滿洲事變 九一八事件 Mukden Incident 일본이 1931.09.18 류탸오거우 사건[柳條溝事件 : 만철폭파사건]을 조작해 일으킨 만주침략전쟁.
일본 군부와 우익은 일찍부터 만주의 이권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등이 앞장서 만주침략계획을 모의했다. 이들은 류탸오거우에서 스스로 만철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측 소행으로 몰아, 만철 연선에서 북만주로 일거에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관동군은 세계공황으로 열강의 간섭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코뭏 Xueliang[張學良]이 Beijing[北京]에, 또 봉천 군벌의 주력이 장성선(長城線) 이남에 집결해 잔류 수비대가 동삼성에 분산되었던 '절호의 기회'를 포착해, 1931.09.18 이후 만주 점령작전을 시작했다. 관동군은 09.23에 랴오둥[遼東]·지린[吉林] 성의 거의 전지역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 압력을 가해 두 성의 독립을 선언하게 했다. 이어 11월에는 소·만 국경을 이루는 동북3성 전역을 장악했고, 1932년 1월 장쉐량의 반만항일 거점인 진저우[錦州]를 점령하고 3월 1일 만주국을 세웠다. 국제연맹은 중국측의 제소에 따라 리턴 조사단을 파견하고 조사보고서를 채택,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했다. 그러나 러허 성[熱河省]마저 점령한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만주침략으로 세력을 강화한 일본 군부와 우익은 정국을 장악하고 일본을 파시즘 체제로 전환시키는 한편 1937.07.07에는 중일전쟁, 1941.12.08에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滿洲國 만주사변 후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에 세운 괴뢰국가(1932.03.01~45.08.15).
1932.02 '신국가건설막료회의'를 개최해 만주국 건국 구상을 구체화했다. 이어서 관동군은 구(舊)봉천 군벌계 장성들을 앞세워 청조의 폐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집정이라는 자리에 앉힌 후, 국제연맹이 중국의 제소를 받고 파견한 리튼 조사단이 만주에 도착하기 전인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의 수립을 내외에 선언했다. 만주국의 수도는 신징[新京 : 지금의 창춘(長春)]으로 하고, 연호는 대동(大同)이라 했다. 일본은 1932년 9월 일만의정서를 조인하고 만주국을 정식으로 승인했으며, 이어 독일·이탈리아·교황청·스페인·헝가리·폴란드 등 극히 일부 국가가 만주국을 승인했다. 이후 관동군이 러허 작전[熱河作戰]으로 청더[承德]를 점령해 만주국의 영역은 랴오둥[遼東]·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러허[熱河]의 4성(省)에 이르렀고 인구는 3,000만 명에 달했으며, 1934년 9월에 제정이 수립되면서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쳤다. 만주국의 실세는 관동군 사령관이었으며, 경제면에서도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전 철도를 경영하고 닛산[日産] 콘체른이 진출해 개발사업을 독점하는 등 일본이 실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만주국은 1945년 8월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 관동군이 패퇴하면서 무너졌다.
西安事件 (병)Xian (웨)Hsian (영)Sian Incident.
중국 국민정부의 대원수 장제스[蔣介石]가 자신의 부하 장쉐량[張學良]에 의해 시안에서 연금된 사건(1936. 12. 12~25). 장쉐량은 중국 북서지방의 시안에 주둔하고 있던 동북군(東北軍 : 만주군)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장제스가 중국 북부를 침략한 일본군에 대항해 항일전을 전력으로 수행하지 않고 반공(反共) 내전을 지속할 방침을 세우자, 이에 반대하여 장제스를 연금했다. 장제스가 석방되고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이루어지면서 이 사건은 끝났다. 1936년 12월 12일 장제스는 새로운 반공작전을 독려하기 위해 장쉐량의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장쉐량의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는 자신들의 고향 만주땅을 수복하려는 일념에서 장쉐량의 부대는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정지, 항일을 위한 거국적인 통일전선 수립, 국민정부의 개각을 요구했다. 공산당은 장쉐량 부대의 요구조건에 전적으로 동조했으며, 저우언라이[周恩來]가 대표로 협상과정에 참여했다. 1936년 12월 25일 장제스는 이 제안에 대해 구두(口頭)로 승락한 후 석방되었다. 장제스는 공산당과 제2차 국공합작을 하기는 했지만, 장쉐량을 체포하여 항일전 기간 내내 연금상태에 두었다. 장쉐량은 1949년 타이완으로 끌려간 뒤에도 오랫동안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上海事變 Shanghai Incident 1930년대 중국과 일본 사이에 일어났던 2번의 사건.
