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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효제 오두막 원문보기 글쓴이: 소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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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풀이를 한다.
처녀귀신의 혼령이 댓잎을 타고 내린다.
새초롬한 입술로 게워내는 독설
목련 가지에 걸터앉은 새벽달의 무릎이 젖는다.
부엌칼을 피해 달아나는
치마꼬리.
진도 앞 바다, 바닷길이 열린다.
청 보리밭을 지나온 바람 두어 오라기 비린 살 내음을 따른다.
힐끗, 드러내는 흰창
갓 피어난
개나리 야린 눈시울이 파르르 떨린다.
< 손광세 대표 시 1 >
봄보리밭에는 해류가 흐른다.
보리숲을 휘저으며 한류가 흐르고
난류도 한 줄기 섞여 흐른다.
어딘가에 숨어있던 은빛 작은 티스푼
열다섯 나물 캐는 소녀의
오지랖 속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는다.
철커덕 철문이 열리고
소스라치던 소녀는 푹 고개를 수그리고 만다.
쌔액쌔액 가쁜 숨을 몰아쉰다.
잠겼다 떴다
파도타기를 하던 빈 소줏병 하나
울컥 벚꽃 내음 한 모금 쏟아내곤
이내 어디론가 떠밀려간다.
< 손광세 대표 시 2 >
상머리에서
조간을 펼치면
남해바다
그 푸른 파도가
멍석말이를 하며
밀려온다.
마당가의
옥수수 키를 넘어
마루에 올라선
푸른 파도.
큰방, 작은방
부엌을 들락거리며
발등이나 핥더니
어느새
밥상까지 삼켜 버린다.
허리 펴며
미역 숲이 일어서고
멸치 떼가
서서히 은 비늘을 세운다.
6월 아침
조간을 펼치면
느닷없이 들이미는
예감의 삐죽한 이물.
피리를 비껴 안은
젊은 여인의
귀밑털이 나풀거린다.
< 손광세 대표 시 3 >
7월이 오면
그리 크지 않는 도시의 변두리쯤
허름한 완행버스 대합실을
찾아가고 싶다.
죽이 다 된 캐러멜이랑
다리 모자라는 오징어랑
구렛나루 가게 주인의
남도 사투리를 만날 수 있겠지.
함지에 담긴 옥수수 몇 자루랑
자불자불 조는 할머니
눈부신 낮꿈을 만날 수 있겠지.
포플린 교복 다림질해 입고
고향 가는 차 시간을 묻는
흑백사진 속의 여학생
잔잔한 파도를 만날 수 있고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행려승의 밀짚모자에
살짝 앉아 쉬는
밀잠자리도 만날 수 있겠지.
웃옷을 벗어 던진 채
체인을 죄고 기름칠을 하는
자전거방 점원의
건강한 웃음이랑
오토바이 세워 놓고
백미러 들여다보며 여드름 짜는
교통 경찰관의
초록빛 선글라스를 만날지도 몰라.
7월이 오면
시멘트 뚫고 나온 왕바랭이랑
쏟아지는 땡볕아래
서 있고 싶다.
< 손광세 대표 시 4 >
마구잡이로 金箭을 쏘아 보낸다.
우수수 잎이 진다.
툭, 투둑------.
알밤이 굴러 떨어진다.
命中당한 낮달이 痙攣을 일으킨다.
온통 무너뜨리는 가을의 虐殺.
부릅뜬 눈자위에 서린 憤怒
누가 달래줄 것인가?
파랗게 질린 들국화
귀뚜라미의 애절한 흐느낌만
戰慄하는 빈 空間을 채운다.
구멍난 우리들 가슴 한복판으로
바람이 지나간다.
< 손광세 대표 시 5 >
딸아이의 손을 잡고 오른 뒷산
길가의 풀꽃들이
바람결에 색소를 타고 있었어요.
도꼬마리 씨앗들은
먼길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후미진 곳에서 귀뚜라민
이슬 빛 목청 가다듬고 있었어요.
한 곁의 작은 거울 조각
푸른 하늘을 품고 있었어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내면------.
산을 내려오는 내 맘속에도
거울 조각 하나 박히고
가을 하늘이 들어서고 있었어요.
저 아래
낮달도 가라앉아 있었어요.
< 손광세 대표 시 6 >
가을은 휠체어를 타고
세란병원 앞을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방사선실에서 나오는 길인지
늑골이 드러나지 않는
필름을 말아쥐고 있었다.
