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가자
김재선 김진섭 김태원 문찬술 박세웅 이성우 이춘배 허정구 허헌구 최일선
1. 답사내역
2009년 5월 28일(4목) 답사 때에는 11명이 갔었는데 이번엔 몇 명이나 나올까?
나 홀로 생각하며 요즈음은 오륙명 수준이라 10주년 100회차라는 것을 공지에 알릴 걸 그랬나...^^
이생각 저생각 하면서 시간을 여유 있게 잡고 8시 50분에 집을 나선다.
8호선에서 5호선 3호선으로 환승하며 구파발역에 도착하니 10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다.
천천히 걸어 출찰구를 나와 화장실 쪽을 향하는데 역으로 들어오는 춘배를 만났다.
잠시 이야기 나누는 사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여 약속 시간 십여분 전에 모인 친구 모두 아홉명이다.
진섭이 따라 주는 커피 한잔 마시며 이야기 나누다 보니 10시 30분 우리는 4번 출구로 나간다.
예전의 4번출구가 아니고 반대편에 나와 있는게 아닌가 다시 건너편출구로 나가 703번 버스를 확인한다.
아무리 찾아 보아도 보이지 않고 물어 보아도 나그네 뿐이라 안되겠다 싶어 삼송역으로 이동한다.
삼송역에서도 이리저리 우여곡절 끝에 찾긴 찾았으나 한번 꼬인 실타래 풀기 어렵다는 것 새삼 깨닫게 한다.
은평 뉴타운 건설 때문에 그리고 나이들어 집중력이 떨어진 때문에 친구들 고생 많이 시켰다.
그렇게 헤매고 다녔는데도 친구들 찾는데만 집중하고 단 한마디도 불평불만 없어 중후한 인품에 감동되었다.^^
잠시 후 우린 703번 광탄행 버스를 타고 벽제 삼거리에서 혜음령 쪽으로 의주로 가는 연행길을 따라간다.
그 옛날 산적이 들끓고 맹수들이 많았다는 혜음령 마치 코구멍 같은 턴널이 뻥 뚤려 빠르긴 해도 재미 없겠구나
했는데 노선버스는 살고 있는 주민들을 위해 구불구불 돌아가는 비탈길 따라 고개를 넘어간다.
내 고향 강릉 가는 대관령 보다야 아주 짧은 길이지만 대관령 오르내리던 추억 때문인가 고개길을 좋아한다.
한참을 달려서야 우리는 장지산 용암사 앞 정류장에서 내려 일주문을 지나 용암사 경내로 들어간다.
용암사 주불전 앞에 한쌍의 석등이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시주한 석등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알수 있다.
내 추측으로는 불심이 깊었던 육영수여사가 대통령의 이름으로 시주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마애석불로 오르는 계단길 좌측엔 조그만 석불과 석탑이 있는데 이승만대통령이 오셨다가 어깨가 허전하다고 하여
조그만 석불과 석탑을 어깨 위에 올려 놓았는데 4.19 혁명으로 몰락하자 철거되어 방치되었다가 새로 안치한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과 세월이 약이란 말 뉘라 지었는지 모르지만 우리 조상님들의 번쩍이는 기지는 참으로 자랑할 만하다.
마애석불 거의 다 올라서는 마지막 계단 내려서던 공양주보살님인가 사시공양 드린 메사발을 엎고 말았다.
옆에 따라오던 젊은 보살님 제가 든다고 했는데 안스러운 표정을 짓는 모습과 미안해 하는 노보살의 표정이
내 뇌리에 오버랩 되며 마치 선계에 올라서며
자비심이랄까 측은지심이랄까 알 수 없는 묘한 심정에 빠져든다.
우람하게 버티고 서서 사바세계를 두루 살피고 뭇중생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의주길 오가는 나그네의 이정표로
건너편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는 영혼들의 길라잡이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신 중이라 이 중생의 물음엔 묵묵부답이다.^^
고려 13대 선종 임금이 자식이 없어 근심에 쌓였는데 셋째 부인인 원신궁주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두 노인이 나타나 우리는 파주 장지산 바위 틈에 살고 있는데 먹을 것이 없어 고생을 하고 있다면서
바위에 불상을 만들어 주면 우리도 살아갈 수 있고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는데
꿈을 깬 궁주가 왕께 이야기하여 알아본 결과 꿈에서 말한 바위가 있어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불상을 조성중 또 꿈에 두 노인이 나타나 왼쬭은 미륵불 오른쪽은 미륵보살을 만들라고 했단다.
보물 93호인 이 석불은 왼쪽의 둥근 갓을 쓴 미륵이 남자이고 오른쪽 사각 갓을 쓴 미륵이 여자라고 한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마애불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용암사라는 절에서 기도처로 활용하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기도를 드리면 아들을 점지해 주기도 하고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한 기도처라고 한다.
다시 돌아나와 용암사입구 버스정류장에서 안전을 위해 703번 버스를 이용하여 윤관장군 묘역으로 이동한다.
묘역에 들어가기 전 입구 우측에 있는 윤관장군이 타고 다니던 교자(가마) 전마(戰馬)의 무덤 교자총 전마총을 본다.
