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랑 속 헤매다 마침내 도착한 낯선 땅
금남 최부와 표해록 > 1 <
최부(崔溥 1454∼1504).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이다.
본관은 탐진(耽津)이며 1454년 나주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청렴결백하고 절개가 굳은 성품이었다.
1477년 24세에 진사시험에 3등으로 합격했고, 29세에 성종(13년)이 인재를 골라 쓸 때 정통책(正統策)으로 답을 올려 3등을 차지했다.
이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있으면서 그 재주와 이름이 알려졌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전적(典籍-성균관 학생을 지도하는 정6품직)에 임명됐다.
1486년 중시에 2등으로 합격해 사헌부 감찰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과 수찬을 지내다 1487년 부교리가 됐고, 그해 9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추쇄는 도망간 노비를 찾아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일, 경차관은 지방에 임시로 보낸 관리)으로 제주에 갔다.
이듬해인 1488년 윤정월에 부친상 소식을 듣고 바다를 건너 나주로 귀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중국 땅 태주(台州)에 표착됐다가 6월 4일에야 압록강을 건너 의주성에 도달하게 된다.
이후 열흘만에 서울 남대문 밖 청파역에 도착해 성종의 명으로 바로 표해록을 집필했다.
귀국 다음해인 1489년 모친상을 당해 1491년 탈상하고 11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됐으나 사간들의 반대로 다음해 1월 사임했다. 이들은 선생이 부친상 중에 서울에 머물며 표해록(漂海錄)을 찬술했다하여 탄핵했다.
그러나 1492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다녀왔고 1493년 4월 홍문관 교리에 제수됐다.
그러나 앞서의 일이 계속 문제가 되자 홍문관의 학사들이 성종에게 “최부는 계속되는 상으로 4년 동안 한번도 집에 가지 아니하고 여막에서만 수상(守喪)한 사람으로 효행이 남다르니 동료들과 함께 봉사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고했다.
성종은 선생을 5월 승문원 교리에 제수하고, 1494년 5월 홍문관 교리, 8월 부응교(副應敎) 겸 예문관 응교로 승진시켰다.
최부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였다. 연산군 시대로 접어들어 1498년 7월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가택 수색을 당했는데 ‘점필재집’을 소장하고 있어 이로 인해 고문을 당하고 함경남도 단천(端川)으로 유배됐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연산의 명으로 다시 투옥, 사형에 처해졌다. 사형되기 전날 밤 같은 옥에 갇혀 있던 김전과 홍언필 등은 술을 준비하여 전별해 주었다고 한다.
이 때 선생의 나이는 51세였다. 사후 2년 뒤 1506년 통정대부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됐다.
처형당한 후 재산은 모조리 몰수당했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선생의 저서는 대부분 유실됐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외손자는 ‘미암일기’로 유명한 미암 유희춘이다. 외조부의 저서가 유실됨을 애석해 하던 희춘은 승정원에 소장된 표해록 원본을 찾아내 선생 사후 60여년이 지난 1573년에야 간행, 세상에 알렸다. 희춘은 ‘동국통감론’ 120수도 찾아 두 권의 책으로 엮었다. (금남선생은 동국여지승람과 동국통감 등의 편찬에 참여했었다)
대표적인 선생의 저서 ‘표해록’은 중국기행문이다. 정식명칭은 금남선생표해록(錦南先生漂海錄)으로 일부 학계에서는 우리나라 기행문학의 백미이자, 베니스 상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일본스님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더불어 세계 3대 중국기행문으로 꼽는다.
일부 학자는 표해록이 우리가 유년시절 읽었던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정해진 루트를 통해서만 중국을 왕래했던 당시에 최부 선생의 기행루트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마치 낯선 소인국에 떨어진 걸리버처럼 말도 통하지 않는 이국 땅에서 겪어야 했던 이들의 여정은 흥미진진하다.
최부 선생은 제주를 떠날 당시 상복을 입고 있었으며 폭풍 속에서도, 중국(명나라) 땅에서도 상복을 갈아입지 않았다. 해적을 만나 위험한 상황에서 아랫사람이 관복을 입어 위엄을 보이라고 청하자 선생은 “하늘의 이치는 본디 곧은 것인데 어찌 하늘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는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라며 상복차림을 고수한다.
조난자 신분이었지만 조선을 대표하는 철저한 공인으로 행동했으며, 조선 왕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냈다.
표해록에는 최부를 포함한 일행 43명이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윤달 정월 3일 제주를 떠나 같은 달 17일 이국 땅에 오르기까지 망망대해에서 추위와 굶주림, 공포에 시달리며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과 귀국까지의 여정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선생은 관찰력이 예리했다. 스스로 상중이라 하여 행동을 삼갔지만 오가는 길에 보게 되는 주변 상황을 통찰하는 안목이 있었다.
중국에서 수차(水車)를 본 기억을 살려 1496년 호서지방에 가뭄이 들자 수차제조를 시도, 양민구휼에 나서기도 했다.
선생은 중국을 크게 강북(양자강 기준)과 강남으로 나눠 구분했다. 강남에서는 통화로 금이나 은을 사용하고 강북은 동전을 이용하더라는 점이나, 강남은 농, 공, 상업에 힘쓰고 있는데 반해 강북사람은 놀고 먹는 이들이 많다고 기록했다.
또한 교통, 장례 풍속, 음식, 무기 등을 관찰하여 기록했다. 같은 중국 땅이라 하더라도 강북과 강남이 다른 점이 많았다면서 같은 점이 있다면 귀신을 받들고 도교나 불교를 숭상하고 있다는 점이라고도 썼다.
중국인들의 특색을 “그들은 말할 때 손짓을 하는 습관이 있고 화가 나면 입을 찡그리고 침을 뱉으며, 음식은 정갈하지 못하고 젓가락도 일정한 것이 없이 돌려쓴다”고 묘사했다.
고병익 전 서울대 총장은 표해록이 갖는 가치를 다음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문학적 가치로, 표류하다 살아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이기도 하지만 저자 최부의 문필력으로 인해 문학적 가치가 높다는 점.
둘째는 정신사적 가치로 역경 속에서도 조선의 선비와 관리로서 존엄성을 지키려 노력한 점, 특히 중국측과의 교섭과정에서 관복을 입지 않고 상복을 고집하며 우리의 법도를 따른 점.
셋째는 사료적 가치로 당시 중국의 남부는 조선의 관리가 가보지 못했던 미지의 땅으로 그 곳의 습속과 자연은 당시 중국 연구사료로 큰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최부의 표해록은 학자들 외에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 미국에서 더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1769년 기요타 기미카네(淸田君錦)가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했고, 1965년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였던 존 메스킬(John Meskill) 교수가 영역했으며 중국에서는 북경대학의 거전자(葛振家) 교수가 중국어로 번역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부선생의 방손인 최기홍(崔基泓)선생이 국역했다. 위주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