진열장 속의 제 모습을
곁눈질 해보곤
손으로 머리를 빗질하며,
빛 바랜 연서
갈기갈기 찢어
보도에다 뿌리고 있었다.
이따금 뱉아내는
짙은 기침소리에
비둘기 몇 마리 날아오르고,
서둘러 입술을 여는
꽃가게 안의
샛노란 국화꽃------.
가을은 휠체어를 타고
독립문 쪽으로
느릿느릿 다가가고 있었다.
< 손광세 대표 시 7 >
월광곡이 내려앉는다.
하얀 드레스 자락을 끌며
여인이 뜰을 거닌다.
여인의 발 아래
고전의 강물이 일어선다.
지아비를 수자리에 보낸
아낙의 미간에서
강물이 흘러나온다.
복건을 두른 동몽선습 한 소절이
용마루를 넘어와 합류한다.
대살강에 엎어 둔
속살 뽀얀 사기 그릇
가만가만 어깨를 들썩인다.
강물을 보탠다.
자맥질하던 여인은
끝내 떠오르지 않는다.
자욱한 물안개
낙도처럼 호젓한 남산------.
마당가에 검정 고무신이 밀린다.
시리디시린 영혼을 눕힌다.
찰싹찰싹
월광곡이 부서진다.
자잘한 은비늘이 부서진다.
< 손광세 대표 시 8 >
동치미 국물을 마신다.
사각사각 살얼음을 마신다.
고향 집 대 살강에 엎드려 있던
속살 뽀오얀 달빛을 마신다.
밤이 이슥토록
이웃 마을
새신랑 방에서 건너오던
애조 띤 노래 소리를 마신다.
간간이 끼어 들던
눈바람도 함께 마신다.
해감내 나는
혈관의 아슴한 하류
섬 하나가 생긴다.
갈잎이 서걱거린다.
깃을 접고
청둥오리 떼가 내려앉는다.
< 손광세 대표 시 9 >
물결선 그 위로
고개 내민 안테나
청자빛 고운
전파를 수신한다.
< 손광세 대표 시 10 >
어린 나를 앞세우고
성묘하러 가시던
아버님의 산소를 찾는다.
성묘길에 오르면
한풀 꺾인 햇살처럼
자상해지시던 아버님.
"우리 손자 오느냐고
아버지께서
반가워하실 게야."
아버님이
아버님의 아버님으로부터
들으셨을 말씀.
그날의 나처럼
황금 날개의 여치나 쫓는
자식놈에게 들려준다.
구절초 핀 등성이를 오르면
초가을 바람이듯
쓸쓸해지시던 아버님.
모시옷 차려 입으시고
성묘하러 가시던
아버님의 산소를 찾는다.
< 손광세 대표 시 11 >
신작로엔
달구지가 지나가고 있었다.
늘어선 가로수에서
매미소리가
반짝이고 있었다.
"다리 아프제?"
안쓰러운지
연신 물어 보셨지만,
어머니와 함께 걷는
십오리 장 길
먼 줄을 몰랐다.
신나기만 했다.
짐수레에선
참외가 단내를 내뿜고,
알록달록 곱게 물들인
밀짚모자
찡긋, 눈짓을 보냈다.
만지작거리다간
그냥 두고
값만 물어보고
지나가고…….
어느 골목에선가
어머니는
노란 부채 하나를 사셨다.
부채 속에는
숲이 들어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목백일홍 닮은 나무 몇 그루가
어깨를 짠
파랑새가 살고 있는
새벽
숲.
후덥지근한 밤
그 숲은
바람을 보내주곤 하였다.
푸른 바람을
몰래 보내주곤 하였다.
달겨드는
모기 소리
밀어내곤 하였다.
< 손광세 대표 시 12 >
정초에 집 지키고 있으면
대바람소리 들린다.
어릴 적, 세배하러 들를라치면
구실 아제 나지막한 사랑채
창호지 밖에서 사운거리던
대바람소리.
구실 아제 나이가 되면
나도 이런 곳에서
대바람소리랑 살아야지.
묵화나 치고
글씨나 쓰며
세배 온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대바람소리 들으며
대바람소리 만큼
청빈한 꿈을 키우곤 했었지.
어느새
구실 아제 나이가 되어
고도 같은 적막에 묻혀 있으면,
몇 해전 세상 떠난
구실 아제
지긋이 눈감고 만나시던
쓸쓸한 대바람소리 들린다.
