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역학동 원문보기 글쓴이: 재즈
|
태초력
태초력(太初曆)은 중국의 한(漢) 무제(武帝, BC 156~BC 87) 때인 기원전 104년에 제정되어 실시된 역법(曆法)이다. 중국에서 사용된 통일된 공식 역법(曆法)의 시초이며, 천체력(天體曆)으로의 발달을 가져와 역법(曆法)의 기준을 제시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는 태초력(太初曆)의 제정 이전에 ‘고육력(古六曆)’이라 하여 황제력(皇帝曆), 전욱력(顓頊曆), 하력(夏曆), 은력(殷曆), 주력(周曆), 노력(魯曆) 등 여섯 가지의 역법(曆法)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고육력(古六曆)은 모두 옛 제왕이나 왕조의 이름을 붙이고 있지만, 주(周)와 진(秦) 시대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최초의 중앙 집권적 통일 국가인 진(秦)은 기원전 222년 이후 전욱력(顓頊曆)을 국가의 공식 역법(曆法)으로 사용하였고, 한(漢)도 이를 계승하여 사용하였다. 고육력(古六曆)은 모두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으로서 365일과 1/4일을 1회귀년으로 하고 있어 ‘사분력(四分曆)’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29와 499/940일을 한 삭망월(朔望月)로 하고 19년에 7개의 윤달(leap month)을 두었다. 또한 각기 한 해의 첫 달인 세수(歲首) 등을 달리 두고 있는데, 전욱력(顓頊曆)은 동지(冬至)가 있는 달의 앞 달인 건해월[建亥月, 하력(夏曆)의 10월]을 한 해의 첫 달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욱력(顓頊曆)을 포함한 이들 고육력(古六曆)은 해와 달의 운행에 의한 단순한 음양력(陰陽曆)으로서 일식(日蝕)과 월식(月蝕) 등의 천문 관측과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나타났다. 그래서 한(漢) 무제(武帝) 때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을 담당하는 태사령(太史令)의 직위에 있었던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 등이 역법(曆法)의 개혁(改革)의 주장하여 태초력(太初曆)이 제정되었다.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는 태사령(太史令) 사마천과 화중대부(和中大夫) 손경(孫卿), 역관(曆官)인 등평(鄧平), 낙하굉(落下閎), 그리고 천문학가(天文學家)인 당도(唐都) 등 20여명이 역법(曆法)의 개혁(改革)을 주장하여 무제(武帝)가 이듬해를 태초(太初) 원년(元年)으로 하는 조서를 내리며 사마천(司馬遷) 등에게 새로운 한력(漢曆)을 편수하도록 명령하였고, 이에 등평(鄧平)과 민간의 역서(曆書) 연구가 20여명을 이 일에 참여시켜 새로운 81분력(分曆)을 완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초력(太初曆)을 ‘81분력(分曆)’이라고 하는 것은 한 삭망월(朔望月)의 길이를 29와 43/81일, 곧 2391/81일로 보았기 때문이다. 태초력(太初曆)은 전욱력(顓頊曆)에서 하력(夏曆)의 10월인 건해월(建亥月)을 세수(歲首)로 하던 것을 고쳐서 하력(夏曆)의 정월(正月)인 건인월(建寅月)을 한 해의 첫 달인 세수(歲首)로 하였다. 그리고 동지(冬至)를 11월로 고정하였으며, 중기(中氣)가 있는 달을 윤달로 하는 무중치윤법(無中置閏法)을 채택하였다.
태초력(太初曆)은 단순히 해와 달의 운행에 근거했던 고육력(古六曆)과는 달리 천문 관측 기술과 역법 계산 능력의 발달에 기초해 일식(日食)과 월식(月食), 그리고 행성의 운행을 계산하는 방법이 포함된 천체력(天體曆, astronomical ephemeris)으로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치윤법(置閏法)과 연대배치법(連大配置法)의 규칙을 확립하여 통일된 역법(曆法)의 실시를 가능케 하였고, 역법(曆法)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치윤법(置閏法)은 윤년(閏年)이나 윤달을 넣어 보정하는 방법이며, 연대배치법(連大配置法)은 작은달(小月, 한 달이 29일인 달)과 큰달(大月, 한 달이 30일인 달)을 교대로 했을 때 나타나게 되는 평균 삭망월(朔望月)과의 오차를 줄이기 위해 연속되는 2개의 큰달인 연대월(連大月)을 배치하는 방법이다. 그 뒤 중국에서는 태초력(太初曆)에 기초해 천문 관측 기술과 계산 능력을 발달시켜 왔으며, 천문(天文) 관측값과 일치시키기 위해 청(淸)의 시헌력(時憲曆)에 이르기까지 수십 차례 개력(改曆)을 해 왔다.
