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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똑딱이 가발
이주미
백화점 지하주차장 입구에 막 들어섰을 때 여자아이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자아이는 사마귀가 붙어있는 왼손으로 핸드폰을 덮고 꼼짝하지 않았다. 사마귀는 여자아이의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이 만나는 자리, 경혈로는 합곡에 해당하는 지점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윤자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자 여자아이의 몸이 왼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즐거운 쇼핑 되세요.
빨간 제복을 입은 백화점 점원이 무릎을 까딱 굽혀 인사했다. 흰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수신호를 따라 다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어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여자아이의 왼손 다섯 손가락이 먹이를 사로잡은 말미잘처럼 핸드폰을 휘감았다. 손등에 붙은 사마귀가 핸드폰 진동을 타고 굴러 떨어질 듯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가까운 곳에 차를 주차하자마자 여자아이가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어냈다. 여자아이는 결박에서 풀려나기라도 한 것처럼 냉큼 차 밖으로 몸을 빼냈다. 여자아이가 돌아서서 핸드폰에 찍힌 발신번호를 확인하고 있는 동안 윤자는 막 도착한 엘리베이터 앞으로 뛰어갔다. 빨간 제복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열림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여자아이도 윤자를 놓칠세라 황급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이 닫힙니다. 올라갑니다.
빨간 제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자가 빨간 제복 가슴께로 손을 뻗어 9층 버튼을 눌렀다. 출입문과 바닥만 빼고 모두 거울로 되어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윤자는 거울로 여자아이를 보았다. 거울 속 거울로도 여자아이가 보였다. 얼굴, 몸매, 차림새, 어디로 보나 열여섯이나 열일곱밖에 안 돼 보이는데 여자아이는 굳이 스무 살이라고 했다. 성긴 머리카락 때문에 나이가 좀 들어 보이기는 했다. 엘리베이터 천장에 붙은 거울로 여자아이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탈모가 심해 정수리께 피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머리를 눈여겨보는 게 못마땅했는지 여자아이는 신경질적으로 오른손 엄지와 검지의 손톱을 세워 사마귀를 쥐어뜯었다.
여자아이를 처음 만난 건 경호가 퇴원하던 날, 병원 수납창구 앞에서였다. 윤자는 아들 경호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여자아이가 다른 병실을 드나드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처음엔 머리 때문에 약물치료 중인 환자인 줄 알았다가 환자복을 입지 않는 걸 보고 어떤 환자의 보호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여자아이는 병원 밥 나오는 시간마다 배식카트 주위를 기웃거리는 게 일이었다. 간혹 몸 상태가 안 좋거나 병원 근처에서 외식하려는 환자들이 밥을 물리는 경우가 있었다. 배식이 끝나갈 무렵에 여자아이는 카트 속에 남은 식판을 눈에 띄지 않게 꺼내다가 간병인들한테 가져다줬다. 덕분에 사오십 대가 대부분인 간병인들 속에서 여자아이는 딸처럼 보호받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건 정식 간병인들이 병원 방침에 따라 하늘색 유니폼을 착용하게 된 뒤부터였다.
경호가 퇴원하던 날 윤자는 경호를 병실에 두고 수납대에 먼저 내려와 있었다. 어수선한 사람들 틈에서 언뜻 여자아이를 발견하고는 윤자가 목을 빼고 여자아이 쪽을 돌아다보았다. 여자아이는 윤자와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며 조용히 물었다.
“간병인 안 필요하세요?”
다른 환자 옆에서 폴대를 들고 서 있던 간병인이 여자아이를 알아보고 눈을 꿈쩍하며 지나갔다. 여자아이가 대답을 재촉하듯 윤자의 눈을 쏘아보았다.
“아줌마 말고는 돌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던데, 간병인 쓰지 그러세요. 월급은 조금만 주셔도 돼요.”
여자아이는 다짜고짜 흥정조로 나왔다. 다급해보였다. 여자아이도 윤자가 초면은 아닌 모양이었다. 간병인을 둘 생각은 없었지만 윤자는 여자아이에게 좀 더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어느 간병인?”
“저요.”