제1차 상하이사변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시작되자 중국대륙 전체에 항일운동이 확산되었으며 특히 상하이의 정세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일본군은 항일운동의 진압, 만주독립 음모에 대한 열강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상하이에서 매수한 중국인으로 하여금 니치렌종[日蓮宗]의 탁발승을 저격하게 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그결과 1932년 1월 28일 조계(租界) 경비를 담당하던 일본의 해군육전대와 중국의 십구로군(十九路軍) 사이에 전투가 발발했다. 일본은 2월 중순에 육군 약 3개 사단을 파견하여 3월 상순에 중국군을 상하이 부근에서 퇴각시키고 5월에 정전협정을 체결한 후 육군을 철수시켰다.
제2차 상하이사변은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蘆溝橋事件]으로 시작된 일본의 중국 화북 침략에 대해 상하이에서 항일운동이 거세지자 일본 해군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일어났다. 8월 9일 일본해군육전대의 오야마 도시오[大山勇夫] 중위와 수병 1명이 중국보안대에 사살되자, 일본은 육군 2개 사단을 파병했다. 14일 양국 군대 사이에 전투가 시작되고 이후 난징[南京]·우한[武漢] 등 중국 전토로 확대되면서 1937.07.07 중일전쟁이 전면화하게 되었다.
1937.07.07 베이징[北京] 교외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일본군이 일으킨 군사행동으로 말미암아 확대된 이 전쟁은, 분명히 만주사변의 연장임에도 불구하고, ‘루거우차오사건’ 또는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 하여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 이것은 청일전쟁 이후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멸시감을 일본 국내에 조장시키고, 중국에 대한 군사행동을 마치 ‘아시아 혁신’의 사업인양 거짓을 꾸민 일본정부의 정책발로였다. 중일전쟁의 큰 발단의 사건으로는 노구교 사건과 남경대학살을 들 수 있다. 1937.07.07 오후 10시 40분 북경서남쪽 10여 Km 떨어진 영정하에 걸려있는 노구교(루거우차오)의 동쪽편 완평현성 북쪽의 황무지에서 야간훈련 중인 일본군의 한 부대를 향해 현성 및 현성 반대쪽인 용왕묘 부근으로부터 몇 십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일본군은 곧바로 응전태세에 들어가 07.08 새벽, 완평현성을 폭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07.09 본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총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동안 일본의 지나주둔군 특무기간과 천진시장 장자충 사이에 가까스로 정전협정이 성립되어, 소규모의 충돌은 있었지만 9일 중에는 거의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지의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도쿄에서 11일 오전, 당시 고노에내각은 각의에서 일본 본토로부터 3개 사단, 조선으로부터의 1개 사단, 만주로부터 2개 여단을 파견한다는 강경방침을 서둘러 승인했다. 한편 07.17 장개석 군사위원장은 강서성 여산에서 성명을 발표하고(공표는 19일), 노구교를 잃으면 고도 북평이 제 2의 심양이 되고, 그렇다면 수도 남경도 북평의 운명을 걷지 않을 수 없으니 노구교 사건의 해결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이것이 최후의 경계이다.”라고 발표하였다. 07.27 고노에 내각은 한 때 연기시켰던 일본 본토의 3개 사단 파병을 결정하고 천황의 허락을 받았다. 07.28 현지 일본군은 천진·북경을 중심으로 전면공격을 개시하여, 30일에는 영정하 이북의 북경·천진 일대가 거의 일본군에 떨어졌다. 8월 전쟁은 다시 상해로 확산되었다. 그것은 이전 상해사변의 경우와 거의 똑같은 진행과정이었다. 화북에서 총공격이 시작된 7월 28일, 일본정부는 전면전쟁을 예측하고 양자강 유역의 거류 일본인 철수를 지령했다. 8월 9일 저녁 상해에서 해군대위 오요야마가 시내의 상황을 정찰하던 중 중국보안대에 의해 사살당한 것이다. 11월 일본측은 곧바로 군함을 증파했다. 08.13 내각은 2개 사단의 상해 파견을 결정했다. 1935년 이래 일본이 화북분리공작(華北分離工作)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 중국에서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일어났다. 1937.07.07 루거우차오사건(蘆溝橋事件)이 일어나자 관동군(關東軍)을 중심으로 한 일본 육군 내의 전쟁확대파는 소련의 참전을 경계하는 비확대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1937.08.13 제2차 상하이[上海] 사변을 통해 중국에 대한 침략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전쟁을 신속히 끝맺으려 했으나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이룬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1937.12월에 이르러서야 난징[南京]을 점령하고 엄청난 학살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1938년 5월에 쉬저우[徐州], 10월에 광둥[廣東]·우한[武漢]을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전력이 한계에 도달하게 되어 전선은 고정되고 일본군은 점(點:도시)과 선(線:철도)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한편 중국 국민정부(國民政府)도 광둥·우한이 함락되자 사기가 떨어져 왕자오밍[汪兆銘]이 충칭[重慶]을 탈출하여 난징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1940.09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동맹이 체결되고 1941.12.08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5.08.15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전쟁은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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