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공진(河拱辰)은 진주(晋州) 사람으로, 성종(成宗) 때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으며, 목종(穆宗) 때에는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었다.
왕이 병으로 자리에 눕자 하공진은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중랑장 탁사정(卓思政) 등과 함께 침전의 문 가까이에서 당직을 섰다. 얼마 뒤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郞中)으로 옮겼다.
강조(康兆)가 거병하여 개경 근처로 다가오자, 하공진은 마침내 탁사정과 함께 강조에게로 도망하였다. 하공진은 일찍이 동·서계(東西界)에 있으면서 제멋대로 군대를 움직여 동여진(東女眞) 부락에 침입하였다가 패배하였다. 현종(顯宗) 초에 이 일로 죄를 받아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곧 소환되어 복직되었다.
얼마 안 있어 왕이 거란을 피해 남쪽으로 파천할 때, 하공진은 뒤따라가다가 도중에 알현하여 아뢰어 말하기를, “거란(契丹)은 본래 역적의 토벌을 명분으로 삼았고 지금 이미 강조를 체포하였으니, 만일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다면 저들은 반드시 군대를 철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점을 쳐서 길한 괘(卦)를 얻었으므로 마침내 하공진과 고영기(高英起)에게 표문을 가지고 거란 진영으로 가도록 하였다. 하공진이 창화현(昌化縣)에 가서 표문을 낭장(郞將) 장민(張旻)·별장(別將) 정열(丁悅)에게 주니, 〈그들이〉 앞서 거란 군영에 가서 말하기를, “국왕께서는 진실로 와서 뵙기를 원하셨으나, 다만 군사의 위세를 두려워하셨고, 또한 국내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강남(江南)으로 피난 가셨으므로 배신(陪臣) 하공진 등을 보내어 사유를 알리려 하였습니다. 하공진 등도 역시 두려워하여 감히 앞에 나오지 못하오니, 청하옵건대 속히 군사를 거두어 주소서.”라고 하였다. 장민 등이 미처 군영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거란의 선봉군이 이미 창화현까지 진군하였다.
하공진 등이 앞서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자 거란 측에서 묻기를, “국왕은 어디 계시냐?”라고 하니, 〈하공진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지금 강남(江南)으로 가고 계시는데, 계신 곳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또 〈거란에서〉 묻기를, “〈강남이〉 먼가? 가까운가?”라고 하니, 〈하공진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강남은 너무 멀어서 몇 만 리 인지 알 수 없다.”라고 하니, 추격하던 거란 군대가 돌아갔다.
이듬해에는 하공진이 고영기와 함께 거란 진영으로 가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간청하니, 거란 임금이 그것을 허락하였고, 하공진 등을 억류하기로 하였다. 하공진은 억류당했지만, 내심 환국을 도모하면서 겉으로는 충성과 근실함을 보였는데, 거란 임금이 은총과 대우를 심히 더하였다. 하공진이 고영기와 함께 은밀히 모의하고 〈거란 임금에게〉 아뢰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이제 이미 망하였으니, 원하옵건대 저희들이 군사를 이끌고 점검하여 오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거란 임금이 허락하였다. 곧이어 〈고려〉 왕이 국도(國都)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거란 임금은〉 고영기를 중경(中京)에 살게 하고, 하공진을 연경(燕京)에 살게 한 후에 양가(良家)의 딸을 배필로 삼아 주었다.
하공진은 좋은 말을 많이 사서 고려로 가는 길[東路]에 차례로 배치해 두었는데, 어떤 자가 그 계획을 보고하였다. 거란 임금이 그를 국문하자 하공진은 상세히 사실대로 대답하고, 또 말하기를, “저는 우리나라를 감히 배반할 수 없습니다.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나 살아서 대국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란 임금이 의롭게 여기고 그를 풀어주면서 절개를 바꿔 충성을 다할 것을 설득하였으나, 하공진의 말투가 더욱 강경하고 불손해지니, 마침내 그를 죽이고 앞 다투어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
후에 왕이 교서를 내려서 공훈을 기록하였고, 그의 아들 하칙충(河則忠)에게는 녹봉과 자급을 올려주었다. 문종(文宗) 6년(1052)에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좌사낭중(左司郞中) 하공진은 통화(統和) 28년(1010)에 거란군이 침입하자, 적을 대하며 몸을 돌보지 않았고, 세 치의 혀를 움직여서 능히 대군을 물리쳤으니, 공신각에 초상을 그릴만 하다.”라고 하고, 그 아들 하칙충을 5품직으로 뛰어 올려 임명하였다. 얼마 후 또 그의 공적을 기록하고,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을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