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길 따라 ‘강경’으로 가보자
옥녀봉에서 바라본 금강과 논산천이 만나는 풍경.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네 슈퍼마켓에서 딸기를 만났습니다. 딸기를 만나면 절로 웃음이 나와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참 반갑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딸기를 먹어야겠습니다.
딸기는 보기만 해도 달콤하고 상큼합니다. 딱딱하지도, 무르지도 않은 식감도 참 좋지요. 향은 또 왜 그렇게 좋은지. 차가운 물에 슝슝 씻어, 소쿠리에 담아 놓기만 하면 준비 끝. 바나나 다음으로 간편하기도 합니다. 꼭지를 똑똑 하고 따 먹는 것이 그렇게도 재미있고, 종종 멍하게 보게 되는 딸기 씨의 배열에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려 장미과랍니다. 역시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딸기가 더 좋은 이유는, 딸기는 새 학기를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딸기는 딸기처럼 상큼하고 사랑스러운 학생들을 몰고 옵니다.
오늘은 딸기 때문에 생각난 그곳, 바로 논산으로 떠나려 합니다. 논산은 딸기의 최대 산지이자, 전국 생산량의 약 15%를 차지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매년 4월 초(올해는 4월 5일부터 9일까지) 딸기 축제를 엽니다.
‘딸기 먹기 전 젓갈 정식부터’
논산을 여행한다면서, “엥? 갑자기 웬 강경? 논산여행이라며!”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요. 강경도 논산이에요. 논산시에 속한 작은 읍입니다. 종종 주변에서 깜짝 놀라요. “강경이 ‘시’가 아니었어요?”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사실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한 것이, 과거에는 강경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곳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3대 시장에 평양, 대구와 함께 꼽히고, 조선 2대 포구로도 원산과 함께 강경을 들곤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여행 포인트가 정해진 것 같습니다. 오늘의 여행 포인트는 “강경은 왜 번성했고, 이제는 왜 그렇지 않을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여행의 포인트도 생각했겠다, 좀 먹고 시작할까요? 강경의 자랑, 젓갈을 먹으러 갑시다. 강경의 다양한 젓갈을 맛보기 위해서는 젓갈 정식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명란젓, 새우젓, 낙지젓, 갈치속젓, 아가미젓, 청란알젓 등 없는 젓갈이 없어요. 식사 때 함께 나오는 조기도 염장한 것이죠. 사장님께서 친절히 그릇 아래에 써주신 젓갈 이름을 들춰보며 먹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강경이 젓갈로 유명한 것이 혹시 강경이 번성했던 이유를 찾는 힌트가 되지 않을까요? 수산물을 젓갈로 만들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상하지 않게 보관하기 위함이었을 테고, 그것은 결국 수산물이 넘치도록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니까요. 그래서 강경젓갈전시관으로 향해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네요. 강경젓갈전시관이 배 모양입니다. 배의 위치도 재미있는 것이 바다 쪽이 아닌 육지를 향하고 있어요.
조선 후기 가장 큰 포구 ‘강경포’
과거에는 배가 지나갈 수 있는 강이 매우 중요했어요. 오늘날의 고속도로라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고 교통로였죠. 그래서 우리 역사에 중요한 강이 몇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금강이랍니다. 왜냐하면 일단 엄청 크기 때문입니다. 크다는 건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다는 걸 뜻해요. 그리고 우리나라 서해는 조석간만의 차가 큰 것으로 매우 유명하죠. 바닷물이 밀물일 때는 그 밀물이 강을 거슬러 올라와요. 밀물이 그렇게 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배들은 그 밀물을 따라 내륙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금강의 경우 바닷물이 부여 규암면까지 올라갔고, 배는 지금의 세종시 부강면까지 올라갔다고 해요. 그래서 금강을 따라 많은 포구가 있었어요. 그중 조선 후기 가장 큰 포구가 바로 강경포였던 거죠. 금강 물줄기가 남동 방향으로 흐르다 남서 방향으로 급격히 방향을 바꾸는 곳에 강경이 위치해 있어요. 더군다나 이곳에서 논산천과 강경천이 합류합니다. 논산천과 강경천도 배가 드나들 수 있었으니, 누가 봐도 한반도 남쪽 최고의 교통 요지였던 셈이죠.
당연히 교통 요지에는 사람들이 모이게 마련이고, 그러면 시장이 형성되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바다와 강에서 들어오는 수산물과 호남평야의 곡물들이 이곳에 모였습니다. 쌀 400석을 실은 큰 배들이 이곳을 오갔던 것인데, 조선 시대 이곳 강경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모습이 상상이 되시나요? 이곳에 젓갈, 즉 염장법이 흥할 수밖에 없었던 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듯 보입니다.
그리고 전시관 전망대에서 금강을 바라보면 길쭉한 시설물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등대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물의 수위를 표시하고 기록하기 위한 시설물이라고도 합니다. 등대든 수위를 표시하는 시설물이든 바다가 아닌 내륙에 있는 그것의 존재는 강경과 금강이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말해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어요.
밀물을 이용한 하역시설 ‘강경갑문’
전시장을 지나 강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서창교가 보입니다. 그 아래를 흐르는 물줄기가 북서쪽으로 흘러 논산천과 합쳐지고 바로 금강으로 흐
릅니다. 이 물줄기가 논산천과 만나는 곳에 옥녀봉이 있고, 그 끝에는 강경갑문이 있습니다. 물줄기를 따라 남동쪽으로 올라가면 강경젓갈골목이 나오고, 옛 노동조합 건물, 은행 등 근대 건축물과 강경 버스터미널, 강경읍사무소가 나옵니다. 바로 강경의 중심으로 연결되는 것이죠.
