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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간 땅 속에 묻혀 있었던 청계천이 최근에 다시 햇볕을 쪼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지하의 청계천에서 예상밖의 문화재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하루 빨리 청계천의 물 흐름을 복원(?)하려는 서울시 관계자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청계천 2가에 자리잡고 있었던 수표교도 청계천 발굴 조사로 인하여 다리의 기초석 등이 발굴됐다.
수표교는 조선 1420년(세종 2년) 개천(開川, 청계천)에 세워진 다리다. 이 수표교는 1422년(세종 4년) 제2차 개천공사 때 나무 다리에서 화강암 돌다리로 교체됐다. 원래 수표교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수표교 근처에 우마시전(말과 소를 거래하는 시장)이 있어서 마전교(馬廛橋)라고 했다. 그러다가 1441년(세종 23년)에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한 수표(水標)를 다리 서쪽에 세우면서 다리 이름도 수표교로 바뀌었다. 이 다리는 물길을 건너는 다리일 뿐만 아니라 홍수 조절을 위해 수량을 재는 역할도 했다. 수표는 하천 등의 물높이를 재는 기구로 측우기를 만들 무렵에 같이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문화유산이다. 수표도 처음 세울 때에는 나무 기둥으로 세웠으나 성종 때부터 돌기둥으로 바뀌었다. 나무로 만든 수표는 물 속에서 쉽게 썩기 때문이다. 이 돌로 된 수표는 1833년(순조 3년) 3월에 만들어진 것이 홍릉의 세종대왕기념관에 남아 있다. 돌기둥의 3척까지 물이 차면 물이 적고, 6척이면 보통 수위이며, 9척이면 위험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아무튼 같은 자리에 함께 있어야 할 수표교와 수표가 이산가족처럼 헤어져 있는 것이다. 수표교를 청계천에 이전 복원할 때에 이 수표도 보호각에 싸서 수표교 옆에 다시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수표교는 1760년(영조 36년)에 대대적인 준설 공사를 마치고 다리를 수리하게 된다. 이 때에 높이 4m인 다리의 돌기둥에 '庚(경), 辰(진), 地(지), 平(평)'이라는 글씨를 새겨 물높이를 4단계로 측정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 다리 동쪽에 준천사라는 관청을 두어 수량의 변화를 한성판윤에게 알렸다. 물론 여름의 홍수에 청계천이 넘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표교에는 '정해개조(丁亥改造)' '무자금영개조(戊子禁營改造)'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준설 공사가 끝난 후, 1767년∼1768년(영조 43∼44년)에 다리를 다시 고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에 다시 쌓은 수표교가 현재까지 전해지는 수표교의 모습이다. 수표교 구조는 간단하게 보면 기둥과 들보로 구성되어 있다. 수표교는 6각형의 큰 다리 기둥에 길게 모진 도리를 얹고 그 사이에 커다란 판석이 깔려 있다. 특이한 것은 수표교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 2단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 중 위 단의 마름모 돌은 모서리가 물의 흐름과 마주하고 있어서 흐르는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였다. 수표교는 난간석이 아름답다. 이 난간에는 연잎과 함께 연꽃 봉오리가 터질 듯이 봉긋하다. 수표교는 청계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옛 사람들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다리였다. 이 수표교는 역대 임금들도 자주 건너다녔다. 조선 시대에는 청계천 건너 지금의 중구 저동에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년 왕들은 설날, 한식, 단오, 추석, 동짓날에 영희전에서 전배(展拜)를 드리기 위하여 이 수표교 다리를 왕래하였다. 왕이 조상들을 모시러 이 다리를 건넜다면, 조선 시대 한양의 백성들은 봄이 오는 정월 대보름날에 이 수표교에서 연날리기도 하고, 밤을 새워 답교 놀이를 즐겼다. 다리 밟기를 뜻하는 답교놀이를 하면 1년간 모든 병을 물리치는 액막이가 되고, 무병장수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수표교를 비롯한 청계천의 다리 등 12다리를 밟으면 열두달의 액을 면할 수 있으며, 특히 여인들은 1년간 다리병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는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각자 자기 나이대로 다리를 밟는다는 고려 이래의 전통 풍속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 다리밟기 행사가 가장 성황을 이룬 곳이 바로 수표교와 광교였다. 이 다리밟기에는 일반 백성들과 양반들을 포함한 많은 남녀노소가 밤을 지새며 참여했기 때문에, 다리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게다가 다리에 모인 사람들이 퉁소를 불고 북을 쳐서 매우 소란스럽기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정월 대보름날 밤에는 다리 밟기를 하면서 숭례문과 함께 흥인지문을 활짝 열어 모든 백성들의 내왕을 자유롭게 했다. 이 거대한 행렬은 밤이 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양반들은 대보름 하루 전인 14일 저녁에 수표교에서 다리를 밟았다. 