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221012010001491#
1709년 10월 14일 조선 후기 문신 이서우가 이승을 떠났다. 그가 남긴 시 중에는 <도망후기몽(悼亡後記夢)>이 특히 널리 알려졌다. 아내가 먼저 세상을 하직한 후 혼자 남아 쓸쓸한 가을밤을 맞이했는데, 그날따라 비가 내렸다.
“곱던 모습 희미하게 보일 듯 사라지고(玉貌依俙看忽無)
깨어보니 등불만 외로이 타고 있네(覺來燈影十分孤)
가을비가 꿈을 깨울 줄 진작 알았더라면(早知秋雨驚人夢)
창 앞에 벽오동나무 심지 않았을 것을(不向窓前種碧梧)”
꿈에 아내를 만났다. 살아생전 그 곱던 모습을 또렷하게 볼 수 있을 법했는데, 오동나무 잎사귀에 가을비가 후두둑 떨어져 내 잠을 흔들어버렸다.
깨어나 어리둥절 주위를 살펴보니, 홀로 남은 등불의 그림자만 너무나 쓸쓸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전에 짐작했더라면 창 밖에 벽오동은 심지 않았을 텐데….
벽오동을 심을 때 부부는 함께 했을 것이다. 이토록 정겨운 부부인데 창 밖에 어떤 나무를 둘 것인지 머리를 맞대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 나무가 두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이 되었다. 우리가 왜 벽오동을 심었는지 가을비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그 순간 이서우는 가을비 들으라는 뜻에서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렸더니
내 심은 탓인가 기다려도 아니 온다
무심한 일편(一片) 명월이 빈 가지에 걸렸어라”
라는 시조를 읊어주고 싶었을 터이다. 부부가 벽오동을 심은 것은 아름다운 날을 염원해서였기 때문이다.
벽오동과 봉황 이야기는 ‘장자’에 나온다. “남방에 사는 새 원추(봉황)는 벽오동이 아니면 앉지 않고, (60년에 한번 열릴까 말까 하는)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태평성군의 시대에만 솟아나는) 예천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그런 좋은 세상을 부부가 함께 누리고자 했다. 그러나 아내가 먼저 죽었으니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로 떨어졌다. 이규보의 노래처럼 “봉황을 보려고 벽오동을 심었더니(本因高鳳植) / 부질없는 잡새들만 날아드는(空有衆禽棲)” 상황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이서우의 기일인 오늘 그를 위해 한 마디 위로의 말씀을 드리려 한다. “당신께서 가시고 30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봉황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신께서는 부인을 다시 만난 지 300년이나 되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