< 손광세 대표 시 13 >
찔레나무 새순이
피어나는 아침.
어디쯤에서
나를 향해 오고 있는
少女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휫파람을 불며
내 少女는
햇살 쏟아지는 食卓을
어루만지고 있는가?
찰랑찰랑
유리 그릇을
헹구고 있는가?
풀잎 끝의
이슬을 털며
파도소리를 쫓아
새벽 散策을 나섰는가?
녹두 빛 새 한 마리
꽁지를 흔드는
이런 아침 時間에
어디쯤에서
나를 향해 오고 있는
少女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 손광세 대표 시 14 >
다가서고 싶어라.
다가서고 싶어라.
발을 내딛는 순간
포르르
새가 되어 날아가 버릴지라도
그대 곁으로
다가서고 싶어라.
이맘쯤에서
바라보는 것 만으론
가시지 않는
목마름.
비질해 놓은
고요한 그대의 뜨락에
오월 햇살로
내려앉고 싶어라.
아카시아 숲 그늘로
머무르고 싶어라.
헤어지지 않는다손
레일은 싫어라.
아득히 세월이 흐르고
어루만질
사마귀 점 만한
비밀 하나
만들고 싶어라.
지울 수 없는
손톱자국 하나
찍어두고 싶어라.
< 손광세 대표 시 15 >
네 눈동자 가득
내가 들어있다.
코스모스 지우고
내가 들어있다.
내 눈동자 가득
네가 들어있다.
저녁 노을 지우고
네가 들어있다.
< 손광세 대표 시 16 >
전깃줄 우는 소리만
칙칙 감기던
사시사철
나는 알지 못했었구나.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던 너를------.
바닷가에서
오솔길에서
틈만 있으면
하루에도 몇 차례씩이나
나직하게 말을 걸어오던
너를
나는 알지 못했었구나.
날개옷을 불사르고
가난한 기억의 울안에서
바느질을 하며
마루를 닦으며
달빛처럼 살고 있는
영원한 나의 소녀.
아카시아 꽃
눈부신 음정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겨운 이 행복을
정녕
나는 알지 못했었구나.
< 손광세 대표 시 17 >
고무신 벗어들고
단숨에 천릿길을 달렸어.
개울을 건너고
숲길을 돌아
댓잎 수런거리는
네 방안까지 들어선
귀.
"여보세요?"
내 귀에 닿은 네 입술.
내 입술이 닿은 네 귀.
잘근잘근 귓불을 씹으며
쏟고 싶은 봇물같은 이야기.
아!
이젠
저승보다 아득한
우리의 분단.
"------."
끝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지층 어디쯤
화석으로 묻힌
물 너울 밀어보내던
봄밤의 개구리 소리.
목련꽃 내음 달고 오던
싱그런 네 목소리
듣고 있었어.
< 손광세 대표 시 18 >
세상엔 온통 네 얼굴뿐이더라.
포플러 늘어선 언덕길에
잎새들 뒤적이는 바람결에
발자국 하나 없는 모래밭에
모내기가 한창인 논두렁에
새참이 담긴 광주리에
관광버스의 경적소리에
용두돈대 가는 길목
금침이 내려꽃히는 잔디밭에
클로버 잎새 위에
쏘나타처럼 눈부신 아카시아 꽃가지에
닝닝거리는 꿀벌의 날개짓에
비어있는 흰 벤치에
잔물결 찰싹거리는 해안선에
꽃게의 재빠른 옆걸음질에
건너편, 야트막한 산허리에
간간이 건너오는 뻐꾸기 소리에
묻어오는 보리 내음에
뭉게구름에
들여다보는 파인더 속에
전등사 가는 길에
꾸불꾸불 돌아가는 산모롱이에
앞서가는 소녀의 머리카락에
티없이 맑은 웃음소리에
벌받는 여인의 목상에
보랏빛 짙어오는 산 그늘에
------.
주렁주렁
네 얼굴이 열리더구나.
< 손광세 대표 시 19 >
여옥이, 서연이, 순집이, 연진이, 복순이, 설자, 금아, 둘순이, 둘자, 판숙이, 판점이, 점순이, 순옥이, 춘자, 명희, 선옥이, 필선이, 소옥이, 귀연이, 명금이, 옥심이, 봉순이, 영숙이, 숙자, 우정이, 인순이, 갑님이, 명순이, 성자, 미야, 옥희………….
가을 밤, 귀뚜라미가 출석을 부른다. 까맣게 잊고 지낸 이름들을 부른다.
