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 : 1914년 1월 25일 ~ 1975년 10월 8일 (향년 61세) - 데뷔 : 1932년 동광지에 시 '봄노래'로 등단
- 경력 : 1966 한국시인협회장 외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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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영(1914년-1975년) 시인, 그 이름은 ‘시의 고향을 찾아서’가 지금껏 다른 시인들을 다뤄오는
동안 여러 차례 시인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귀에 익었지만 시인의 활동을 집중 조명하다보니
시인이며 언론인으로, 출판인으로 당대의 유명 시인들과의 교분이나 활동범위가 그 누구보다도 넓었다.
장만영은 1914년 1월 25일(음) 황해도 연백군 은천면 영천리 87번지에서 아버지 장완식 님과
어머니 김숙자 님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난다.
아버지는 전북 부안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후일 고향인 황해도 배천에서 온천을 개발하여
온천호텔을 경영했으며 어머니는 따로 양조장을 경영했다.
초애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그러나 형제. 자매가 없어 늘 외롭게 혼자 놀았고 어머니가 읽어주는 동화를 듣고, 애독하곤 했다고
후에 그의 산문에서 어린 시절의 외로웠던 배경을 술회했다.
1927년, 초애는 배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세의 나이로 단신 상경하여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교)에 입학한다. 이때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하숙을 하면서 많은
문학서적들을 사 모은다.
그는 하굣길에 서점에 들러 마음에 끌리는 제목들의 서적을 구입해와 어느 때는 구입한 책이 너무
어려워 덮어 두었다가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읽곤 감명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그가 주로 탐독한 책들은 밀턴의 <<실락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등과 해외 전원시인들의 시집이었다고 한다.
그는 3학년이 되자 습작활동을 하며 교내 회람지에 습작 <쓰레기통>을 발표하고
1931년 주요한이 발행하는 <<동광>>지의 독자투고란에 습작품을 발표하면서,
서면으로 김억의 문학 지도를 받는다. 이때 주요한, 김동환, 김소월 등 국내 시인들의 작품을 애독한다. 그리고 이듬해 경성제2고보를 졸업하자 김억과 직접 만나 사제지간의 관계를 맺게 되고 <<동광>>지에 김억의 추천으로 <봄노래> 와 <마을의 여름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한다.
1933년 그는 고향인 배천으로 내려가 지낸다. 이때 신석정시인과 친교를 맺는다.
석정은 초애가 있는 배천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초애는 고향에 내려와 있으면서도 매월 열리는 ‘구인회’의 문학 강연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을 오르내리며 해외 전원시인들의 영향을 받은 유사한 작품들을 발표한다.
이 무렵 발표한 작품들이 <정처 없이 떠나고 싶지 않나?> <귀로> <산과 바다> 등이다.
고향으로 내려가 있던 초애는 이듬해인 1934년 일본유학을 떠난다.
동경의 미사키영어학교 고등과에 입학하고 문학서적들과 외국의 서정시집을 사서 읽는다.
그는 2년여의 일본유학 중에도 계속 국내 문예지, <<신동아>> <<신인문학>> 등과 동아일보 등
신문과 문예지를 통해 <고요한 아침> <새벽> <봄 들기 전> 등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다.
유학 중이던 초애는 학과를 다 마치기도 전에 부모님의 강권에 의해
1936년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다.
장석훈 님에게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물었다. 장석훈 님은 “그 이유를 직접 들은 바는 없지만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던 시기인 만큼 3대 독자였던 아들의 신변이 불안했던 조부님의
조급한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돼요.” 라고 한다. 일본유학을 중단하고 돌아 온 초애는 그해 10월 신석정의 소개로 그의 처제인
박영규(2008년 타계)와 결혼한다. 그리고 <<시건설>> 창간호에 <달, 葡萄, 잎사귀> 등을 발표한다.
順伊 버레 우는 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東海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葡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葡萄는 달빛을ㄹ 머금고 익는다.
順伊 葡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호젓하구나.