그러나 태초력(太初曆)의 역서(曆書)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전한(前漢) 말기인 기원전 7년 유흠(劉歆, BC 53?~25)이 태초력(太初曆)을 수정해 만든 삼통력(三統曆)을 통해 그 내용을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삼통력(三統曆)은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그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삼통력(三統曆)은 동중서(董仲舒, BC 170?~BC 120?)의 역사 순환론을 역법(曆法)에 적용했으며, 《주역(周易)》의 괘(卦)와 효(爻)의 개념을 끌어들여 절기(節氣)와 삭망(朔望), 월식(月蝕)과 오성(五星, 목성·화성·금성·수성·토성) 등에 관한 기본 상수(象數)와 해석을 담고 있다. 하지만 삼통력(三統曆)은 28수(二十八宿)와 동지점(冬至點, winter solistice point)의 위치를 제외하고는 태초력(太初曆)의 수치를 그대로 쓰고 있어서 새로운 역법(曆法)이 아니라 태초력(太初曆)을 해석하고 부분적으로 보완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부에서는 삼통력(三統曆)은 역법(曆法)을 구성하는 3통(三統)의 원리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황제의 연호(年號)에서 비롯된 태초력(太初曆)을 후대(後代)에 다르게 부른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서 태초력(太初曆)은 실질적으로 후한(後漢) 장제(章帝, 57~88) 때인 기원후 85년 사분력(四分曆, 고육력과 구분하기 위해 후한사분력이라고도 함)이 제정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사분력(四分曆)은 동지점(冬至點)의 위치 등을 수정하였고, 24절기의 태양 위치 등에 대해 태초력(太初曆)보다 더욱 정확한 수치를 사용하였다.
태음태양력
순태음력은 계절에 전혀 관계없는 역법이었다. 그러나 태음태양력에서는 달의 차고 기울기를 주로 하면서 태양의 운행에 맞춰보려고 노력한 역법이다. 이 역법은 달과 태양의 두 운행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므로 매우 복잡하게 되기는 하지만, 실지로는 고대의 여러 나라와 여러 민족이 이 역법을 채택하였다. 물론 1태양년이 12삭망월과 정확히 일치한다면 태음력 ·태양력 ·태음태양력의 구분이 없게 되겠지만, 실제로는 태양년과 삭망월과의 비는 12.36827(=365.24220÷29.53059)이다.
이 소수부 0.36827(월)은 10.875일인데 이것이 쌓이면 한 달을 이루고 평년은 12달의 1년, 윤년(閏年)에는 13달의 1년을 만든다. 이렇게 덧붙인 한 달을 윤달이라고 한다. 계산에 의하면 윤달의 수는 8태양년에는 3개월을, 19태양년에는 7개월을, 27태양년에는 10개월을 두어야 역년(曆年)과 계절이 맞는다. 이들 8년법(99삭망월) ·19년법(235삭망월) ·27년법(334삭망월)의 총일수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8태양년= 2921.9376일, 99삭망월=2923.5284일 19태양년=6939.6018일, 235삭망월=6939.6887일 27태양년=9861.5394일, 334삭망월= 9863.2171일 이 중 19태양년은 235삭망월의 길이와 매우 같음을 볼 수 있다.
이 일수 6940일을 중국에서는 장(章)이라고 하여, 이미 BC 600년경인 춘추시대의 중엽에 발견한 주기이고, 그리스에서는 BC 432년경에 메톤주기라고 하여 아테네의 메톤에 의하여 발견된 주기이다. 그리하여 19년 동안에 윤달을 7회 넣는 방법이라 하여 19년 7윤법(十九年七閏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윤달을 어디에 두느냐가 또한 문제가 된다. 윤달을 6월 또는 12월 다음에 두는 방법과, 그렇지 않고 임의의 위치에 두는 방법도 있다.
