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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9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요나단에게서 찾은 하나가 되는 방법
본문 : 사무엘상 18장 1절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개역개정>
원래는 하나였지만 둘로 나누어진 것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우리나라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까지, 불과 78년 전만 해도 한 나라였지만 현재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원래는 말과 글과 얼이 다 하나였던 한민족이었지만 지금은 너무도 다른 둘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원래 카톨릭과 개신교는 하나의 종교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기독교’라는 종교의 분류로 큰 틀 안에서는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를 하나의 ‘기독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같은 틀 안에 넣어 두기에는 너무도 확연히 다른 둘입니다. 이젠 누구도 하나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래 하나님과 아담은 하나였습니다. 에덴동산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은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 역시 하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한 몸으로 선포하신 하나님의 선포는 하나님과 인간 역시 하나임을 선포하신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불순종’과 ‘회피’ 그리고 ‘외면’이 만들어낸 죄의 결과로 인해 하나가 된 결합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인간은 둘로 나누어져 버렸습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이사야 59장 2절, 새번역>
원래 부모와 자녀는 하나였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하나의 탯줄로 어머니와 모든 것을 공유했던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우는가 봅니다. 하나 된 부모와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른이 되면 독립을 하고 부모를 떠나갑니다. 당연히 둘이 되는 것을 선택합니다. 처음에는 아이가 원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부모가 원하지 않아 부모가 둘로 나누어 진 것으로 인해 눈물짓게 됩니다. 그래서 결혼식장에서 부모님들이 그렇게 많이 우시나 봅니다.
원래 성전 안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예배자’로 하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순간에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만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준비했던 사람도,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도 모두 한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던 ‘예배자’였습니다. 그래서 각 자 개인으로 불리지 않고, 하나의 ‘이스라엘’로 불리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였습니다. 예배 공동체였고, 삶의 공동체였고, 운명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성전 안에서 예배자가 여러 가지로 나누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직책이 곧 계급으로 바뀌었고, 계급으로 인해 귀천이 나누어졌으며, 드리는 제물에 따라 용서의 양도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다못해 성전 안에서 예배를 더 편리하게 드릴 수 있다는 명목 하에서 장사판이 벌어졌습니다. 이제는 성전 안에 예배자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 예배를 통해 무슨 이득을 얻을까 생각하는 장사꾼들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예배자’란 공동체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나였지만 둘이 된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까? 지금 우리는 ‘예배자’라는 공동체입니까? 지금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되어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둘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까? 혹여나 나의 예배만이 강조됨으로 우리의 예배는 뒷전이 된 것은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었든 나만 예배드리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우리는 홀로 예배드리는 개인 예배자입니까? 함께 하나 되어 예배드리는 ‘예배자’라는 이름의 공동체입니까?
정말 진심으로 마음 다해 간절히 소망하기는 우리 모두 함께 하나 되어 예배드리는 예배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물론 우리는 너무도 다릅니다. 너무 달라서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이해하고 인정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각 자 다른 우리가 하나의 ‘예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예수님이 그토록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1~23절, 새번역>
그리고 ‘예배자’로 묶어 주신 진짜 목적은 바로 최종적으로 하나님과도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함이셨습니다. 다시금 에덴동산을 회복하고, 죄를 해결함 받아, 다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금 생명을 주시고, 의인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초청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19절, 새번역>
분명 우리가 하나의 예배 공동체가 된다면 다시금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도 너무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단 한 번도 개인 구원만을 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 개개인이 모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예배 공동체, 그 사회 구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도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의 ‘예배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의 ‘예배자’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해답을 오늘 다윗과 요나단에게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모든 것이 너무도 달랐던 다윗과 요나단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던 친구였습니다. 과연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은 사무엘상 18장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가 되길 원하는 쪽에서부터 마음을 열고 움직여야 합니다.
사실 저는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순서 배치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이라고 바꾸어서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히 이 관계는 요나단으로 인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더 유명해 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장본인이 바로 요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위대한 다윗이 되도록 기초를 다진 인물이 바로 요나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것도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아버지 사울 왕 앞에 선 다윗을 보면서 요나단은 하나의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나는 왕이 되지 않겠다. 다음 왕은 다윗이다.’ 이미 하나님의 영이 아버지를 떠난 것을 알고 있었던 요나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다윗을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사실은 왕자였던 자신이 물려 받아야 할 왕의 자리인대, 솔직히 질투가 활활 불타올라서, 오히려 죽이고 싶도록 미울 수 있을 터인데, 완전히 반대로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고 상대방을 인정하게 됩니다. 자신은 아버지 사울처럼 다윗과 등지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게 됩니다.