< 손광세 대표 시 20 >
당신의
이름을 모릅니다.
당신이 누구였는지도
모릅니다.
종달이가
자지러지고 있었어요.
송피를 벗겨 먹고
흙담에 기대면
가물가물 떠밀리던
아득한
표류.
꿈속에는
먼 섬 기슭의 파도 소리가
들리고 있었어요.
자맥질하던
당신의
목소리 어딘가에
맨드래미가
피었던 던 같아요.
이것뿐이어요.
내게 남은 기억은
다만
이것뿐이어요.
글세요.
파란 대문이었는지
감나무가 있었는지
아슴한 걸요.
큼직한
흉터라도 하나
만들어 둘 걸 그랬다 싶은
당신을 찾습니다.
본명의
나를 찾습니다.
< 손광세 대표 시 21 >
退却하는
겨울을 막고 있다.
밀려오는
봄을 버티고 있다.
그러나, 어느새
뜰 안에는
봉긋봉긋 벙그는
木蓮 봉오리.
내보낼 건
죄 내보내고
들여보낼 건
죄 들여보내고.
겨우
아이들 두엇
붙들고 있는
탱자 울타리.
혀끝에
뱅뱅 도는
설지 않는 風景이다.
< 손광세 대표 시 22 >
하루에 한 두 차례
면회를 한다.
창구에 다가서면
그도
때 맞춰 나온다.
빙그레 웃을 뿐
할 말이 없다.
그도
나를 향해
빙그레 웃을 뿐.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한 채
내가 돌아서면
그도
끌려가고…….
대여섯 어릴 적부터
낯이 익은
나로 인해
刑을 사는
終身囚.
그 곱던
복숭아빛 살결 위에
時間이 할퀴고 간
밭이랑
몇 골.
뒤돌아 서서
손을 들어 보이면
驛夫처럼
그도
손을 들어 보인다.
< 손광세 대표 시 23 >
플라타나스가 교정 안으로 슬금슬금 다리를 뻗는 해어름녘이었습니다.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별관 교실 창 틈으로 풍금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산그늘을 달고 다니던 여선생님의 교실이었습니다. 풍금 소리에도 좁은 쓸쓸한 산 그늘이 묻어 있었습니다.
창 틈으로 새어 나온 풍금 소리는 저녁 안개처럼 자욱히 교정에 내려앉았습니다. 고무줄을 넘는 아이들의 귓바퀴를 맴돌다간 측백나무 울타리를 넘어 어디론가 떠나기도 하였습니다.
그중 어느 하나는, 혼자서 콩돌줍기를 하고 있던 순이의 숨결 속으로 몰래 스며들었습니다. 가슴 속의 심연에 파랗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르고------.
여선생님이 된 순이의 얼굴에도 어느 사이엔가 산그늘이 자릴 보였습니다. 잔잔히 가라앉아 있던 풍금소리는 푸드덕 푸드덕 날새짓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순이는 풍금 앞에 단정히 앉았습니다. 흰 저고리 검정 치마의 그 여선생이 되곤 하였습니다.
교정에는 밀물처럼 나무 그림자들이 밀려왔습니다. 지긋이 눈을 감고 순이는 건반을 더듬어 나갑니다.
교문 옆 어디쯤에선가 혼자서 콩돌줍기를 하고 있을 누군가를 향하여, 아득한 세월 저켠 하늘을 향하여 악보도 없는 풍금 소리를 날려보냅니다.
잠자리처럼 자꾸만 자꾸만 날려보냅니다.
< 손광세 대표 시 24 >
層階를 오른다.
毒針에 밀려
주춤주춤
層階를 오른다.
굽어보면
시퍼렇게
식칼을 벼리는
바다.
더는 오를 수 없는
年輪의
벼랑 끝에서
풀썩,
눈감고
뛰어 내리면,
三十 里 밖
어디쯤에선가
風物 소리 들리고
와르르
무너져 내릴
惡夢 같은
이승의
壁.
부서진
껍질 사이로 열릴
오오!
白木蓮 자북한
또 하나의
世上.
모를 일이지.
노른자에
실핏줄이 서는
나는
한 마리의
새일른지------.
이따금
이따금씩
어깨 밑이 가렵다.
< 손광세 대표 시 25 >
건물 그늘에 붙어 서서
흑인 사나이가
숨을 죽이고 있다.
망원렌즈가 장착된
저격용 총으로
출구쪽을 겨냥하고 있다.
