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石 池龍雨 선배가 그립습니다
“오랜만에 세브란스에 재입원하고 놀래고 실망한 점이 한 둘이 아니다. 의료수가는 예전의 배 이상 인상했으면서도 환자를 다루는 과정은 거의 '야전병원' 수준이니 기가 차다. 심지어 검사실이 꽉 찼다는 이유로 다른 환자들이 즐비한 입원실 안에서 환자의 옷을 다 벗기고 '관장'(배설)기구를 삽입하는 등 저질 의료행위를 해서 참다못한 내가 "여기가 대한민국 제1급 병원인 세브란스병원 맞는가, 아니면 야전병원인가?" 하고 호통을 쳤을 정도다. 한번 환자가 입원하면 보유중인 온갖 고가 의료 장비들을 차례로 다 거치게 하고 치료 그 자체보다도 각종 장비검사로 의료수가를 최고 한도로 올리고 있으니 이건 말이 좋아 '병원'이지 '돈 먹는 하마'라는 불쾌감이 치민다. 이제는 병원도 의사도 환자를 하늘처럼 알라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같은 서약 따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흥분 용서해라!”
지용우 선배가 타계하기 며칠 전 나에게 유언처럼 보낸 카톡 전문이다. 지용우 선배는 이처럼 현대의술의 한계를 원망하며 눈을 감았다. 지금 와서 憤痛해 한들 소용없는 일이지만 생각할수록 안타깝기 그지없다.
형님처럼 가까웠던 지용우 선배
지용우 선배와 나는 정말 친형제처럼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하루도 연락이 없으면 궁금해 했고 사흘이 멀다 하고 만났으니 친 형제인들 이렇게 다정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용우 선배를 만난 것은 1970년대 초 민관식 당시 문교장관의 정책 브리핑을 듣기 위해 자리를 함께했을 때로 기억된다. 지 선배는 그때 경향신문 교육담당 논설위원으로, 나는 신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함께했다. 그 후 국방장관 브리핑 등 이런 저런 공식석상에서 자주 만났는데 그때마다 지 선배의 남다른 친화력에 감동을 받곤 했다.
지 선배와의 교분이 두터워 진 것은 1980년 12월 신아일보가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되자 내가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출퇴근차를 같이 타면서 부터다.
출근 차는 갈현동에서 나를 먼저 싣고 역촌동 지 선배 댁으로 갔다가 대조동 박노경 위원(작고) 댁을 들렀고 퇴근 때는 역 코스로 귀가하거나 연신내에 내려 호프집으로 직행하곤 했다. 인사이동으로 내가 아르바이트은행부장을 거쳐 정경연구소 기획위원직을 맡고 있을 때 나를 다시 논설위원으로 롤백 시킨 분이 바로 지용우 논설실장이었다.
지 선배가 정년으로 경향을 떠났을 때 나는 심의위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정년퇴임 후 우리는 신문사 밖에서 자주 만났다. 지 선배가 경향사우회 회장 때는 사우회 사무실에서, 경향OB산악회 회장 때는 매월 산에서 조우했다.
숱한 일화 남긴 池龍雨 선배
지용우 선배는 유별난 애처가였다. 그 바쁜 시간 논설을 쓰면서도 수시로 집에 전화해 부인의 안부를 물을 정도였다. 도둑이 들었다며 비호같이 사무실을 나가던 모습, 역촌동 다가구주택을 지으며 고생고생 했던 일, 엄동설한 한잔 하고 광화문 건널목을 건너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던 택시에 다리를 다쳐 함께 병원신세를 져야 했던 날 새벽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어부인들의 겁에 질린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경향 선후배 사이에 회자되는 지용우 선배에 관한 일화는 책을 몇 권 써도 모자랄 만큼 많아 보인다. 그는 문교부출입기자 시절 경희대학교 기둥 몇 개는 자신이 세웠다며 母校愛를 과시하곤 했다. 편집국 張 모 기자와의 라이벌 관계에서부터 공항취재를 위해 나갔다 못 볼 것을 보고 회사에 항의 했던 일이라든지 경찰기자시절 동료들과 중부경찰서 유리창을 작살냈다는 무용담도 심심치 않게 들려주곤 했다.
