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1931년 서울생
1950년 경기중학교 6년 졸업
1951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과2년 중퇴 - 일본으로 밀항
1958년 일본 동경 예술대학 건축학과 졸업
일본인 미찌꼬(김도자)와 결혼
1960년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 석사학위 취득
국회의사당 건축현상설계 1등 당선
1961년 김수근 건축연구소 개소
홍익대학교 조교수
"워커힐" 설계 및 설계위원
1962년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자유센타" 설치위원회 건축분과위원장
1966년 월간 종합문예지 "공간" 창간
1968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대표이사
1974년 국토건설종합계획심의회 위원
대한민국 건축국전 심사위원
1975년 국민대학교 조형학부 학과장
세계건축가 연맹(U.I.A) 이사
1976년 한국건축가협회 회장
1979년 문화재 공보부 문화재 위원회 의장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장
1981년 건설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1982년 미국건축가협회(Honor,FAIA) 명예회원
1984년 서울특별시 시정자문위원회 위원
1986년 간암으로 사망
개 요..
"김수근"이란 이름 석자를 빼놓고 과연 한국건축을 논할 수 있을까?
이 땅에 현대건축의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건축과 예술임을 증명해보인 김수근..
그러나 그만큼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건축가도 없다. 왜색풍이다는 논쟁을 비롯해, 서구 유명건축가의 모방이라는 논쟁까지, 실제 그의 건축은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삶 또한 그랬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논쟁이, 김수근 개인에 대한 논쟁이라기 보다는 당시 한국의 건축계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즉 전통의 현대적 해석에 대한 논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건축가 김수근은 건축가가 아니다. 재정압박에 월간지 "공간"의 폐간이 논의 되는 시기에 "등사판을 미는 한이 있더라도 공간지 발간을 중단할 수 없다."며 종합 예술지 "공간"에 보였던 애착. 아파트 한채 겂에 해당하는 피아노까지 사들이며 소극장 "공간사랑"을 운영하면서 공옥지, 김덕수 등의 인물을 발굴해낸 일련의 활동등, 분명 그는 한명의 건축가이기를 넘어서서 음악, 미술, 연극, 영화등 모든 문화예술장르를 넘나든 종합예술가였다..
16세기의 르네상스운동이 건축에서부터 시작해 문화예술 전반으로 퍼져나갔듯이, 어쩌면 김수근 역시 건축을 시발로 한국판 르네상스를 꿈꿨는지도 모른다. 건축의 해를 맞이한 1999년, 또다른 천년을 준비해야하는 시점이기도 한 이때, 바로 우리가 김수근을 주목하고 재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자료 출처 : KBS[TV 명인전] - 벽돌의 빛 건축가 김수근 중에서 -
작품성향..
이 건축이 위치하는 원서동은 창덕궁을 비롯한 궁원이 있고, 도시의 가로 이면에는 아직도 한옥 주택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장소이다. 여기에서 건축가 김수근은 자신의 작업장을 건축하며 이 공간이 예술가들을 위한 문화적 핵으로 만들 프로그램을 실천하였다.
이 건축은 그의 오랫 동안의 공간적 실험의 집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궁극적 공간", "네거티비즘", "제3의 공간", "모태공간" 등의 개념을 발표하던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건축의 내,외부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간적 연출의 다채로움과 그의 공간적 사유를 결부시켜 볼 수 있다.
흑색의 벽돌인 전(傳)이라는 재료 역시 전통의 소재였으며, 외벽을 덮고 있는 담재이가 계절을 표현한다..
기존의 한옥과 사이에 마당을 가지며, 건축은 세 단계에 걸쳐 증축을 거듭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는데, 그 결과 가로에서부터 안쪽으로 층단을 이루며 볼륨이 변화된다. 내부에서 김수근문화재단, 공간건축사사무소, 소극장인 공간사랑, 월간 [공간] 편집실, 갤러리 등의 여러 가지 기능이 복합되어 있다. 내부의 공간적 다양성은 공간의 중첩, 전이의 효과를 느끼게 하며, 기본적인 척도를 인간화에서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자료 출처 : 한국의 현대 건축,건축가 기문당 2000 -
첫댓글 개인적으로 정말 존경하는 분이에염~~그리고 공간사옥도 참좋아라 하는 건축물인뎅..정말 멋지십니다..
김포공항..잠실종합운동장도 김수근씨의 작품인줄 알고 있습니다.
공간의 명장..
공간은 건축은 실적이 안좋은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