⑴ 바빌로니아력:BC 2500년경에 이미 이 역법이 확립되었다. 서부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지방에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두 강이 흐르고 있는데, 바빌로니아문화가 이곳에서 싹이 트고 발전되었다. 이곳에서 살던 칼데아 사람들은 역의 편찬과 점성술(占星術)에 이용하기 위하여 천문을 관측하였다. 그들은 1삭망월이 29일 12시 44분 7.5초라는 것을 알았고, 일식(日蝕)과 월식에서 사로스주기가 223삭망월, 즉 18년과 11일임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월초를 초승달이 나타난 날로 정하고 한 달을 원칙적으로 30일로 하였으며 1년을 12개월, 첫째 달에는 춘분(春分)이 들게 하고, 윤달은 연말 또는 제6월 다음에 넣었다. 후에 BC 529년에는 8년 3윤월법(八年三閏月法)이 채택되었고, BC 504년에는 27년 10윤월법이, BC 383년부터는 19년 7윤월법이 채택되어 이것이 유대력에 옮겨졌다.
⑵ 유대력:이것은 고(古)유대력에서 변천해 나온 역이다. 고유대력은 BC 6세기 말까지 유대 민족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구약성서에 의하여 약간 그 성격을 알 수 있다. 즉 초승달을 보고 이 날을 월초로 정하고, 역일(曆日)은 저녁부터 시작하되 1년을 12개월 또는 13개월로 하는 태음태양력이었다. 이 역에서 뚜렷한 사실은 7일의 주(週)가 있고 제7일째 날을 안식일(安息日)이라고 하여 그리스도교회를 통하여 전세계로 퍼졌다고 한다. 후에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 태양력으로 옮겨진 일도 있었지만, 4세기경부터 역법이 확정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쓰이고 있다. 현행력에서는 하루의 시작은 오후 6시부터이고, 연초는 원칙적으로 추분(秋分) 후의 월초를 취한다. 치윤법(置閏法)은 19년 7윤법이었으며, 월(月)의 대소는 대체로 번갈아 두었다.
⑶ 그리스력:고대 그리스에서는 도시마다 독특한 역이 있었고, 시대마다 다른 역이 쓰였는데 모두 태음태양력이었다. 치윤법도 8년 3윤법, 또는 19년 7윤법 등 구구하였다. BC 460년에 천문학자 오이노피데스는 730태음월과 59태양년이 같다고 둠으로써 1년을 365.373일로 두었으나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BC 400년경에 채용된 19년 7윤법은 1태양년으로 365.2632일, 1삭망월로 29.53192일이었다. 윤달의 위치는 6월 다음이 되고, 월초는 초승달이 처음으로 나타난 날로 하였다. 그리스에서는 19년법 이외에 8년법도 쓰였다. 8년법은 8력년을 99력월로 하고, 그 동안의 일수를 2922일로 정하여 1년을 365.2500일, 1력월을 29.51515일로 하는 방법이었다. 이미 말한 19년법도 실제와 상당히 다르다고 하여 76년법이 대두된 일이 있었다. 76년법은 76태양년에 28윤월을 두는 방법인데 BC 334년경에 칼리푸스에 의해 고안되었다. 그 총일수를 27759(=6,940×4-1)일로 하였는데, 이렇게 하면 1력년과 1력월은 각각 365.2500일이고 29.53085이다.
이 역은 BC 330년부터 천문학자 간에서 실시되었다고 한다. 그 후 BC 125년경 히파르코스에 의하여 304년법이 고안되었다. 이것은 76년(=19×4)의 일수를 111035(=27759×4-1)일로 하였는데, 이것에 의하면 1력년은 365.24671일, 1력월은 29.530585일로 되어, 실지에 많이 접근된 값을 얻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실용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⑷ 인도력:BC 6세기경까지는 역일제도가 구구하였는데 27일의 항성월(恒星月) 12월(324일)을 1년으로 하는 평년과 13월(351일)을 1년으로 하는 윤년이 쓰이기도 하였고, 30일의 큰 달 6개, 29일의 작은달 6개를 합쳐서 12삭망월(354일)의 1년을 쓰기도 하였고, 30일씩 12월을 1년으로 쓰기도 하였다. BC 6세기∼AD 2세기의 기간에는 1성수년(星宿年:12恒星月) 32751/67일, 1태음년 35412/62일, 1세간년 360일, 1태양년 366일로 보았으므로 5태양년=60태양월=61세간월=62삭망월 =67성수월 의 관계가 있다.