-<달. 葡萄. 잎사귀> 전문
장석훈 님에게 “초애 선생님께서 가장 아끼셨던 시는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 포도. 잎사귀>였을 겁니다.” 라고 했다. 그렇다. 초애 역시 자작시 평론에서 “<달. 포도. 잎사귀>는 나의 대표작 대우를 받고 있다. 여기저기 가장 많이 등장되어 있는 것도 이 작품이다.” 라고 했고, 자평에 앞서 목월의 평을 적어놓았다. 다음은 목월의 평이다.
“신석정의 세계와 비슷하다. 역시 달빛이 스며 있는 동양화이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는 포도의 그 투명한 보랏빛이 영롱히 나타난다.
회화적 수법이다. 그런데 보다 다음 구절, ‘포도는 달빛을 머음고 익는다’는 주관과 객관이 묘하게 어울린 구절이다. 달빛을 머금고 익는 포도는 차라리 만영(초애)의 감상을 먹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 만영은 석정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라고 했다.
초애와 목월은 대구 피난 시절 바로 이웃에 살았다.그렇게 가깝게 지낸 터라 그런지 장석훈 님은 인터뷰 내내 아무 스스럼없이 목월시인을 “아저씨”라 호칭했다. 시인 장만영 자신도 이 작품에 대해선 여느 작품보다 더 고심했고 몇 달을 두고 고치고 또 고쳤다고 했다.
順伊 뒷산에 두견이 노래하는 사월달이면
비는 새파란 잔디를 밟으며 온다.
비는 눈이 水晶처럼 맑다.
비는 하이얀 眞珠 목걸이를 자랑한다.
비는 垂楊버들 그늘에서
한 종일 銀色 레이스를 짜고 있다.
비는 대낮에도 나를 키쓰한다.
비는 입술이 함숙 딸기물에 젖었다.
비는 고요한 노래를 불러
벗향기 풍기는 黃昏을 데려온다.
비는 어디서 자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順伊 우리가 촛불을 밝히고 마주 앉을 때
비는 깊도록 窓 밖에서 종알거리다가
이윽고 아침이면 어디론지 가버린다.
-<비> 전문
그의 시에서 유난히 ‘순이’ 또는 ‘순아’ 라는 호칭이 자주 등장한다. 박인식 팀장이 장석훈 님에게 묻는다. “초애선생님의 시에 등장하는 ‘순이’ ‘순아’를 아드님께서는 혹 알고 계십니까?” 라고. 장석훈 님은 멋쩍게 웃으며 “아버님의 마음 속 애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솔직히 그 시절 그 정도의 활동을 하시면서 애인이 없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한다. 이 이야기에 대해선 작가 자신도 산문(자작시 해설)을 통해서 고백한다.
“‘마돈나’라는 이름을 예술에서 성모 마리아 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보다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우상, 애인으로 생각하듯이 나의 시에서의 ‘순이’는 나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녀요, 애인이다. …후일에 가서 내가 몇 번의 연애 경험을 겪을 때, 그때 나는 몇 사람의 나의 애인에게 ”순아“라는 이름을 붙여 불렀다.” 라고 한다.
초애의 첫 시집 <<양>>은 1937년에 출간된다. 100부 한정판으로 자비 출판을 했으며 그 중 80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스로 불사르고 20부만 가까운 친지와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양>>의 초간본을 소장하고 있는지 장석훈 님에게 물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아버지께선 책을 무척 아까셨는데 제가 이사를 다니다보니 관리를 못해 가지고 있질 못합니다. 다만 국립중앙도서관에 <<양>> 초간본 75번 책이 소장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라고 한다.
어린 羊은 오늘도 먼 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찬란한 綠衣를 산뜻이 갈아입은 산마루 끝에는
파아란 하늘을 밟고 가는 흰 구름이 있습니다.
어린 羊은 오늘도 아득한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새들아 타고 날아가는 포근한 바람 속에는
새들의 지저귀는 즐거운 노래가 있습니다.
어린 羊은 오늘도 떠가는 흰 구름을 보고
자기 엄마가 산을 넘어오지 않나 의심합니다.
