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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강해(113)
어떻게 기도할까?
(2022. 10. 05. 수)
본문 : 눅18:9-14
2021년에 아프카니스탄이라는 나라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군이 철수하니 불과 3개월만에 수도 카불이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지킬 의지가 없이는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영적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끊임없이 사탄의 공격을 받습니다.
누군가 대신 싸워줄 수 없습니다.
목사도, 성도도, 가족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결국은 스스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신앙은 외로운 영적 전쟁입니다.
성도님들 ! 모두가 스스로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성도님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지 않도록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18:1-8)를 통해,
제자들이 불의한 세상 속에 살더라도 ....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는(우리 성도)
‘기도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도 결국 과부의 간청에
그녀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는데.....
‘하물며’ 너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비유의 결론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요청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도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비결입니다.
응답받는 비결입니다.
<기도의 자세>
그런데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 이어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더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올바른 기도의 자세를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끈질긴 기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올바른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그 바른 기도를 가르치시기 위해
또 하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보게 되는 것은 비유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자들도 듣고 있습니다.
9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누구에게 말씀하십니까?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할 정도라면
나름대로 신앙생활에 대단한 특출한 열심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바리새인’이 생각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늘 주변에서 감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본래 바리새인은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별한다’는 뜻의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들은 먹는 것, 입는 것, 움직이는 생활 전부를
거룩한 방향으로 구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산이나 광야로 도피하여 자신들만의
게토화된 공동체를 만들어 산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살면서 거룩하고 구별된 신앙의
삶을 살겠다며 모여진 단체입니다.
그들의 출발은 이렇듯 선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잡하고 까다로운 크고 작은
종교적 규례를 철저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이 복잡한 규례를 다 지키려면
상당한 자기 생활의 포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러한 생활은
상당히 존경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형식만 남고
내용(정신)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참뜻은 잊어버리고
그 껍데기만을(제도적 형식만을) 열심히 지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나만큼 더 잘 지키는 사람은 없다’는
‘교만한 마음’이 그들 마음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불같은 저주를 받았고,
오늘날에 와서는 외식주의, 형식주의 대명사가 된 것입니다.
<비유의 내용>
그러면 구체적인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0절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세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상당한 모욕입니다.
당시의 세리는 유대를 식민 통치하고 있는 로마의 하수인으로
세금을 거두어 로마의 황제에게 바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단지 로마에 낼 세금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착취할 몫까지 거두어들였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상상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일제에 붙어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관리인데,
자신들의 몫까지 강제로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얼마나 미움의 대상이었겠습니까?
세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반민족주의자요, 포악자요....
율법과 상관없는 자로서 사회적(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가 되어 ‘세리와 죄인’이라는
말은 항상 같이 따라다니는 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세리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바리새인들에게는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은 ...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태도를 강하게 책망하시려는
의지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그러면 구체적으로 바리새인의 기도를 살펴봅시다.
그들의 ‘교만한 마음’은 기도를 통해 그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첫째,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습니다.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서서’ 기도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방식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뒤에 등장하는 세리도 ‘서서’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따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방해받지 않으려고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과 자신을
철저히 구별 짖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조차 차별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기도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은 시간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자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품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비유컨대 저는 기도는 ‘마음의 창’을
닦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 창에 때가 낍니다.
그러면 자기밖에 안 보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기도하면 ‘창’이 깨끗해지고 투명해집니다.
창이 깨끗하고 투명해야 하나님이 보이고,
어려운 이웃들이 보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부족한 이웃이라 할지라도 사랑으로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습니다.
둘째,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의 기도가 더욱 잘못된 것은 자기의 의를
더욱 크게 하려고 다른 사람들을 비하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이
아니함’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냄으로 자신의 의를 더욱 빛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사적인 이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작은 빛이라도 스스로 빛을 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하하여 반사이익을 얻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는 뒤에 있는 ‘세리’를 의식하고
대놓고 그를 비하합니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는 기본적인 인격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러한 자들은 회개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책임은 바리새인에게 있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음을
오히려 회개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그들은 그것을 ‘감사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 감사는 ‘내가 행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일’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는 자랑이 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여야 합니다.
첫째,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습니다.
둘째,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을 비하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셋째, 바리새인은 ‘자기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기도를 이용하였습니다.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랑합니다.
이것은 율법의 요구를 훨씬 초월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일 년에 단 하루 속죄일에
금식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는 자진해서 일주일에 두 번 곧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였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만들어 놓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
자기들의 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을 남몰래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히려 금식하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 머리에
기름까지 바르라고 하셨습니다. <마6:16-18>
16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절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절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그런데 그들은 자랑하기 위하여 금식한 것이요
그것을 기도를 통하여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기도하는 척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어떤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랑할 거리가 필요했습니다.
“나는 이런 것도 십일조 한다”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습니다.
이것들은 아주 작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자랑을 목적으로 하여(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십일조를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은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믿음은 져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마23:23).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기도를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기도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
한편 세리의 기도를 보십시오.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의 기도는 참으로 겸손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선 자신의 죄 된 모습을 발견하고는
진심으로 참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였습니다.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자기보다 더 나쁜 사람을 지목하며 그보다는
덜 나쁜 놈이라고 스스로 위로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구 때문이라는 말도, 세상 탓하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자의 공통적인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자신의 죄인 됨의 발견입니다.
웃시아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간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지며 이사야의 입술에서
맨 처음 터져 나온 고백은 무엇입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6:5).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자마자 상대적으로
불결하며, 추하고,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어느 여름 디베랴 바닷가에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밤을 지새워 노력했지만, 그날따라 베드로는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물을 걷으려고 그물을 물에 씻는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5:4).
베드로가 믿음으로 그물을 깊은 곳에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고백을 기억하십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물론 세리가 죄를 지은 것이 잘한 일은 아닙니다.
그의 행위 자체를 칭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리는 바리새인처럼 공개적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서서 기도하지 못합니다.
후미진 곳에 서서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 내용도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실제로 당시의 세리는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인 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죄를 참으로 느낄 때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예수님도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맺는 말씀>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맺으십니다.
14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서 누가 의롭다고 인정받았습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기는 겸손한 세리입니까?
세리가 의롭다고 인정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끈질기게 기도해야 하지만,
올바르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다시 세우는 참회의 시간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면 할수록 교만해지는 사람은 잘못된 기도를 한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세리와 같이 겸손한 기도,
바른 기도를 드리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더불어,
응답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