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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81권 / 능지(陵誌)
능(陵)을 옮길 때의 부지(附識)
영릉(寧陵)을 모신 그 다음해인 경자년에 능의 석의(石儀)에 틈이 생겼다. 우리 전하(殿下)가 옮겨 모실 것을 논의하다가 곧 현궁(玄宮 임금의 관(棺)을 말함)을 경동(驚動)시킬까 염려하여 석회(石灰)로 보수만 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계축년(1673, 현종 14) 4월에 한 종실(宗室)의 상소에 의하여 공경(公卿) 이하 삼사『三司 :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ㆍ홍문관(弘文館)』관원들까지 모두 함께 가 봉심(奉審)할 것을 서둘러 명하였더니 생긴 틈들이 모두 종실이 지적한 말과 같았으므로 전하는 깜짝 놀라 어쩔 줄 모르다가 전후 일을 맡았던 신하들을 모두 귀양 보냈다. 뒤이어 빗물이 틈을 타고 속으로 스며들까 염려한 나머지 드디어 옮겨 모실 것을 결의하고 여주(驪州) 홍제동(弘濟洞)에 자리를 정하였다.
9월 29일(을미)에 찬궁(攢宮)을 열고, 10월 4일 장례 행렬이 길을 떠나 7일에 예(禮)대로 양례(襄禮 이장(移葬)하는 것을 말함)를 마쳤는데,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 능인 영릉(英陵)과의 거리가 8백 97보밖에 안 되었다. 예부터 홍제동을 성인(聖人)이 묻힐 곳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와서 그 말이 맞은 것이다.
유지(幽誌 능지(陵誌)를 말함)와 책문(冊文)은 다 옛것을 그대로 썼고 능제(陵制)도 영릉(英陵)과 똑같이 함으로써 두 곳 모두 인자하고 검소하던 덕을 나타내었다. 그러니 만세토록 길이 잠들어 후손들의 끝없는 경사를 돌보아 주실 것을 기약하여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아, 우리 성고(聖考 효종(孝宗)을 말함)의 훌륭한 덕과 아름다운 모훈(謀訓)을 만약 갖추 기록하여 성인(聖人)의 손을 거칠 수 있었더라면 반드시 청묘(淸廟)ㆍ생민(生民)과 동렬에다 두었지 비서(費誓)ㆍ진서(秦誓) 사이에다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 왕이 상빈(上賓 임금의 죽음을 말함)한 지 지금으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신민(臣民)들은 하루같이 사모하고 슬퍼하여 그칠 줄을 모르고 있다. 당초에 빈전(殯殿)을 열 때부터 능소(陵所)에 갈 때까지 멀고 가까운 곳의 백성들이 산과 들을 메우며 지성으로 울부짖었는데 지금 또 면례(緬禮)의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서로 또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기를, “우리 성주(聖主)가 다시금 난수(灤水)의 아침을 당하셨구나.”하였는데 아,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이었겠는가.
하늘이 성덕(聖德)을 보우하여 우리 전하가 신손(神孫) 모(某 숙종(肅宗)을 말함)를 낳으시더니 정미년 1월 22일 그를 세자(世子)에 책봉(冊封)하여 신인(神人)이 모두 큰 희망을 거기에 걸게 되었으니 아, 경사스러운 일이다. 성고(聖考)가 일찍이 장량(張良)ㆍ범증(范增) 두 사람을 논하면서 이르기를, “장량이 홍구(鴻溝)의 약속을 배반한 것은 그의 충분(忠憤)이 복수에 급급한 나머지 생각이 딴 데 미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니 의리(義理)가 바로 그 속에 있는 것이지만, 범증은 번번이 항우(項羽)를 위하여 제업(帝業)을 도모했던 것으로 보아 의제(義帝)의 입장은 고려에 넣지 않았던 것이며, 급기야 의제가 시해당한 뒤에까지도 떠나지 않고 항우를 따랐으니 그것은 천무이일(天無二日 한 세상에 두 황제가 있을 수 없는 것을 말함)의 대의를 모르는 처사로서 그 죄가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도 소식(蘇軾)은 그 일은 따지지 않고 그가 기미에 어두워 해를 입었다고 나무라고 있으니 그의 학문 역시 그릇된 것이다.”하였다.
