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1장 22절입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만물의 머리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현대어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첫째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둘째,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다스리는 머리요, 또한 교회의 머리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골로새서 1장 17-18절에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있었느니라. 그는 몸이니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머리요 교회의 머리이신 것은 그분이 원수(元首)라는 의미를 강하게 풍기고 있는 '만물의 으뜸'이 되셨다는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계셨고 만물은 그분의 능력으로 보존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하면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 되셔서 만물의 으뜸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 수 있게 회복된 것입니다(골 1:20-22절).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만물의 머리이셨는데, 죄 때문에 단절되었던 이 관계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으로 회복시켜 놓아 본래의 관계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 자들이 그분의 왕국을 이룬 것이니,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섬깁니다.
'머리'라는 말이 지닌 의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인데, 이 말씀은 첫째, 우리 신체에서 몸뚱이의 제일 윗 부분에 붙어 있는 머리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 의미가 성경에서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신자와의 관계성을 '머리'와 '몸'으로 설명할 때는 일차적으로 신비한 일체를 이루는 '연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신자는 한 몸, 그러니까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는 각 개체가 아니라 한 생명을 이루고 있는 유기체입니다.
둘째, 머리라는 표현은 단체의 머리(首長), 즉 가장 어른 되는 분이요 지배자요 명령하는 분인 우두머리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주(主), 그러니까 머리로 계십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표현할 때는 이 사실을 핵심적인 의미로 다루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16절을 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가 서로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머리'라는 말을 쓸 때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 첫째는 1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 여기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라'는 말은 우리의 손과 발이 머리까지 자라가야 한다는 의미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손과 발이 머리까지 그렇게 기형적으로 자라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그리스도라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으니 그의 신자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목표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영혼의 기능과 육신의 모든 기능이 활동을 해서 장성해 나가 그 머리되신 분에게까지 자라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로 완전히 충만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그의 신자된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엡 4:13). 사람이 생장(生長)하는 데에 있어서 어렸을 때 갖는 중요한 특징은 "나는 커서 이 다음에 이러 이러한 사람이 되겠다"고 목표를 갖는 것입니다. 가령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장군을 자신이 도달해야 할 목표로 삼고서 그와 같은 인격과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자신이 커 가고자 합니다. 이 경우에 신자가 도달해야 할 목표인 머리는 본 받아 그와 같은 인물이 되는 것으로서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본 받아 더욱 더 닮은 자가 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자"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인 예수만을 바라보고, 그분이 계신 영광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오직 인내를 가지고 달려가자는 배경으로 하고 있는 얘기입니다.
다음으로 그 둘째는 1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가 서로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여기에 보면,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몸이 자라도록 서로 돕게 될 것이고, 그러면 온 몸이 잘 자라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가 잘 자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온 몸의 각 마디(지체)가 무슨 활동을 해야 할지를 지휘하고, 또 그만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그에 따라서 각 마디는 힘을 내어 맡은 분량대로 활동합니다. 그 결과 온 몸은 영양을 공급받고 그 몸을 자라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잘 자라는 몸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각 지체가 그리스도의 도움을 입음으로 사랑의 수고를 다하는 까닭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의 주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의하여서 온 몸이 자라나는 것이 있고, 생명이 보존되고 평화롭게 삶이 유지 되어갑니다.