윤자는 무심코 고개를 저어 거절부터 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여자아이는 사정하던 눈빛을 미련 없이 거두고 슬며시 자리를 비켜갔다. 아닌 게 아니라 윤자도 퇴원 후의 일이 걱정이었다. 꽃가게를 계속 닫아둘 수는 없으니 간병인을 붙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봐요, 아가씨. 연락처나 있으면 하나 줘요. 나중에 연락 할게.”
다른 퇴원환자를 물색하느라 여전히 수납대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던 여자아이가 윤자의 손짓을 보고 재빨리 몸을 날려 다가왔다. 여자아이는 어깨에 메고 있던 퀼트가방을 품에 안고 종이와 연필을 꺼내들었다. 핸드폰 번호를 적으면서도 여자아이는 당장 흥정을 끝낼 것처럼 말했다.
“24시간 돌봐드려요. 월급은 그냥 적당히 알아서 주세요.”
여자아이는 병원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어진 게 틀림없었다. 병원에서 간병인들에게 유니폼을 입도록 한 건 허가받지 않는 간병인을 가려내기 위해서였을 터였다. 윤자는 자격을 물으려다 말을 바꿨다.
“경력은?”
여자아이가 산만하던 시선을 윤자 눈에 고정시키고 윤자 마음에 드는 말을 찾아내려고 눈을 깜빡거렸다. 여자아이의 눈에는 어느새 생기가 돌고 있었다.
“웬만한 건 다 해봤어요. 말기 암환자, 치매환자 다 거들어봤어요.”
“병원에만 있었어요?”
윤자는 아무 뜻 없이 물었는데 여자아이는 추궁당하는 느낌이 들었는지 눈을 찡그렸다. 여자아이가 잠시 머뭇거렸다. 조금 뒤에 여자아이가 부끄러워하며 입을 열었다.
“저기, 저요, 홈쇼핑 광고에도 나간 적 있어요. 똑딱이 가발 광고에요. 왜 있잖아요. 요만한 가발.”
여자아이가 손바닥만 한 똑딱이 가발을 손가락 끝으로 잡아 머리에 꽂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숫제 윤자 앞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퀼트가방을 열어보였다. 여자아이는 한 손을 가방 속에 넣고 작은 종이상자 뚜껑을 열어 조심스럽게 똑딱이 가발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손가락 끝으로 잡고 또깍또깍 머리에 붙였다. 비포와 에프터의 차이는 과연 놀라웠다. 여자아이는 한결 어리고 건강한 여학생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근데 왜 그만 뒀어?”
윤자가 말을 놓아도 여자아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가발을 붙이고 웃으라는데 그게 도대체 돼야죠.”
다시 손끝으로 또깍또깍 똑딱이 가발을 떼어내자 여자아이는 초라한 비포 상태로 돌아왔다. 여자아이는 한층 더 다급해진 얼굴로 윤자를 바라보았다. 윤자는 어쩌나 보려고 또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도 여자아이는 가볍게 단념하고 돌아섰다. 자존심이 강해보였다.
그러고 3개월이 지나 윤자는 결국 여자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휠체어를 쓰게 된 경호를 위해 방문턱을 없애고 거치적거리는 사물을 모두 치웠지만 방 안에 틀어박힌 경호가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윤자가 잠시 꽃가게를 돌아보고 오는 날에는 경호가 거실에 나왔던 흔적을 남겼다. 경호에게 필요한 건 간병인이 아니라 대화 상대인 듯했다. 윤자가 여자아이에게 전화를 건건 그 때문이었다. 여자아이는 서너 번이나 번호를 남겨서야 전화를 받았다. 여자아이는 윤자도 경호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여전히 일거리를 못 찾은 건지 마침 다른 일자리로 옮길 참이었는지 당장 윤자의 집으로 찾아왔다. 윤자가 빈방 하나를 내주자 여자아이는 꽤나 만족스러워 했다.
9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즐거운 쇼핑 되세요.
