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동서원(道東書院) - 오도일(吳道一)
도동서원(道東書院) 한훤당(寒暄堂) 원우(院宇)인데, 현풍(玄風)에 있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우셔서 대도가 동으로 왔으니
고정(考亭)의 남은 학파가 진정한 종통(宗統)이로다
외로운 충성은 당시의 화(禍)를 구하지 못하였고
지극한 가르침으로 후학들을 길게 계몽하셨네
의구(依舊)한 강산에는 훌륭한 행적이 남아 있고
지금은 서원(書院)과 문묘(文廟)에서 숭상하도다
문 앞의 맑은 낙동강은 마치 말처럼 흐르는데
일맥(一脈)이 아마도 사수(泗水)와 통하리라.
------------------------------------------------------------------------------
[原文]
道東書院1) 寒暄堂2)院宇3),在玄風4)。
天佑吾邦5)大道東6),考亭7)遺派8)是眞宗9)。
孤忠10)不救當時禍11),至訓12)長開12)後學蒙13)。
依舊14)江山15)芳躅16)在,秪今17)俎豆18)閟宮19)崇。
門前淸洛20)流如馬21),一脈22)惟應23)泗水24)通。
西坡集卷之五
[註解]
주1) 道東書院: 서원 이름. 대구광역시 달성군(達城郡) 구지면(求智面) 도동리(道東里)에 소재한다. 조선 선조(宣祖) 38년(1605년)에
건립하고, 동왕 40년에 사액(賜額)을 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의 김굉필(金宏弼)·정구(鄭逑)·곽승화(郭承華)·원개(元槩)·
배신(裵紳)·곽율을 봉향(奉享)하고 있다.
주2) 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년-1504년)의 호이다. 그의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 한훤당(寒暄堂)이며, 본관은 서흥(瑞
興)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예조참의 김중곤(金中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使) 김소형(金小亨)이고, 아버
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뉴(金紐)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중추부사(中樞副使) 한승순(韓承舜)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소학(小學)』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다. 증조부인 김사곤(金士坤)이 수령과 청환
(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주3) 院宇: 고려(高麗) 중기(中期) 이후(以後)에 서원(書院), 사우(祠宇), 정사(精舍), 영당(影堂) 따위를 통틀어 이르던 말이다.
주4) 玄風: 현풍군(玄風郡)은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달성군 서남부 지역에 있었던 옛 행정 구역이다. 오늘날 현풍읍, 유가읍, 구지면, 논공
읍 일대가 이에 해당한다. 고려시대에는 포산현(苞山縣, 포산은 비슬산의 일명)으로 불리다가, 1018년(현종 9년) 밀성군(密城郡)에
속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년)에는 감무를 설치하였고 구지산부곡(仇知山部曲)을 병합하였다.
1419년(조선 세종 원년) : 현풍현으로 개칭되었고 현재 현풍면인 현내면(縣內), 서부면(西部), 마산면(馬山), 모로촌면(牟老村), 현
재의 논공읍 일부인 논공면(論工), 걸산면(乞山), 현재의 유가읍인 유가면(瑜伽), 동부면(東部), 우만면(雲滿), 말역촌면(末亦村),
현재의 구지면인 구지면(求智), 묘동면(沙洞), 오설면(烏舌), 산전면(山田面), 현재의 고령군 개진면 일부인 진촌면(津村), 우곡면
일부인 답곡면(沓谷), 왕지면(旺旨) 이상 17개 면을 관할하고 현감을 두었다.
주5) 吾邦: 우리 나라. 우리 고장. 내 고향. 여기서는 고려(高麗)와 조선(朝鮮)을 말한다. 중국 원나라의 성리학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도입하였고 백이정(白頤正)은 원에 유학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였고 충선왕 때 이제현(李齊賢)은 원의 만권당에서 원 학자들과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곡(李穀)에서 이색(李穡)으로 이어졌고 이색은 다시 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정도전(鄭道傳)을 가르쳤
다.
안향(安珦)→백이정(白頤正)→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길재(吉再)→김숙자(金淑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
손중돈(孫仲敦)→이언적(李彦迪)으로 학맥이 전승되었다.
주6) 大道東: 대도(大道)가 동방(東方)으로 왔다는 뜻이다. 대도는 올바른 도리. 정도(正道)라는 뜻이며, 여기서는 유학, 특히 성리학을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이 학업을 완성하고 돌아갈 때 그 스승 마융(馬融)이 나의 도가 동으로 옮겨간다[吾道東]고 한 말
을 응용한 것이다.
