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장손을 잃은 슬픔은 크지만
증언자 : 정민구(남)/정석진(아버지)
생년월일 : 1955. 3. 4(당시 나이 26세)
직 업 : 전기기사(현재 사망)
조사일시 : 1988. 12
개 요
5월 21일 어머니를 찾으러 나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게 되자 아버지가 찾아나섰다. 5월 22일 대학병원에서 아들 시신을 찾음.
온순하고 믿음직한 아들이었는데
정민구는 1980년 당시 26세의 건장한 청년으로 성격도 온순하고 매사에 믿음직한 아들이었다. 1979년말 군을 제대한 후 자기 전공을 따라 일신방직 공무과 전기계에 들어와 근무하고 있었다. 약혼을 한 상태에서 5·18을 맞이하게 되었다.
영업이 계속되다가 날이 갈수록 5·18 상황이 심각하고 급변해 가자 5월 21일 회사가 휴업을 하였다. 아버지가 대학교 다니는 동생이 광주에 있는 것을 염려스러워하자 민구는 자신이 송정리역까지 데려다줘서 고향인 충남 천원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민구도 젊은 나이라서 위험스럽게 생각되어 아버지인 내가 데려다주기로 했다. 자전거에 둘째아들을 태워 송정리까지 데려다주고 저녁 6시쯤에 집에 와보니 민구가 보이지 않았다. 다른 식구들에게 '민구가 어디 갔느냐'고 물으니 어머니를 찾아본다며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그때 민구의 엄마는 금남로 부근의 피부과에 가서 돌아오지 않자 민구가 나간 모양이었다. 늦은 밤이 되었지만 소식도 없이 들어오지 않자 민구의 가까운 친구들에게 연락하고 수소문했으나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걱정과 불안으로 밤을 지새고 다음날(5월 22일) 아침 일찍 친한 친구들 집으로 찾아나섰다. 친구들은 모두 모른다고 했는데 광천동에 사는 친구 한 명만이 낮에 시위군중 속에 있는 민구를 보았다고 알려주었다.
먼저 간 아들의 장례식
그 말을 듣고 시위하다가 다쳐서 혹시 병원에 있지 않나 해서 병원으로 찾아나섰다. 광주역 앞의 병원부터 시작해서 곳곳의 병원을 찾아다니며 "혹 다친 사람 중에 정민구라는 사람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어느 병원에서도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오전 10시가 넘어 대학병원 영안실 앞에서 30여 구의 시체들 가운데 정민구라는 이름이 씌어진 시신을 찾아낼 수 있었다. 광목 거죽천을 떠들고 아들 시신을 보니 왼쪽 어깻죽지를 총알이 관통하여 피를 흘렸고 얼굴 모습은 정상적인 상태였다. 나는 아들 민구의 시신을 보고 거의 정신을 잃었는데 소식을 접한 나의 친구와 아들 직장 동료 30여 명의 도움을 받아 수의를 입혀 입관을 시켰다. 입관을 시킨 후 곁에서 시신을 지키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5월 23일 아침 병원으로 가보니 시신은 없어지고 다만 누군가가 상무관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그 길로 곧장 상무관으로 가니 그곳에 있는 청년이 민구 사진이 필요하므로 가져오라고 하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상무관으로 왔다. 민구의 어머니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민구 동생들과 함께 시신 옆에서 분향하는 시민들을 맞았다. 그렇게 상무관에서 8일 정도를 지내고 시체 검시가 있은 후 망월동에서 합동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전에 시신을 상무관으로 옮긴 후 전계량, 박찬봉 씨 등 5, 6명의 유족들과 함께 모여 장지 결정 등을 의논하였으나 무산되고 계엄군에 의해 장례가 치러졌다.
유족회의 단일화 통한 명예회복 및 정당한 보상
5, 6명의 유족 대표들의 모임을 계기로 유족들의 명예회복 및 생계보장, 5·18 진상조사를 위한 5·18 광주의거유족회를 설립하여 박찬봉 씨가 회장직을 맡고 매달에 한 번씩 유족회 모임을 가졌다. 그런데 유족회 내부에서도 의견 갈등이 일어나 거의 양분된 상태다. 박찬봉 씨 등을 위주로 한 유족들은 시대적 조류에 발 맞춰 물질적 안정을 취하면서 화합해 가자는 입장인 반면에 전계량 씨 등을 위시로 한 유족들은 명예회복 및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투쟁적인 활동도 해야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양측이 대립된 상태다. 한때 유족회 간사도 했던 나는 이들의 중도적 입장에서 두 입장의 단합, 연합을 통한 단일화가 이룩되기를 바라는 데 마음 같지 않다. 요즈음은 회모임도 자주 안 나가게 되고 대신 민구의 어머니가 참석하여 그들의 입장과 돌아가는 사정을 들려주는 형편이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그들의 죽음이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의한 것이었거나 그렇지 않은 것을 떠나 유족들을 위한 명예회복을 물론이고 생계보장을 위한 정당한 보상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처음 5·18을 겪고 나서 집안의 기둥이며 믿고 의지한 자식을 잃은 슬픔에 만사 의욕을 잃어버리고 위로의 말도 들을 여유조차 없어 다시는 치유할 수 없는 응어리진 상처만이 가슴에 남게 되었다. 그래도 남자였던 내가 이런 심정일 때 민구의 어머니는 어떠했으랴! 처음 자식의 시신을 대하고부터 이성이 혼란스러워지고 정신에 이상이 생겨 한 번씩 폭발했다 하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그 후 심장병을 얻어 무수한 치료를 했으나 지금도 아들 이야기만 나 오면 정신적 이상이 오는 것이다. 다 키운 자식을 잃었다는 슬픔에서 헤어나기란 마음먹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아들과 같은 회사를 다녔던 나는 아들과 같이 어울렸던 친구들만 보면 아들 생각이 나서 슬픔에 잠기곤 한다.
5·18 직후에도 아들이 어떻게 사고를 당했는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는데 우연히도 친구 하나가 21일 밤 10시경에 아들을 보았다고 말했다. 광주역 앞에서 시위대 차량에 타려고 하는 것을 만류했는데 그것을 뿌리치고 시위대 차를 타고는 가 버렸다는 것이었다. 아마 차를 타고 가다가 시 외곽지역에서 총상을 입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평상시에는 그런 말을 전혀 하지 않던 아들 친구도 같이 술 잔을 기울이게 되면 자신을 원망하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보는 것도 마음 아픈 일이었다. 이런 가슴아픈 일에 더하려는 듯 1980년 이후 2년여 동안을 서부경찰서 정보과에서 조사를 한답시고 자주 왔다갔다하며 들쑤시자 한 번은 큰 호통을 쳐서 보냈다.
어느덧 8년이 지나면서 느낀 것은 5월 영령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더라도 국가적으로나 정치적인 도구로서의 이용은 절대 금물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면, 앞서 말했듯이 당시의 피해가족에 대한 정신적 위로와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리고 5·18 묘지를 이장하여 성역화시키는 것보다는 현재 그곳을 조경하여 어느 누가 보든지 민주화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하는 바다.
(조사.정리 이병님)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