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전라남도 중앙에서 북쪽으로 위치한 광역시.
북동쪽으로 담양군, 북쪽으로 장성군, 서쪽으로 함평군, 남쪽으로 나주시, 남동쪽으로 화순군에 접한다. 서울·부산·대구·인천·대전에 이어 국내 제6위를 차지하는 대도시이며, 호남지방(湖南地方) 최대의 도시이다. 면적 501.19㎢, 인구 146만 8000명(2010년 현재)이다.
2011년 현재 행정구분은 5개 자치구, 93개 행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광주광역시 서구 내방로 111(치평동)이다.
위치는 동경 126°38'∼127°00'34", 북위 35°03'∼35°15'이다.
역사
이 지역의 구석기시기 문화는 뗀석기로 대표된다. 이 뗀석기는 인간이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인지활동과 자유로이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결과의 산물이다. 이 뗀석기가 광주 상무지구의 치평동, 첨단지구의 산월동, 광주철도 이설 구간인 매월동 등의 구릉상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유물은 광주지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물·유적으로는 광산구 원산동에서 주거지가, 송암동과 운암동에서 주거지가, 우치동 용강마을 및 송암동 임정마을, 신용동과 용두동 등에서는 간돌칼·돌화살·그물추 등이 발견되었다.
고인돌군이 광산구 서창동·풍암동·압촌동·지석동·삼거동·와룡동과 충효동·효덕동·송하동 등지에서 발견되고, 광산구 신창동에서는 옹관묘군 및 돌도끼·돌화살촉이 발견되었다. 대체로 광주의 서북부지역인 극락강 주변에 선사유적이 널리 분포해 있다.
광주를 비롯한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은 철기문화의 보급에 따라 지석묘사회 이래 발전시켜 온 농업생산력과 인구를 기반으로 하여 점차로 정치적 결집력을 키워 마침내 지역적인 정치적 연맹체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마한의 54국 중 신미국(新彌國)을 중심으로 하여 광주를 비롯한 영산강 유역의 마한연맹왕국을 형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근초고왕대 이후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었으며, 웅진으로 천도한 다음부터 직접적인 지배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에는 무진주(武珍州) 혹은 노지(奴只)라 불렀다고 하는데, 백제 동성왕 20년(498) 탐라 정벌 때 이곳까지 왕이 행차한 기록이 보인다.
신라의 영역에 편입된 뒤 686년(신문왕 6)에 무진주라 했고, 757년(경덕왕 16)에 무주(武州)로 고쳐 현 전라남도 지역의 중심치소로 삼았다. 892년(진성여왕 6)에 견훤(甄萱)이 이곳을 근거로 스스로 왕을 칭하다가 전주로 옮겨가서 후백제를 세웠다.
고려 조인 940년(태조 23)에 광주로 이름을 고쳤고, 994년(성종 14)에 10도를 설치하고 정도사를 파견하는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져 광주는 해양도에 속하였다. 해양도에는 14주 62현이 소속되었는데 광주는 지명이 해양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992년(성종 11)에 주·부·군·현의 명칭을 변경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광주에 지방관으로 자사(刺史)가 파견되었는데 자사 파견은 1005년(목종 8)에 폐지되고 절도사에서 안무사로 지방관이 바뀌는 과정을 겪으면서 현종대에 현령이 파견되기에 이른다. 1259년(고종 46)에는 권신 김인준(金仁俊)의 외향이라 하여 익주(翼州)가 되기까지 광주의 행정구조는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 이후 무진주로 고쳤다가 1310년(충선왕 2) 화평부로 변하였으며, 1362년(공민왕 11)에는 고려 제2대 혜종의 이름 무(武)를 피해 무진부(茂珍府)로 고쳐졌다가, 1373년(공민왕 22)에 광주목으로 바뀌는 등 숱한 변천을 겪었다. 몽고의 침입 때는 무등산에 몽고군이 주둔한 적이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빈번할 때는 6차에 걸쳐 침구를 당했으며, 이때 정지(鄭地)가 왜구의 격퇴에 큰 공을 세웠다.
조선 조인 1430년(세종 12)에 이곳 사람 노흥준(盧興俊)이 목사 신보안(辛保安)을 때린 일로 무진군(茂珍郡)으로 강등되었다가 1451년(문종 1)에 광주목으로 복구된 일이 있다. 1481년(성종 12)에 판관 우윤공(禹允功)이 유시(流矢)에 맞은 사건으로 광산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501년(연산군 7)에 복구되었다.
