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절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맹세로 된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맹세로 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이
세우시지만 우리 편에서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우리만 가까이 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과도 가까워야 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우리에게 가까이 와서 잘
해줘도 그 사람이 하나님과 가깝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율법의 제사장들이
인간들에게 아무리 가까이와도 그들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해 줄 수 없습니다.
율법은 축복이냐 저주냐 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중보하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과
언제나 하나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22절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이와 같은 제사장은 하나님의 맹세가 그 보증입니다. 제사장이 꼭 해야 할 일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장은 죄를 도말할 수는 있어도
죄를 사할 수는 없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임시조치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맹세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맹세의
보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제사장과 구원의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롬8장9절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고후13:5절에도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요일5장11-12절도 분명히 증거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증거는 아들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아들을 믿음으로 받았는데 그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이나 죄 사함의 보증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이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시작과 끝입니다. 왜 시작입니까?
예수님보다 앞선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끝이라는 것은 예수님 뒤에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과 끝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증을 받은 믿음은 아무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항상 든든하고 자신 있고 증거가 확실합니다.
23절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And로 연결이 되어 그리스도의 다른 면을 설명합니다. 히브리서는 제사장
직분의 대조와 법과 말씀의 대조로 된 책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법이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가 누구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은 죽음을 이기지 못하므로 숫자가 많아야 됩니다. 스페어가 많아야 됩니다.
레위 지파 제사장은 죽으면 계속 바꾸려고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들은 얘기로 성막에서 일하는 제사장 옷에 방울이 달려있는데 방울
소리는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서 아직 살아서 일하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물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지성소 우편에 앉아 그 분이
살아계신다는 음성을 항상 들려주십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간 후에도 방울
소리가 계속 들리면 그로 말미암아 지성소에서 그가 계속 일하고 있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법궤를 손으로 만진 우사처럼)
죽으면 아무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연결된 끈을 당겨서 끌어냅니다.
그리고 난 다음 다른 사람이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스페어가 많아야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한 분으로 족합니다.
그 분은 영원한 분이시며 항상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존재하는 분입니다(I am who I am). 그래서 딤전2장 5절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21절 이전에는 제사장으로서
‘맹세가 있느냐 없느냐’를 말씀하고 23절부터는 그 분이 ‘항상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란 제사장은 하나님의 맹세가 분명히 있었고,
또 그분은 항상 계시는 분입니다.
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히4장16절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7장25절은 구원은 죄 사함의 구원과 온전함의 구원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죄 사함의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아갑니다. 율법아래서는 대제사장 외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25절은
굉장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구원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온전해 지는 겁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기도인 요17장을 참조해 보시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험상 처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우리가 무엇엔가 붙잡힌
줄 알고 주님을 붙잡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붙잡힌바 된 것을 붙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좇아가노라 말합니다(빌3장) 야곱도 얍복강에서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부터 그가 주님을 붙잡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경험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하나님이 기적과 표적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끌고 가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무엇엔가
붙잡힌 것 같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붙잡고 아버지 앞에 나아갑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이 나를 수월하게 하셨는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수월하게 안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도망가도 안 됩니다.
다들 이상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얘야 네가
어릴 때는 내가 너를 붙잡았지만 이제 네가 내게 붙잡혔으니 이제 네가 나를
붙잡고 아버지 앞에 나아오라’ 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이런 혼란기가 있습니다.
때가 되면 진리를 알고 진리를 따라 아버지 앞에 스스로 나갈 줄 알아야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주님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해서 간구하십니다.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출입을 항상 지키십니다.
주를 찾는 자들에게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 영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주님을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말합니다(사62:7)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영광을!!
할렐루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