아, 이 역시 백왕(百王)을 초월한 식견이요, 또 은미한 뜻이 그 속에 잠재한 말인 것이다. 이 말들이 지난번 능지(陵誌)에 빠졌기에 지금 모두 추지(追識)하는 바이다. 첫째 숙안공주(淑安公主)는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에게 하가(下嫁)하여 아들 치상(致祥)을 낳았고, 둘째 숙명공주(淑明公主)는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에게 하가하여 아들 정보(廷輔)ㆍ정협(廷協)을 낳았고, 셋째 숙휘공주(淑徽公主)는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에게 하가하여 아들 태일(台一)을 낳았고, 넷째 숙정공주(淑靜公主)는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하가하여 아들 인선(仁先)과 딸 하나를 낳았고, 다섯째 숙경공주(淑敬公主)는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麟)에게 하가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며, 숙녕옹주(淑寧翁主)는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의 아내가 되어 딸 하나를 두었다. 우리 전하(殿下 현종을 말함)는 명선(明善)ㆍ명혜(明惠)ㆍ명안(明安) 세 공주를 두었는데 맏이와 지차는 일찍 죽었다.
그후 14년 계축년(1673) 10월 일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 송시열(宋時烈) 지음. <끝>
[주기]
[주01] 찬궁(欑宮) : 천자(天子)의 빈궁(殯宮)을 말한다.
[주02] 청묘(淸廟) : 《시경(詩經)》 주송(周頌)의 편명이다. 종묘(宗廟)에 제사할 때의 악가(樂歌)로 주 나라 왕실을 찬미한 내용인데 그
속에는 후직(后稷)ㆍ태왕(太王)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덕을 기리는 것들로 되어 있다.
[주03] 생민(生民) :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편명으로, 주 나라를 찬미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주04] 비서(費誓) : 《서경(書經)》의 끝 부분 편명으로, 주공(周公)의 아들 백금(伯禽)이 노(魯)에 봉해진 뒤 대중을 비(費)에 모이게 하
고 유고(諭告)했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주05] 진서(秦誓) : 《서경(書經)》의 맨 끝 부분 편명이다. 진 목공(秦穆公)이 신민(臣民)을 상대로 맹세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주06] 난수(灤水) : 시체를 목욕시킨 물로, 여기서는 유해(遺骸)가 다시 남의 손에 의하여 정돈된다는 뜻으로 쓰여진 것이다.
[주07] 장량(張良) : 초한(楚漢) 시대 한(漢)의 모사(謀士)로,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홍구(鴻
溝)를 경계로 천하를 반분(半分)하자는 항우(項羽)의 제의를 받아들이게 한 다음 뒤에 맹약을 무시하고 항우를 다시 공격하여 대세
를 결정지었다.
[주08] 범증(范增) : 초한 시대 항우(項羽)의 모신(謀臣)이다. 항우로부터 아보(亞父)라는 칭호로 존경받았으나 결국 한(漢)과 내통한다
는 혐의로 배척당하여 팽성(彭城)에서 죽었다.
[주09] 홍구(鴻溝)의 약속 : 홍구는 중국 하남성(河南省) 형양현(滎陽縣)에 있는 물 이름이다. 초한(楚漢) 때 그곳을 경계로 하여 그 서쪽
은 한(漢), 그리고 동쪽은 초(楚)가 관할하기로 하였다.