요나단은 제 목숨을 아끼듯이 다윗을 아끼어, 그와 가까운 친구로 지내기로 굳게 언약을 맺고,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서 다윗에게 주고, 칼과 활과 허리띠까지 모두 다윗에게 주었다. <사무엘상 18장 3~4절, 새번역>
요나단은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가 되길 원했기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음을 열고 다윗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왕자에게만 주어지는 모든 물품들을 다윗에게 내어주면서까지 요나단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게 됩니다. 자기 목숨을 아끼듯이 다윗을 아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씩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하여, 하나가 되길 원하는 사람이 먼저 마음을 열고 움직여야 합니다. 손해 볼 것 예상하고, 비굴할 것 예상하고, 내 것을 양보할 마음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마음만 먹은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표현해야 합니다. 때론 나의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기꺼이 양보하는 것입니다. 생각만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앉고 싶었던 그 자리에, 그 자리가 왕의 자리일지언정 내어줄 수 있는 결심과 행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먼저 움직여 주길 바라다보면 그냥 세월만 흘러갈 뿐입니다. 내 자리를 지키느라 힘을 쓰면 다른 사람에게 점점 내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불편하게만 느껴질 따름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꼭 실천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자기 자리가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닙니다. 그 자리를 다른 이에게 양보할 수 있다면 이미 먼저 움직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2007년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여러 가지 목적으로 서울에 있는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예배를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교회가 바로 여의도에 있는 순복음 교회입니다. 소문대로 엄청나게 컸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파이프 오르간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그렇게 아내와 함께 일찍 도착해서 가장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기왕이면 가장 앞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었고, 마침 자리도 비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열심히 기도를 하며 예배를 준비했고, 이제 예배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였습니다. 누군가 제 어깨를 두드렸고 이런 말이 들려 왔습니다. ‘그 자리는 우리 자리니 비켜주세요’ 느낌상으로 장로님과 권사님으로 보이는 부부였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사실 인상을 한 번 썼습니다. 그런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조금 크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비켜 주세요!’ 저희 부부는 비켜 드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자리가 헌금위원석도 아니었고, 대표 기도자 준비석도 아니었고, 특별한 순서를 맡은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 분들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늘 비어 있었던 것일까요? 다른 자리는 가득 찼는데 늘 그 자리는 그 분들을 위해 비어 있었던 것일까요? 저희는 그렇게 쓸쓸히 앉을 곳 없이 예배도 드리지 못하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화나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보다 씁쓸한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교회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꽤나 많은 교회에 갔을 때, 아니 사실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암암리에 존재하는 지정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씁쓸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자기 자리를 양보할 줄 아는 요나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마음을 열고, 움직임으로,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멋진 양보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나의 상대방은 모두 다윗과 같은 나의 VIP들입니다. 나의 VIP들을 위해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의 자리를 양보하는 요나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서로 요나단임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얼굴 가득 미소를 짓게 될까요? 마음이 통했다고 얼마나 기쁠까요? 진짜 오늘 읽은 본문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사무엘상 18장 1절, 개역개정>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먹었다면 지체하지 말고 하나가 되기 위하여 움직임이 필요합니다. 그 움직임이 바로 우리를 하나 된 ‘예배자’가 되게 할 것입니다.
둘째, 내 목숨을 아끼듯이 아껴야 하나가 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목숨 아끼듯이 아꼈습니다. 아니 사실은 다윗을 자기 목숨보다 더 아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 사울이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윗을 죽이겠다고 선포한 날, 요나단은 다윗에게 이 모든 사실을 귀띔해 줍니다. 만약을 대비해 도망칠 수 있는 길도 알려 줍니다. 그리고는 곧장 아버지를 만나 다윗을 죽여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고 다윗을 위해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는 항변을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해 말했던지 사울은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게 됩니다. 자칫하면 왕의 말을 거역한다고 요나단의 목숨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사울 왕의 말에 반기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을 그만큼 아꼈기에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행히 다시 요나단 덕분에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좋아졌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사울이 다윗을 죽일 기세였습니다. 다윗은 이제 정말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믿을 존재라고는 요나단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도 두려웠던 다윗은 그만 요나단에게 따져 묻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요나단이 자신에게 어떻게 해 주었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다윗이 라마의 나욧에서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 요나단에게 따져 물었다. "내가 무슨 못할 일을 하였느냐? 내가 무슨 몹쓸 일이라도 하였느냐? 내가 자네의 아버님께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아버님이 이토록 나의 목숨을 노리시느냐?" <사무엘상 20장 1절, 새번역>