빨간 제복이 문 옆으로 비켜섰다. 빨간 제복의 눈동자가 인조 눈썹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진한 커피향이 밀려들어왔다. 문이 닫힙니. 등 뒤로 빨간 제복의 코맹맹이 소리가 엘리베이터 문에 잘렸다. 낯익은 풍경이 윤자의 눈에 가득 찼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커피숍이었고 다음으로 일식 식당, 중식 식당, 은행, 서비스센터, 수선실, 그리고 문화강좌가 열리는 강의실들이 줄줄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아이도 한결 밝아진 얼굴로 두리번거리며 두어 걸음 뒤에서 윤자를 따라왔다.
지하 주차장에서 곧장 9층으로 올라온 사람들은 쇼핑을 하러 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대개 문화센터 수강생들이었다.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진행하고 있는 강좌는 백여 개가 넘었다. 수필교실, 수채화교실, 디지털카메라교실, 요가 따위에 주부 수강생들이 몰렸다. 선착순으로 접수하면 댄스스포츠나 신바람 노래교실은 무료로 수강할 수도 있었다. 지난 삼 개월 동안 윤자는 이곳에서 경락 마사지를 배웠다.
윤자가 문화센터 접수대로 다가가자 비로소 여자아이가 입을 열었다.
“뭐 하시게요?”
“가끔 바람이나 쐬러 나오라고. 취미삼아 뭐 하나 배워두는 게 좋지 않겠어?”
윤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자아이는 등을 깊이 말아 강좌 전단지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가르마 자리가 조명을 받아 번들거렸다. 윤자도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서서 여자아이처럼 전단지를 훑어보았다. 여자아이는 검지손가락 끝으로 전단지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손등에 붙어있는 사마귀는 손독이 올라 벌겋게 성이 나 있었다.
여자아이가 선택한 건 뜻밖에 양재 강좌였다.
“퀼트도 있어.”
윤자가 여자아이의 퀼트가방을 보며 말했다.
“담에 수선이라도 해먹고 살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여자아이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말하고는 입술을 야무지게 오므려 닫았다. 윤자는 꽃가게 문 닫는 시간에 맞춰 수강증 두 장을 끊었다. 윤자가 지갑을 열어 수강증을 끼워넣고 있는 동안 여자아이는 핸드폰 폴더를 열어 발신번호를 보고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면서 윤자는 여자아이에게 간편한 트레이닝복 한 벌과 후드 티 한 장, 그리고 모자 하나를 사서 들려주었다.
* * *
멀리 인수봉이 보이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경호는 벤자민과 치자나무에 물을 주었다. 하이포넥스가 섞인 물을 분무기에 가득 채워서 잎사귀 하나하나를 뒤집어가며 물을 적셨다. 분무를 할 때마다 경호는 고운 모시수건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볕이 밝고 따뜻한 날에는 모시 위에 엷은 무지개가 내려앉기도 했다. 무지개 너머로 경호의 훤한 이마가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윤자가 꽃가게에 가고 나면 경호는 이렇게 어김없이 베란다로 나와 화초를 돌보았다. 여자아이가 온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돼가고 있었지만 여자아이는 여전히 경호를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윤자 말이, 경호는 전문대를 나와 꽃사진을 찍으러 다녔다고 했다. 야생화도감을 만드는 도중에 산에서 실족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화초를 대하는 경호의 태도에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경호는 잎이 새로 돋는 화초는 볕이 잘 드는 쪽으로 돌려놓았고, 잎은 푸른데 시들시들한 화초는 그늘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잎이 누렇게 뜬 화초는 분갈이를 해주었고, 마른 잎은 손으로 툭툭 털어 떨구어냈다. 경호가 화초에 가위를 대는 일은 결코 없었다.
“식물에도 감정이 있어요.”
경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그걸 기억하기도 해요.”
여자아이는 가만히 경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화초를 다루는 경호의 손길은 더없이 자상하고 너그러웠으며 그의 손을 탄 화초들은 어리광을 부리듯 베란다를 푸르게 뒤덮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호의 변덕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배달부가 문을 두드리는 시간은 언제나 열 시 반을 조금 지나서였다. 배달부는 경호의 이름을 꼭 두 번씩 부르며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다.
이경호 씨, 이경호 씨, 택배요.