[주10] 의제(義帝) : 항우(項羽)에 의하여 존칭된 초(楚)의 회왕(懷王)이다.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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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寧陵誌文
嗚呼。我大行大王以聰明睿智之聖。有傾否濟屯之志。臨御十年。克念克勤。未嘗一日或怠。海隅含生。方且跂踵延頸以望功成治定之日。乃以己亥四月二十一日辛亥。有疾不豫。猶愍稼穡之病。露立禱雨。越五月初四日甲子。禮陟于昌德宮之正寢。壽四十一。嗚呼天乎。眞所謂創業未半。中道崩殂者。嗚呼天乎。我殿下攀號莫及。與小大臣攷古諡法。謹上尊號。曰宣文章武神聖顯仁大王。廟號孝宗。群臣相與言曰。諡者行之跡。號者功之表。今其庶矣乎。將以十月二十九日丙辰。葬于寧陵。實健元陵之西麓也。我殿下以臣時烈自始侍講于初潛。洎末年復侍帷幄。遂以幽宮之志命臣。臣辭謝不敢。不獲命。則遂泣血拜手稽首而獻文曰。嗚呼。天之迫於氣數屈伸而生大亂。亦生大聖人。以擬其時。將降大任於是人也。亦必窮阨其身。以增益之。故王誕降之夕。彩氣呈瑞。旣生九歲而遭丁卯之難。十七歲而母大妃薨。哭泣悲哀。庭中不忍聞。十八歲而遭丙子之難。入于江華。十九歲而丁丑正月。得朝仁祖於南漢之城下。仍質于瀋陽。旣而西至于蒙古界。南至于山海關。又南至于錦州衛,松山堡。見諸將敗降。又東至于鐵嶺衛,開元衛。又東北至如奚部。鑿玄氷丈餘而飮其水。二十六歲而居北八年。始得東歸。未數月。旋入燕山。見京邑灰燼。二十七歲乙酉。自燕山歸國。前後二十餘年之間。天之憂戚玉成者。靡所不至。遂由次適而升儲位。由監撫而履至尊。王心知天意之有在。不敢自暇逸。惟修德立政。日不暇給。其修德曰。學以明其心。行以踐其實也。故在東宮。書無逸豳雅及古昔箴戒之語以自警。嘗問宮僚。漢之文武孰勝。皆曰。文帝勝。王曰。武帝不忘平城之憂。武帝勝。及卽位。日三御經筵。嘗曰。予氣質多偏。惟學可以變化。然靜以常敬。默以常信。此最要法。又曰。緊切工夫。無如敬以養心。如是則本源澄澈。人欲退聽矣。然亦須義以方外。然後動靜相資。體用兼該也。敬義之說。雖始於孔子。而舜禹所謂精一者。已是此理。精一之說。雖始於舜禹。而前此聖人。亦必以是相傳矣。故名其閤曰養心。堂曰敬義。又曰。克己須從性偏處下工。予性多在於怒。怒時處事。每不中理。近得一術。事有不可。必待中夜怒弛而處之。頗覺其寡過矣。又曰。欲之潛隱者甚可畏。予雖自謂不復喜酒。然程子大賢。猶復有喜獵之心。心其可少忽哉。且心術隱微處。最可深察。予每有及民之事。不無使民德我之意。是知無所爲而爲者。眞聖學之要也。此可見王用功之精密也。又曰。禹之勤勞。甚於百戰創業者。然禹絶無私天下之心。此所以爲聖人也。此實深造默契之言。非懸度揣摸之可及也。蓋王英睿絶倫。甫成童。講尙書。如璣衡律呂之法。