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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2: 지난해 12월 29일이었죠. 신년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정진석 추기경은 ‘오병이어’ 일화를 꺼냈습니다. 정 추기경은 “성경을 보세요.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불어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어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없어요. 그럼 뭘까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리신 기도를 듣고 감동한 사람들이 품 속에 숨겨둔 도시락을 꺼냈던 겁니다. 낯선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마음을 연 거죠”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현문우답’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얘길 처음 들었느냐고요? 그건 아닙니다. 그런 해석은 익히 들었죠. 그건 일부 신학자와 아주 유연한 목회자들 사이에서나 오가던 얘기였죠. 설사 그렇게 생각하는 성직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공개 석상에서 ‘도시락’ 이야기를 밝히긴 쉽지 않은 거죠. 왜냐고요? ‘오병이어’ 일화는 예수님이 보이신 완전한 기적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칫하면 ‘십자 포화’를 맞기 십상입니다.
그런데도 한국가톨릭의 수장인 정 추기경은 “‘오병이어’ 일화에는 숨겨둔 도시락이 있다. 꽁꽁 닫힌 사람들의 마음을 연 것이 바로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글자 하나, 단어 하나라도 무의미한 게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 눈발이 날리더군요. 그 속에 서서 생각했습니다. ‘무엇이 추기경의 발언을 가능케 했을까.’ ‘무엇이 78세의 추기경으로 하여금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오병이어의 비밀을 밝히게 했을까.’
기사를 읽은 독자 반응도 흥미로웠죠. 어떤 사람은 “용기가 있다”“패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다른 이는 “진보적이시다”고 했어요. 과연 그럴까요. ‘현문우답’은 그게 ‘용기’ 때문도, ‘진보’ 때문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건 다름 아닌 ‘울림’ 때문이죠. 무슨 울림이냐고요? 깊고, 깊고, 깊은 묵상에서 우러나는 ‘울림’이죠. 그런 묵상에서 길어올린 ‘울림’ 속에 예수의 메아리가 온전히 담기는 법이니까요.
#풍경3: 정 추기경의 파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죠. “2009년은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이라며 ‘진화론’ 얘기를 정면에서 다뤘습니다. “신학과 과학의 영역은 별개”라며 논쟁 자체를 회피하는 신학자와 목회자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죠. 게다가 정 추기경은 우주의 생성과 빅뱅, 자연의 섭리와 신의 섭리를 함께 논하며 진화론을 다독거렸습니다. 진화론은 자연법에 관한 것이고, 자연법은 신의 섭리인 영원법의 일부라는 거였죠.
정 추기경은 진화론을 향해 ‘펀치’를 날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걸 껴안더군요. ‘현문우답’은 거기서 진리의 속성을 보았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진리는 모든 것에 통해야 한다는 거죠. 진리는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과학이든, 철학이든, 종교든, 천문학이든 말이죠.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진리의 탓이 아니겠죠. 인간의 탓이겠죠. 인간의 과학, 인간의 종교가 아직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정 추기경과의 인터뷰는 파격이자, 감동이었습니다. 그 파격과 감동의 뿌리는 ‘묵상’이었고요. 그게 예수의 울림, 예수의 메시지를 길어 올린 ‘두레박’이었습니다.
백성호 기자
첫댓글 진리는 어떠한 것에도 걸림이 없어야 한다. 참으로 그러네요.
백성호기자의 글에도 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깊은 묵상과 하나의 생각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에서 나오는 것이라 믿어집니다. 요숙님의 공감에도 공감이 갑니다. 시비분별은 진리의 것이 아닙니다. 걸림이 없고 주저함이 없이 말하고 행동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