집안의 적요를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소리였다. 경호가 화초에 물을 주는 동작은 그 순간에 멈추었다. 경호는 분무기를 겨드랑이에 낀 채 급히 휠체어를 돌렸다. 마치 배달부를 기다리느라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있던 사람처럼 행동이 눈에 띄게 민첩해졌다. 경호는 힘차게 휠체어 바퀴를 돌려 현관 앞으로 갔다. 그리고 상체를 깊이 숙여 팔을 뻗었다. 손잡이에 경호의 손이 닿자마자 문이 활짝 열렸다. 열린 문에 배달부의 몸이 가득 들어찼다.
배달부는 여자아이의 운동화와 경호의 슬리퍼를 밟지 않으려고 발로 살살 밀어내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깨에 이고 온 물건들을 쿵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배달부가 놓고 간 물건들은 햄, 소시지, 감자, 4킬로그램 짜리 양파 따위였다. 일주일에 한 번 경호가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 주문한 식품들은 꼭 그런 식으로 도착했다. 경호는 여자아이의 손을 빌리지 않고 여러 행보를 하여 주방으로 물건을 옮겼다.
한 달 만에 경호는 비정상적으로 살이 쪄 있었다. 식탐 때문이었다. 경호는 베란다뿐 아니라 주방마저 독차지하고 손수 요리를 하려고도 했다.
경호가 닭 매운탕을 끓이겠다고 해서 여자아이는 마트로 달려가 생닭 한 마리를 사다줬다. 경호는 싱크대에 물을 받아 닭을 담가놓고 흙 묻은 감자껍질을 벗기며 콧노래를 불렀다. 핏물 빠진 닭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쇠칼을 내리쳐 큼지막하게 토막을 내기도 했다. 양념에 닭을 재어놓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소시지와 양파를 기름에 볶았다. 냄비에 닭과 감자와 양파를 볶다가 물과 양념을 넣어서 끓이자 매캐한 매운탕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여자아이는 경호와 마주 앉아 조용한 식사를 했다. 경호는 이를 전부 드러내며 닭뼈에 붙은 살을 발라먹었다. 오돌뼈를 입 안에 넣고 올강거리고 있다가 오도독 깨물어 먹는 모습은 자기몫의 먹이를 안전하게 사수하고 있는 야생동물 같았다. 경호의 눈 밑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걸 보고 여자아이는 경호에게 넵킨을 건네주기도 하고 물을 떠다 주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 경호는 휠체어를 몰고 베란다 앞으로 갔다. 여자아이도 얼른 설거지를 해놓고 경호에게 갔다. 여자아이에게 하루 중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 그 시간이었다. 경호의 등 뒤에서 여자아이는 윤자가 가르쳐 준 대로 마사지를 했다. 열 손가락을 모두 이용해 어깨를 주무르고 뒷목 뼈에서 양쪽으로 반 뼘씩 떨어진 자리, 견정에 지압을 줬다. 여자아이가 견갑골 안쪽에 있는 견외유를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렀다가 둥글게 굴리고 있을 때였다. 경호가 물었다.
“홈쇼핑 광고모델 했다면서요? 그 전엔 무슨 일 했어요?”
경호는 포만감 때문에 기분이 썩 좋아져 있었다. 경호가 고개를 외틀어 여자아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여자아이는 입을 꼭 다물었다.
“똑딱이 가발 한 번 써볼래요?”
어쩐지 경호의 말투가 짓궂게 느껴져 여자아이는 입을 더 굳게 다물었다. 그러자 경호도 장난기를 거두고 입을 다물었다. 한참이 지나 경호의 입에서 넋두리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이젠 못본 척 할 것 같아요, 험한 바위틈에 핀 야생화 따위.”
여자아이가 마사지하던 손을 멈추자 경호가 연기하듯 과장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아아, 무슨 말이냐면, 나는 북한산 구석구석 야생화의 은신처란 은신처는 다 꿰고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무슨 말씀이냐 하면, 나는 나를 꽃향기에 취한 벌이나 나비쯤으로 착각하고 계셨다, 이 말씀이죠.”