주7) 考亭: 주자(朱子: 朱熹)의 호이다. 고정은 중국 복건성 남평시(南平市) 건양구(建陽區) 담성가도(潭城街道) 고정촌(考亭村)의 촌명
이기도 하다. 주자가 만년에 이곳에서 저술과 강학을 하였다.
주8) 遺派: 남은 학파. 남겨진 학파
주9) 眞宗: 진정한 종통(宗統). 진정한 종파
주10) 孤忠: 홀로 다 바치는 충성(忠誠). 홀로 바치는 외로운 충성. 고충. 홀로 외로운 충성을 바치다
주11) 當時禍: 당시의 화. 1498년(연산군 4년) 7월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朋
黨)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임금의 정치를 비난하거나 시국을 비방했다”는 죄로 벌을 받게 된다. 곤장 80대, 평안북도 희천(熙川)
유배형을 받았다. 2년 후 다시 전라남도 순천(順天)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1504년(연산군 10년) 9월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다
시 한 번 연루되어 사약을 받게 되는데 향년 51세였다.
주12) 長開: 길게 열다. 길게 열어주다
주13) 後學蒙: 후학의 몽매함. 후학의 어리석음
주14) 依舊: 의구하다. 여전하다. 예전대로다. 옛 모양(模樣)과 변(變)함없음
주15) 江山: ‘강(江)과 산(山)’이라는 뜻으로, 자연(自然)의 경치(景致)를 이르는 말.
나라의 영토(領土)를 이르는 말. 여기서는 도동서원을 가리킨다.
주16) 芳躅: 고인(古人)의 유적. 옛사람의 훌륭한 행적(行跡)
주17) 秪今: 지금. 현재
주18) 俎豆: 적대(炙臺)와 접시. 제기(祭器). 제사(祭祀). 여기서는 서원(書院)에서의 제향을 가리킨다.
주19) 閟宮: 종묘. 여기서는 문묘(文廟)를 가리킨다. 1610년(광해군 2년)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었다.
중종때 조광조 일파의 주장으로 정몽주와 함께 배향 논의가 있었지만 대신들은 김굉필이 뜻은 있었으나 이룬게 미흡하다며 정몽주는
찬성하고 김굉필은 반대하여 정몽주만 배향되고 김굉필은 배향되지 못했다.
주20) 淸洛: 맑은 낙수. 맑은 낙동강
주21) 流如馬: 말처럼 흘러가다. 힘차게 흘러간다는 말이다.
주22) 一脈: 일맥. (하나로 이어진)한 줄기
주23) 惟應: 아마도
주24) 泗水: 산동(山東)성에 있는 강, 또는 현(縣) 이름. 공자가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상도 사천현(泗川
縣 : 지금이 경상남도 사천시)를 사수현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성주 근처의 지금의 대구지역에도 사수가 있다.
사수(泗水)는 오늘날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칠곡도호부(漆谷都護府) 문주방 사
수리(泗水里) 였다. 사수동은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북구 금호동, 달성군 다사읍 등지와 경계를 이룬다.
----------------------------------------------------------------------------------------------------------------------------------------------------
부주(附註)
위의 시는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 1645년-1703년) 선생이 지은 것이다. 그의 자는 관지(貫之), 호는 서파(西坡)이며,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공감역(繕工監役) 오희문(吳希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이고, 아버지는 오달천(吳達天)이다. 어머니는 조간(趙幹)의 딸이다. 그는 최석정(崔錫鼎), 조지겸(趙持謙), 조상우(趙相愚) 등과 교유하였다.
1673년(현종 14)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 1680년(숙종 6) 지평·부수찬, 1683년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687년 승지가 되어 자파(自派)를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이후 복직되어 1696년 도승지·부제학·대사헌을 지냈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성에 유배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세칭 동인삼학사(東人三學士)라 하였으며, 술을 좋아하여 숙종으로부터 과음의 경계를 받았다. 죽은 뒤 복관되었고, 울진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자는 48세이던 1692년 3월,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다. 50세이던 1694년 4월, 換局 후 이조참의가 되었다. 위의 시는 아마도 저자가 성주목사로 근무하던 시기에 인근의 현풍에 있는 도동서원을 참배하고 지었을 것이다. <끝>
글 > 이상훈(李相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