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로 가는 뱃길, 그리워라
최 화 웅
6.25가 터졌을 때 나는 서울 계성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전쟁은 어린 나에게도 잔인하리 만치 가혹했다. 1.4후퇴 때 한강철교가 폭파된 뒤 줄을 이은 피난민들은 강남의 영등포역으로 몰려 피난열차을 타려고 아우성이었다. 6.25 중에 김환기 화백은 손바닥 두 배 크기의 캔버스에 네모와 원, 파랑과 빨강, 검정으로 '피난열차'를 그렸다. 마치 콩나물 시루를 연상케 하는 작품에서 피난민들의 몸부림이 그대로 표현되었다. 몽드리앙의 네모난 추상을 연상시켰다. 살을 애는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 인민군의 출몰로 2주 넘게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열차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렇게 부산역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낯선 역광장에 봇짐을 풀고 둘러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먼동이 트자 서둘러 아버지의 고향, 명지(鳴旨)로 들어갔다. 명지는 흐리고 비가 내릴려면 먼 바다가 울기 시작하는 섬이다. 전쟁으로 한 학기를 빼먹고 이듬해 명지초등학교 2학년에 들어가 골마루에서 공부했다. 서울의 도심에 비해 명지는 자연 그대로의 갯마을이었다. 명지는 해빙기 이후 낙동강의 끄트머리에 형성된 모래섬, 델타다. 강기슭 따라 갈밭이 질펀하게 펼쳐지고 돛단배가 그림처럼 미끄러지던 풍경 위로 구름이 떠가는 하늘이 펼쳐졌다. 당시 명지는 경상남도 김해군의 면소재지였다. 명지에는 어진 사람들이 소금 굽고 조개 케며 고기를 잡고 파 부치며 살았다.
명지라는 지명은 조선조 역사서와 지리지에 등장했다. 1482년 조선 성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을 1530년 중종 때 증보, 개정한 지리서,『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해도호부 산천 편에 명지를 “자연재해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면 섬의 어딘가에서 천둥소리가 섬 전체에 울려 퍼졌다.”라고 썼다. 그 뒤 영정조 때의 왕조실록에서는 염장의 관리를 두고 관리들의 민폐 근절을 위해 암행어사 박문수를 파견해서 염민들을 살폈다. 임진왜란 때의『난중일기』에는 명호(鳴湖)로 1861년『대동여지도』에는 明旨로 지명의 표기가 틀리게 표기되었다. 1592년 4월 15일 다대포해전과 같은 해 부산포해전을 겪은 경상수사 원균이 1592년 4월 29일 이순신 장군에게 보낸 원국요청서에서 “김해강, 구포강, 명지도에 적선 500여 척이 상륙하여 고을, 포구, 병영, 수영이 함락되었다.”고 전했다. 그 뒤 1731년 간행된『승정원일기』에서는 “지선어민들은 고기를 잡고 해태를 양식하며 소금밭을 일구어 살았다.”고 썼다. 명지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섬마을이었다. 그러나 중세까지는 일본 왜구의 노략질이 이어져 괴롭혔고 근대에는 바다가 국경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잦은 접경이었다.
명지는 구한말 개화사상의 발흥지로 개화가사 15편이 발굴된 역사적 현장이다. 명지의 선각자들에 의해 불붙기 시작한 개화사상은 후세를 위한 신교육으로 이어졌다.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8년 개화기 당시 명지의 선각자 추호(秋湖) 선생과 양재일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지방 토호들이 명지초등학교의 전신인 2년제 사립 동명학교를 세워 일찍이 신학문과 새로운 사상을 받아드리고자 애썼다. 개화가사는 추호문집에 수록된「동명학교 개교가」가 부국강병과 자주독립정신이 성난 파도처럼 일었던 개화사상을 엿볼 수 있다. 명지는 외세의 침범이 물밀 듯 한 구한말 역사의 현장이었다. 개화사상과 함께 불붙기 시작한 항일투쟁은 동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삼일운동 때는 4월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연이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장날을 틈탄 진목리와 영강리 장터에서 궐기했음이 당시 주동자였던 동명학교 교사 이진석 선생님을 비롯한 7명이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은 판결문이 지금도 정부문서기록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다.