경호는 스스로 자기를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열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쏟았다. 경호의 등뼈에서 중요한 혈점들을 찾아 지압을 하면서 제1흉추부터 제12흉추까지 차례로 짚어갔다. 경호는 순하게 등을 맡기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손가락이 경호의 열두 번째 갈비뼈를 따라가며 세심하게 지압을 하고 있을 때 경호가 가만히 여자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여자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경호의 엄지손가락이 여자아이의 손목을 부드럽게 쓸고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꽃들이 있어요. 사루비아, 분꽃, 채송화, 패랭이. 어디 조그만 시골 마당에 그 꽃들의 씨를 뿌리고 싶어요. 담 밑에 맨드라미와 해바라기도 심고 싶고. 나팔꽃 씨를 심어 싹이 트면 줄을 매달아주고도 싶고.”
경호가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긴장했다. 손목을 잡고 있는 경호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경호는 뼈가 부러질 듯 억세게 여자아이의 손목을 잡은 채로, 그러나 다정하고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널 조금만 더 잘 알게 되면 안 되겠니?”
여자아이가 경호의 손을 떼어내려 하자 경호의 손아귀는 더욱 단단하게 옥죄어 들었다. 여자아이가 뒤로 물러서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경호는 놓아주지 않았다. 차라리 저항하지 않자 그제야 경호의 손아귀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었다. 경호에게 잡혔던 손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생기고 살갗이 밀려 있었다. 경호가 또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일자리가 생기면 가도 좋아. 난 괜찮아. 나 이젠 식물처럼 강한 생존능력을 갖게 된 것 같아. 알고 보면 식물이 동물보다 강해. 북한산에 있는 참나무나 너도밤나무도 오백년 넘게 산 나무들이야. 아프리카에 있는 바오밥나무는 수천 년을 살지. 나 이젠 이 붙박이 생활에 익숙해졌어. 나도 나무처럼 살 수 있을 거 같아. 난 정말 괜찮아.”
여자아이는 얼른 돌아서서 신발장 옆에 있는 산세베리아 화분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산세베리아 옆으로 나란히 놓여있는 알로에, 제라늄, 카랑코에도 하나씩 욕실로 들여다 놓고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볕이 들지 않는 곳에 놓아둔 다육식물들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았다. 일요일에 윤자와 함께 화분을 들어다 욕실에 늘어놓고 물을 흠뻑 주었다. 다육식물들은 성장을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물을 한 번씩 줄 때마다 도톰하게 잎의 살을 찌웠다.
여자아이가 다시 욕실에서 나와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경호는 고개만 외틀고 여자아이의 발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등으로 방문을 닫았다. 딸깍. 방문 볼트 채워지는 소리가 차갑게 들렸다. 마침표 같은 소리. 거절하는 소리. 여자아이가 이번에는 엄지손가락 끝으로 손잡이 가운데에 있는 잠금 버튼을 눌렀다. 따깍. 마음의 빗장을 채우는 소리. 문 밖에서는 경호의 휠체어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자아이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가만히 핸드폰 폴더를 열어 귀에다 댔다.
“여보세요? 간병인 좀 쓰려고 하는데요. 자격증은 있는 거죠? 여긴 목동인데…….”
여자아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경호가 문 밖에서 방문을 노크했다. 따깍따깍,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도 들렸다. 마침내 사나워진 경호가 방문을 주먹으로 쾅쾅 치기 시작했다.
여자아이가 문을 열어주었다. 경호의 표정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경호가 원망하는 눈빛으로 여자아이를 바라보고 있어서 여자아이는 경호의 눈을 피했다.
경호가 휠체어를 거칠게 밀어 베란다 앞으로 갔다. 어느새 경호의 손에는 가위가 들려 있었다. 경호는 베란다 밑에서 제멋대로 뒹굴고 있는 식물들의 가지를 가위로 싹뚝싹뚝 끊어냈다. 다육식물들의 굵은 잎들도 툭툭 떨어져나갔다.
