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奇正鎭) 찬(撰)
[생졸년] 1798년(정조 22)~1879년(고종 16) 수(壽) 81세
훤칠하게 키가 큰 한 유생이 성은 주씨(周氏)요, 이름이 방찬(邦瓚)인데, 강가에 있는 나의 병려(病廬)를 찾아와 말하기를 “낡은 세보(世譜)가 있으니 바라건대 한 말씀만 빌려주시면 광영이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심히 노쇠하고 문묵(文墨)을 물리친 지가 이미 오래이나, 성이 주씨인 사람은 노년에 처음 대하므로 귀가 번쩍 뜨여 가까이 오게 하고 그 사는 곳을 물어보았다.
말하기를 “영광(靈光)의 삼계현(森溪縣)에서 대대로 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관향을 물으니, “철원(鐵原)입니다.”라고 하였다. “영남의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주씨와 같은 씨족인가?”라고 하니, “같은 시조에서 나왔으나 관향을 달리하여, 그 쪽의 관향은 상주(尙州)입니다.”라고 하였다.
“영광에서 산 지가 얼마나 되었는가?”라고 했더니, “세대로 계산하면 30여 세가 되고 연수로는 천년 내외가 됩니다. 고려조에 왜구를 토벌한 공으로 삼계군(森溪君)으로 봉해진 분이 있었는데, 이 사실이 삼계에서 거주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난리 뒤에 분묘(墳墓)가 많이 실전되어 버리고 지금 와서는 일 년에 한 차례 물밥이라도 올리는 것은 15세(世) 이하에 불과 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세의 벼슬과 벌열(閥閱)은 어떠했는가?”라고 하니, “본래 당(唐)의 성씨였는데 신라 때에 바다를 건너와 신라, 고려의 두 조정에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으니 옛 보첩에 그렇게 실려 있습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혁명 전보다 훨씬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외읍의 수재(守宰) 벼슬은 여러 대를 했고 훈록(勳錄)에 참여한 사람도 1세가 있으며, 벼슬이 각사의 산반(散班)에 이른 사람도 약간 인이요, 문과 급제와 생원 진사도 몇 사람이 났는데 10세 이하로는 적막합니다.”라고 하였다.
“선세의 내외 친족과 인척은 어떤 집인가?”라고 하니, “이는 갑자기 낱낱이 다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중 가장 드러난 분을 말한다면, 송지지당(宋知止堂 송흠(宋欽))의 집과 나송재(羅松齋 나세찬(羅世纘))의 집이 모두 내외척(內外戚)이고, 방찬의 본생 9세 조비(祖妣)가 기씨(奇氏)인데 부친의 휘는 충순위(忠順衛) 대익(大益)입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나는 한참을 탄식했다. 대저 기씨 부인은 고봉(高峯) 문헌공(文憲公)에게는 당질녀(堂姪女)가 되고, 우리 선조 금강공(錦江公)과는 종자매(從姊妹) 간이 된다. 이때에 기씨가 처음 하향하였을 적에 가성(家聲)이 오늘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윗감을 주씨 집안에서 골랐다면 당시 주씨 집안의 명성이 가볍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듣건대 김하서(金河西)가 주 거사(周居士)에게 준 시에 ‘스스로 삼계의 주씨라고 한다.’는 구절이 있다고 하니, 그렇다면 삼계의 주씨가 그 당시의 현귀(顯貴)한 씨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은 자손들이 한미하여 영광에 주씨가 있다는 것을 읍의 경계만 벗어나면 아는 사람이 드물다. 심지어 그대가 우리 기씨의 외손인데도 내가 늙어 죽게 되어서야 비로소 와서 보게 되었다. 만약 세보(世譜) 한 가지 일이 아니었더라면 거의 서로 알지도 못하고 딴 세상의 사람이 되었을 뻔했구나.
비록 그러하나 참으로 귀중한 것이 있다. 고대에는 민심이 순일(純一)하여 분주히 경쟁하는 뜻이 적었으므로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를 하지 않은 일도 있었다. 아래로 정전(井田)이 시행된 시대에 이르러는 백성들에게 정해진 생업이 있게 되었지만 오히려 죽거나 이사함에 향리를 벗어남이 없는 법이 있었다.
말세가 되어 정전이 폐해지자 분주한 경쟁이 일어나 바쁘게 움직이며 쫓아다니느라 수레바퀴가 도로에 얽히고 빈번히 왕래하여 이익을 따라 다니게 되었다. 지금 그대의 주씨는 본분에 의지하여 평생을 산림에서 나가지 않고 집터를 잡아 분묘 아래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능히 영광에서 30세를 살아 올 수 있었다. 나는 주씨가 반드시 후손이 번창하여 오래도록 오늘날처럼 한미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청컨대 이를 써서 그대의 세보 서문으로 삼는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
[原文]
鐵原周氏世譜序
頎然一儒生。周姓邦瓚其名。造我江上病廬曰。有秖殘世譜。願丐一言爲光。吾衰甚。文墨閣已久。顧姓周人。老來所刱對。耳根甚新。進而問其居。曰靈光之森溪縣世居也。問其貫鄕。曰鐵原。與嶺南愼齋之周通族否。曰同出而殊貫。彼則尙州也。居靈光幾多時。曰以世計三十有餘。年數千年內外矣。麗朝。有以討倭功封森溪君者。此是居森溪之的證也。而亂後墳墓多失傳。到今歲一澆飯。不過十五世以下也。先世科宦閥閱奚若。曰本以唐姓。新羅乘桴。羅麗兩朝。奕世達爵。載於舊牒者然也。入我朝。遠不逮革命前。然仕至外邑守宰者數世。參勳錄者一世。仕至各司散班者若干人。文科生進亦數人。十世以下則索然矣。先世內外族姻誰家。曰此非卒乍所可歷言。而言其最著者。則宋知止堂家,羅松齋家。皆內外戚也。而邦瓚之本生九世祖妣奇氏。父諱忠順衛大益也。聞言未旣。吾爲之咄歎者久之。蓋奇氏夫人。於高峯文憲公。爲堂姪女。吾先祖錦江公之從父姊妹。是時奇氏初下鄕。家聲非今日比。而乘龍之卜在周。則當日周氏家聲。不草草可推矣。抑又聞金河西贈周居士詩。有自言森溪周之句。然則森溪之周。爲伊時顯族可驗矣。今日子孫單寒。靈光之有周。纔出邑境。知之者鮮矣。甚至君以吾奇之彌甥。吾老垂死。始來見焉。若非世譜一事。幾乎不相知而爲隔世人矣。雖然可貴者則有之。古者民心純一。奔競之意少。故至老死。不相往來者有之。下至井田之世。民有定業。猶有死徙無出鄕之法。末世井田廢而奔競興。營營逐逐。轍結於塗。煕煕穰穰。與利俱往。今子之周依本分。平生不出山樊。卜宅不離墳墓之下。故能三十世於靈光。吾知周氏必有後。不長爲今日之單寒矣。請書此以爲君之世譜序。<끝>
노사집 제19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