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 산
사람들은 보통 태어날 때 유 무형의 재산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나는 선대로부터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춘궁기 그 어려운 시절에 서울로 전학을 가서 학교에 다녔으니 일찍부터 새로운 문화를 접하게 되어, 초등학교 시절은 모든 게 신기하고 대하는 것 마다 호기심을 자극하고 흥미로움의 전부였다.
1960년대 서울은 모든 게 혼란스럽고 중구(당시 서대문구) 만리동에 살 적에 염천교를 지나 서울역에 나가면 역 앞과 인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요즘 세대들은 짐작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의 극치였다. 지금처럼 넓은 대로도 아니고 전차가 지나가고 도동, 양동, 동자동(미군 부대) 일부 지역은 황철영이 발표한 ‘어둠의 자식’들 그대로였다.
인간의 일차적 해결은 첫째 먹고, 둘째 잠자리 그리고 가족을 챙기고 돌보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봉래 초등학교와 배문 중학을 다니던 꿈 많은 시절 어린 소년기에 나의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당황하게 된다. 시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관계로 수학(산수)과 음악이 항상 뒤처졌던 것 또한 사실이다. 다른 과목은 시험이 다 끝나면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는데 두 과목은 항상 중간에서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그 당시부터 내가 이다음에 어른이 되어 장가를 가게 되면 수학 잘하는 배필을 만나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그때 생성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은 우표수집(주로 쉬이트)이 학생들 사이에 유행처럼 일었고 신문(동아일보)에 우표발행 안내가 나오면 학교 마치고 서울 중앙우체국에 가서 줄 서는 것이 일이었고, 만약 시기를 놓치면 갈월동과 신문로에 있던 우취사에 가서 웃돈을 주고 우표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옛이야기지만 한강 다리가 한강철교 하나이던 시절이다. 여름이면 그 다리 중간에 있는 윤중 제 모래사장에서 여름 해수욕(민물)을 대신하는 즐겁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어렵게 청소년기를 보내게 되는데, 주로 방학을 이용하여 서울과 순천을 오가며 보냈다.
어머니가 유지관리 농사 짖던 농토와 많은 재물을 없앴다. 그 당시 재산에 대하여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다음에 자식에게 물질적 재산보단 정신적인 재산을 물려주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늦은 32세란 나이에 결혼하고 순천에서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30년 전엔 광양제철 특수 경기라 하여 사업이 번창하였다. 딸 ․ 아들 낳아 키우면서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 풍요를 주고자 두뇌를 향상 시키는 교육을 시작하였고 시간이 나면 서울을 구경시키고 여행을 하는데 할애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나의 수학 머리는 닮지 않고 모계 혈통을 이어받아 이공계에 진학하여 스스로 즐겁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어린 날부터 주입식 교육을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너희에게 물질적 재산을 물려주진 않겠다. 그러나 공부하는 데는 최선을 다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하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자식에게 물러줄 부동산과 재물이 빈곤하다. 두 아이 다 일찍 자립하고 본인들 스스로 직업을 선택하여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내 집에는 평생 공부하면서 모은 고서적만 가득하다. 그것도 필요로 하는 자식에게 문학 관련 서적(시집 등)을 제외한 책은 물러줄 심산이다. 이 모두 대를 이를 필요는 없다고 보며 다 비워내고자 한다. 우리 식구는 이제 각자 취미생활과 능력 사고력 등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동아, 50년 독자
“동아일보는 진보나 보수에 편향되지 않고 지금껏 진실을 위해 중립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50년 독자로 지켜봐 왔고 그동안 모아온 기사 스크랩이 명백한 증거입니다.”
허 근씨는 (61 ․ 전남 순천시 석현동) 서울 중구 봉래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64년 7월 15일 처음으로 신문을 구독하게 됐다. 경찰관이던 부친의 권유로 소년 동아(현 어린이동아) 창간 독자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 소년 동아에 실린 과학전시회 기사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 중고생 때는 집에서 부친이 보던 동아일보를 읽었다.
누나(68 ․ 허정남)가 기사 스크랩을 하는 것을 보고 문화 ․ 예술 기사를 오려 모았다. 그는 1966년 2월 13일 발행된 ‘순정효왕후 장례식 엄수’라는 동아일보 호외 스크랩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는 청년 시절 동아일보에 각종 사회 부조리를 제보해 받은 원고료로 신문구독료를 내고 책을 구입했다.
그는 1976년 강원도 원주에서 통신병으로 군 생활을 할 때도 상관에게 신문 구독을 정식 건의할 만큼 ‘신문 마니아’였다. 그는 일병 시절 용기를 내 1군 사령관에게 내무반에서 신문 구독을 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고 사령관이 허 씨가 내무반에서 신문을 구독할 수 있도록 하라고 이례적인 지시를 내렸다. 그가 구독 신청을 한 신문은 유신정권에 유일하게 쓴소리를 하던 동아일보였다. 군대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동아일보를 보면 찍히던 시절이었다.
허 씨는 제대 이후 삼성전자에 다니던 1980년부터 신문 스크랩을 다시 시작했다. “신문 4, 5개를 한꺼번에 보며 스크랩을 했지만, 동아일보에서만 중립을 지키려는 흔적들을 그나마 찾을 수 있었죠”
허 씨가 50년 동안 모아 온 동아일보 스크랩 책자만 45권이다.
허 씨는 고향 순천에서 자영업을 하면서 국사편찬위원회에 사료조사 위원과 순천문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향토사학자이자 시인이다. 그는 시를 쓰거나 향토사학 서적을 집필할 때 동아일보 스크랩에서 도움을 받는다. 동아일보 문화 ․ 예술 기획취재나 기획 ․ 탐사 보도 기사가 참고 자료가 됐다.
최근에는 자녀들이 다닌 카이스트나 성균관대 관련 동아일보 기사들을 스크랩하면서 사회적으로 성공하면 동아 꿈나무재단에 장학금을 기부하라고 자녀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허 씨는 “동아일보는 박정희 유신정권 때나 1980년대 신군부억압에서도 기사의 진실을 전하는 숨은 한 줄을 꼭 넣었다.”며 “중립을 지키며 진실을 밝히려는 일관된 모습이 50년 동아일보 구독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또 “동아일보를 다른 신문의 틀에 끼워 넣어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동아일보를 읽어본 뒤 평가하라’고 충고하고 있다.”며 “동아일보가 늘 국민의 알 권리를 더욱더 충실하게 지켜주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글은 2013년 ‘동아, 내 삶의 내비게이터’ “중립적이며 진실을 밝히려는 모습, 동아 사랑의 이유” ‘50년 독자 허근’에서 발췌하였다.
봉화산 둘레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