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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에 해당한 자 (막14:53∼65)
우리는 앞서 마치 강도나 되는 것처럼 칼과 몽둥이로 예수님을 붙잡아간 것을 살펴보았는데, 그들은 대제사장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대제사장들은 물론 장로들과 서기관들까지 모여 있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예고해 오셨던 대로 대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들에게 넘겨진 것이지요. 마태와 누가를 통해 우리는 당시 대제사장이 가야바였음을 알 수 있는데, 요한은 먼저 그의 장인이자 직전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에게 신문을 받으신 후에 가야바에게로 갔다고도 하지요. AD 6∼66년까지 재임한 대제사장이 18명으로 평균 3~4년 정도였는데, 가야바는 19년 동안 대제사장직을 감당하였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로마와 밀착되었고 그들에게 충성하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이렇게 해서 공회가 열렸는데, 일반적으로 산헤드린 공회는 모세의 70인 장로를 모델로 하여 70명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되었고, 대제사장이 의장을 맡아 총 71명이었다고 합니다. 그중 23명이 모이면 열릴 수 있었는데, 본문에서는 다 모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자치적인 문제와 종교문제를 다루는 최고의결기구였던 공회는 주로 월요일과 목요일 낮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열렸고, 특히 안식일이나 축제일은 피하였지요. 그런데 지금은 유월절 기간에, 그것도 한 밤중에 대제사장의 집에서 이렇게 모였으니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많은 군중들로 인해 민란이 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사실 재판에서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절차의 문제이지요. 그래서 정당한 과정과 절차를 어긴다면 애초부터 그 재판이나 제시한 증거 자체가 효력을 발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암튼 이처럼 늦은 시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모였다는 것은 이미 그들 가운데 사전에 치밀한 모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부자로 예수를 판 유다가 그날 저녁을 실행일로 삼았으니 모두 시간을 비워두고 밤에 가야바의 집으로 모이라는 공지가 되어 있는 상황이었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민감한 사안일수록 공개적이고 투명하게 재판이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말이지요.
그런데 이때 제자들 중 하나인 베드로가 멀찍이서 예수님을 붙잡은 이들을 따라가고 있었지요(54). 한편으로 보면 베드로가 앞서 고백하였던 것처럼, 다 버리고 주를 떠난 상황에서 비록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니 그가 큰소리쳤던 것이 완전히 공수표만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베드로에게 더 큰 비극을 가져오는 복선에 불과하였습니다. 한발짝 떨어져 멀리서 주님을 따르는 것은 결코 ‘진정한 제자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깊이 개입되기를 원치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것만 취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돌아설 수 있는 이기적인 선택이니 말입니다. 분명 겉으로 봐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분을 온전히 닮으려 하지 않지요. 그러다보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더하다는 말을 듣게 만드는 원인제공자일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지요.
암튼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안뜰까지 들어가서 아랫 사람들, 그 집안의 종들과 함께 둘러앉아 불을 쬐면서 붙잡혀 가신 예수님의 상황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 모습 자체가 한편으로는 경솔하지만 늘 당당하고 큰소리를 쳤던 베드로에게는 매우 어색하고 낯선,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새 철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뭔가 조심스럽고 신중한, 매우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렇게 멀찍이서 베드로가 보기를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며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길래 이렇게 조용히 사람들 틈에 끼어 예수님을 살피고 있을까요?... 그리고 실제로 그가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증거를 찾고자 합니다(55-56). 그들은 이미 체포하기 전부터 결론을 명확하게 내려놓은 상황이었지요. 그러니 말만 신문이고 재판이지 사형시키기로 정해진 가운데서 이를 뒷받침해줄 결정적인 증거나 단서를 찾아 꿰맞추려는 요식행위에 불과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답정너’ 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미 답은 정해져 있고 그저 너는 대답만 하면 돼” 라는 말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구미에 맞는 증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서로 일치하지가 않았습니다. 거짓으로 꾸며내다 보니 하나하나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함께 맞추어보면 제각각이었던 것이죠. 율법에 따르면 최소한 둘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했는데, 결국 둘도 일치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특히나 이스라엘의 경우는 증언을 매우 중요시 했는데, 이웃의 생명과 명예를 좌우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십계명의 9계명에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며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원래 증인, 증언이라는 것이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있는 그대로를 진술하는 것인데, 결국 이들은 십계명까지 어겨가며 하나같이 ‘위증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예 처음부터 결론을 분명하게 정해놓고 시작했던 재판이 진행될수록 오히려 예수님의 죄없음이 드러나고 점점 더 오리무중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증언하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몇몇 사람들이 일어나서 자신들이 똑똑히 들은 말이라며 예수를 고발합니다. 그가 말하기를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 지으리라고 했다구요. 성전중심의 삶을 특징으로 하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을 허무는 것은 중범죄에 해당하였지요. 때문에 매우 결정적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실상 신문을 해보니 이것마저도 서로 일치하지 않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당신의 몸을 일컫는 것으로,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으니까요.
