- 맥오에스 프로세서의 독립적인 제조
- 두 번째 브랜드의 창설
가세는 그동안 애플의 이윤마진(그리고 자신의 예산)을 지키기위해 무슨 짓이든 했었지만, 스핀들러는 좀 더 실용적이었다. 그래도첫 번재부터 세 번째 선택은 스핀들러나 다른 중역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네 번째 옵션인 독립 브랜드 창설이 훨씬 더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스컬리는 또다른 선택을 내놓았다. 애플을 인수할 구매자를 하나 따로 찾자는 제안이었다.
두 번째 브랜드 계획의 일환으로 클라리스가 떠올랐다. 클라리스가 애플 로직카드에 기반하는 맥을 표준 본체에 넣어서 파는것이었다. 이상적으로는 MS-DOS 컴퓨터와의 경쟁이 되는 천 달러 정도의 애플 호환머신이었다. 그런데 이 제안이 퓨에트를공포에 빠뜨렸다. 그는 저렴한 매킨토시가 자기부서를 침식하리라 여겼다. 이에 따라 동 프로젝트는 스컬리가 찬성했는데도부결되었다.
따라서 스컬리는 전략파트너, 혹은 구매자를 찾아나섰다. 첫 번째로 심각한 후보는 노벨이었다. 당시 노벨은 DigitalResearch(GEM을 갖고 있다)를 인수하였다. 노벨의 사업 수입은 보통의 PC를 전체 인트라넷이 저렴하게 연결시키는NetWare로부터 나왔었다. 윈도우즈와 MS-DOS가 점점 더 유명해지자, 노벨은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의 압력을 받았고, 이에따라 영역을 넓히기 위해 NetWare의 클라이언트 소프트웨어로부터의 OEM마저 축소시켰다. 노벨은 마이크로소프트를 완전히없애고 싶어 하였고, 그때문에 전체적인 데스크톱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였다.
GEM을 되살리기 대신, 노벨은 애플에게 맥오에스 라이센스를 제안하였다. PC상에서 맥오에스를 돌리자는 내용이었다. 스핀들러는 여기에 동의하여 스타트렉 프로젝트가태어나게 된다. 하지만 컴팩 상에서 돌아가는 프로토타입의 맥오에스가 나오자 이 프로젝트는 해체된다. 일이 그렇게 되자 스핀들러는스컬리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더 외부 구매자를 찾도록 하였다. 스핀들러는 애플 브랜드와 대규모 유통망과 현금을 갖춘 대기업이만나면 매킨토시가 시장의 25%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면 컴퓨터 산업도 자연스레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애플에 접촉한 첫 회사는 다름아닌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였다. 썬은 68000 프로세서에 기반하는 저렴한 웍스테이션으로웍스테이션 시장을 점령하였으며, 이제는 SPARC 아키텍쳐(RISC 기반이었다)로 남아있는 미니컴퓨터와 메인프레임 사업까지도전하고 있었다. 사실 애플과 썬의 인수 얘기는 1988년부터 낮은 수준에서 나와 있었다. SunOS(현재는 솔라리스로바뀌어있다)를 애플이 채택하거나, 썬을 인수해버리자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제 썬은 무섭게 자라났으며, 썬은 데스크톱 시장을원했고, 애플이 그에 들어맞았다. 썬 CEO이자 공동 창립자인 스콧 맥닐리(Scott McNeally)는 애플에게 할인된 값에애플이 썬을 인수하고 자신은 COO로 임명해달라 제안하였다. 그런데 스핀들러에게는 국물이 없었다. 이에 스핀들러는 스컬리에게제안을 거절하라 하였다.
그러자 예기치 않게도 IBM의 CEO, 잭 큘러(Jack Keuler)가 매우 다른 제안 두 가지를 들고 애플과 스컬리에접촉하였다. IBM은 RISC에 있어서 애플과 협력하기를 원하였다. IBM은 1970년대 이래로 RISC 기술을 작업하고있었으며, IBM RT/PC를 선보인 이후, RS/6000 시리즈 웍스테이션에 들어가는 POWER 라인의 히트로 성공을 거두고있었다. IBM은 애플이 하이엔드 컴퓨터용으로 POWER 라인을 채택하기를 희망하였다. 경영진은 이 제안에 대해 환호하였다.이에 모두가 실패로 끝난 Aquaris 프로젝트 대신, 매킨토시를 RISC로 이주시키는 연구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기도 하였다.애플은 이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이고는 PowerPC 작업에 참여하게 되지만, PowerPC는 스컬리가 애플을 떠난 이후에서야나오게 된다.