이것을 '양반 수표교 다리밟기'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가 되자 이러한 풍습은 다리만 밟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고 하여, 육조에서 가무별감에게 흥겨운 가무연회를 곁들이라고 명하게 됐다. 이 때부터 답교놀이의 배역이 정해진 선소리산타령패도 등장하게 된다. 순수한 다리밟기 행사가 정형화된 다리밟기 놀이로 발전한 것이다. 조선 순조 때 김매순이 열양(洌陽·한양)의 연중 행사를 기록한 <열양세시기>에 이 답교놀이가 눈에 보이듯이 묘사되어 있다. 정월 대보름 상원날 밤에 열두 다리를 밟으면 일년 열두달의 액운을 없이 할 수 있다고 해서, 공경(公卿) 귀인부터 여염의 서민들까지 늙은이나 병든 사람말고는 다리 밟기에 나오지 않는 이가 거의 없다. 가마나 말을 타거나 지팡이를 끌고 나오는 사람들까지 거리거리 메어지고, 풍악과 음식 그릇이 사람 모인 곳마다 어지러울 만큼 수선스럽다. 이 다리 밟기 놀이는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의 연등놀이와 함께 일년 중 가장 성대한 놀이이다. 이 두 밤은 해마다 임금께서 친히 명을 내려 야금을 해제한다. 선조 때 시인이자 예조판서를 역임한 동악 이안눌(1571∼1637)도 정월 대보름날 장가를 들었는데, 친구들과 수표교의 다리밟기에 어울렸다가 술에 취해 다리 부근에 쓰러져 잠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안눌은 이 날 밤의 해프닝으로 남의 신방에서 다른 신부를 만나게 되고, 결국 이 신부를 소실로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첫날밤 신부를 놔두고 놀러 나간 원래 신랑은 또 어디에 가서 놀았단 말인가? 이 일화를 보면, 조선 중기의 정월대보름 다리밟기 놀이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해방의 시간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날은 한양성 사람들의 밤을 구속하던 밤 10시 통금 시간도 없었고, 이 날은 도성 안의 양반과 일반 백성이 함께 어울려 놀았다. 또한 이날은 고요히 숨죽여 지내던 여인들이 바깥 공기를 시원스레 호흡할 수 있는 날이었다. 한양성은 양반과 일반 백성들의 사는 구역이 따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 날의 다리 위는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현재의 서울은 이러한 가슴 뿌듯한 축제와 모든 시민들이 함께 어울릴 공간이 있는가? 바쁜 시대를 탓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조선 시대의 우리 선조들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더 윤택한 삶을 살았던 것도 아니고, 더 편안하고 한가한 시간을 가진 것도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가 일제의 굴곡 없이 성숙했다면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대표적인 서울의 축제가 바로 이 다리밟기 놀이이다. 물론 정월대보름 답교놀이가 계승되지 못했던 것은 놀이의 장소가 되었던 서울의 열두 다리(모전교, 대광통교, 소광통교, 수표교, 장통교, 효경교, 태평교, 송기교, 혜정교, 철물교, 초교, 이교)가 근대화라는 미명 아래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시민들이 광화문과 종로에 모이듯이 이 청계천 수표교에서 정월대보름 달빛 아래 서로 모여 답교놀이를 되살릴 수는 없을까?
답교놀이를 되살리려면, 우선 청계천의 다리, 수표교가 제자리에 복원되어야 한다. 광복 후에도 수표교는 수표석과 함께 장안의 명물로서 500년 역사를 짊어진 채 청계천 위에 남아 있었다. 수표교는 1959년 11월의 청계천 복개공사 때 기초석을 제외한 다리 대부분이 철거되어 신영동으로 이전되었다가 1965년에 서울 장충단공원에 옮겨져 있다. 다행히 이 수표교는 청계천 복원사업이 시작되면서, 결국 청계천에 복원되어 우리들 곁으로 돌아올 것 같다. 청계천이 제 모습을 찾으면서, 원형이 남아있는 수표교와 광교는 보존·복원되어 보행자들의 다리가 되는 것이다. 청계천에 남은 수표교의 유구는 일단 수해 방지 공사를 위하여 필요한 부분만 발굴, 유구를 해체하여 이전한다고 한다. 물론 청계천 복원구간에서 발굴된 수표교의 기초석 유구와 장충단 공원으로 이전된 수표교 유구를 합체하여 원래의 자리에 복원해야 할 것이다. 수표교 복원 시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27.5m인 수표교 길이와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계획하고 있는 21∼23m의 청계천 폭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골치 아프게 연계도로의 폭을 걱정하기보다는 청계천을 무너뜨린 현재의 도로 체계가 왜곡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육백년 고도의 사대문 안이 철저히 유린된 지금, 차들이 이용하기 좋은 차로 한 개를 확보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청계천 조경 설계안에 있는 하천의 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표교를 선조들이 애용하던 모습으로 그 자리에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청계천과 수표교는 다시 제 모습을 찾는 것일 뿐이다. 18세기에 당시 한양의 20만명이 이용하던 이 수표교는 다시 관광객을 끌어 모을 것이다. 도로 혼잡 비용보다는 내외국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생기는 수익 창출, 그리고 문화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이 더 클 것이다. 정월 대보름 밝은 밤에 다시 다리를 밟자. 고속으로 질주하는 시대에 이 정도의 멋과 재미를 갖추는 것도 좋지 않을까? |
첫댓글 전국 민속경연대회 연습으로 참 많이 힘 들었었는데......... 이 작은 체구에 무동을 세우고 다리를 올라갔다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