이쯤되자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초조함의 목소리들이 배어나옵니다. 밤중에 신속히 처리하고자 했던 자신들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요. 그러자 대제사장이 가운데 일어서서 예수님께 직접 묻게 됩니다. 우리는 가끔씩 민감한 사안에 대한 재판이나 어떤 위원회가 열리게 되면 기자들이 해당 위원장을 찾아가 질문을 쏟아냅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은 회의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사적인 의견을 밝히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노코멘트를 하고, 그 모임 안에서 현명한 결정이 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이런 식으로 인터뷰하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주관해야 하는 대제사장이 직접 신문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의 뜻대로 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다그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들을 말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너는 아무런 대답도 없느냐고, 스스로 대해 변론을 해보라고 요구를 하지요. 상대방이 다그칠 정도로 거짓 증언들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무죄를 위한 정당한 변호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무시고 좀처럼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까닭은 예수님께서는 이 신문과 재판의 목적이 당신의 무죄를 밝혀 석방을 받는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지요.
이에 그가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빼어들고 묻습니다. “네가 찬송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정면으로 승부수를 던진 것이지요. 물론 찬송받을 이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라고 물은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다름아닌 막1:1절에서 선포되었던 그 말씀이 지금 대제사장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물론 한편으로는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도망가버리고 이렇듯 붙잡힌 채 홀로 초라하게 남겨진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냐며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투로 들리기도 합니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하여 아마도 오늘날이었다면 당장에 변호사가 외쳤겠죠. “이의있습니다. 지금 유도신문을 하고 있습니다.”라구요. 지금 대제사장은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예수님께 덮어씌우기 위해 교활하게 유도신문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다른 질문들에는 적극적으로 답변을 하고 해명을 할지언정 이 질문에 있어서 만큼은 보다 신중하게, 유도신문이라며 답변을 거부하고 묵비권을 행사하시는 것이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껏 침묵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 질문에 대해서 만큼은 피하지 않으시고 답변을 하십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인데, 62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시110:1, 단7:13절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신적인 정체성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비록 지금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신문을 당하고 있지만 인자가 영광의 모습으로 재림하실 때에 진정한 우주적 재판관으로 결국 박해하는 그들까지도 심판하실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대제사장의 모함인 것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뻔히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마치 재판을 종교지도자들이 뜻하는 대로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선택하신 것이고 주님께서 주도하여 결국은 십자가로 향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나아가시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대제사장은 자신이 놓은 덫에 걸려들었다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릅니다. 그리고는 더욱 더 오버하여서 자신의 옷을 찢으며 큰 소리로 “신성모독이로다∼∼” 라고 외칩니다. 사실 레10:6절이나 21:10절 등의 말씀을 보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고 엄격히 금하고 있음에도 지금 가야바는 사람들을 자극하고 끓어오르게 하기 위하여 커다란 슬픔과 분노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동들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대제사장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조정하고 다룰 줄 아는 자였기 때문이죠. 이제 대제사장이 이렇게 말한 이상, 더 이상의 추가적인 신문이나 변론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본인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라고 말하지요.