대한언론인회에서는 6‧25참전언론인회를 만들며 더욱 친숙했고 전적지 탐방 때는 지용우 선배가 성명서를 직접 작성해 낭독했다. 언젠가 최전방 국군위령비 앞에서 불편 한 몸으로 성명서를 낭독하다 쓰러져 구급차 신세를 질 뻔했던 일도 화제의 한토막이다.
형님대신 낙동강전투 참가, 한때 교편 잡다 언론계로
지용우 선배는 1950년 6월 25일 오전 형님 대신 6·25전쟁 최대 격전지인 낙동강전투에 참가했다. 계급장도 없는 급조된 군인으로 多富洞 전투, 浦項전투와 함께 6·25 3대 격전지로 알려진 安康전투, 그 빗발치는 彈雨 속에서 옆구리에 총탄을 맞고 후송되어 3일 만에 깨어났다.
1951년 1월 12일 대한민국 제1차 명예제대증서를 받고 전역한 지 선배는 그 후 경희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 2세 교육에 헌신하는 것이 보람 있는 인생이라 생각하고 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는다. 교편생활 중 다른 교사들 모두 두려워했던 불량학생 한명을 용감하게 훈육 선도한 무용담을 들을 때면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지 선배의 불같은 성격이 묻어난다.
그 뒤 학원 영어강사로 자리를 옮겼고 한때는 서울 약수동에 문을 연 KEI 영어학원 ‘스타강사’ 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교직생활과 그 잘나가던 학원 강사를 그만두고 1964년 공채 5기(수습5기)로 경향신문에 입사했다. 정치부와 사회부 기자, 제2사회부장을 거쳐 장장 16년간의 논객생활을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그는 자신의 저서 ‘시대의 증언’에서 ‘‘자유분방함과 비리고발의 통쾌함, 권력의 비정(秕政)과 맞서 싸우는 용기 등이 다른 직종에선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매력’이 있어 신문기자로 직업을 바꾼 이유를 실토했다.
“정치권력에 대한 언론의 역할은 결국 견제와 비판이다. 만일 정부와 언론이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게 된다면 그것은 대신 국민의 알 권리를 저버린 권·언(權·言)유착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언론은 정권 그리고 사회가 부패하는 것을 막아주는 방부제의 역할을 해야 하며 신문기자는 기자이기 전에 인간이 돼야한다.” 지용우 선배의 언론관은 이렇게 분명했다.
지용우 선배는 특히 ‘전천후 논객’으로 지명도가 높았다. 장장 16년간의 논설위원 재직 중 그의 이름 석 자를 내걸고 쓴 ‘지용우 칼럼’ 등은 그가 생시에 말한 대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자유분방하게 논조를 폈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말해준다. 정년퇴임 후에도 글을 써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呂永茂)논설주간으로 타계하기 며칠 전까지도 이 신문에 비중 있는 칼럼과 ‘천둥소리’를 집필했고 ‘대한언론’ 논설고문으로 왕성한 필력을 과시했다.
강한 도전정신에 남다른 친화력
지용우 선배의 아호는 ‘靑石’이다. 그는 푸른 빛깔을 띤 응회암처럼 강직하고 외유내강의 원리원칙주의자로 통한다. 앞에서 본대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불같은 성격이다. 어쩌다 버릇없는 젊은이를 보면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 직성이 풀린다. 한번은 퇴근길 어느 술좌석에서 젊은 청년이 너무 시끄럽게 떠든다고 싫은 소리를 했다가 속된말로 기어오르는 바람에 시비가 붙어 본의 아니게 파출소 신세를 진적도 있다.
언론인 具宗書 박사(정치학)는 지용우 선배가 고희를 맞아 출간한 칼럼집 ‘시대의 증언’에서 “지 선배는 공사가 분명하며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면서 도전정신과 모험심이 남달랐다고 소개했다. 1970년대 초 국방부 기자단이 미 태평양사령부 초청으로 일본 자위대 군사시설을 둘러 볼 때 유독 지 선배만이 선뜻 자원하여 높이 200m 낙하산 훈련용 철탑에 겁 없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모두들 놀랐다”고 한다.