“식물의 세계가 공존하고 상생한다고? 웃기지 말라고 해. 다 미화하는 거야. 이놈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내 눈엔 낱낱이 보여. 아무데서나 이빨을 드러내는 동물들은 순진하기나 하지. 이놈들은 음흉해. 이건 평화가 아니라니까. 서로 시기하고 짓밟으려고 해. 너무 교묘해서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야. 그렇지만 내 눈엔 다 보인다고. 오백년 산 참나무, 너도밤나무는 정말 무서운 놈들이야.”
경호의 심사는 잔뜩 뒤틀려 있었다. 여자아이는 방문 앞에 서서 식물들의 줄기가 처참하게 잘려나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카랑코에 잎 하나가 간신히 줄기에 붙어 있다가 툭 떨어졌다. 신병이 한바탕 경호의 영혼을 훑고 지나간 듯했다. 한참 뒤에야 경호가 난동을 멈췄다. 잠잠해졌다. 죽은 짐승의 다리가 관성에 의해 옴죽거리듯 기운이 다한 경호가 말을 똑똑 끊어내고 있었다.
“주제넘어. 감정을 기억하기까지 하다니. 감히 질투를 하다니.”
울음딸국질 같은 경호의 목소리가 길게 여운을 남겼다. 정적이 흘렀다.
경호와 여자아이는 불 켜는 것도 잊고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경호는 평소처럼 노을 지는 인수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경호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 전에 하던 대로 열 손가락을 모두 이용하여 경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진심으로 경호를 위로하고 싶었다. 경호의 등은 물먹은 다육식물처럼 통통하게 살이 쪄 있었다. 등뼈가 잘 잡히지 않았다. 여자아이의 두 엄지손가락은 경호의 척추 자리를 찾아가며 제12흉추부터 제1흉추까지 차례로 짚어 올라갔다.
“미안해요.”
경호가 다정하게 말했다. 다정한 경호의 목소리는 습관처럼 여자아이를 또 긴장시켰다. 여자아이는 말없이 손가락을 세워 경호의 어깨 양쪽에 있는 견정을 눌렀다. 두 손바닥을 붙여 가볍게 근육을 털어내기도 했다. 그 때 여자아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드릴로 벽에 구멍 뚫는 소리를 내며 핸드폰이 나무탁자 위를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여자아이가 핸드폰을 받지 않자 경호가 몸을 살짝 틀고 조용히 말했다.
“전화 받아 봐요. 나 상관하지 말아요.”
하지만 경호는 이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렵하게 휠체어 바퀴를 돌려 핸드폰 있는 데로 가고 있었다. 경호의 눈이 활활 타고 있었다.
* * *
윤자는 꽃가게 문을 일찍 닫고 문화센터에 왔다. 여자아이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일주일에 두 번 윤자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여자아이를 만나 함께 집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무슨 일인지 여자아이 얼굴이 자꾸 어두워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한번은 윤자가 주문받은 화분이 있어 여자아이에게 혼자 문화센터에 가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날 윤자는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수업이 끝날 시간에 맞춰 백화점으로 갔다. 마침 여자아이가 수업을 마치고 뒷문으로 나오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몹시 지쳐 있었다. 여자아이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얹고 있어 윤자도 무심코 여자아이의 뒤를 좇았다.
여자아이는 가전제품이 있는 8층을 그냥 지나고, 가구전시장이 있는 7층도 그냥 지나고, 아동복이 있는 6층도 그냥 지나 스포츠용품이 있는 5층에서 내렸다. 각 층마다 무전기를 손에 쥔 백화점 매니저들이 돌아다녔다. 여자아이는 다시 스포츠 의류 매장을 그냥 지나고, 스포츠화 매장도 그냥 지나고, 인라인스케이트 매장도 그냥 지나 헬스기구 전시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둘러보고 가세요.
