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4년. 메이저리그는 샐러리캡 도입 문제를 놓고 사무국과 선수노조(선수대표 톰 글래빈)가 팽팽히 맞섰다. 양측은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결국 45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시즌이 중단됐다. 행동은 같이 했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했던 두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연속 경기 출장을 이어가고 있던 칼 립켄 주니어와 4할 타율에 도전장을 던진 토니 그윈(당시 34세)이었다.
그윈의 타율은 .394였다. 게다가 중단 직전 10경기에서는 .475의 맹타를 휘둘러 오히려 페이스를 끌어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파업과 함께 그윈의 처음이자 마지막 도전 기회는 날아가고 말았다. 그윈은 1941년 테드 윌리엄스의 마지막 4할(.406) 이후 가장 높은 타율을 기록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1994년. 일본에서는 새로운 기록이 탄생했다.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2년차 외야수 스즈키 이치로(당시 20세)가 210안타를 날려 일본 프로야구 탄생 60년 만에 최초로 200안타를 달성한 것. .385의 퍼시픽리그 역대 최고 타율 기록도 세운 이치로는 미국에 진출하기 전까지 7년 연속 타격왕을 거머쥐었고, 미국에서의 첫 시즌에서도 아메리칸리그 타격왕에 올랐다.
1994년. 4할과 200안타에 도전한 천재 타자는 한국에도 있었다. 해태 타이거스의 2년차 유격수 이종범(당시 만 23세)이었다.
이종범 : .393 .452 .581 / 125경기 196안타 2루타27, 19홈런 77타점 84도루
그윈 : .394 .454 .568 / 110경기 165안타 2루타35, 12홈런 64타점 5도루
이치로 : .385 .445 .513 / 130경기 210안타 2루타41, 13홈런 54타점 29도루
이종범의 데뷔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1993년 이종범은 133안타로 박정태가 1991년에 세운 131안타의 신인 최다안타 기록을 경신했고, 1985년 이순철이 세운 31개의 신인 최다도루 기록은 무려 73개로 늘려놨다. 또한 1986년 김정수에 이어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 역대 2번째 신인이 됐다. 하지만 이는 상상을 넘어서는 2년차 시즌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1994년 출발은 평범했다(4월 타율 .324). 하지만 이종범은 5월에 .394, 6월에 .400을 기록했고 .390으로 전반기를 끝냈다. 65번째 경기에서 100안타를 돌파함으로써 백인천이 1982년 원년에 기록한 69경기 기록도 경신했다. 78경기에서 기록한 122안타는 정확히 200안타 페이스였다. 전반기 이종범은 팀 도루의 절반을 혼자 해냈으며, 1번타자임에도 팀 홈런의 25%와 타점의 17%를 책임졌다. 17홈런-57도루를 기록, 역대 최초의 30-30클럽 가입도 가능해 보였다.
8월21일 광주 쌍방울전에서 이종범은 4타수4안타를 기록, 하룻만에 8리를 끌어올렸고 .400에 올라섰다. 하지만 이종범은 이후 22경기에서 .324에 그쳤고, 결국 .393로 시즌을 마감했다. 또한 마지막 6경기에서 12안타를 몰아쳤지만, 끝내 4개 차이로 200안타 달성에 실패했다.
시즌이 끝난 후 이종범이 밝힌 가장 아쉬웠던 순간은 .400에 올라선 쌍방울전 직후였다. 이종범은 갑자기 배탈에 시달렸고, 좋았던 기세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이종범은 이후 3경기에서 13타수1안타에 그치며 순식간에 1푼을 까먹었다.
시즌 막판에 페이스 조절을 했다면 이종범은 4할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치열한 4강 싸움을 했던 해태는 팀 공격의 절반 이상이라는 이종범을 쉬게 할 여력이 없었다. 이종범 역시 기록을 위해 쉴 생각이 없었다. 또한 이종범은 '2번째 4할'보다는 '첫번째 200안타'에 더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문제는 이종범이 포지션이 유격수였다는 것이다. 165안타 이상 13명 중 미들 인필더는 이종범이 유일하다. 1루수와 외야수를 제외한 선수도 이종범을 제외하면 3루수 김한수(1999년 169개 10위)뿐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최다안타 20위 중 미들 인필더는 2루수 로저스 혼스비뿐이며, 혼스비와 3루수 웨이드 보그스를 제외한 18개 기록이 1루수 또는 외야수에게서 나왔다(한편 KBO는 상위 19개 중 5개, ML은 20개 중 4개가 우타자에게서 나왔다).
또한 이종범은 1루에 나가면 끊임없이 도루를 시도했고 이는 엄청난 체력 소모로 이어졌다. 1994년 이종범을 제외하고 최다안타 상위 18명 중 4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선수는 2003년 이종범(50개)뿐이다. ML에서도 30위 기록 중 도루를 60개 이상 성공시킨 선수는 1911년 타이 콥(83개)이 유일하다. 시즌이 끝날 무렵 이종범의 체중은 정상 체중에서 6kg이나 모자란 66kg에 불과했다.
지친 이종범은 후반기에 단 2개의 홈런을 추가하는 데 그쳤다. 이에 박재홍보다 2년 먼저 최초의 30-30을 달성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으며, 홈런 1개 차이로 김성한 이호성 장종훈 이정훈 송구홍 이순철에 이은 역대 7번째 20-20도 놓쳤다.
이종범은 OB전에서 .457, 쌍방울전에서 .451, 삼성전에서 .429의 맹타를 휘둘렀다. 롯데전(.387)과 한화전(.360) 태평양전(.360)에서도 3할6푼 이상을 기록했다. 이들 6팀을 상대한 성적을 합치면 .406로 테드 윌리엄스의 1941년 마지막 4할과 같았다. 하지만 단 한 팀이 이종범의 소나기 안타를 피했는데, 그 해 정규시즌 81승과 한국시리즈 4연승을 거둔 최강 팀 LG였다. 이종범은 LG전에서 .315에 그쳤고, 결국 이것이 4할과 200안타 달성을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투수 중에서는 누가 이종범의 앞길을 막아섰을까. 이종범은 그해 평균자책점 5걸 중 정민철(14승10패 2.15) 박충식(14승8패 2.35) 김상진(14승10패 2.37) 이상훈(18승8패 2.47)을 상대로 도합 .463(41타수19안타)을 기록했다. 하지만 4위 김태원(16승5패 2.41)에게 .222(9타수2안타)에 그쳤다. 가장 큰 실패를 맛본 대결은 세이브포인트 1위(44) 정명원(7타수1안타), 그리고 송진우(6타수 무안타)였다. 시즌 성적에서 두 선수의 대결을 제외하면 .401가 된다.
1995년, 이종범은 1994년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찾아온 단축시즌 때문이었다. 1995년은 단기사병 제도의 마지막 해였고, 이종범도 많은 선수들과 함께 입대했다. 이에 바람은 그가 퇴근한 후 광주에만 불었다.
기록 제공 - 스포츠투아이(주)
첫댓글 그윈 이치로랑 타격은 비슷한데 홈런 타점이 월등히 더 많고 도루는 하늘과 땅 차이네요 우리나라 선수가 독보적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