어린 羊은 오늘도 새 소리를 들으며
저를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를 그리워합니다.
-<羊> 전문
그의 첫 시집에 들어있는 이 시 <양>은 엄마 없는 어린 양이 겨울 지내고 봄을 맞아, 새 울고 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봄 하늘을 보며 봄이 오면 혹시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까. 엄마를 그리워하는 어린 양의 쓸쓸한 마음을 그렸다고 한다.
장만영은 자신의 시를 확대 해석하지 않고 시를 쓸 때의 동기나 감정을 그대로 자평했다. 그는 <<현대시 감상>>에서 <羊>을 “나는 자기를 속이고 싶지 않다. …만일 내가 나를 속이고, 남한테 시인인 척 또는 애국자인 척하려면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어린 양은 바로 나라를 잃은 서러움에 잠긴 소년인 나 자신이다. 소년은 봄철 아름다운 강산을 바라보며 어머니___내 나라를 그리워한다.
하늘로 떠가는 흰 구름은 제 나라 제 땅을 잃고 먼 이역을 헤매는 수없이 많은 애국자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지저귀는 새들 소리는 소년에게 무엇을 알리는 것일까?
시는 그 전부가 아닐지라도 그걸 읽는 이로 하여금 제멋대로 이해시킬 수 있는 불가사의한 예술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작품의 의도하는 바는 작자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나는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어린 양의 쓸쓸한 마음’을 써 보았을 뿐, 무슨 큰 사상을 여기다 내포시키지 않았다.” 라고 평(고백)했다.
고향에 내려가 지내던 그는 1938년 좀 더 본격적으로 문학을 해보겠다는 각오로 가족을 두고 혼자 서울로 온다. 그는 관수동에 방을 얻어 살면서 다양한 체험을 하고 작품 활동을 한다. 이때 이봉구, 최재서, 서정주, 정지용, 김기림 등과 사귄다. 그리고 이듬해 1939년 두 번째 시집 <<축제>>(인문사)를 출간한다. 서울을 적극적인 문학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던 그는 적이 실망한다. 생각과는 달리 가까이에서 지켜본 예술가들의 생활이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매일같이 만나는 친구들은 헤어날 길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2년여 만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1944년에는 배천온천을 직접 경영하며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고향에서 지낸다.
해방과 더불어 고향 뒷산으로 38선이 갈리며 그의 가산은 기울어진다. 주민들은 남쪽으로 떠나기
시작한다.
그의 가족들도 1947년 서울 회현동으로 이사를 오는데 이미 가산은 기울어 어려움을 면치 못한다. 그는 집에다 출판사 ‘산호장’을 등록하고 세 번째 시집 <<유년송>>을 펴낸다. <<유년송>>은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담은 시집이다. 그는 어려운 중에도 동료 시인들의 시집 비용을 제공하여 출간해주기도 한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종군작가단의 일원으로 서부전선과 적지를 순회하며 전쟁의 비참함을 체험하고 단원 문인들과 <<戰線文學>>을 발행한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1952년 <<고등문예독본>>에 이은 <<중학문예독본>>을 1953년에 펴낸다.
1954년 그는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신천지>>와 학생문예지인 <<신문예>>의 주간을 맡고 외국 시집을 번역하여 펴낸다. 1956년에는 그의 네 번째 시집 <<밤의 抒情>> 1957년 다섯 번째 시집 <<저녁 종소리>>등 그의 생전에 8권의 시집을 출간하는데 특이하게도 그 출간 횟수마다 시집의 제목을 한자 한자 늘려간다. 그래서 1973년에 출간된 여덟 번째 시집의 제목이 <<저녁놀 스러지듯이>>이다.
그는 1959년에는 한국시인협회 부회장에 선임되고 한양대학교 문리대 강사를 역임한다.
1966년엔 한국시인협회 회장에 선임되고 1968년엔 ‘신시 60년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한다. 그러나 평소 위가 좋지 않았던 그는 1973년 1월에 접어들면서 동맥경화증과 위궤양으로 병상생활을 하다 1975년 10월 8일 급성췌장염 등의 합병증으로 타계한다.
