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를 담는 경관 "오이도(烏耳島)"
2016년3월30일 오늘도 아름다운 5060 산행동호회에서
2014년6월4일에도 갔었다는 수요산행지로 정한 오이도
옥구산행을 하기 위해 오전 여덟시에 집을 나서서 두시간
사십오분의 교통거리인 오이도역에 도착하니 오전 열시 사십오분
34명의 산우님들이 해진 대장님의 안내로 울창한 솔 숲이
이뤄진 늠내길 4코스와 넓은 옥구공원에서 쇠주와 막걸리 잔을
주고 받으며 20여분간의 쉼을 즐기다가 옥구산 정상에 올라 유수한
공업도시랄 수 있는 안산시와 시흥시 바다건너 인천 송도를 조망(眺望)
해보니 급격한 해양도시화가 황해의 중화경제권(中華經濟圈)임을
실감케 했습니다. 하산하여 간조시라서 갯뻘이 끝이 보이지 않은
해변길을 걸어 빨간등대 아래 선착장까지 와서 네 파트로 나뉘여서
자리를 펴고 모여앉아 생선회와 찌게를 끓여서 기분좋은 뒷풀이를
하고 세시간 걸리는 귀가길로 집에 돌아오니 밤 열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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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고 새우는 봄이 오니 겨우네 움추렸던 몸과 마음은
꽃이 피듯 사지(四枝)를 활짝펴고 사람의 마음속에 차 있는
넓고 크고 올바른 기운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펴니 흙속에
생물의 몸에 영양을 좋게 하는 성분인 자양분(滋養分)을 먹고
흙위로 싹을 틔워 꽃이피고 눈속에서도 꽃이 피는 설중매화(雪中梅花)
가 고고한 품을 갖춘 봄의 전령(傳令)처럼 가장 먼저 피우니 정비석
선생님이 저자인 "명기열전" 7권에 쓰여진 퇴계이황(退溪李滉)과
관청에 딸려 가무와 기악 따위를 하는 단양(丹陽)관기(官妓)였던
두향(杜香)이와 매화를 주제(主題)로 시를 즐겨 읊으니 사랑이
무르익어가는데 두 분은 얼마 뒤에 있을 긴 이별을 예견이나 한듯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지요.
靑山橫北郭(청산횡북곽)-푸른 산은 북쪽 밭 재를 둘러 있고
白水汚東城(백수요동성)-맑은 물은 동쪽 성을 돌아가도다.
此地一爲別(차지일위별)-오늘밤 여기서 한번 헤어지면
孤逢萬里征(고봉만리정)-외로운 나그네 만리를 가리
퇴계(退溪)가 이런시를 지으니
두향(杜香)이 화답 했지요
浮雲遊子意(부운유자의)-떠가는 저 구름은 임의 마음이요
落日故人情(락일고인정)-지는 이 해는 나의 정이 로다
揮手自玆去(휘수자자거)-손 흔들며 그대는 떠나가니
蕭蕭班馬鳴(소소반마명)-가는 말 울음소리 못내 서러워
이별을 앞둔 마지막날 밤
밤은 깊었으나 두 사람은 말이 없었지요
퇴계가 무겁게 입을 열었어요
"내일이면 떠난다. 기약이 없으니 두려울 뿐이구나"
두향이 말없이 먹을 갈고 붓을 들었지요 그리고는 시 한수를 썼어요
“이별이 하도 서러워 잔들고 슬피 울제
어느덧 술이 다하고 임마저 가는 구나
꽃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이날밤의 이별은 결국 너무나 긴 이별로 이어졌지요
두 사람은 1570년 퇴계선생이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21년 동안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요
그렇지만 두향은 진정으로 사랑한 그님을 위해 관기
생활을 정리한후 평생을 수절하며 퇴계를 그리워했어요
어쩌면 단 10개월 동안 이었지만 자신의 모든것을
주어버린 그님에 대한 예의 였는지도 몰라요
두향은 오로지 퇴계만을 그리워하면서 함께 노닐던
강변 강선대를 혼자 거닐며 짧은 기간이었지만 퇴계
와의 수많은 사연들을 추억하면서 외롭게 살아갔어요
그러면서 강선대에서 눈물을 흘리며 가야금소리에
도수매(倒垂梅)란 시를 지어 보냈지요
一花纔背尙堪猜(일화재배상감시)-한 송이 꽃 약간 뒤돌아 피어도 오히려 의심스럽거늘
胡奈垂垂盡倒開(호내수수진도개)-어찌하여 모두 거꾸로 드리워져 피었는고
賴是我從花下看(뢰시아종화하간)-그 까닭을 알고자 꽃 아래에서 살펴보니
昴頭一一見心來(묘두일일견심래)-머리 쳐든 한송이 한송이 꽃심이 보이네
퇴계 또한 두향과 이별한지 4년이 되는 어느 봄날
퇴계의 나이 52세되던 해에 인편에 시 한수를 적어 두향에게 보냈다지요
黃卷中間對聖賢(황군중간대성현)-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허명일실좌초연)-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매창우견춘속식)-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을 다시 보니
莫向瑤琴嘆絶絃(막햑요금탄절현)-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을 말라.