나는 명지초등하교 졸업과 함께 부산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ㄱ', ’ㄴ' 두 반의 졸업생 중 10여 명 넘게 특차 사범병설중학교와 1차 선발 중학교에 고루 합격했다. 부산으로 진학한 학생들은 통학과 자취생활을 하거나 하숙 아니면 친척집에 얹혀 더부살이를 했다. 지금은 공항을 드나드는 길이 왕복 10차 선으로 넓혀지고 여러 개의 낙동강 다리와 동서고가도로가 연결 되어 모든 게 바뀌었다. 주말 토요일이면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진부국도를 오가던 신흥여객 시외버스 출발지인 자갈치와 낙동강을 건너는 돛단배를 타기 위해 하단 뱃머리에 모여들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드럼통을 망치로 두들겨 펴서 차체를 씌운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털털거리며 대티고개를 힘겹게 넘었다. 당시에는 대티고개 부근에 부산의 똥오줌을 모아서 처리하는 위생공사 탱크의 악취가 대단해 한여름 폭음 속에서도 차창을 닫고 땀을 흘려야 했다. 그래도 집으로 가는 길은 마냥 즐거웠다. 동무들을 만나 다른 학교의 소식을 듣고 사춘기에 든 눈이 첫사랑의 그리운 얼굴도 볼 수 있어서 뱃머리는 항상 설렘에 가슴 벅찼다.
그때를 회상해보면 토요일 집으로 가는 낙동강 뱃길은 낭만적이었다. 낙동강 하구는 바다처럼 하루에 두 번씩 물이 나고 들었다.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지면 물 속에 감춰진 모래등이 나타나 철새떼가 꼬리를 물고 날아들었다. 당시 배 밑이 넓은 광선인 옛 돛단배는 물이 빠진 바닥에 잘 얹히곤 했었다. 그럴 때면 모든 사람들이 을숙도 갈밭에 내려서 줄지어 걸었다. 승객들이 내려 배가 가벼워져 뜨면 그 순간을 틈타서 힘센 청년 장골들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님들이 나서서 배의 밧줄을 어깨에 메고 끌었다. 평소 밀물 때는 돛단배가 마음 놓고 다니다가도 썰물 때면 미로를 빠져나가듯 조심스럽게 물골을 찾아야 했다. 물이 나면 배를 끄는 광경이 낙동강 하구의 또 다른 풍경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쯤 발동선이 나왔고 선창에는 비를 피하 수 있는 대합실도 생겼다. 간혹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큰 형님들이 내려오면 명지를 둘러싼 강둑은 멋진 성악무대가 되곤 했었다. 대학 교복의 웃도리 맨 위 단추를 푼 형님들이 앞서가며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Der Lindenbaum)를 독일어로 부르고 그 뒤를 따라 우리가 걸었던 기억이 새롭다.
낙동강 하구에 석양이 곱게 물든 날 나는 구포에서 다대포로 이어지는 널찍한 강변도로를 달리며 지난 날의 그리움에 젖은 적이 있다. 을숙도를 끼고 하구언을 지나면 그리운 명지다. 그 곳에서 어린 날 개구쟁들의 동심이 살아 있는 곳이다. 여름이면 떼를 지어 멱을 감고 수박서리를 일삼았다. 돌이켜보면 그 곳에서 뛰놀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딛고 어느새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늘에는 오늘도 바람 부는 대로 구름 흐르는 대로 무심한 세월이 산과 강을 넘고 있다. 드넓은 명지의 들녘에는 신도시의 유령과 투기의 망령이 점령군처럼 돌아다닐뿐 고향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우리의 향토를 지키지 못한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옷깃을 여몄다. 그 하늘 그 땅 위에 서서 남은 날을 바라본다. 늙음으로 새로워지는 것은 아름답다. 고향에 이는 갈숲의 강바람이 속절 없이 늙어가는 나를 다시 꿈꾸는 소년이 되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이제 그리운 명지 뱃길도 다 사라졌다. 그러나 나는 명지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뱃길과 낙동강 해넘이를 결코 잊지 않으리. 그리고 언젠가 그리운 동기들을 만나면 강둑을 손잡고 걸으면서 정다운 우리 가곡 ‘사우(思友)’와 정지용의 ‘향수’를 목청껏 불러보리라.
첫댓글 명지 뱃길을 새롭게 알게 되었네요. 그림이 그려지는 풍경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