스컬리는 혹시 IBM이 애플을 바로 인수하는 데에 관심이 있는지 큘러에게 물어보았지만, 간단히 말해서 아니오였다. IBM은애플과 매킨토시처럼 OS/2와 PC-DOS에 워낙에 묶여 있었다. 이에 스컬리는 AT&T와 접촉하였다. AT&T는당시 개인용 컴퓨터에 대투자를 벌이는 와중이었다. AT&T는 전국적으로 ISDN 네트워크를 설치하고 있었으며, GO로핸드헬드 컴퓨터도 실험하고 있었다. 새 회사를 위한 새 조직도 차트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협상이 진전됐지만, 갑자기AT&T 이사회에서 철회 명령이 떨어졌다. AT&T는 일 년 전에 인수했던 NCR을 소생시키기를 원했다. 게다가AT&T는 이미 셀률러 통신사 인수를 완성하고 있었다.
스컬리는 1년 뒤 IBM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IBM CEO 자리에 관심 있느냐는 제안이었다. 스컬리도 매우 관심을표명하고, 두 달 정도 헤드헌터와 계속 접촉하였지만, 결국 IBM CEO 자리는 P&G 전 CEO에게 돌아간다. 스컬리는코닥과 AT&T에서도 접촉을 받았지만 스컬리가 거절하였다.
이 시기동안 스컬리는 자신의 시간 대부분을 빌 클린턴 선거운동에 투입시키고 있었다. 스컬리는 오랜동안 공화당 편이었지만, 기술분야에 있어서는 클린턴이 유일하게 합리적이라 생각하였다. 심지어 스컬리의 이름은 클린턴의 러닝메이트로 후보로까지 올라있었고,상무부 자리까지 제안을 받았지만, 스컬리는 거절하였다. 대신 그는 클린턴의 첫 연두교서 자리에 초대를 받아 힐러리 클린턴과나란히 앉게된다.
즉, 스컬리가 애플보다는 클린턴 선거운동에 시간을 더 쏟자, 애플 이사진은 스컬리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게 된다. 게다가스컬리는 1990년 초가 되면 애플을 떠나고 싶다고 이사진에 표명하였다. 심지어 그는 자기와 IBM이 인터뷰중이라는 얘기도이사진에 알려주었다.
Ouster
스컬리가 기대만큼 성과를 계속 내왔기 때문에 이사진들은 스컬리에 대해 관용적이었지만, 스컬리의 운도 이번에는 다하였다.
스컬리는 이사진에게 애플이 계속 성장하리라 확신시켰다. 애플 주식은 1992년 중반에 거의 70달러에 다달았지만, 후에 폭락하게된다. 1993년 1/4 분기에 애플은 46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그 전 해에 벌어들인 이윤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몇 주일 만에 주가가 2/3로 떨어졌다. 실망스러운 분기 성적이 시장에 나오기 전에, 이사진들은 1993년 6월 17일날쿠퍼티노에서 열린 회의에서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었다. 스컬리는 이번 일이 일시적이라 강변했지만, 이사진들은 스컬리의 말을듣지 않았다.
그동안 (가세가 축출당한 이후로) 스핀들러는 스컬리의 후계자로 낙점받아왔었고, 스컬리의 자리를 그도 탐내고 있었다. 스컬리의프리젠테이션이 끝나자, 이사진들은 스컬리보고 방 밖에 나가 있어달라 요구하였고, 곧 이어 선거가 있었다. 그리고 스컬리는교체되었다. 스컬리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받았고 몇 분 후, 그의 자리는 바뀌어 있었다.
스컬리가 떠나자, 스핀들러는 어떻게 CEO직을 수행할 것인지에 대해 15분간의 숙고시간을 받았지만, 15분간 생각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오직 스컬리를 축출하기 위해 수단을 썼던 것뿐이었다.
After Apple
스컬리는 뉴튼을 성공적으로 선보일정도로 오랜동안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주주들의 집단소송에 휘말려있던 Spectrum의CEO 자리를 맡았지만 회사가 부도난 후, 1995년까지 코닥의 디지탈 카메라부를 이끌었다. 여기서 그는 벤쳐캐피탈리스트 회사인Sculley Brothers LLC를 공동창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