장석훈 님은 “아버지께서 평소 위가 좋지 않으셨는데 좋은 소화제를 못 드시고 소다 같은 것을 드시다 병이 커지신 거예요.” 라며 말끝을 흐렸다. 장만영시인의 묘지는 벽제천주교묘지에 있다가 1982년 6월 용인공원묘지로 이장했다. 그리고 7월 10일 고인의 8주기를 맞아 김경린, 김광균, 구상, 박태진, 송지영 등이 추진하여 묘지마당에 시비를 세웠다.
<용인공원묘지 - 시인의 묘소>
초애는 <나의 초상>이라는 산문에서 자신을 꽃게에 비유했다.
1
이 놈은 몸집이 커 둥글박거리기만 한다.
이 놈은 모로 기면서 바로 걷는다고 생각한다.
2
이 놈은 배고동 소리만 들어도 몸을 오무라 들인다.
이 놈은 조금만 분해도 입으로 거품을 내뿝는다.
3
이 놈은 구멍 속에 들어박혀 나오길 싫어한다.
이 놈은 달을 좋아하면서 실은 무서워한다.
4
이 놈은 가끔 외롭다고 집게질을 한다.
이놈은 곧잘 바보처럼 운다.
-<게> 전문
시인은 어느 날 아내가 집 마당에서 게장사와 흥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둥글박거리는 커다란 꽃게를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는 ‘뜀박질에 있어서도 그렇고 생존경쟁에 있어서도 남들처럼 날쌔게 뛰지 못하며 늘 남한테 뒤떨어지는 자신을 자각하며 모로 기면서 바로 걷는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 한편 겁이 많으면서도 남들과 타협하지 못하고 잘 싸우는 자신, 어려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집에 틀어박혀 있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이 게와 닮았다’며 “여기에 덧붙여 한 마디 더 말해두면 나는 철두철미 숙명론자이다.
모든 사리를 숙명적으로 해석한다.” 라고 했다. 장만영 시인의 ‘시의 고향’은 어린 양처럼 외롭고
여린 내면이다.
아버지의 전집을 발간했으면 바라면서도 여의치가 않아 선뜻 뜻을 실행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장석훈 님과 인터뷰를 마치고 시인이 살았던 서대문구 평동 55-2번지를 찾아가 보았다.
옛 자취는 없어지고 지금은 강북삼성병원 영안실이 들어앉아 있다.
취재팀은 곧바로 용인 공원묘지로 향했다.
하지만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동산 정상에 위치한 시인의 묘소를 올라가기엔 무리라고 묘지
관리인이 극구 말리는 바람에 다음에 다시 찾기로 하고 돌아왔다가
얼마가 지난 뒤 눈이 웬만큼 녹은 다음 다시 찾았다. 묘지 마당의 시비에는 <길손>이 수록되어 있다.
<시인이 살던 집터-현 강북삼성병원 영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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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영(張萬榮)
▣ 1914년 황해도 연백 출생, 1932년 경성 제이 고보를 거쳐 일본 미자키 영어 학교 고등과 졸
업, 1932년 <동광>에 <봄 노래>가 김억에 의해 추천, 1937년 제1시집 <양(羊)> 간행,
1953년 서울신문 출판국장으로 있으면서 <신천지> 주재, 1966년 한국 시인 협회 회장,
1975년 사망
▣ 시집 : <양>(1937), <축제>(1939), <장만영 시선집>(1964)
달, 포도, 잎사귀
순이,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호젓하구나.
- <시건설>(1936) -
[ 개관정리 ]
▷ 성격 : 서정적, 회화적, 관조적, 주지적
▷ 어조 : 고요하고 담담한 어조
▷ 표현 : ㉠ 시각적 심상, 공감각적 심상 등 신선한 이미지의 사용의 돋보임.
㉡ 가을 달밤의 서정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견고하고 투명한 심상을 통해 보여줌.
㉢ 한국의 전통적 정서가 지성의 통제를 받아 이미지와 적절히 조화를 이룸.
