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기보다 거룩해져야 합니다.
2015/09/06/홍종찬
목사
행복(幸福,
Happiness)의
사전적 의미는 “욕구가
만족되어,
부족함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안심해 하는 심리적인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는 극히 주관적인 것으로 사람뿐만 아니라 여러 생물들에게도 이에 상응하는 상태가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개는
행복감을 느낄 때 꼬리를 흔든다고 합니다.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A.H.Maslow)는
사람의 욕구에 대해 5단계를
말한 바 있습니다.
첫째,
생리적
욕구(Physiological
Needs), 둘째,
안전의
욕구(Safety
Needs), 셋째,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Belongingness
and Love Needs), 넷째,
존경(자존감)의
욕구(Esteem
Needs), 다섯째,
자아실현의
욕구(Self-Actualization
Needs)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어느 단계를 달성하게 되면,
계속하여
더 높은 단계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절대적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행복을 수치화(정량화)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은 주관적 감정 상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이란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신33: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행복은 얻어지는 게 아니라 선포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싸움은 단순히 영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과 성령의 싸움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고
했는데,
여기에서
“육체”(σάρξ,
사르크스)라는
말은 단순히 “몸”(σῶμα,
소마)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로마서에서
“육신”(σάρξ)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인간의 영이나 육체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아니라 영육의 통일체로서 “인간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과 부패성”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구원 받은 신자에게도 남아 있는 “옛사람”의
속성이라 규정하고 “육신”이라
표현했습니다.
육신은
여전히 죄악에 대해 연약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고
했습니다.
물론,
성도
속에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또 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속사람”(롬7:22절),
“마음의
법”(롬7:23절),
혹은
“마음”(νοῦς,
롬7:25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 속에도 두 개의 대립되는 원리,
즉
육신과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성화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생한
자의 새 마음,
새
성향만으로는 성화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절)라고
탄식했습니다.
성도는
행복해지기보다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거룩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절대적 속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4,4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역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5-16)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될 수는 없지만 주님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라고
하심으로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령
따라 행하는 자만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갈
5:16절은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기게 된다”는
것으로 “성화의
삶”을
가리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성령을 따라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따라”(πνεύματι,
프뉴마티)라는
말은 단순히 “성령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성령을
좇아”,
“성령을
따라”,
“성령에
이끌리어”,
“성령의
도우심으로”라고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행하다”(περιπατέω,
페리파테오)라는
말은 “주위를
걷다”,
“두루
다니다”,
“따르다”,
“행동하다”,
“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씀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라”,
“성령과
함께 살라”는
것으로 항상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되는데,
그
이유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는 성령이 육체를 거슬러 서로 대적함으로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못하도록 어거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소욕”(ἐπιθμέω,
에피뒤메오)이란
“마음을
두다”,
“갈망하다”,
“탐하다”,
“바라다”,
“기꺼이...하다”라는
말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갈5:19-21)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죄를 향한 소원으로,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롬8:7)고
했습니다.
“육체”는
하나님과 원수 된 부패성을 의미합니다.
그
부패된 “육체”로부터
“소욕”이
드러나게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육체의
소욕”이
있습니다.
신자일지라도
그 소욕을 따라가면 백전백패 할 것이 자명합니다.
“성령을
따라 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자가
“육체의
소욕”을
끊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성령을 따라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언제라도 육체의 소욕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날마다 행복해지기보다 성령을 따라 거룩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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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빚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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