이 일수는 모두 1830일이다. 인도력의 성격은 3∼12세기 동안에 8세기 상반기인 당(唐) 현종(玄宗)때에 구담실달(瞿曇悉達)에 의하여 중국문자로 번역된 구집력(九執曆)에 의하여 대략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구집(九執)이란 일월과 오성 및 두 은성(隱星)을 가리켜 말하는데, 두 은성은 라후(raku:羅喉)와 케도(ketu:計都)이다. 라후와 케도는 중국식 역에서는 없는 말이고, 범어(梵語)에서 온 말인데 황도(黃道) ·백도(白道)의 승교점(昇交點)과 강교점(降交點)을 가리킨다. 구집력에서는 657년 2월 춘분삭을 역원으로 하고, 이 해 춘분을 세수(歲首)로 하였다.
여기에서 상원부터의 적월(積月) M은 적년을 y, 연초 이후 경과한 월수를 m이라고 하면 M = 12 y + m + [( 12 y + m )× 7/228] 로 주어진다. 분수7/228 은 228개월의 삭망월(윤달이 아닌 것)마다 7개월의 윤달을 넣어야 한다는 뜻인데, 이 식의 이면에는 19년 7윤법이 뒷받침하고 있다. 인도의 고대 역법은 인도 천문학에서 나온 것인데, 그 중의 하나인 구집력이 중국에 들어와서 대단히 미약하기는 하였지만, 중국에 인도문화가 전해졌다는 데 의의가 있다.
위식에서 [ ]는 228로 나눴을 때, 몫의 정수(整數)만을 취한다는 뜻인데 이 몫은 역원부터 필요한 날까지에 끼워넣어야 할 윤달의 수이다. 구집력의 우월한 점은 오늘날의 구면천문학(球面天文學)과 일맥 상통하고, 또 매우 이론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특히 주목할 것은 인도숫자의 소개와 사인표의 기재이다. 그러나 당대의 여러 역을 살펴볼 때 구집력에 의하여 받은 영향은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구집력은 단순히 인도역가(印度曆家)의 독점물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대의 학자는 과거의 관념에 집착하고 구태여 새로운 방법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주전원(周轉圓)의 이론이 이미 인도에서 알려져 있었지만, 그 이후 1000년이나 지난 명(明)나라 때에 이르러 서양과학이 들어와 비로소 주전원의 이론을 알게 되고, 삼각함수(三角函數)의 이론에 놀랐다고 한다.
⑸ 중국력:중국은 일찍부터 고도의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천문지식과 역의 기원도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와 함께 오래되었다. BC 2200년경 황제(黃帝) 이래 이미 하지와 동지, 춘분과 추분을 관측하여 정했으며, 주(周)나라 때에는 장(章)이라 하여 서양의 메톤주기와 같은 내용의 것이 서양보다 일찍 알려졌다. 중국력의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한(漢)나라 때의 태초력(太初曆)부터이다. 이 역은 BC 104년부터 188년간 쓰였는데 이후 청(淸)나라의 시헌력(時憲曆)까지 수십 종의 역이 쓰였다. 태음태양력에서 윤달을 삽입함으로써 역일과 계절이 맞도록 조정한다고는 하지만, 근 30일의 차이가 나기 쉽다. 이 때문에 역일과 계절에 차이가 크게 나타나지 않도록 1년의 길이에 24기(氣)를 정하고, 이것을 12절기(節氣)와 12중기(中氣)로 나눠서 배당한다.
여기에서 정월절은 정월의 절기이고, 정월중은 정월의 중기이다. 중기는 그 소속 달의 이름과 일치되는 음력달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하지 5월중이란, 하지는 5월에 들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망종(芒種) 5월절은 망종이 반드시 5월에 들지 않아도 음력달의 이름에는 하등의 변동이 없다. 망종 5월절은 대개 음력 4월 중순 이후 5월 중순에 들게 된다. 만일 하지 중기가 5월 말에 들고 그 다음달에 중기가 들지 않으면 이 달은 윤5월로 한다. 이렇게 중기가 들지 못하는 달을 윤달로 정하는 방법을 무중치윤법(無中置閏法)이라고 한다. 무중치윤법에 따르면 1년 중 어느 달에나 윤달이 들 수 있다. 무중월(無中月)에서는 그 앞 달의 말일 부근과 뒷달의 초승에 중기가 들고, 이 달에는 절기 하나가 들게 된다.