강경갑문은 조석에 지장을 받지 않으면서 화물의 하역과 선적작업을 하고, 수위를 조절하면서 홍수피해를 줄이기 위해 일제강점기 때 만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갑문이 있던 곳은 인천과 이곳뿐이었다고 해요. 대단하죠? 밀물 때 독에 배와 물이 들어오면, 가두었다가 화물의 하역과 선적 작업을 하고, 다시 밀물이 들 때 밖으로 나가면 다른 배들이 들어와 작업을 하게 한 시설물입니다. 얼마나 싣고 내릴 것이 많았으면, 강경갑문까지 설치했을까요.
다양한 문물이 만난 ‘옥녀봉’
강경갑문 옆에 있는 계단을 따라 옥녀봉으로 올라가 보겠습니다. 옥녀봉에 오르면 강경은 물론 금강과 논산천이 한눈에 조망됩니다. 봉수대도 있어요. 온통 평평한 곳인데 옥녀봉만 톡 튀어나와 있는 게 참 신기합니다. 이런 걸 해면에 있는 섬 같다고 해서 ‘도상구릉’이라고 합니다. 화강암의 차별침식 때문에 생긴 거예요. 아무튼 옥녀봉 바로 아래에는 해조문을 놓치면 안 됩니다. 풀 해(解), 조수 조(潮), 즉 조차를 설명하는 암각문 입니다. 조석의 발생원인, 언제 물 높이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기록된 최초의 설명문이에요. 밀물이 그만큼 중요했던 거죠.
옥녀봉은 일제강점기 때 강경신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 후기 못지않게 일제강점기 때도 북적였던 곳이란 걸 알 수 있죠. 일본인뿐 아니라 중국인들도 많았다는데, 이 말은 곧 다양한 외국 문물이 들어오는 곳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 예배처도 있어서, 기독교 성지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곳을 작은 일본이라 불렀을 만큼 근대문화유산이 많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강경노동조합·남일당 등 근대문화유산
근대문화유산 하면 군산이 먼저 떠오를 텐데, 그에 못지않은 곳이 바로 이 강경이죠. 강경이 상업 중심지였던 만큼 경제와 상업 관련 건축물이 많아요. 지금은 강경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는 한일은행 강경지점, 군산노동조합보다 먼저 생긴 충청 지역 최초의 노동조합인 강경노동조합 건물도 있습니다. 좀 더 들어가면 남일당 한약방이 있습니다.
1920년대 이곳이 호황이던 시절부터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라고 해요. 한옥 같지만 일본식 건축양식이 많이 가미된 건물로 귀중한 근대 건축물입니다. 강경 사람들의 자랑 강경상고도 있어요. 학교 정문을 들어가 바로 왼쪽에 있는 건물은 교장관사로 활용되던 건물인데, 딱 봐도 일본식 건물이에요. 급한 경사의 지붕, 미로 같은 복도, 개인 주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포치(건물 입구의 지붕)가 특징이죠.
강경은 조석간만의 차가 큰 서해와 큰 배들이 들어 올 수 있었던 큰 금강, 주변의 넓은 평야가 만든 최고의 도시였습니다. 그 위세는 조선 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지요. 하지만 철도와 도로 같은 내륙교통이 발달하고, 결국 하굿둑까지 설치되면서 그 위세는 시들어졌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집중포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번성했던 과거의 모습들이 곳곳에 보물처럼 숨겨져 있고, 맛있는 젓갈로 남아있습니다.
이 작은 강경읍에 검찰청과 법원 그리고 논산경찰서가 다 들어와 있기도 합니다. 정치·경제의 중심지는 넘어갔지만, 이 기관들은 강경에 남아 있는 것이죠. 논산시에서는 근대문화유산과 젓갈 거리를 중심으로 강경을 열심히 홍보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고 노래 부르고 있지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개발되지 않았기에 살아남은 일본식 건물들이 중요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이제 정신없던 3월이 끝나갑니다. 상큼하고 사랑스러운 논산 딸기 먹으러 가는 길. 강경도 꼭! 들려보세요.
전국지리교사모임
“논산하면 논산훈련소지요”
강경읍을 둘러보고, 딸기 축제를 즐겼는데도 여유가 있다면, 논산훈련소도 둘러보세요. 논산훈련소는 한국전쟁 당시 이곳 논산에 제2육군훈련소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연무대라는 이름을 지었죠. 그때에는 육군훈련소가 7개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유일하게 남아서 이름도 제2육군훈련소가 아닌 육군훈련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연무읍이라는 지명은 연무대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죠.
연무읍은 입대하는 사람과 그들을 배웅하러 온 사람들을 위한 독특한 경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입소일이 되면 그때는 엄청 북적이고 다른 때는 엄청 한산하답니다. 주변에는 펜션들과 식당이 늘어서 있는데, 입대와 외출을 위한 곳이에요. 입영준비물을 파는 곳도 있습니다. 물론 입소일에만 문을 열지요.
황산벌이라는 말은 들어보셨죠? 계백 장군이 결사항전을 펼쳐 신라와 최후의 일전을 벌였던 곳이죠. 그 황산벌이 바로 논산이랍니다. 정확히는 논산 탑정저수지 동쪽이죠.
백제와 신라, 황산벌에서 맞선 계백과 관창, 그들의 혼이 서린 이곳에서 그들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나라를 지키라고 육군훈련소가 세워진 것일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