여러분이 요나단이었다면 이 순간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저는 솔직히 짜증이 지대로 올라왔을 것 같습니다. 지금껏 그토록 아껴 주었건만 오히려 나에게 항의하는 다윗을 보면서 화가 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을 아끼듯 다윗을 아낀 요나단은 달랐습니다. 이런 순간에도 차분히 다윗을 달래며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요나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자네를 죽이시다니,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나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하시지를 않네.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이 일이라고 해서 나에게 숨기실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럴 리가 없네." <사무엘상 20장 2절, 새번역>
하지만 다윗은 이런 요나단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새삼 요나단이 얼마나 하나가 되기 위해 노력했는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은 소위 징징거리면서 요나단에게 아끼면 아끼는 것을 보여 달라고 말하게 됩니다. 다윗의 입장이 너무도 이해가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의 인내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맹세까지 하면서 말하였다. "자네가 나를 지극히 아낀다는 것은, 자네의 아버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이 일만은 자네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을 걸세. 자네가 알면 매우 슬퍼할 테니까 말일세. 주님께서 살아 계시니, 내가 자네에게 분명히 말하겠네. 나와 죽음 사이는 한 발짝밖에 되지 않네." <사무엘상 20장 3절, 새번역>
이 말을 듣고 난 후 요나단은 다윗의 소원을 물어보게 되고, 다윗이 원하는 대로 다윗이 잘 도망칠 수 있도록 돕게 됩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아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사울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면서 소리쳤다. "이 패역무도한 계집의 자식아, 네가 이새의 아들과 단짝이 된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그런 녀석과 단짝이 되다니, 너에게도 부끄러운 일이고 너를 낳은 네 어미를 발가벗기는 망신이 될 뿐이다. 이새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은, 너도 안전하지 못하고, 너의 나라도 안전하지 못할 줄 알아라. 빨리 가서 그 녀석을 당장에 끌어 오너라. 그 녀석은 죽어야 마땅하다." <사무엘상 20장 30~31절, 새번역>
맞는 말입니다. 왕좌가 요나단에게 이어지려면 사울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이미 그 왕좌를 포기한 지 오래였고,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거칠게 다윗을 왜 죽여야 하냐고 아버지에게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항의는 사울이 창을 들어 자신을 찔러 죽이려 하는 결과를 만들었고, 더 이상 아버지 사울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요나단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다윗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하나가 된 친구사이였는데, 이젠 다시 볼 수 없는 둘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그 숨어 있던 바위 곁에서 일어나, 얼굴을 땅에 대면서 세 번 큰 절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끌어안고 함께 울었는데, 다윗이 더 서럽게 울었다. 그러자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잘 가게. 우리가 서로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잊지 않도록 하세. 주님께서 나와 자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나의 자손과 자네의 자손 사이에서도, 길이길이 그 증인이 되실 걸세." 다윗은 일어나 길을 떠났고, 요나단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엘상 20장 41~42절, 새번역>
도대체 얼마나 아껴야 이렇게 아낄 수 있는 것일까요? 답은 하나입니다. ‘자기 목숨’ 만큼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야 ‘자기 목숨’ 보다 더 아끼는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요나단을 넘어 예수님의 길에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요나단에게서 진짜 섬김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만큼 상대방을 동일하게 사랑하는 것,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 내가 소중한 사람이란 것을 아는 만큼 상대방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요나단의 깨달음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깨달음을 소유할 때 내 목숨처럼 아끼며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런 불문율을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태복음 7장 12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우리가, 동역자들이 하나가 되기 위한 하나님의 가르침 중에서 오늘은 요나단에게서 그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요나단처럼 하나가 되길 원하는 쪽에서부터 마음을 열고 움직여야 합니다. 요나단처럼 자기 목숨을 아끼듯이 아끼겠노라 결단한 섬김이 필요합니다.
혹시라도 이 두 가지 방법이 어렵게만 느껴지십니까? 솔직히 상대방이 먼저 마음을 열고 움직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있으십니까? 내 목숨 아끼는데 쓰는 시간도 부족하십니까? 하나가 되는 게 어려우니 포기해야 할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자 힌트로 요나단의 이름의 뜻을 나누면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용기와 희망을 드리고 싶습니다. 요나단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을 실천해 나갈 힘이 우리에게는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요나단’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우리 모두는 요나단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 두 가지 방법을 실천할 힘을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상상을 한 번 해 봅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인물이 우리 주변에서도, 우리 교회를 통하여 나오는 상황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상상이 현실이 되게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그런 다윗을 만든 요나단에게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여러분이 요나단입니다. 요나단 여러분! 하나가 되는 방법을 오늘 찾았습니다! 할렐루야!
결단 찬양 -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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