다시 말해서 1태양년을 12로 등분하면 1중기의 구간간격이 30.437일이고, 1삭망월이 29.531일이므로, 삭망월의 중앙에 절기가 들게 되면 그 달에는 중기가 들지 못하고 밀리는 수가 있다. 또 위의 두 값의 차 0.906일이 쌓여 33개월이 지나면 윤달 한 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와같이 1태양년의 시간 길이를 등분하여 그 평균값을 이용하여 24기를 매기는 방법을 평기법(平氣法)이라고 한다. 이 평기법은 동양에서 오랫동안 써왔다. 정기법(定氣法)은 청대인 1645년에 서양역법 시헌력의 채택과 함께 처음으로 쓰였고, 한국에서는 1653년(효종 4)에 채택된 시헌력을 통하여 쓰였다.
정기법은 천구상의 황도를 15°간격으로 24등분하고 각 등분점을 태양이 통과할 때를 24기의 입기(立氣)시각이라 하고 춘분점부터 동으로, 춘분 ·청명 ·곡우 ·입하 등의 순서로 매긴다. 이런 방법으로 입기 시각을 정한 것이 정기법이다. 태음태양력에서도 월(月)의 대소가 문제가 되는데, 순태음력의 경우와 같이 큰달과 작은달을 번갈아 배치하고 간간이 윤일(閏日)을 두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하면 역에서의 삭망과 실지의 삭망은 일치하지 않고, 평균삭망을 다룬 것이므로 이것을 평삭법(平朔法)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관측과 계산이 정밀해져서 현행의 역에서는 정삭법(定朔法)이 채택되고 있다. 정삭법에서는 1평균삭망월의 소수부 0.53059일의 처리가 문제로 된다.
계산에 의하면 이 소수부는 15개월 중에 큰달이 8개이거나 17개월 중에 큰달이 9개이거나 49개월 중에 큰달이 26개이거나, 801개월 중에 큰달이 425개 있어야 한다. 이들 중에서 뒤에 적은 것일수록 실제에 더 가깝다. 예를 들면 801개월법에 따르면 425÷801=0.5305868(일) 로 되어 0.53059에 매우 가깝다. 또 801평균삭망월의 길이는 0.5059×801=425.00259(일) 로 되어 큰달의 수를 425개나 두어야 하고 그나머지 0.00259일, 즉 3.7분이 오차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계산은 평균삭망월의 값에 관한 것이고 실제에 있어서 정삭법은 매우 복잡하다. 정삭법에 의하면 큰달이 4회, 작은달이 3회, 또는 이와 반대로 작은달이 4회, 큰달이 3회 계속되는 수도 있다. 정삭법이 현행력에 쓰이는 방법이다.
⑹ 한국에서의 음력(陰曆):한국의 민간에서 많이 쓰던 음력이란 태음태양력을 말한다. 한국은 중국 문화권 내에 속해 있어서 역에서도 중국력을 수입하여, 이것을 그대로, 또는 약간의 손질을 하여 우리의 역으로 써왔다. 그 중 백제에서는 중국에서 들여온 역법을 다시 일본에게 전달해 준 일도 있었다. 이들의 모든 역이 태음태양력이다. 각 시대별로 채택된 역법을 간단히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시대 674년(문무 14)에 대나마덕복(大奈麻德福)이 당나라에서 역술(曆術)을 배워와서 역서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역은 이순풍(李淳風)의 인덕력(麟德曆)일 것이라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적혀 있다.