에베소서 5장 23절의 말씀을 보면 이 관계성을 좀더 진지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의 부부 관계라는 실제 문제를 들어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남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어떠합니까? 남편과 아내는 각각 독립된 인격체입니다.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이고가 아닙니다. 누가 더 힘이 있고 누가 힘이 없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남편도 하나의 인격이고 아내도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갖는 순서는 질서에 따른 차서가 있습니다. 남편이 있고 다음에 아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먼저 남자를 창조하시고 그를 돕는 자인 '배필'을 삼게 하기 위하여 그의 몸의 한 부분으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남자에게로 이끌어 나아오게 하여 남자가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남편과 아내의 한 몸이 되는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부부가 사단의 시험을 받고 하나님께 범죄하여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에 따른 심판을 하실 때 남편과 아내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이는 남편과 아내의 우열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의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요, 아내는 남편을 공경으로 따라야 할 위치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이것이 있어서 아내를 다스리고, 또한 남편에게 복종하기에 가정은 화목하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성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곧 다스리는 주이십니다. 온 몸의 각 마디가 어떻게 활동해야 할 것인지를 지휘하고, 또한 힘껏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움을 주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복종함으로 따릅니다. 그리스도의 지휘와 도움을 받아 힘껏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으로 온 몸에 영양을 공급하여 잘 자라게 합니다. 그 교회가 얼마나 사랑으로 수고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온 몸인 교회는 그리스도로 충만해져 나갑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각 지체된 신자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그리스도 한 분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여 그를 따라가며, 그런 신자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가지고 교회의 모습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는 분명히 이렇습니다. 그런데 만일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서 이런 모습이 갖추어져 있질 않고 어떤 부분만 그렇다면, 그래서 나머지 부분은 전혀, 또는 제대로 지체의 기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정상적인 몸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몸의 어떤 부분이 고장난, 즉 병난 상태일 것이며, 이는 몸 전체에게 영향을 끼쳐 몸이 아프거나, 장애인으로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각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임 있게 맡은 분량대로 활동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합해야 합니다. 다 같이 믿음을 합해 가지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생명력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건강함이 있습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받는 실증이 있어야 함
우리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알고 있다면, 교회는 실제 그분의 다스리심을 받는 삶이 나타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로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하면서도 과연 그분의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는 것이 없다면 행함이 없는 말뿐인 것으로 죽은 믿음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루고 있는 교회를 '개혁교회(개신교)'란 말을 사용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런데 이 개혁교회란 '교리(신학)와 생활'을 중시합니다.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만물의 머리요 교회의 머리란 것을 알았다고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현실 생활에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허지만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지금 교회의 머리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실제 현실 생활에서는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지도 않아 자기 중심으로 산다면 교리와 생활에 괴리가 생깁니다. 행함이 없는 말 뿐으로서 아무런 생명력이 없어 기독교 신앙이 이런 것인가 하는 비판이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는 통치는 내세의 세계에서나 있을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렇게 알고 있는 형편입니다. 지금 교회를 이루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그때를 대비해서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지금 현재의 이 보이는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서 통치력을 행사하고 계십니다.
또 신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는 통치를 자기 형편 처지에 맞추어서 요구합니다. 그래서 급한 사정이 생기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예수님께 기도하여 도와 달라고 합니다. 그때마다 내세우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오 사랑의 주님이시쟎습니까? 주님께서 내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기도하면 내가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으니 도와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아프고 병든 자, 귀신들린 자를 도와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니 내 문제쯤이야 대수롭겠습니까?" 하면서 떼를 쓰며, 어거지로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교회를 다스리는 통치가 기껏해야 이렇게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데 동원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문제 삼지 말아 보겠습니다. 당장 물에 빠진 사람이 급한 마음에 찾는 것은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며, 눈에 보이는 것이 지푸라기라 할지라도 붙잡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 삼지 않으면 안됩니까? 과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자기의 통치자로 모시고서 섬기며 살 때, 그래서 그분의 도움이 필요로 할 때 찾고 기도하는 것은 그것으로서만이 아니라 자기 삶의 생활 전반에서 가지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이 실제의 현실 생활에서는 경험되고 증명되는 것이 없이, 자기 문제의 해결사로서만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알 때 그와 함께 알아야 할 것은,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데 그 왕국은 이 현실 사회에서 건설되고, '은혜의 왕국'으로 현재 교회를 이루고 있는 각 신자들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 은혜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이 각 신자들의 일상의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을 공예배하는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교회란 몸이 하나님께 절하는 예배가 갖는 실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의 표지가 말씀 선포와 성례전과 권징 이라는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 예배를 일상적으로 갖는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 받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삶을 살기 위하여 항상 생각이나 행동으로 새로워져서 자신의 몸을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롬 12:1-2). 성경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 또한 일상에서 본능적으로 가지며, 봉사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몸의 각 지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에게 이러한 생각으로 살도록 자기의 뜻을 분별하게 하시며, 은혜를 공급하여 활동하게 해 주십니다.
