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창빈안씨 부묘소 답사(현충원內동작릉. 조선11대 중종의 후궁. 조선14대 선조의 할머니)
② 육영수여사 35주기 추도식 참례(현충원 박정희대통령 육영수영부인 묘역)
③ 효빈김씨 부묘소 답사(구리시.조선3대 태종의 후궁. 제1서자 경녕군의 어머니)
④ 아차산 등반
창빈 안씨(昌嬪 安氏1499∼1549)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1488∼1544)의 후궁
선조(1552∼1608)의 할머니
아버지 안탄대(安坦大) : 창빈안씨의 세계(世系)는 안산(安山)에서 나왔는데, 아버지 안탄대(安坦大)는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어 적순부위(迪順副尉)가 되고 나중에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어머니 황씨(黃氏)는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
연산군 5년(1499) 7월 9일 출생으로 아홉 살 때인 중종 2년(1507) 궁녀로 들어가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대비(貞顯大妃)의 각별한 후의로 중종 13년(1518) 왕의 총애를 받았고, 22세에 상궁(尙宮), 31세에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마침내 42세에 숙용(淑容)에까지 올랐다.
중종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은 영양군(永陽君) 이거(李 )이고,
둘째는 나중에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 된 이초(李 )이며,
외동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1544년 중종이 사망하자 전례에 따라 인수궁(仁壽宮)으로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의 특명으로 궁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 명종 4년(1549) 우연히 친정에 나갔다가 10월 13일 51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1568년 덕흥부원군의 셋째아들 하성군(河城君)이 조선 제14대 임금으로 즉위하자 선조 10년(1577)에 창빈(昌嬪)으로 추봉되었고 특명으로 덕흥대원군의 사당에 제향되었다.
숙종은 창빈 안씨가 서거한 지 130여 년이 지나도록 묘도(墓道)에 비석이 없음을 걱정하여 숙종 9년(1683) 12월 비를 건립하였다.
신도비는 묘소의 서쪽 비탈10여 m쯤 떨어진 곳에 세워져 있다.
비의 형식은 후궁의 묘에서 찾아보기 드문 예로서 정사각형을 기본으로 했다.
대좌(臺座)·비신(碑身)·개석(蓋石)으로 구성되는데, 정사각형의 2단 대좌는 장중한 느낌을 준다.
비신도 사각기둥 모양이며, 개석 또한 4각 지붕 모양으로 꼭대기에 연꽃봉우리를 크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효빈김씨는 김점(金漸)의 딸로 원래 태조비 신덕왕후강씨의 시비였으나, 뛰어난 미모로 태종에 총애를 받아 상전인 신덕왕후 강씨를 배신하고 태종의 후궁이 되어 태종이 잠저(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즉 개성의 정안군 방원의 사저)에 있을 때 아들 경녕군을 낳았고, 그 공으로 태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1401년 빈에 봉해졌다. 뛰어난 외모 때문에 신덕왕후강씨조차 그녀를 이성계앞에 내놓기를 꺼렸다고 하는데 결국은 태종의 후궁이 되었다. 후궁이 된 뒤로도 태종비 원경왕후 민씨의 질투로 몇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원래의 묘갈(墓碣)은 없어지고 1987년에 세운 비석이 묘의 오른쪽에 서 있다. 봉분을 장식하고 있는 석물은 다른 묘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먼저 둘레돌 대신 봉분 앞쪽에 일자형의 장대석을 놓고 그 돌 양끝편에 다시 일자형의 장대석을 앞쪽이 약간 벌어지게 놓았다. 이렇게 양쪽으로 놓인 장대석 사이에 혼유석(魂遊石)과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이 있다. 상석에는 '효빈김씨지묘(孝嬪金氏之墓)'라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