㉣ 문답의 형식을 통해, 화자의 정서에 독자를 참여시키는 효과를 가져옴.
▷ 중요 시어 및 시구
* 순이 → ㉠ 토속적이고 순진무구한 모성을 상징하며, 시상을 열고 닫는 기능을 함.
㉡ 시 전체의 분위기를 섬세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이끌어가는 역할
㉢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능(돈호법)
* (고풍한) 뜰 → 이 시의 공간적 배경, 사물들을 수용하고 흡수하여 생성과 성숙을 빚어내는 공
간
* 동해 바다 물처럼 / 푸른 / 가을 / 밤 → 독특한 시행 배열로 '대상의 의미 강조' 뿐만 아니라,
'시각적, 음악적, 함축적 효과'를 동시에 나타냄.
* 달빛에 호젓하구나 → 화자의 정서가 이입(移入)된 구절
▷ 소재 : ① 달 : 한국문학의 전통적 소재로, '생명력, 성숙, 풍요로움'을 상징
② 포도 : 생성, 성숙, 풍요의 이미지
▷ 주제 ⇒ 가을 밤의 정취, 가을 달밤의 서정(정적미)
[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달빛이 비치는 고풍한 뜰(동적)
2연 : 달의 모습과 향기(정적)
3연 : 깊고 푸른 가을 밤(정적)
4연 : 달빛을 먹고 익는 고운 포도(정적)
5연 : 달빛 아래 호젓한 포도 잎새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장만영의 <달. 포도. 잎사귀>는 1936년 <詩建設>지(창간호)에 실린 모더니즘 기법의 시입니다. 이미지 제시에 충실한 작품입니다. '도시와 기계 문명의 비판'이라는 서구 모더니즘의 정신과는 상관없이, 이 시는 느낌의 고향, 꿈의 고향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모더니스트의 전통 창조적 낙원의 한 전형으로서 이 시는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원형적 심상으로 보아도 달빛 넘치는 아름다운 정원은 낙원을 표상합니다. 이 시를 현실의 공간과 낙원의 공간으로 대비해 보면, 이 점은 선명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신비감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서정과 호젓한 분위기가 넘치는 시입니다. 첫째 연에 등장한 '순이'라는 여성의 이름은 다섯째 연 첫째 줄에도 제시되며, 詩想을 열고 마감하는 이중적 기능을 맡고 있습니다. 이 호칭은 순진 무구하고 토속적인 여성의 이름이어서, 서정적 주인공의 고독을 씻어 주며, 안온한 분위기 조성에 이바지합니다. 여기서 서정적 주인공이 여인을 부르는 수사적 기교는 자아의 고독한 서정의 세계에 독자를 동참시키는 내적 대화의 기법에 해당합니다. 내적 대화이므로 순이의 반응과 대답도 내면화하여 은밀한 정적 속에 묻힙니다. 순이는 침묵하는 존재이므로 이 시에 실제할 수 있습니다. 서정시가 독백이고, 독자는 단지 엿들을 뿐이라고 한 J.S. 밀의 말이 새삼 생각나는 장면입니다.
이 시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은 뜰입니다. 벌레의 영롱한 울음소리가 투명한 청각 영상을 자극하는 고풍한 뜰, 수용과 생성의 태반인 이 신비한 공간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왔음을 경이롭게 감지하는 순간, 그 빛의 원천인 달은 고요히 정지해 있는 존재로 의인화해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의 만남이 촉발시킨 정적(靜寂)의 표상입니다.
우는 벌레나 밀려오는 달은 뜰의 적막을 돕는 배경음과 그런 이미지 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달은 과일보다 향기로울 수 있습니다. 특히 셋째 연의 형태미는 축소 지향으로 '밤'에 수렴되고 있으나, 시의 공간은 오히려 '동해 바다'로 확대되어 있습니다. 넷째 연에서 포도의 내적 성숙이 감미롭도록 낭만적이고, 마지막 연에서 불러 보는 '순이'의 표상은 달빛에 젖은 정원의 아름다운 향연에 은밀히 초대된 소중한 이름이 됩니다.
