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1626~1689)
베드로 성당 안에는 160명이 넘는 교황들과 여러 국왕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당연히 남성들이지요. 그런데 그들 가운데 세 분의 여성들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한 분이 17세기 스웨덴의 여왕이었던 크리스니나 여왕(1626~1689)입니다.
17세기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유럽이 분열되어 있었던 시절이며,
스웨덴은 개신교의 리더 국가였습니다.
특히 그녀의 아버지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전쟁이었던 30년 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딸이었지만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그녀를 아버지는
마치 왕자(남성)처럼 교육시켰으며, 그녀 또한 여성스러움을
거부하고 남성을 능가하는 강인함과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인물입니다.
그녀의 나이 6살 때 아버지가 전쟁에서 죽자,
5명으로 구성된 섭정 대신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정치, 행정, 군사, 외교, 외국어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지식을 습득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스페인어, 이태리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학구열이 높았던 그녀는 다방면의 유명한 석학들을 초빙하여 교육을 받았는데,
그 중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했던
프랑스의 데카르트도 그녀의 교사였습니다,
그녀의 학구열 때문에 매일 새벽 5시부터 시작된 고된 일정으로
결국 데카르트가 1년 만에 사망한 사건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집니다.
그녀가 18세가 되던 해에(1644년)정식 여왕으로 등극하여
30년 전쟁을 종식시키고 스웨덴을 유럽의 강국으로 발전시켰고,
스웨덴 최초의 신문 발간, 명문 대학과 도서관 설립,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는 등
위대한 군주로서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10년간 통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을 거부하였고,
특히 개신교 국가의 군주임에도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개종하면서
자신의 자유로운 신앙을 위해 왕위를 사촌에게 양도하고
로마로 들어와 여생을 보냅니다.(당시 그녀의 나이는 28세였다.)
세속의 권력보다 신앙의 가치를 더 귀하게 여겼던 그녀를
당시 교황님(인노첸시오 10세)은 로마의 여왕이라고 칭송하셨습니다.
로마에서도 그녀는 도서관을 설립하고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기 위한 아카데미를 설립하는등
평생을 문화 예술을 장려하는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현재 그녀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고정된 시각으로 여성을 판단하는 관행을 거부하고
지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하여 권력마저도 거부했던 여인,
그래서 그녀는 오늘날까지 스웨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헬레나 성녀
고고학자들의 수호성인
성 암브로시우스(Ambrosius)의 기록에 따르면,
성녀 헬레나는 여관 주인의 딸이었습니다.
평민 신분의 딸이었던 그녀는 270년경 후에 황제가 되게 될
로마의 장군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를 만나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였고 280년경 외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Flavius Valerius Aurelius Constantinus)입니다.
그러나 292년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는
황제가 되려는 정치적 야망으로 헬레나 성녀와 이혼하고,
서방 정제인 막시미아누스(Marcus Aurelius Valerius Maximianus Herculius)
황제의 딸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하였습니다.
헬레나 성녀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나
306년 효심이 깊었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황제가 되면서
그녀를 Augusta(존귀한 여인)로 호칭하게 하고
황후의 신분으로 로마로 모시고 와서 머물게 하였습니다.
황후가 된 성녀는 그러나 권력과 부귀보다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과 신앙생활에 전념하였습니다.
교회사가인 성 에우세비우스(Eusebio)에 의하면
아들의 권유로 그리스도 교인이 된 그녀는 326년경
78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성지를 순례하면서 성지를 복원하여
베들레헴에 예수님 탄생 성당, 예루살렘 올리브 산의 주님 승천 성당과
예수님 부활 성당(현재는 무덤 성당)을 짓게 하였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 유물들을 발굴하여
로마로 가져와 그녀의 궁전에 보관하였고,
그녀의 궁전터에 세워진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에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주님 부활 성당(현재는 무덤 성당)을 지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십자가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무수히 많은 십자가가 발굴되자 성녀 헬레나는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찾기 위해
한 젊은이의 시체를 모든 십자가 위에 올려놓게 했는데,
그 중 한 십자가 위에 올려놓았을 때
그 젊은이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을 살린 십자가가 주님의 십자가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참된 십자가를 발견한 성녀 헬레나는 이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있는 아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보내고,
또 하나는 예루살렘의 주교인 성 마카리우스(Macarius)에게 주고,
남은 부분은 로마로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성녀 헬레나의 상징은 십자가이며,
이콘이나 성 미술에서 십자가를 들고 있는 성인으로 묘사됩니다.
로마에서도 최초의 성당인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을 비롯하여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유해를 발굴하게 하고 기념성당을 짓게 하여
성지와 유물을 보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교회는 그녀를 고고학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추대하였습니다.
카노사의 마틸다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서 오른쪽 앞으로 두 번째 기둥에는
1630년대 후반 베르니니가 제자들의 도움으로 완성한 작품으로
군주를 상징하는 지휘봉과 교황관을 들고 있는 그녀의 석상과
그녀의 발 아래쪽에는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사건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는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1077년 1월 28일의 사건으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카노사 성으로 가서 용서를 구한 사건입니다.
11세기는 교회의 성직자 임명권인 서임권을 둘러싸고
황제와 교황 간의 대립이 정점에 올랐던 시기였습니다.
클뤼니 수도원 출신으로 검소하고 개혁적인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 임기 초기부터 강력한 개혁과 쇄신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특히 당시 세속의 군주가 관행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성직자 임명권(서임권)을 금지하고, 성직매매금지, 성직자의 독신 규정 강화 등
성직자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세속으로부터 교회를 독립시키려는 조치를 취해나갔습니다.
이에 반대한 당시 신성로마 제국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고 교황에 반기를 들자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황제인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게 됩니다.
파문을 당한 하인리히 4세를 주변 제후국들의 제후들은 모두
그를 외면하고 교황의 편을 들었고,
뜻밖의 불리한 정세에 처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카노사 성으로 교황을 찾아와 용서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카노사의 성주였던 마틸다는 자신의 성으로 교황을 초대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교황을 보호하였습니다.
황제가 성문 밖에서 엄동설한에 맨발의 누추한 차림으로
꼬박 3일간 용서를 청하였고, 마침내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성문을 열고 하이리히 4세를 용서하고 파문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권력을 강화한 하인리히 4세는
다시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을 폐위시키고,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하여 결국 그레고리우스 7세는
살레르노로 피신하게 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마틸다는 황제와 교황 간의 권력다툼이 정점에 달했던 11세기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지방을 다스리던 투스카니 공국에 태어나서
불과 그녀의 나이 6살 때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녀가 다스리는 투스카니 공국은 지리적으로
황제의 영토와 교황령의 중간지점에 끼여 있는 완충지역이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황제에 반대하는 교황파에 가담함으로써,
그녀는 아버지가 죽고 난 후
황제에게 인질로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토스카나 공국의 수장이 된 뒤
그녀는 그레고리우스 7세 교황을 지지하여
당시 교회와 이탈리아를 독일 황제로부터 지켜내었고,
이후의 끊임없는 황제 군의 침입에도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 자신이 직접 말을 타고 칼을 들어 병사들을 지휘하며
나라를 지켰던 여전사였습니다.
그녀는 당시 교황을 지지했던 든든한 후원자였으며,
외세로부터 교회와 이탈리아를 적극적으로 지켰던
이탈리아의 쟌 다르크였습니다.
그녀의 사후 카노사성이 파괴되면서 1635년 그녀의 유해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