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나를 정토로 이끄신 대법사님
굉혜(박병규, 변호사)
1) 관정 스님과의 인연, 그리고 정토
나는 20대가 되기 전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천수경을 비롯한 관음신앙, 다라니, 금강경과 선불교 등 부처님의 가르침을 꾸준히 공부해 왔다. 나이 30대가 지나고 40대가 되면서 정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정토삼부경을 공부하다가 중국의 관정 스님이 쓰셨다는 「극락세계 유람기」와 「정토선 정의」를 읽고 그런 스님을 만나 극락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었다. 그런데 2002년 어느 날 인사동 여래선원에서 기별이 왔다.
“극락에 다녀오신 스님이 오셨으니 친견하십시오.”
정토를 공부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바로 극락을 가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극락을 다녀온 스님이 오셨다는데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나는 주저 없이 시간을 내서 찾아가 친견하였다. 비록 직접 말이 통하지 않아 내가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질문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이미 80살의 나이가 되신 큰스님께서는 노구를 이끄시고 멀리 다른 나라까지 와서 법을 펴시는 열정에 감동하였고,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법력을 통해 나는 그 자리에서 ‘극락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마정수기를 받은 것도 잊을 수 없는 인연이었다. 앞으로 극락을 가고 정토를 펴는데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마정수기를 해주신다고 했다.
다음에 오셔서 아미타사에서 법회를 할 때 나는 관정 스님께 정식으로 귀의하여 ‘굉혜’라는 법명을 받았다. 굉자는 관정 스님의 관자를 이은 임제종의 항렬자라고 한다. 그 항렬자에 불자들이 수행할 때 마지막 목표로 하는 지혜를 나타내는 혜자를 붙여 주셔서 한편으로는 기쁘면서도 큰 임무를 맡은 책임감을 느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정토수행의 길에 들어서는 첫걸음을 걷게 되었고, 관정 큰스님은 나에게 정토의 길을 인도하신 잊을 수 없는 스승이 되셨고 입문법사님이 되셨다.
나는 이때부터 열심히 정토를 공부하고 가능한 한 관정 큰스님의 법문을 많은 사람들이 듣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큰스님은 2003년 11번째 한국을 방문하여 2월 12일부터 3월 10일까지 27일간 전국을 돌며 순회 법회를 하셨다. 나는 당시 일정을 맡으신 등원 스님과 협의하여 2월 20일(목) 법조인 불교단체인 서초반야회(회장: 김동건 법원장, 총무: 박홍우 변호사) 이름으로 서초구민회관에서 큰스님을 모셔 법회를 열었다. 저녁 7시에 시작한 법회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수 백 명의 법조인들이 참석하여 큰스님의 극락 다녀온 이야기와 극락을 가기 위한 지름길인 정토선 수행법을 들었다.
2) 50대 중반에는 큰 불사를 하겠습니다.
당시 고향인 영월에 어머님께서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1년간 침상에 누워 계실 때였다. 그래서 나는 특별히 법력이 높으신 관정 큰스님을 모시고 가서 어머님 병환을 낫게 해드리고 싶었다. 큰스님을 모시기 위해 아담한 관세음보살상을 집에 모시고 큰스님 제자인 등원 스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초청의사를 밝혔다. 마침 큰스님의 제자인 등원 스님과 등인 스님의 절이 영월에 있어 이절에 법회를 하러 가시는 길에 바쁜 시간을 쪼개 우리 집에 직접 들려주셨다. 이때 우리 집 식구들은 부모님을 비롯하여 형제들까지 가능한 식구들이 모여 모두 큰스님으로부터 마정수기를 받는 법회를 가질 수 있었다. 병석에 계신 어머님에게도 마정수기를 주시고 말씀하셨다.
“올해만 넘기면 오래 사실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렇게 어려운 병으로 고생하시던 모친께서 그 뒤 13년을 더 사셨고, 2008년에 돌아가신 아버님보다 더 오래 세수를 누리셨다.
짧은 시간이지만 큰스님을 모시면서 정토로 가는 나의 마음은 더욱 굳어졌고, 나도 큰스님처럼 많은 중생들에게 정토를 펴야 하겠다는 발원이 커져갔다. 다음 해 큰스님이 오실 때는 다른 도반 2명과 함께 꽃다발을 들고 공항까지 마중을 나가 정중하게 스님을 모셨다. 그때 나는 나의 발원을 말씀드렸다.
“큰스님 50대 중반이 되면 모든 것을 접고 큰스님처럼 법을 전하는 불사를 하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큰스님이 대답하셨다.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그 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정토관계 법보시를 위해 설립된 삼보제자에 동참하여 「임종 삼대 요」 같은 책들을 번역하여 법보시하였고, 2008년에는 뜻이 같은 도반들과 법보시 출판모임인 ‘서유출판사’를 세워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그러나 직업을 가지고 법을 편다는 것은 뚜렷한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큰스님에게 발원했을 때 마음먹은 것에 비하면 너무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이제 그 때 큰스님에게 말씀 드린 50대 중반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대절명의 시간에 서있으면서도 업에 끌려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고 있다. 이때야 말로 나를 정토로 이끌어주신 큰스님께서 다시 한 번 큰 힘을 주셔야 할 때가 되었다. 최근 내가 집에 걸려있던 관정 큰스님 휘호 「南無阿彌陀佛」을 사무실로 옮긴 것도 이제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보고 함께 극락에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다짐에서 온 것이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여쭙는다.
“큰스님 이제 전에 말씀드리던 5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힘을 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