고려 예종 때 동북방면 여진 정벌로 큰 공을 세운 장군의 업적이야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9성을 쌓았다가 화친을 위해 다시 여진에게 돌려주고 후일 전쟁의 책임 추궁을 당하였으나 죽음은 면하였다.
다시 복권되었으나 벼슬은 사양하였고
예종 6년(1111년) 생을 마감하고 1130년(인종8년)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해설사님이 오셔서 간단한 설명을 해 주셨다.
사당이나 묘역 출입은 동입서출이라고 우측길을 따라 올라가고 좌측길로 내려오라고 하여 그대로 따른다.
고려 때 양광도 파평현이였고 파평윤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의 한사람인 윤관의 고조부 윤신달이다.
윤관(1040년 7월 12일 음 6월 1일~1111년 6월 15일 음 5월 8일 위키백과에서)장군은 파평윤씨 중시조이다.
묘소에는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물게 석물이 유난히 많다.
동자석 작은 문관석 큰 문관석 무인석 그리고 문 무인석 뒤편의 석마 아마도 잊혀졌다 다시 찾은 탓이리라.
돌아 나오면서 파평윤씨와 청송 심씨의 400년 동안의 갈등을 해소하는 화해비를 보면서
결국은 파평 윤문에서 2500평의 묘지의 땅을 증여하고 심문에서 19기의 산소를 이장함으로서 화해가 이루어졌다.
갈등의 해소는 개인이든 단체이든 서로의 양보와 이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진리를 깨우쳐 준다.^^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길 건너편 낙지집으로 들어가 산낙지 덮밥으로 통일 하고 막걸리부터 비우기 시작한다.
미역국 낙지내장 이것 저것 서비스로 안주거리가 많이 나온다.
산낙지 덮밥 삼천냥이나 더 비싸지만 탁월한 선택으로 낙지볶음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ㅎㅎㅎ
배도 채웠겠다 알콜 기운으로 기분도 업 되었겠다 우린 마지막 혜음원지를 찾아 버스에 다시 오른다.
파주시청에서 알려준 정보로 용미4리 정류장에서 내려 찾기 어렵다는데 하면서 온능슈퍼 옆길로 들어간다.
맨 앞에서 물어도 모른다고 하여 일단 더 들어가서 젊은 친구에게 물었더니 돌아나가 좌측으로 가 보란다.
친구들 잠시 기다리게 하고 우측 길로 갔더니 울타리가 처져 있는데 멀리 발굴지 같은게 눈에 들어온다.
돌아나가 친구들 손짓으로 부르고 나는 천천히 걸어 올라 가는데 이번엔 문이 열려 있는 왼편 길을 택한다.
올라가면 또 문이 있는데 잠기지 않아 들어가 왼쪽으로 다리를 건너 옆으로 뚝방길을 따라 가니 계단식으로 된
발굴지가 눈 앞에 광활하게 펼쳐지는게 오늘 시작부터 헤매였는데 찜찜했던 마음은 구름 걷히듯 사라진다.
혜음원은 고려시대 송경에서 남경으로 오가는 백성들과 관리들의 안전과 편의를 위하여 국가에서 세운 객관이다.
1120년(예종 20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122년(예종17년)에 완공한 사찰이며 국립여관인 객관이다.
특히 국왕의 남경 행차에 대비하여 별원(행궁)도 건립하였으며 인종이 혜음사(惠陰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1999년 혜음원이란 글자가 새겨진 명문 암막새기와가 발견되면서 알려졌다.
혜음원은 세 구역으로 나뉘어 사찰 객관 별원(別院 . 行宮) 9단으로 이루져 있고
수십개소의 건물지 연못지 배수로 등의 유구와
금동여래상 자기류 토기류 등 고려 중기에 해당하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왔던 길 되돌아 나와 용미4리 버스정류장에서 703번 버스에 올라 서울로 돌아온다.
혜음령을 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실은 오늘 답사가 100회차인데 어디가서 생맥주 한 잔 하자고 했다.
그래 하면서 진섭이 내가 생맥주 살게 하면서 어디로 갈가 그러기에 세웅이 동네 연신내로 가자고 한다.
찬술이 일선에게 통화하더니 마침 마포 딸네 집에 와 있어 나올 수 있다고 장소 정해지면 알려주기로 했단다.
연신내역에서 내려 세웅이 안내로 생맥주집으로 들어가 좌정한다.
진섭이 일선에게 전화하여 조그만 아이크림 케익 하나 사들고 오라고 전화하란다.
찬술이 전화하여 연신내 다왔다며 사 들고 오기로 했단다.
이렇게 하여 문화유적답사 일 백회 기념 축하연은 성대하게 치루어 졌다. ^^ㅋㅋㅋ
초장부터 헤매는 야릇한 날이였지만 어렵사리 찾은 혜음원지 뒤로 갈수록 행운이 함께 한 즐거운 날이였다.
중후한 인품의 54친구들이 있어 친구들과 함께 더불어 많이 웃고 즐거움 가득한 행복한 하루였음을 확인한다.^^
온고이 지신이라 했던가
옛 것만 믿었던게 친구들을 힘들게 했던 하루였던 것 같다.
친구들 고마웠고 잘 들어 갔겠지?
다음에 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 낄낄대 보세나~~~
첫댓글 혜음원지를 찾아 보여 주려는 별집대장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