매장 직원들이 통로로 나와 여자아이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한 남자가 이클립스 발판에 올라가 정면에 있는 전신 거울로 팔과 다리의 동작을 비춰보았다. 그 모습을 본 매장 직원이 남자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이클립스를 지나 런닝머신과 헬스 싸이클 사이를 가로질러 거울 앞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물체 앞으로 걸어갔다. 안마의자였다. 여자아이는 꽃무늬 퀼트 가방을 가슴 쪽으로 바짝 당겨 안고 검은 물체의 품에 몸을 깊숙이 뉘었다. 리모콘의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가죽 시트 속에서 여러 개의 주무름 롤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아이의 굽은 등과 어깨, 허리가 연체동물의 것처럼 출렁거렸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여자아이는 힘센 물살에 떠내려가는 시신 같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 후였다. 그날 양재강사는 재단대 위에 새로운 패턴 여러 장을 펼쳐 놓았다. 그 중에서 윤자는 66사이즈를, 여자아이는 55사이즈를 찾아냈다. 여자아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주색 아세테이트 원단에 눈을 바짝 대고 무늬와 결을 살핀 뒤 왼쪽 손목에 핀쿠션을 끼웠다. 그리고 원단 위에 시접분을 여유있게 두고 패턴 자리를 잡았다. 족두리꽃 같은 핀쿠션에서 하얀 구슬핀 하나를 뽑고 그것으로 옷감 위에 패턴을 고정시키기까지 여자아이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런데 가봉을 하면서 여자아이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기본 패턴을 응용해서 보트네크형 민소매 원피스를 만들고 있었다. 어깨가 처져있는 여자아이는 기본 패턴의 어깨선과 진동둘레선을 1.5센티 가량 내려야 했다. 게다가 등이 굽고 날개뼈가 돌출해 있어 등품은 양쪽 1센티씩 키워야 했다. 가봉은 실표뜨기 한 옷감을 몸에 걸치고 강사한테 수정받는 것이었는데 그때 여자아이는 등판이 운다는 지적을 받았다.
“등이 많이 굽었네요.”
양재 강사가 여자아이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말했다. 강사는 옷감이 우는 곳을 찾아내어 핀으로 주름을 잡았다. 가봉하면서 웬만한 단점은 그렇게 주름으로 간단히 커버되었다. 여자아이는 곧은 철근을 박아놓은 마네킹처럼 양 팔을 조금 벌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에 수강생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가만히 보니 여자아이의 팔죽지 부분에 나팔꽃 같은 멍이 하나 있었다. 민소매 옷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멍이었다. 수강생들의 시선이 어느새 그 보랏빛 멍 자국에 모아졌다. 그 멍을 볼 수 없는 사람은 여자아이뿐이었다.
가봉이 끝난 옷들은 집으로 가져가서 미싱으로 본봉을 해오면 됐다. 여자아이가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윤자는 여자아이의 벗은 몸을 힐끗 보았다. 가리비 껍질 같은 브래이지어 가운데에 가슴골이 예쁘게 패어 있었는데 왼쪽 쇄골뼈 아래에 멍이 하나 더 눈에 띄었다. 여자아이가 얼른 옷자락을 내렸다. 거기 핀 나팔꽃을 본 사람은 윤자뿐이었다. 윤자는 비로소 여자아이와 경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눈치 챘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 있었다. 강의실에 너무 일찍 와버린 윤자는 뒷문을 돌아보며 여자아이가 오기를 지루하게 기다렸다. 양재 강사가 먼저 새로운 패턴을 한 아름 안고 앞문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안고 온 패턴은 슬랙스 패턴이었다. 윤자는 77과 55사이즈 패턴을 찾아 들고 몇 번이나 뒷문을 돌아보았다. 수업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여자아이가 뒷문으로 들어왔다. 윤자가 빨리 오라고 손을 흔들자 여자아이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평소처럼 여자아이는 원단 위에 슬랙스 패턴을 놓고 구슬핀으로 패턴을 고정시켰다. 여자아이의 왼쪽 손목에는 어느새 예쁜 족두리꽃이 피어있었다. 여자아이가 봉제 가위를 집어 들고 흰색 쵸크 선을 따라 옷감을 오리기 시작했다. 가윗날에 형광등 불빛이 차갑게 흘렀다. 여자아이가 가위질을 멈추고 원단을 짚고 있던 왼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사마귀 위로 가위가 살짝 지나가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사마귀가 떨어져나갔다. 사마귀 자리에 금낭화 꽃잎 같은 연분홍 속살이 드러났다. 그 위로 핏방울이 꽃술처럼 맺혔다.