이 시는 '한국의 전통적 정서(소재선택, 정적미)'에다 '모더니즘 기법(참신한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아름다운 시가 될 수 있었다.
☺ 생각해 봅시다 ☺ ━━━━━━━━━━━━━━━━━━━━━━━━━━━━━━━━━
1. 이 시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정조를 생각해 보자.
▷ 정밀감(靜謐感)
2. 이 시에서 시상을 전개시키고, 마무리하는 기능을 하는 시어를 찾아보자.
▷ 순이
3. '순이'에 대한 화자의 감정 상태를 드러내는 시어를 찾아보자.
▷ 익는다.
4. 이 작품에서 '순이'라는 시어의 구실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 고독을 달래어 줄 토속적이고 순진 무구한 반려자. 독자의 공감을 환기할 만한 친근한 이름.
5. 공간적 분위기에 도취된 작자 자신의 모습이나 정서가 이입(移入)되어 있는 시구를 찾아보자.
▷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6. 이 시에서 뜰은 어떠한 공간으로 제시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 수용(화해)의 공간, 성숙의 공간
7. 이 작품이 표상하는 것은 회화적 심상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배경과 심상으로 그림을 그린
다면 어떤 종류의 그림이 연상되는가?
▷ 풍경화.
8. 이 시의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자.
▷ 쉬운 단어를 썼으나 표현이 참신하다. 관습적인 판단을 뒤엎는 가진술(假陳述)로 표현하고
있다. 율격이 노출되지 않고 내면화되어 있다. 막연한 감정이 아닌 견고하고 투명한 심상을
보여 준다. 전원의 서정을 이미지로 정확히 포착하였다. 한국의 전통 정서가 지성의 통제를 받
은 이미지와 적절히 조화되어 있다.
9. 이 시를 참고로 할 때, 우리나라의 모더니즘 시가 문명 비판적 자세를 보이지 못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자.
▷ 우리의 의식이 이지적(logos)이라기보다는 정감적(pathos)이라는 점이다.
10. 이 작품에서 달빛의 이미지가 무엇을 환기하는가 생각해 보고, 그러한 달의 이미지가 어떻게
원형적인 이미지로서 근원적인 의미 세계를 환기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자.
▷ 이 작품에서 '순이'는 어떤 구체적인 그리움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차라리 현대인의 실
존적 삶의 결핍을 보상하는 상징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순이'는 시적 자아
의 아니마적(구체적 대상이 아니라 어떤 추상적인 심성의 표출)인 상징의 표현인지도 모른
다. 즉, 순이는 시적 자아의 결핍된 세계를 보완해 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때, 달과 물의 이미지가 생명의 리듬과 생명의 근원을, 그리고 생명의 재생과 생명의 정화
라는 원형적 의미를 지닌다는 근원적 해석과 접맥되게 되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 시는 달빛
을 통하여 현대인의 결핍된 실존적인 삶을 근원적으로 충만시키고 있는 것이다.
11. 이 시의 주제를 생각해 보자.
▷ 달빛이 주는 생명력과 호젓한 이미지, 가을 달밤의 아름다운 서정
12. 일련의 이미지들이 드러내는 공통적 속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 충만함, 호젓함, 풍만한 생명감
13. 이 작품은 전원을 그린 한가로운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작품 속의 소재 중, 감각의 전
이(轉移)를 통하여 이미지의 효과를 높이고 있는 시행을 찾아보자.
▷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14. 이 작품은 한가로운 한 폭의 전원 풍경을 연상케 한다. 작품 속의 소재 중, 감각의 전이(轉移)
를 통하여 이미지의 효과를 높이고 있는 시행을 찾아 써라.
▷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15. 공간적 분위기에 도취된 작가 자신의 모습이나 정서가 이입(移入)되어 있는 시구가 둘 있다. 그 시구들을 찾아 '주어+부사어+서술어' 형태의 문장으로 고쳐 답하라.
▷ '달이 뜰에(고요히) 앉아 있다.',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다.'