얼마쯤 뒤에서, 누군가가
그 흑인 사나이를
조준선 위에 올려놓고 있다.
아파트 옥상에서
또 누군가가
그 모습을 굽어보고 있다.
< 손광세 대표 시 26 >
남해에서 떼지어 놀던 멸치. 어부가 던진 마지막 그물에 걸린 멸치. 어물전에서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던 멸치. 도매상도 소매상도 만나본 멸치. 됫박에 담겨 봉지 속으로 들어가다가 그만 탈락된 멸치. 값만 물어보고 자릴 떴다가 되돌아선 하숙집 안 주인을 따라온 멸치. 동향의 미역을 만나 온탕을 즐기곤 박 선생의 국그릇 속으로 들어간 멸치. 입맛이 없다고 하여 주소를 옮긴 멸치. 마침내 내 숟가락에 오른 멸치.
예사 인연이 아니다.
< 손광세 대표 시 27 >
떠나면 만난다.
그것이 무엇이건
떠나면 만나게 된다.
잔뜩 찌푸린 날씨이거나
속잎을 열고 나오는 새벽 파도이거나
내가 있건 없건 스쳐갈
스카프 두른 바람이거나
모래톱에 떠밀려온 조개껍질이거나
조개껍질처럼 뽀얀 낱말이거나
아직은 만나지 못한 무언가를
떠나면 만난다.
섬 마을을 찾아가는 뱃고동 소리이거나
흘러간 유행가 가락이거나
여가수의 목에 달라붙은
애절한 슬픔이거나
사각봉투에 담아 보낸 연정이거나
소주 한 잔 건넬 줄 아는
텁텁한 인정이거나
머리카락 쓸어 넘기는 여인이야
못 만나더라도
떠나면 만난다.
방구석에 결코 만날 수 없는 무언가를
떠나면 만나게 된다.
산 허리에 뭉게구름 피어오르고
은사시나무 잎새들
배를 뒤집는 여름날
혼자면 어떻고
여럿이면 또 어떤가?
배낭 매고 기차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볼 일이다.
< 손광세 대표 시 28 >
예.
---.
예에.
------------.
아니오.
---------------------------.
예.
------------------------.
그래요.
----------------------------------------------------.
예.
------------------.
예.
---------.
예에.
< 손광세 대표 시 29 >
인사동 골동품 가게 앞에
나와 있는
거들떠보는 이 없는 돌구유.
빈 가슴에 빗물 받아
가을 하늘을 품고 있다.
노란 은행잎 한 장
띄워놓고 있다.
< 손광세 대표 시 30 >
창 밖의 은사시나무
수천 잎사귀들.
서리 내릴 가을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오늘을 감사하며,
햇빛 받아 반짝일 뿐이다.
바람 따라 파닥일 뿐이다.
< 손광세 대표 시 31 >
빨랫줄에
하얀 기저귀가
시운처럼 나풀거린다.
남새밭
쑥갓꽃 위에
간물 든 상추잎 위에
햇살이 내려와
모이를 줍고,
무시로
나비들이 들락거린다.
자주빛
콩꽃이 핀
울타린 너머
걸려 있는 여름 바다.
낮달을 낚는지
꿈쩍 않는
조각배 한 척.
고구마 밭 저 편
사대나무 가지에서
까치가 운다.
은종이를 잘게 썰어
사립밖에
뿌린다.
< 손광세 대표 시 32 >
녹슨 거울을
문지르고 싶어요.
영지 연못의
연잎을 걷어내듯
천년 세월을
문지르고 싶어요.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잔잔한 눈웃음 짓는
신라의
여인.
매만지는
머릿결 너머
먹기와 지붕 이랑으로
쩡쩡쩡쩡
돌 쪼는 소리
내려앉을 거여요.
볕살 좋은
마당 구석 자리엔
마악, 입술을 여는
백모란------.
첨벙
거울 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요.
서동요를 부르며
달빛처럼 푸는
물너울
일깨우고 싶어요.
< 손광세 대표 시 33 >
실눈으로 바라보아요.
견고한 성벽
무쇠 가슴팍 사이로
바늘귀 만한
길이 열릴 거여요.
바람 소리도 떼어놓고
화살 지나간 길이어요.
살촉 끝
호면 같은 잔 떨림
찐득하게 피는 백일홍
보일 거여요.
고운 이의
믿음 하나 지켜주지 못하고
혼자 살아남아
물 드는 볼
어루만져주어요.
