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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에 추서된 김태연(김단야) 선생. |
1919년 3·1운동 때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여 검거됐으며, 출옥 후 만주군정서 군자금 및 의용병 모집활동을 했다.
같은 해 12월 상하이로 망명해 1921년 3월 고려공산청년동맹 집행위원에 선임됐다가 그해 8월 책임비서가 됐고, 이어 10월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상해지부에 입당한다.
김태연 선생은 1922년 3월에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이 단체를 서울에서 재결성하기 위해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24년 1월에 출옥한 뒤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단체인 신흥청년동맹·화요회에 가입했으며, 그해 4월에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됐다.
그는 1925년 2월 화요회가 전조선운동의 조직적 통일과 근본 방침을 토의하기 위해 주도한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이어 4월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가해 책임비서로 선임됐다. 같은 해 12월에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해 상하이로 다시 망명했다.
특히 김태연 선생은 중국 상하이에서 1926년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6.10만세 운동을 기획하고 격문 인쇄 발송 등을 주도한다.
국제레닌학교 재학시설 각국 혁명가들과 함께 한 김단야(앞줄 왼쪽 두 번째), 박헌영(앞줄 오른쪽 세 번째), 주세죽(가운데줄 오른쪽 세 번째). ⓒ연합뉴스 |
이후 코민테른(제3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조선문제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 6월 국내로 잠입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조선공산당재건 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30년 2월 검거망을 피해 모스크바로 갔다가 1934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민족부 책임자가 되어 한국인 유학생을 관리했으며 같은 해 박헌영의 부인이었던 주세죽과 재혼한다.
그러나 1937년 11월 일본제국주의 밀정협의로 소련의 비밀경찰에 체포된 뒤, 반혁명 폭동과 반혁명 테러 활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의 지도자로 몰려 1938년 사형당하면서 드라마틱한 그의 생애를 마감했다.
정리:국가보훈처뉴스 김병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