16. 이 시에서 '뜰'은 어떠한 공간으로 제시되어 있는가? '~의 공간" 식으로 두 가지를 써라.
▷ 수용(화해)의 공간, 성숙의 공간
17. <정읍사>의 '달'과 이 시의 '달'을 비교하여 설명해 보라.
▷ <정읍사>의 '달'은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를 드러낸다. 이 시의 '달'은 이와 같은 전통적인
정서를 계승하면서 더 참신한 감각과 결합해 있다. 포도와 그 잎사귀들에 스미고 젖는 싱그럽
고 호젓한 달빛은 생명력과 미적인 생성력을 함축하며, 고요하고 애수 어린 느낌을 준다.
▣ 비교해 봅시다 ▣
1. 김광균과 장만영의 시를 비교 대조해 보자.
▷ 둘 다 같은 주지시인(모더니즘)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나, 김광균이 도시적이고 이국적인 시
를 쓴데 비하여 장만영은 전원적이고 향토적인 시를 주로 썼다는 점에서는 대조적이다.
2. 내용이 전하는 유일한 시가로 일컬어지는 <정읍사>와 <달. 포도. 잎사귀>는 달의 어떤 속성을
이미지로 하여, 그리워하는 대상을 노래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
▷ 밤은 정적인 휴식과 사색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밤의 어두움 속에서 어두움과
대조를 이루는 유일한 존재인 달은, 압도적인 태양과는 달리 어두움 속에 존재하는 시적 자아
의 친화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서 같은 어두움 속의 어딘가에 존재한 그리움의 대상이 달빛을
통한 교감으로 이룬다. 두 시는 모두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으며, 달이 그 대상과의 교량 역할
을 한다고 할 수 있다.
3. 이 시와 <정읍사>에서, 시적 자아의 처지와 시적 자아가 그리워하고 있는 대상과의 관계를 염
두에 두고, 달을 통해 드러나는 시대적, 문화적인 차이를 생각해 보자.
▷ <정읍사>에서 시적 자아가 그리는 대상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속세적인 대상이다. '져재(시
장)'에 계신지도 모를 현실적 관계의 대상이다. 달에게 그 임이 진 곳을 디딜까 멀리 비추어
달라고 달에게 기원하고 있다. 현대시인 <달. 포도. 잎사귀>에서 시적 자아가 그리는 대상
'순이'는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때 달은 고대 시가와 같은 기원의 대상이 아
니라 시적 자아와 상호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순이'가 마치 근처에 있는 듯 독백적인 대화를
하고 있다. 이는 자유분방한 상상의 표출로서 현대시다운 개성을 보이고 있다.
# 장만영의 시적 특색 #
장만영은 <달. 포도. 잎사귀>를 발표한 수 약 15년이 지난 후인 1960년에 쓴 시론에서 "시를 읽고 우리가 느끼는 것은 '미(美)'요, 그 '미'는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애수(哀愁)'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하여 시를 '애수적 미'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발언은 <달. 포도. 잎사귀>에서 볼 수 있는 동심(童心)의 순수하고 투명한 고독감과 근원적으로는 호흡을 같이하는 주장이라고 하겠지만 어느 만큼의 감상성이 스며들어 있음을 볼 수 있다. 6․25 전쟁 등의 민족적 비극과 개인적인 삶의 도정은 그를 단순히 동심적인 세계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보인다.
장만영은 흔히 1930년대의 김기림, 김광균 등과 신석정 등의 작품들과 중간적 위치에 서 있거나 호흡을 같이하는 것으로 평가되어 왔는데, 그가 해방 이후 이러한 경향을 발전적으로 결합시키는 지점까지 나아갈 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그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최재서는 이미 장만영의 첫 시집 <양(羊)>에 수록된 '바다'를 언급하면서 '감동의 결핍을 감출 수 없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그의 시적 방법과 소재 사이의 문제점을 지적했던 것이라 보인다.
좀더 폭넓게 고려한다면, 그가 고집한 동심적인 애수의 세계는 넓고 풍요로운 세계로 향하는 통로를 어렵게 만든 것이 아니었던 것인가 하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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