曉解如破竹。至如朞三百。雖老師宿儒。猶病其難通。王一見無復礙滯。自是於精微肯綮處。不甚思索而灑然通透。克至乎高明之域。實非後世人主所可企望也。又嘗曰。講學所以明理。明理將以躬行。躬行之實。孝弟爲先。堯舜之道。孝弟而已。故承事兩殿。順敬備至。自幼侍側。器物必整理。時新之物。不先入口。兩殿每曰。吾家孝子。其在燕瀋。思慕不自克。興言必涕泣。及仁祖大漸。割指進血。及喪。哭泣之哀。顏色之戚。感動臣隣。至窆。將詣陵臨訣。群臣以毀疾請止。敎曰。昨於郊外。瞻望靈轝。歸來。殿宇闃寂。更無憑依。今見此啓。予懷之悲。實與天地無窮也。魂殿小祭祀。非疾甚。未嘗不躬行。嘗幸山陵。陟降進止。哭不暫止。喪畢。群臣請依例陳賀。固辭不受。嘗講蓼莪詩。悽咽泣下曰。詩本性情信矣。況予先志未伸。含痛窮天者乎。筵臣以爲新免於喪。是適然矣。其後語及。未嘗不然。茲可謂終身而慕者歟。繼大妃善病。王奉養調娛。翼翼油油。以所處狹隘。親自視址。以營別殿。曰萬壽。曰春暉。嘗上壽其中。禮肅而愛至。物儉而儀備。旣罷。仍問國中高年。各賜米肉。以廣推及之意。繼大妃嘗曰。王之誠孝。將無以報矣。與昭顯蒙難于北。孔懷之情益至。或不無蓋底之方圓。而能以誠意諧之。淸人欲以昭顯從戰。王輒請自行。辭氣懇款。淸人感而止。昭顯諸子。仁祖朝。坐其母。皆廢置海島。王憐而赦回。後封其子嫁其女而撫愛。與諸公主絶無纖毫厚薄。謂群臣曰。吾與昭顯崎嶇異域。冒犯霜雪。左右提挈。未嘗暫離。東還未幾。人事奄忽。每常悼念。今若視其子。異於己子。逝者豈無憾恨。常以春秋謁諸陵。當幸孝陵。昭顯墓在其傍。王曰。予疇昔之夢。昭顯見予歡若平生。今又夢予執手悵然。覺來悲懷難狀。遂於拜陵訖。省其墓而歸。愛母弟㴭甚至。幼時宿必同衾。後常源源接見。日未夕。不許出。有以危語持㴭者。王怒。杖殺其人。㴭疾就見之。及聞其革。以寡約徑出。則已無及矣。王悲慟忒甚。至斂。又却桃茢以臨之。庶弟澂,潚。其母與姊。舊已稔惡。與金自點謀逆。有司請斷恩處以法。王以事係繼大妃。只賜其母死。而子女放置于外。不絶衣食。後王念其逢霧露以死。命還之。澂,潚入宮見王。王喜而泣語。㴭沒後。王益悼其終鮮。泣諭群臣。悉復其官爵。王之尊屬玏,瑛。宣廟子也。俌仁祖弟也。王愛敬之。沒身不衰。其於疏屬。恩禮周至。無有怨恨不滿者。我殿下稍大。王雖甚愛之。然敎之必以法度。故絶無奇衺雜進以害其德性。此王修德之實。自身而行於家者也。其立政曰。任人以誠而保民以仁也。故始宅宗。首起金尙憲,金集。集山林宿德。尙憲身任大義。嘗拘執在北。奸人以此媒糱之。禍將不測。王應機善處。事以得解。後亦眷向不少怠。巖穴之士。無不禮致。嘗問宋神宗歎無人才。而不用二程何也。筵臣對曰。程子嘗極陳治道。神宗曰。此堯舜之事。朕何敢當。神宗其志如此。雖欲用之得乎。又嘗論朱子。筵臣曰。朱子生南渡時。志在經濟。蓋欲人君正心克己。養民養兵之外。了然無一事以間之也。王曰。宋有程,朱而不能用。今不能推行其道。則豈不復爲後人所恨也。又曰。君臣固難相信。而任將尤難。韓信曰。漢王言聽計用。