인덕력은 당나라가 665년에 반포하여 그 후 64년간 쓰였던 역인데 1태양년을 489428/1340, 1태음월을 39571/1340이라는 일수를 주고 있다. 당시에는 소수(小數)를 다룰 줄을 몰라 이와같이 분수로 표현했는데 년과 월의 분모가 과거의 역에서는 달랐지만, 인덕력부터는 같은 값을 취하였다. 다음에 당나라 부인균(傅仁均)이 만든 무인력(戊寅曆)은 정삭법 때문에 넉 달이 연속 컸었지만, 인덕력에서는 진삭법(進朔法)을 써서 연4대월(連四大月)을 피하게 되었다. 진삭법이란 합삭 시각이 오후 6시 이후이면 다음 날을 음력 초하루로 정하는 방법이다.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서문(序文)에는 신라에서 대연력(大衍曆)도 쓰였다고 한다. 이 역은 인덕력의 일식예언이 맞지 않아 729년에 일행(一行)이라는 중이 엮었는데, 태양운동의 부등속을 나타내는 주요항인 중심차(中心差)를 밝혔다. 대연력은 729년 동안이나 채택된, 당의 대표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후주서(後周書)》와 《수서(隋書)》의 각 <열전(列傳)>에 백제는 송나라의 원가력(元嘉曆)을 썼고 인월(寅月)을 연초로 한다고 적혀 있다. 백제의 기록과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일본에게 역박사를 보내어 역법을 알려준 후, 일본에 원가력이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백제가 원가력을 썼다는 증거이다. 원가력의 흔적은 무령왕릉(武寧王陵)의 지석에 있다. 원가력은 송나라 때 하승천(何承天)이 만들어서 445년 이래 65년간 송나라에서 채택되고 백제에서는 건국 초부터 계속 이 역을 썼다. 1일의 시작은 밤중이 되고, 갑자삭 오전 0시, 우수(雨水) 입기시각을 1년의 시작으로 하였다. 원가력에서는 평기법과 평삭법이 쓰였다. 고려 태조 때에 고려에서는 당의 선명력을 이어받아 썼다고 하는데 이것은 나당(羅唐) 사이의 국교로 보아 830년경에는 신라에서도 선명력이 사용되었으리라고 믿어진다.
선명력에서는 태음시차(太陰視差)를 고려하여 일월식 계산에 약간의 진보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특별한 과학사상이 새로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역의 상원(上元)은 갑자 야반 삭단 동지(甲子夜半朔旦冬至)를 취하였다. 선명력은 고려시대에도 건국 이래 충선왕까지 근 500년간 쓰였다. 중국에서는 당(唐) ·송(宋)이 자주 개력하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 말기부터 고려 말기에 이르는 약 500년간 선명력을 계속 써왔다. 그러나 이 역법에 오차가 생겼을 때 고려에서는 해결하려고 매우 애썼을 것이다. 1052년(문종 6)에 왕이 태사(太史)에게 명하여 십정력(十精曆) ·칠요력(七曜曆) ·견행력(見行曆) ·둔갑력(遁甲曆) ·태일력(太一曆) 등을 편찬시켰지만, 그 내용과 채택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후 1281년(충렬 7) 원나라 사신 왕통(王通)이 수시력(授時曆)을 가져왔었고, 이어 충선왕(재위 1309∼14) 때에 최성지(崔城之)가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수시력을 얻어와 이것을 준용하게 하였다. 원나라에서는 이 역을 1280년부터 88년간 채택하였다. 수시력은 곽수경(郭守敬) ·허형(許衡) ·왕순(王恂) 등이 여러 관측기계를 제작하여 면밀한 관측과 정밀한 계산을 하여 엮은 역법인데 중국력으로서 최선의 역이라고 알려져 있다. 역원(曆元)을 너무 멀리 잡지 않고, 소수를 활용하여 1년의 길이가 점점 줄어든다는 소장법(消長法)을 채택하였다.
대통력은 이 수시력의 소장법을 없앤 것인데 1370년(공민왕 19)에 성준득(成准得)이 명나라에서 얻어왔다. 그러므로 대통력은 수시력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대까지 합치면 중국에서의 수시력의 수명은 근 500년이나 되며, 한반도에서는 1370~1652년(효종 3)의 약 350년간 쓴 셈이 된다. 이리하여 중국식의 역법은 끝났고, 그 뒤는 1653년(효종 4)에 서양역법인 시헌력이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시헌력에서는 처음으로 정기법(定氣法)이 채택되었고, 삼각함수에 의한 수식계산을 하였으며 천체운동에 관하여는 처음에는 이심원(離心圓:複合圓)의 사상을, 나중에는 타원궤도의 사상으로 전진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896년 태양력의 실시까지 쓰였다. 현재 태음태양력의 계산은 미국 해군관측소의 항해력국 발행의 미국 천체위치추산력과 항해력에 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