지용우 선배의 이 같은 도전정신과 승부근성은 정년퇴직 후 등산 마니아가 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규정상 50세 이상은 정규 산악 반에 등록이 안 된다는 코오롱 등산학교를 65세에 노크,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예비반’에 가입해 독도법 등 기초이론을 배운 뒤 20~30대 젊은이들과 함께 20㎏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산악훈련을 하고 바위벽을 기어오르는 암벽등반을 마다하지 않았다. 4주간의 고된 훈련을 마치고 북한산 노적봉에서 ‘졸업등반’을 하던 날, 다른 팀의 남녀 한 쌍이 강풍에 자일이 엉켜 대롱대롱 매달린 채 동사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젊은이들과 똑 같이 정규반 코스를 수료해 코오롱등산학교 개교 이래 최고령 졸업생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단련된 몸이라선지 산에 오를 때면 언제나 선두를 양보하지 않았고 하산할 때면 다람쥐 뺨칠 정도, 아니 빠르기가 쏜살같았다. 어느 날 한라산 설경에 감탄사를 연발하고 중국 적산의 바위산 정상에서 咆哮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천하장사라도 가는 세월 못 막네’
지용우 선배는 시적 감흥도 남달랐다. 대학시절 영문학자를 꿈꾸면서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과 제프리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심취했었다는 그는 틈나는 대로 내게 시를 써 보내곤 했다. 그 중 두 편을 소개한다.
“백발 황혼나이에 이르러/다시 씹어 본 인생의 맛이란/ 흡사 五味子 맛 같다고나 할까.../쓰고, 달고, 시고, 떫고, 짜고../70 평생 이 맛, 저 맛 다 보았네./사랑의 설래 임, 亡부모의 슬픔/전쟁의 참혹함, 생존경쟁의 치열함/그리고 가족 같은 친구들과의 사별/물론 달콤한 장미 빛 사랑도 해 보았지. 인생은 아름다운 무지개 빛깔도/고통스러운 가시덤불만도 아니 라네/喜,怒,哀,樂의 뒤섞임 속에서/一喜一悲하다 끝내는 거지/덧없고 가없는 한평생에서 욕심을 부리면 뭘 하나/아등바등 한다고 안 될 일이 되나/그저 흐르는 물처럼, 바람처럼/유유히 마 음 편히 살다 가는 거지(2010년 7 월 4일 ‘인생은 오미자 맛’)
“한 세상 살다 가면/한 줌 흙으로 돌아가거늘/재물, 명예 얻으려고/ 안간힘 쓰지 말 게 나/인생은 지극히 짧고 덧없는 것/富貴榮華도 一場春夢이라네/ 바람처럼 살다 아 둥 바 둥 살지 말고/구름처럼 물처럼 유유히 살게 나/가 이 없는 사막을 걸어가노라면/그대 발자국이 남긴 하지만/바람 한 줄기 불면 흔적도 없다 네/구름처럼 가세/ 봄이 오면 꽃 피고 가을엔 낙화 지듯/ 인생도 피고 지는 것이 한 평생/ 천하장사라도 가는 세월 못 막 네/ 그러니 구름에 달 가듯이 유유히 살게” (2010년 7월 16일 밤 ‘인생길’)
왜 그때 지선배가 이런 시를 썼는지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임종하던 날 새벽 갑자기 흘러간 노래를 불러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는 지용우 선배, 조용히 ‘산타루치아’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는 미망인 손혜정 여사의 눈물겨운 사부곡을 빈소에서 들었을 때 나는 목이 메어 어쩔 줄을 몰랐다.
‘인생길’을 훌쩍 떠난 지용우 선배의 저승길엔 지금쯤 활짝 핀 한 떨기 국화꽃이 선생의 명복을 두 손 모아 빌고 있겠지요.
영원한 論客 지용우 선배! 당신이 정말 그립습니다.
2017년 11월 정운종(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