雖死不易。人主苟信用臣下。則臣下寧有欲去者乎。又曰。每念宋高有宗,李,韓,岳而不能用。蹙處江南。不能進一步。未嘗不悵然太息也。王神彩嚴毅。人不敢仰視。而每對群臣。言笑樂易。開心見誠。洞澈無間。故人人咸得以自盡其言。直則賞之。其人可用則奬拔之。不拘資格。雖已死者。褒寵不已。忠賢子孫。特加收錄。儒先祠廟。悉賜扁額。有司恤罄。請削朝廩。不許曰。忠信重祿。所以勸士也。毋寧盡損御供也。愛養民生。常如不及。歲惡。免入發積。未嘗少靳。數遣御史。廉問其疾苦。歸則輒親見問。有白其死飢之狀。王惻然泣下曰。此不忍聞。食其下咽。卽減常膳。疾疫民死。命齎內藥以救之。守令必引見。敷納以言。因勉勵之。或於恒調。擢授右職曰。嘗爲某邑。嘉爾治績。天旱必親禱。禱輒應不移晷。凡民之惡欲。罷置如飢渴。雖力討軍實。而老弱者免。雖愛惜官爵。而耆艾則與。尤愼祥刑。自點獄起。悉焚其所親交書。每寒暑甚時。必問獄囚。疏出其細犯。嘗使近臣閱囚。有無衣者。命所司備給曰。罪有常服。凍殺則不可。湖民被誣告逮繫者甚衆。王見爰辭。卽釋之。亦給衣糧。皆叩頭流涕而去。讀呂刑哀敬之文。喟然興歎。面諭刑官。使之盡心。有失入者。輒坐之不以恕。故好生之德。浹于民心。然有罪者一斷於法。不自爲輕重。雖外挾內訌者。衆所疑懼。亦殄戮之無所撓。增損學制。以造俊升。尙慮牖民無法。命梓三綱行實警民等編。以頒中外。蓋帝王爲治之道。大本旣立矣。方將修擧廢墜。振起綱維。以挽回世道。以克酬聖志之所欲爲者。而卒未能就。嗚呼。且以文王之德。百年而崩。猶未洽於天下。況形勢之難易。又萬萬於殷周之際者。而天之降年。又未及文王之中身哉。嗚呼痛哉。昇遐之日。京都士庶。塡咽哭踊。深山窮谷。莫不悲呼曰。吾其奈何。嗚呼。茲所謂未施哀而民哀者歟。王諱▣字▣▣仁祖子也。母妃韓氏。西平府院君浚謙之女。神皇末年。天下始發亂。本朝方且淪喪。天命已歸仁祖。而王以萬曆己未五月二十二日生焉。昭顯世子。王母兄也。昭顯卒有子。 仁祖以王有聖德故立之。王妃故新豐府院君張維女。誕一男。卽我殿下。諸公主下嫁事舅姑。甚執婦道。此見王化之一端也。嗚呼。自三代以下。治不本於學。故道術爲天下裂。惟王遜志來修。以御家邦。故駸駸乎王道之純。三代以下。惟功利是尙。故多愧於天理民彝。惟王正誼明道。無所計較。故聖志克定。卓然如靑天白日。罔曰不克。罔曰民寡。惟厥心厥事。是旣是愼。嘗有日暮途遠之歎。又歎曰。古語一二臣同。不爲無助。今則小大敷同。惟目前是圖。誰與我共此者。故時有荊南幄對之賜。其沈機妙算。有非人人所可窺測者。尤好宋儒書。有以心學說進者。卽授筵臣訂正曰。得無有悖於程朱否。蓋其秉天理明聖學。正王法伸大義。以繼春秋大一統之業。以承聖考道心之傳。以不負皇天生聖之意者。豈非建天地而不悖。質鬼神而無疑者乎。世無知德者。固不能象成歌詩。疏越薦聲。使人愀然如復見盛德之容。然以經傳所載。摸象而蠡管之。其乃武乃文。祖乎堯。孝悌盡道。宗乎舜。儉勤惡旨酒。法乎禹。不邇聲色。改過不吝。慕乎湯。視民如傷。卑服康功。師乎文王。發揚蹈厲。恐不逮事。