실눈으로 바라보아요.
어디론가 원행을 떠난
시력이 돌아오고
외눈박이의 얼굴
낮달처럼 나타날 거여요.
< 손광세 대표 시 34 >
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
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
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
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
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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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광세 대표 시 35 >
마른 버즘이 한창이던
마을 어귀,
얼핏 스친
여인의 얼굴을 그립니다.
동그란 눈
긴 머리카락을 골라
몽타주를 그립니다.
안개 속에서
여인은
손수건을 흔드는데,
붕숭아꽃 빛깔의
볼우물물은
좀체로 고이질 않습니다.
내가 아니고는
그려낼 수 없는
새벽 꿈속에서 만난
여인의 얼굴.
다른 사람이
알아볼 수 있도록
얼굴을 그립니다.
여인의 얼굴을 그립니다.
< 손광세 대표 시 36 >
모래내 정류소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
굴다리 밑으로 들어선다.
이게 얼마 만인가?
매운 바람 한 올이
느닷없이
목덜미에 달라붙는다.
가스등을 피우고
야전점프 깃을 세운
군밤장수가 졸고있던
승화목욕탕 모퉁이를 돌아
한우정육점을 지나
대성쌀가게 앞에 이른다.
주머니 속
토큰 몇 개 만지작거리며
얼마를 가면
고물상에서 구해놓은
자전거 한 대
눈물겹던
낡은 연립주택이 있었지.
현관 앞에서
벨을 누르면
주르르 달려 나와
품에 안기던 어린것들이 있었지.
어린것들 뒤에서
산나리꽃처럼 웃어주던
젊은 아내도 있었지.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십 년 전의
내 가족을 만나러
희망교회가 있는
성산동 골목으로 접어든다.
까치가 둥지를 튼
해묵은 수양버들이
이 근처에 있었는데------.
골방 안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을
낮달처럼 여윈
삼십대의 나를 만나러
낮술에 반쯤 절어
발걸음을 재촉한다.
< 손광세 대표 시 37 >
정문에는 녹슨 큼직한 자물통을 채운다. 그러고는 뒷문으로 들어가서 안으로 튼튼한 빗장을 건다.
다락 밑바닥을 들추고 지하층계를 따라 내려간다. 습한 바람이 인다.
이끼가 돋아나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동굴을 따라 얼마를 가노라면 아슬한 낭떠러지에 이른다.
줄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줄사다리를 걷어올려 종적을 지운다.
칡덩굴에 가려진 비밀 입구를 연다.
박쥐가 날고 썩은 해골이라도 발에 채일 것 같은 비밀 통로를 따라 다시 몇 개의 석문을 여닫는다.
이윽고 석실이 나타난다. 바다 속에 감추어진 도피의 성. 여기서도 안심할 순 없다. 배 한 척을 숨겨둔다. 나무 오리 한 마리 숨겨둔다.
< 손광세 대표 시 38 >
고기나 잡다가
이 세상에 왔는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 년 열 두 달
비린내나 쫒는 인생.
너무 하잘 것 없는
인생 아니냐고
소줏잔 기울이며 쓴웃음 짓는
영감님,
다른 인생인들
별건 줄 아십니까?
방망이 두드리는 사람
지폐 헤아리는 사람
피고름 짜내는 사람
고분 속
뼈다귀 꿰 맞추는 사람
가마에 불지피는 사람
------.
모두들
같은 짓거리 되풀이하긴
마찬가지 아닙니까?
같은 짓 되풀이하다
되돌아가긴
마찬가지 아닙니까?
영감님 앞엔
후박나무 잎새 수런거리는
싱싱한 바다
밥상처럼 차려져 있지 않습니까?
머리를 긁적이는
영감님,
영감님 얼굴에 핀
산다화가 곱습니다.
< 손광세 대표 시 39 >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르겠습니다.
우러르면 우러러볼수록
빗장 푸는 하늘이 있고
모두가 내 것인
넉넉한 황금 들판이 있습니다.
귀를 열면 쏟아져 들어오는
영롱한 풀벌레 소리.
빈 바구니 가득 채우는
들꽃의 향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팔짱끼는 소녀도 있습니다.
언제나 내 곁에 머무는
빛나는 오늘이 있고
어김없이 찾아오는
황홀한 내일이 있어
근심도 소중하고
가난도 오히려 사랑스러워지는
샘물처럼 차오르는
이 넘치는 행복.
어떻게
감사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 손광세 대표 시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