윤자는 얼른 헝겊 쪼가리로 여자아이의 손등을 감쌌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들고 여자아이의 손을 거머쥔 채 밖으로 나왔다. 여자아이가 말없이 따라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윤자가 지하 3층 버튼을 눌렀다. 헝겊쪼가리가 여자아이의 손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무슨 일 있었구나.”
여자아이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여자아이의 퀼트가방 속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여자아이가 가방을 열어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을 꺼내 쥔 손은 또 왼손이었다. 손등에 붙어있는 헝겊 쪼가리가 바르르 떨렸다.
윤자가 여자아이에게 말했다.
“받아보지 그래.”
여자아이의 손이 망설이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며 윤자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 틈에 여자아이는 핸드폰 폴더를 살짝 열었다 닫았다.
달팽이관 같은 출구 끝에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주차장을 벗어나자 햇빛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햇빛 가리개를 내렸다. 햇빛 가리개 안쪽에 붙은 쪽거울로 여자아이가 보였다.
여자아이도 쪽거울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생각난 듯이 여자아이는 허벅지 위에 놓인 퀼트 가방 속에 두 손을 넣고 부스럭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똑딱이 가발을 꺼냈다. 또깍또각. 여자아이는 두 눈을 치뜨고 쪽거울을 보면서 손가락 끝으로 머리에 똑딱이 가발을 붙였다.
“수종사라고 들어봤어요? 거기 경치가 좋다던데.”
여자아이가 표정 없이 중얼거렸다. 윤자가 여자아이를 돌아보았다. 여자아이는 홈쇼핑 광고 모델처럼, 사십오도 각도 위에서 카메라가 보고 있는 것처럼 쪽거울을 보면서 웃는 표정을 만들어보고 있었다.
“너, 떠나고 싶은데 못 떠나고 있는 거니?”
윤자가 앞을 보고 말했다. 윤자와 여자아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는 이미 6번 국도를 타고 양평 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수종사로 가려면 팔당터널 네 개를 지나 봉안터널을 빠져나오면서 45번 국도 청평 방향으로 갈아타야 했다. 그리고 북한강변을 끼고 가다가 조안 보건지소를 끼고 돌아 수종사가 보일 때까지 계속 달려야 했다. 줄곧 창밖만 내다보고 있던 여자아이가 한참이 지나 입을 뗐다.
“내려주실래요?”
차는 아직도 6번 국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데 어딘지는 확실치 않았다. 윤자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근데 너, 등이 많이 굽었대. 어깨 좀 쭉 펴고 다녀. 가끔 어깨 뒤쪽 견정도 눌러주고. 몸에서 에너지가 생기는 우물이라고 해서 견정이라 그러거든. 그리고 스트레스가 생기면 합곡을 자꾸 눌러줘. 거기, 사마귀 있던 자리 말이야.”
여자아이가 똑딱이 가발을 머리에 붙인 채 윤자를 한 번 돌아보고 멋쩍게 웃었지만 웃는 얼굴이 울상이었다.
“죄송해요.”
“내가 더 미안하다.”
여자아이는 얼른 차 문을 열고 결박에서 풀려나기라도 한 것처럼 차 밖으로 몸을 빼냈다. 그리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영락없이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퀼트 가방이 여자아이 어깨에 매달려 대롱거렸다.
윤자는 여자아이가 수종사로 갈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아이는 6번 국도를 따라 계속 걷다가 봉안터널에서 오른편 출구로 빠져나가 조안인터체인지에서 앞으로 쭉 걸어갈 게 틀림없었다. 진중삼거리에서 45번 국도로 접어들어 북한강변을 끼고 또 계속 걸어가다가, 쉬다가 걷다가, 아무튼 수종사가 보일 때까지 여자아이는 걷고 또 걸을 거라고 생각했다.
여자아이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쯤, 윤자는 언젠가 똑딱이 가발을 보면 경호도 여자아이가 그리워지겠구나 생각했다. 윤자는 시동을 걸고 유턴 길을 찾아 엑세레터 패달을 밟았다.
이주미 / 『소설시대』로 등단했으며, 현재 동덕여대 전임강사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