1624년(인조 2)에 현으로 되었다가 1634년에 목으로 복구되었다. 또한 1701년(숙종 27)에 강등되었다가 1707년에 복구되고, 1869년(고종 6)에 강등되었다가 1871년에 복구되는 등 행정체계상의 변화를 겪었으나, 군현의 영역 등은 별다른 변화 없이 조선 말까지 유지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고경명(高敬命)·김덕령(金德齡) 등의 의병장들이 이 지방 의병을 이끌고 크게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중의 사실을 기록한 노인(魯認)의 '금계일기(錦溪日記)'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한 정묘·병자호란 때는 이 고장 출신 전상의(全尙毅)의 순국과 정반(鄭槃)·고일립(高日立)·유박(柳璞) 등의 의병활동이 두드러진다.
1862년(철종 13)에는 수천 명의 민중이 지방관아를 습격하는 민란을 일으켰고, 1894년의 동학운동 때는 동학의 핵심인물 3인 중의 한 사람인 손화중(孫華仲)이 광주에서 봉기해 박성동(朴成東) 등 4000여 명이 참여하는 등 한말의 저항운동이 아주 활발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나주부에 속했다. 이듬해 다시 13도제를 실시하면서 1등군이 되어 전라남도의 도청이 설치되고 나주를 대신해 현재와 같은 전라남도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성내면·공수방·기례방·부동방을 광주면이라 칭했다.
-1931년에 이를 광주읍으로 개칭하고 다시 1935년에 광주부로 개칭하면서 나머지 지역은 광산군이라 칭하게 되어 광주와 광산군이 분리되었다.
일제의 침입에 대항한 항일운동으로는 1906년 김원국(金元國), 1908년 양진여(梁鎭汝)·양상기(梁相基) 부자와 김태원(金泰元)·심남일(沈南一)·신덕균(申德均) 등의 항쟁을 들 수 있다.
1919년의 3·1운동 때는 김철(金鐵)·최흥종(崔興琮)·남궁 혁(南宮爀) 등이 주동해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1929년 11월 3일에는 광주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광주학생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파급되어 민족독립운동의 중요한 몫을 담당하였다. 한편, 1922년 7월에는 광주∼송정리간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1949년에 광주부가 광주시로 승격되어 시의회를 구성하였다.
-1955년에는 광산군의 서방면·효지면·극락면과 석곡면의 일부 지역이 편입되었다.
-1957년에는 광산군의 대촌면·지산면·서창면, 그리고 석곡면지역으로 담양군의 남면에 편입되었던 지역들을 회복하였다.
-1960년대촌면과 서창면은 다시 광산군에 환원되어 현재의 시역이 이때 갖추어졌다.
-1973년부터 구제를 실시해 동·서·북구의 3구로 나누어 관할하였다.
-1986년 11월 1일에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1988년전라남도 송정시와 광산군이 직할시에 편입되면서 광산구가 설치되었다.
-1995.1,1 직할시의 명칭이 광역시로 변경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에는 서구를 분구해 남구가 설치되면서 5개 구가 되었다.
산지지역과 평야지대의 접촉지에 자리함으로써 군사·행정·교역상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1914년에 개통된 호남선(湖南線) 철도가 광주시를 우회하여 영산강(榮山江) 서안을 따라 부설되자 한국의 경제중심권(經濟中心圈)과 떨어져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소비도시(消費都市)로 남게 되었다.
또한 예로부터 호남지방의 행정·군사·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어 온 기반으로 해서 행정 및 기업관리기능(企業管理機能)이 집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넓은 호남평야의 곡창지대와 임해공업지대 및 수산업 지역을 배후지로 가지고 있어 호남경제권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있다.
또, 광주를 중심으로 화순·담양·장성·나주 등 반경 30km 안의 지역이 1일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07년도에는 광역시 중 3번째로 수출 100억불 도시를 달성한 이후 2010년에는 수출 115억불을 달성하는 등 소비도시에서 생산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한편, 국립인 전남대학교와 사립 조선대학교를 비롯한 고등교육기관이 있어 교육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또 UN지정 인권도시 추진을 통해 세계적인 민주, 인권, 평화도시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