요즘 우리는 언론 등에서 ‘프레임을 씌운다’는 표현을 자주 듣곤 합니다. 심지어 ‘프레임 전쟁’이라는 말까지 하는데, 일단 어떠한 프레임을 씌워버리면 그 문제 있어서 충분히 고려되고 다루어져야할 많은 것들이 모조리 잠식된 채 일종의 여론몰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흔히들 정치권에서 잊혀질만 하면 자꾸만 등장하는 색깔론과 같은 것이지요. 유일한 분단국가라고 하는 특성상 ‘빨갱이, 주사파, 종북좌파’라는 프레임을 씌워버리면 거기서부터는 게임 끝이니까요. 기독교에서도 한동안 ‘복음주의냐 자유주의냐’라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때가 있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모든 문제들이 ‘신천지에서 동성애’로 옮겨진 모양새 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성경적으로 바르고 정당한 주장을 하더라도 상대편에서 ‘저 사람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라고 해버리면 자신의 모든 잘못은 묻혀버리고 도리어 상대편이 비난을 받게 되는 웃지못할 일들을 보게 됩니다. 나중에 이에 대해 더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보구요.
여하튼 대제사장이 직접 원고측으로 나서서 신문을 하는 중에 이렇듯 흥분하여 자신의 옷을 찢으며 목소리를 높여 신성모독이라고 소리를 지르니, 곁에 있던 다른 종교지도자들도 덩달아 자신들의 옷을 찢지 않았겠습니가?... 가야바가 계속 말합니다. 너희도 그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듣기에는 분명 신성모독인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기에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요.
이제 그들은 신성모독죄를 저지른 자에게 해당하는 형벌을 이야기할 뿐이지요. 그리하여 밤늦게 소집된 공회는 한 목소리로, 만장일치로 선언하기를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라고 정죄를 하였습니다. 그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감히 인간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여 자신을 심판자와 주(主)로 자처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훼손하였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신들의 권위에도 순종하지 않고 저항하였으니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고 하지요. 물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곧 사형입니다. 율법에서는 자국인이든 타국인이든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하고, 레24:16절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는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으니 이제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로마 총독에게 정식 재판을 요청하는 것만 남았지요.
종교지도자들이 이렇게 결론을 내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벌써부터 예수님을 향하여 몹쓸 쌍욕들을 해대며 침을 뱉으며 뺨을 때립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모욕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지요.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면서 선지자 노릇을 해보라고, 누가 때렸는지 맞추어보라며 마음껏 비웃고 조롱합니다. 사실 이들이야말로 지금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수치와 모욕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으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법조문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의 신문사건은 재판정을 열 수 없었던 유월절 축제일에, 그것도 한 밤중에 열렸다고 하는 시간상의 문제, 성전에 마련된 정식 법정이 아닌 대제사장의 사저에서 비공개로 모였다고 하는 장소의 문제, 피고의 증언으로 재판을 시작하지 않고 고발자의 진술로 시작한 일, 증언이 서로 일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죄한 것, 그리고 신문과 선고 사이에는 적어도 하루밤이 지나야 하는데 그 밤에 선고한 일 등 모든 것이 온통 불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을 받을수록 죄가 특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론지어놓은 죄의 근거마저 발견할 수 없고 오히려 죄없음이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계획과는 달리 재판이 무산될 위기에서 오히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한 길을 스스로 선택하시고 이를 위해 나아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자신들의 종교적인 열심으로 포장을 하고 있으나 결국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지위와 특권, 물질적인 탐욕 등을 내려놓지 못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대적하기까지 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 속에서 다시금 우리와 한국교회의 현실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땅에서 가지고 누리는 것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예수님의 삶과 그분이 걸어가셨던 길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하고 바라는 것은 더 가지고 높아지며 편안한 삶을 살게 해달라는 것은 아닌지요?
끝으로 한발짝 물러나 멀찍이서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지는 않은지요? 내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충족될 때는 따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언제든지 돌아설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나요? 멀찍이서 따르는 것은 구경꾼이나 관찰자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참 제자는 아니지요. 사순절 첫 번째 주간입니다. 다시금 우리를 사랑하시어 스스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하시고 걸어가신 우리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주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올곧하게 걸어나갈 수 있는 일산호수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