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원통하구나. 아! 분하다. 우리 이천만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구나! 동포여! 동포여! -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이 민영환은 한번 죽어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이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려 한다. 나는 죽지만 죽지 않고 구천 에서도 기필코 여러분을 도울 것이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들은 더욱더 분발하여 힘쓰고 뜻을 굳게 갖고 학문에 진력 하며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해 우리의 자주 독립을 회복 한다면 나는 지하에서나마 기뻐할 것이다. - 충정공 민영환의 유언 -----------------------
을사조약에 따라 한국은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겨 외국에 있던 한국 외교기관이 전부 폐지되었고, 영국, 미국, 독일, 청나라 등의 주한 공사들은 모두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 가게 되었습니다.
조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을사조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 으로 취임하였으며,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 면 에서까지도 한국 정부에 직접 명령, 집행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한국은 명실공이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게 된 것 입니다.
이에 대해 한국 민족은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습니다. 위에서 본 장지연의 논설 등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하게 꾸짖기도 하였고, 백성들이 궐기하여 을사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며 을사5적의 처단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고종은 조약이 불법 체결된지 4일 뒤인 22일 미국에 체재중인 황실고문 헐버트에게 다음과 같이 통보하며 이를 만방에 선포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 아래 최근 양국 사이에 체결된 이른바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짐은 이에 동의한 적도 없고 금후에도 결코 아니할 것이다. 이 뜻을 미국정부 에 전달하기 바란다.
한편, 적극적이고 과감한 투쟁에 떨쳐나선 이들도 있었습니다. 충청도에서는 전 참판 민종식이, 전라도 에서는 전 참찬 최익현이, 경상도에서는 신돌석이, 강원도 에서는 유인석이 각각 의병을 일으켜 힘으로 일본을 몰아 내려는 시도를 하였고, 을사5적을 암살하려는 시도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불과 100년 전 우리 모습이 처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188)> 망국 25 - 나라가 망하다!(2)
을사조약 체결에 조정 대신 민영환은 비분강개하는 글을 남긴 채 자결을 했고, 그 소식을 들은 행랑채에 살던 인력거꾼도 뒷산의 소나무에 목을 매 주인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보다 앞서 주영 공사 이한응이 조약체결을 막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자결하였습니다. - 슬프다! 종사는 장차 무너질 것이요 온 겨레가 모두 남의 종이 되겠구나!
갑신정변의 주역 홍영식의 친형 홍만식도, 강직한 대신 조병세도, 학부 주사 이상철도, 평양친위대 김봉학도, 경연관 송병선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일본에 항거함과 아울러 고종과 대신과 백성의 각성을 구하였습니다.
이렇듯 을사조약 체결에 대한 반발이 극렬했지만, 이완용 등은 오히려 당초 다소 부득이한 찬성에서 적극적 찬성 으로 선회하며 조약 하의 정국을 기정사실화 하였습니다. - 이리 될 게 뻔한 일이었는데, 어찌할 힘도 없으면서 우리 에게 다 덮어씌운단 말이냐!!!
사실 이완용 등 5적이 없었더라도 조약은 좀 늦춰졌을 지언정 체결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일본 이 러일전쟁의 승전국으로 국제적 동의를 얻은 일인데다, 당일 총칼로 위협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일에 대놓고 도장을 찍은 자 에게 돌아갈 동정은 있을 수가 없다 하겠습니다. (이들의 그 후 행보는 총대를 맨 수준이 전혀 아닙니다)
한국의 지사들은 을사조약 체결 후 앞에서 본 것처럼 더러는 목숨을 내던지고, 더러는 무력으로 일본군과 을사 5적에 맞서기도 하고,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자강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물론 이 때부터 일진회 같은 것을 만들어 일본의 정책에 적극 협조한 세력 역시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 힘이 없었으므로... -----------------
이토히로부미는 초대 통감으로 들어온 후 내각을 이완용 등 친일파로 채우고, 각 부문별로 고문관을 두어 한국 내정 까지 틀어쥐었습니다.
고종황제는 이토히로부미를 통감이라 부르지 않는 등 나름대로 저항을 하는 한편,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이준, 이상설을 보내 을사조약의 강제성과 위법성 을 대외에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법이나 정의가 아니라 힘 이었습니다. 한국호가 점점 기울어져가고 있습니다.
謹弔...
나라를 힘이 없어 뺏기면서 달리 할 말이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