다음으로 둘째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그들이 소유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예배는 온 세상에 하나님을 선양하여 하나님께 외인(外人)되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는 빛의 사명을 갖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면, 사실 그분을 증거 할 사명 또한 가진 상태에서입니다. 그만한 복음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충성스럽게 사역할 사명감도 있는 것이 전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아니고서는 교회는 형성되지 않습니다. 만일 교회를 설립했을지라도 하나님에 의하여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에 불과할 따름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대해서는 앞서 '지교회의 설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사'를 다룰 때 설명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신자는 예배에서 하나님을 선양하는 그 빛이 그들의 하늘의 품성을 지닌 고귀한 인격과 입술의 증거를 통해서도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 자가 은혜의 왕국의 통치를 받는 삶을 실증적으로 갖는 사람입니다.
이때 이 은혜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은혜의 왕국의 통치를 받게 하는 직접적인 방법은 교회의 사역자로 세운 자들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권능을 가지시고 교회를 통치하실 때에는 교회에 사역자들을 임명해서 세워 그들을 통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왕국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통치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지상의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통치를 대신 수행할 사역자를 임명하여 세워서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사실을 구체적이며 실제적으로 표현하십니다. 그러기에 사역자가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은 그의 위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가 교회를 다스려 나간 통치력은 하늘의 인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통치를 받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곧 은혜의 왕국의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는 사역자들의 활동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에 이르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생명의 열매를 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말하기를 자신이 사도권을 가지고 사도의 사역을 수행한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너희들이었다고 하였습니다(고전 9:2). 이는 비단 사도권을 가진 사역자에 의해서만 있어지는 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이 즉, 목사는 설교하고, 장로는 치리하고, 집사는 구제하고, 그밖에 여러 임시 직원들이 다양한 봉사를 하여 성도를 섬기는 것에서 온 교회원이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에서 살게 합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과 입술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그리스도를 말하는 일을 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생명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해 나가십니다. 여기에서 '은혜의 왕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실증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의 속성인 거룩성을 지켜 나가기 위하여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구원을 받고 교회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죄로부터의 구원인데, 죄의 책임과 그에 따른 형벌을 면제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실 때에 우리 또한 그와 함께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하나는, 의롭다 함을 받은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만에 다시 부활하여 생명의 주가 되신 사실로 말미암습니다(롬 4:25). 이런 교회이기에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품성을 발휘하는 데서 교회의 존재 목적과 그 가치를 찾습니다. 곧 하나님의 백성다운 자로서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생명 있는 교회이니, 이를 '거룩성'으로 말합니다. 교회는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한 자가 되었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었으니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해서는 안되며, 이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여 가르치신 올바르고 거룩한 것에 마음을 다해 순종하는 의의 종으로 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롬 6:15-23). 이런 사람을 성경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것으로 설명합니다(엡 4:22-24). 거기에서 교회가 은혜의 왕국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실증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실증이 없으면 외식하는 위선의 위험성이 있음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습니다. 교회가 그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말하며 또한 보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아는 원리와 같습니다. 개혁교회가 '교리와 생활'을 중시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교회는 결코 교리로서만 말해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에서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 그 실증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이 말은, 우리가 교회라고 공언하고,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면, 과연 자신들의 머리로 계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실증을 가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생명 없는 거짓된 교회로 남기 딱 알맞습니다. 유대인의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문제점이 바로 이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에 관한 지식(knowing about God)은 많이 가지고 있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그 지식이 아무런 믿음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공허한 말뿐이었던 것은, 남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그들 자신들은 정작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데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of God)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없는 지식, 생활이 뒤따르지 않는 교리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기에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그 전철을 따라 참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습니다(눅 11:45-54). 그들은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는 지식으로 고작해야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데 썼습니다. 이런 그들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외식하는 위선자'로 신랄히 비판하며 책망하셨습니다(마 23:1-36). 교회가 참으로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아멘(*)
첫댓글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