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의 연령파괴 현상이 점입가경이다. 극중 배역이 연기자의 실제 나이와 열살이 넘는 차이를 보이는 사례가 허다하다. 배역의 나이 폭이 큰 사극이나 시대극의 경우에는 더 심하다. 배역보다 어린 연기자라면 분장을 통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 반대의 경우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생긴 주름을 감추고 10여세 연하의 배역을 연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세월이라는 물길을 되돌려 놓는 짜릿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연기자로서는 커다란 행운이다.
K2TV 특별기획드라마 ‘장희빈’의 여주인공 김혜수는 만 32세. 극중의 장옥정이 입궁한 것은 18세 때다. 궁녀로서는 늦은 나이지만 김혜수는 14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실제로 숙종이 희빈 장씨와 한 살 차라는 점이다. 숙종은 13세 때 즉위했고 전광렬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숙종 6년으로 설정됐다. 그러니 전광렬은 숙종의 19세 때 모습부터 연기하는 셈이다. 실제 전광렬의 나이와는 무려 21세나 차가 난다.
서른이 넘어서 단체로 교복을 입은 사례도 있다. MTV 미니시리즈 ‘삼총사’에서 32세의 손지창과 30세의 류진이 대학입시를 앞둔 고3 수험생으로 등장했다. 이정진(24)도 교복을 입고는 머쓱했지만 대선배 두 사람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7년의 세월이 흐른 것으로 스쳐 지나갔지만 K1TV 일일드라마 ‘당신 옆이 좋아’에서는 하희라(33)와 정혜영(29)이 갈래머리에 교복 차림으로 등장했고, 이재룡(38)과 손현주(37)도 20대 초반의 대학생부터 시작했다.
MTV 일일드라마 ‘인어아가씨’의 정보석(38)은 29세의 회계사 마마준 역을 맡았다. 극중에서 장서희를 두고 사랑싸움을 펼쳤던 김성택과는 꼬박 열살 차지만 배역상으로는 한 살이 더 어리다. 박상원(43)도 연예가의 대표적인 피터팬급 연기자다. STV 주말극장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맡은 김지헌 역도 30대 중반의 매력적인 노총각이다. 오죽하면 STV 특별기획 ‘대망’의 박휘찬이 그의 연기인생에서 처음 맡아본 아버지 역이었을까.
STV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의 김두한은 만 15세에 주먹세계에 입문해 17세에 신마적, 구마적을 차례로 꺾고 조선 주먹패의 황제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안재모는 15세 소년에서 시작해 30세 전후의 청년기까지의 김두한을 그린다. 아래로는 9세, 위로는 6세 차다. 오대규(35)가 STV 일일극 ‘해뜨는 집’에서 28세의 강준태 역을 맡은 것은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그러나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경험이 마냥 즐겁지는 않다. 일단은 “배역보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비난에 직면해야 하고 요행으로 앳돼 보이는 외모 덕분에 눈가림을 한다손치더라도 이미 그 연기자의 실제 나이를 뻔히 알고 있는 연예가의 참새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당장 “어린 척하는 모습이 짜증난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 살이라도 어리게 보이려고 나이를 줄여 말하는 경우도 많지만 자칫 들통날 경우 더 큰 낭패를 보기도 한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좋은 역을 따내고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성형수술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보톡스 주사의 효과를 한번이라도 경험해봤다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든 게 연예가의 현실이다.
김혜수는 고교 2학년 때인 87년 브라운관 데뷔작인 K2TV ‘사모곡’에서부터 성인연기를 시작했다. 상대역도 죄다 또래 연기자가 아닌 중견탤런트들이었다. ‘사모곡’에서는 길용우(47)와 애틋한 정을 나누더니 ‘순심이’에서는 김성환(52), ‘꽃피고 새 울면’에서는 노주현(56)을 상대역으로 맞았다. 심지어 ‘장미빛 인생’에서는 박근형(62)과 결혼하기까지 했다. 그런 김혜수가 30대에 접어 들어 10대의 장희빈을 연기하고 있으니….
‘삼총사’ 김소연(22)의 이력도 김혜수 못지않다. 도무지 열다섯살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외모 때문에 데뷔시점인 중3 때부터 성인연기를 했다.
하이틴 스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96년에도 ‘신고합니다‘ ‘도시남녀‘ ‘일곱개의 숟가락’ 등의 드라마를 통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