象乎武王。自漢以下。則恢廓大度。高祖如之。重厚直柔。光武同之。信義彰著。昭烈近之。弧矢鐵柱。寤寐豪英而齎志不伸。惜乎宋孝宗似之。此則時勢然也。王在燕。忽見五彩凝室而神龜出見。昔禹抑洪水。而天乃以是錫禹。使王志業成就。則將不在禹下矣。奈何天示之兆。而不畀之壽。使天下萬世。不得卒受其賜歟。孰謂亂之可治。變之可正。而陽不可終無歟。匪風下泉之終於變風。其意安在。豈所謂天不勝氣數屈伸而然者歟。雖然。建皇極之正。明人倫之晦。其正大宏遠之規。日星乎中天。以遺我 聖子。以基億萬年無疆之業。則其與地平天成。萬世永賴者。未嘗不同也。嗚呼。龜眞有知也歟。噫。此可以少慰臣子無窮之痛也歟。臣猥蒙知奬。不卽褥蟻。忍以文字。記事纂言。乾坤之大。日月之明。固難繪畫。而且恐遣辭之際。華而不實。則罪有甚於華元,樂擧。故寧質而不敢溢。以對揚疇昔遠佞之聖德云。崇禎紀元後三十二年己亥十月日。左參贊臣宋時烈撰。
遷陵時附識
寧陵下還之翌年庚子。陵上石儀罅隙生焉。我 殿下議將改封。旋慮驚動玄宮。只命以石灰逐旋塡補。今年癸丑四月。因一宗室上疏。亟命公卿以下以及三司諸臣同往奉審焉。其罅隙細大。皆如宗室言。殿下驚懼駭隕。徧謫前後任事諸臣。因慮雨水或從罅隙中滲漏。遂議遷奉。卜吉于驪州弘濟洞。以九月二十九日乙未。啓欑宮。十月初四日。廞衛臨堩。初七日癸卯。依禮克襄。去我世宗大王英陵八百九十七步而近。蓋弘濟洞自古稱聖人葬地。今其果協矣。夫幽誌冊文。皆因舊貫。陵制一遵英陵儀式。幷昭慈儉之德。其萬世永寧。垂佑無疆之慶。可期而無疑矣。嗚呼。我聖考盛德嘉謨。倘能備記。以經聖人之手。則必在淸廟生民之列矣。何渠參伍於費秦二誓之間哉。嗚呼。今去上賓之時十有五年矣。臣民之思慕悲痛。如一日不怠。當初啓。自 殯殿以至陵所。遠邇含生。彌山滿野。至誠哀號。今聞緬禮之擧。又相與涕洟而言曰。我聖主復臨灤水之朝。嗚呼。是孰使之然哉。天佑聖德。我殿下遹誕神孫名某。丁未正月二十二日。冊封爲世子。太係神人之望。噫其休矣。聖考嘗論張,范二人曰。良之背鴻溝約。其忠憤急於復讎。念何暇及他。義理便在其中矣。增也每爲項羽圖帝業。將置義帝於何地。及其義帝弑。而猶從羽不去。是不識天無二日之義也。其罪大矣。而蘇軾顧捨此不論。乃咎其昧幾被害。其學謬矣。嗚呼。此亦超越百王之見。而亦豈無微意於其間耶 。此前誌所逸。故今幷追識焉。一公主錫號淑安。下嫁益平尉洪得箕。生子致祥。二公主錫號淑明。下嫁靑平尉沈益顯。生子廷輔,廷協。三公主錫號淑徽。下嫁寅平尉鄭齊賢。生子台一。四公主錫號淑靜。下嫁東平尉鄭載崙。生子仁先及一女。五公主錫號淑敬。下嫁興平尉元夢麟。生一女。淑寧翁主降爲錦平尉朴弼成妻。生一女。我殿下生明善,明惠,明安三公主。長次夭。後十四年癸丑十月日。判中樞府事臣宋時烈撰。<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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