이 시문의 끝 구절에 “거문고 마주 앉아 줄 끊겼다 한탄 마라”는
두향의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이지요 두향은 이 시 한편을 받고
평생을 거문고 가락에 실어 그 님을 그리워 했다 하네요
서해를 담는 경관 "오이도(烏耳島)"
‘까마귀의 귀’라는 재미있는 의미를 지닌 이곳은 육지와 연결된
섬 아닌 섬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2년 군수용 소금의 채취를
위하여 제방으로 육지와 연결된 이후 서해안의 이색적인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오이도와 대부도를 연결하는 12.7㎞ 동양 최대 길이의
시화방조제 건설 이후 갯벌의 오염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멀어졌으나
정화 공사를 마친 시화호와 방조제가 예전의 청정함을 되찾으면서
맛과 경관을 즐기는 명소로 다시 태어났다.
2003년 개장한 대규모 종합어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오이도의
먹거리는 서해 바다의 넓은 갯벌에서 채취한 조개구이와 바지락이
듬뿍 담긴 칼국수가 유명하다. 시화방조제 전망대와 기념관으로
연결되는 방조제 위의 도로는 막힘 없이 직선으로 연결되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바다 위를 달리는 듯 멋진 경관을 감상할
수 있으며 인라인 스케이트나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는 전용도로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선착장 인근의 갯벌체험과 바다를 물들이는
서해의 붉은 낙조는 오이도의 추억을 만드는 멋진 경관이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마로니에북스")
시흥 오이도 유적(始興 烏耳島 遺蹟)
경기도 시흥시 정왕도 914
오이도 입구 너른 자리(약 8천㎡)에 분포하고 있으며, 서해안에서
규모가 가장 큰 패총(조개무지)이다. 출토된 유물은 신석기시대의
토기, 석기, 수혈주거지, 야외노지, 화덕을 비롯하여 청동기
패총에서 발굴한 초기 철기시대의 덧띠토기[粘土帶土器],
삼국시대의 두드림무늬토기[打捺文土器] 등 백제토기,
통일신라시대의 도장무늬토기[印花紋土器],
주거지 및 온돌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안말, 뒷살막, 가운데살막, 신포동, 소래벌, 알말 패총 등이
있는데 시화지구 개발 이후 신포동, 소래벌, 가운데살막
패총 등의 유적지는 유실되었고, 아직 남아 있는 뒷살막, 안말
등의 지역도 구체적인 보존방안이 필요한 실정이다.
우리나라 서해안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남북관계의 흐름을 알 수 있고 내륙지방과의
남북교류관계, 서해안 갯벌지대의 신석기시대 해안 적응과정을
알려주는 유적이다. 2002년 4월 1일 사적 제441호로 지정되었다.
시흥시가 관리한다.
시흥올레길인 "늠내길"
천혜의 자원, 푸른환경과 함께 선사시대 이래로 역사유물이 풍부한
시흥시는 수도권 유일의 생태도시로 거듭날 가능성이 풍부한 도시이다.
이러한 시흥의 서쪽 해변에 위치한 오이도는 섬 전체에 걸쳐 패총이 분포되어
있으며, 해양 생태의 풍부한 조건으로 수도권 주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지역이다. 오이도 패총은 서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패총으로,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남북관계 흐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유적일 뿐 아니라,
내륙지방과 신석기문화의 남북교류관계, 그리고 서해안 갯벌지대의
신석기시대 해안 적응과정을 알려줄 수 있는 유적으로 파악되고 있다.
시흥의 올레길은 ‘늠내길’로 불린다. ‘늠내’라는 말은 ‘뻗어나가는
땅’이란 뜻. 이 말은 고구려 장수왕 시절에 백제의 영토였던 이곳을
차지한 후 부르던 ‘잉벌노’에서 비롯됐다. ‘뻗어나가는 땅’이란 의미를
지닌 잉벌노의 당시 표현이 늠내다. 늠내길은 숲길, 옛길, 갯골길
등 3개의 코스로 조성됐다. 숲길(13km)은 시흥시청에서 시작해 시내의
야트막한 산을 잇는 길이다. 옛길(11km)은 소래산을 중심으로 옛사람들이
걸어 다녔던 산자락과 고개를 이었다. 갯골길(16km)은 시흥시청에서
장현천 방죽을 따라 소래포구 입구까지 갔다 온다.
갯골길의 출발은 시흥시청이다. 시흥시청 정문에 갯골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시흥시청을 빠져나와 실개천을 따라간다
. 물줄기가 거의 말라붙을 만큼 작은 개울이다. 장현천의 시작이다
. 그러나 이 개울을 따라 2시간만 걸어가면 배가 드나드는 바다다. 예전에는
큰 비가 내리면 이곳까지 숭어떼가 물줄기를 거슬러와 뛰놀았다.
처음은 실개천이지만 2시간만 걸어가면 바다와 만나
시흥시청에서 장현천을 따라 1km 가면 쌀연구회가 나온다
. 시흥 들녘에서 수확한 쌀을 모아 도정하는 곳이다. 쌀연구회에서
개울을 따라난 방죽을 버리고 들녘으로 난 길을 따라 간다.
방죽을 따라가도 갯골생태공원에서 두 길이 만난다. 시흥 들녘은
쌀도 생산하지만 연밭도 조성하고 있다. 여름이면 들녘 한 가운데에
뽀얀 연꽃이 피어난다. 연꽃은 현재 시흥의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쌀연구회에서 2.7km를 가면 갯골생태공원에 있는 전망대에 닿는다.
이곳부터 다시 방죽을 따라 간다. 갯골생태공원은 시흥시가 갯골의 생태적
보전과 과거의 향수가 물씬한 염전지대를 체험공간으로 활용, 갯벌 체험과
배움터로 만들려고 조성하고 있다. 공원 내에는 산책길과 염전 체험장,
소금창고, 생태탐방로 등이 조성되고 있다.
갯벌생태공원을 지나면 아늑한 방죽길이다. 이곳부터
방산대교까지 약 3km는 맨발로 걸어도 좋을 흙길이다.
도보여행자는 물론 자전거 동호회도 즐겨 찾는다. 가끔 말을
타고 오는 이도 있다. 또, 폭이 넓어진 갯골에서는 망둥어나
숭어를 노리는 낚시꾼들이 갈대밭에 웅크리고 있다. 특히
, 가을이면 갯벌을 붉게 물들이는 퉁퉁마디(함초)와 키 높이로
웃자란 갈대, 세월 뒤편으로 사라진 염전의 예스러운 정취가
어울려 걷는 맛이 특별하다.
갯벌생태공원에서 1.3km 가면 섬산이다. 장현천에 물을 보태는
작은 개울이 이곳에서 가지쳐 나간다. 이 작은 개울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었는데, 그 끝이 섬산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큰 비가 내렸을 때 떠내려 온 산이라고도 하고, 논 가운데
섬처럼 떠 있어 섬산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수십척 어선이 정박한 소래포구 앞에서 걸음 되돌려
섬산을 지나서도 왼쪽은 염전이, 오른쪽은 갈대밭과 함초가
가득 메운 갯벌이 펼쳐진다. 섬산에서 방산대교까지는 2km.
국도가 지나는 큰 다리인 방산대교에 서면 이제 바다가 멀지 않음이
느껴진다. 넉넉해진 갯골에는 배를 정박시킬 때 썼던 닻이 줄줄이
서 있다. 눈길을 서쪽으로 주면 소래포구에 정박한 수십척의 배들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소래포구만 지나면 서해바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