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리랑카 출신으로 한국 승복을 입은 혜월스님
혜월스님을 만나기 위해 햇볕 좋은 초겨울 날, 14번 프리웨이를 타고 엔텔롭밸리, 페어블라섬(Pearblossom)이라는 이름도 고운 지역으로 차를 몰았다. GPS가 알려주는 대로 찾아갔는대도 구제불능 길치(길을 잘 못 찾는 사람)는 스님 계신 곳 주변을 30분이 넘도록 계속 맴돈다. 이쯤 되면 어떻게든 혼자 찾아보겠다는 굳은 의지는 한풀 꺾일 수밖에.
“스님, 저 길 잃은 것 같아요.”
휴대전화의 연결상태도 좋지 않아 스님과의 통화는 번번히 불통이다. 가까스로 스님이 남긴 음성 메시지를 체크해보니 대로변까지 차를 몰고 나와계시겠단다. 이런 민폐가…
말씀하신 교차로에 이르니 초면임에도 한국식 승복을 입은 모습이 단박에 혜월스님임을 알아볼 수 있는 이가 차를 몰고 나와 있다. 길 잃은 중생을 위한 이 작은 수고는 영혼의 방향을 잃고 생의 언저리를 헤메는 우리들을 향한 그의 큰 연민 가운데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앞선 스님의 차를 따라 그가 이끄는 명상센터(Medi tation Center)에 다다랐다. 초겨울이지만 고도가 높은 이 지역은 칼바람이 매섭다.
“제법 춥네요, 스님.” 스님은 시종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스토브 앞에서 뭔가를 조리하신다.
“좀 드세요. 속이 따뜻해질 거예요.”
속 깊은 사발에 내온 음식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김이 길에서 헤매는 사이, 얼어붙은 몸을 덥혀준다. 앗! 만두다. 야채로 속이 채워진 교자에 브로콜리를 더해 끓인 만둣국을 먹고 나니 비로소 온 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기 시작한다.
스님의 거처이자, 도반과 제자 등 길손들이 찾아올 때면 게스트룸, 부처님을 모셔 놓은 절, 명상에 입문하고자 하는 이를 위한 명상수련장으로까지 두루두루 쓰이는 공간을 휘 돌아본다. 한국 산수화, 사군자화, 색동 방석 등 그와 한국이란 나라의 긴 인연을 엿볼 수 있는 물증들이 곳곳에서 존재감을 발하고 있다. 이곳 저곳을 헤매던 시야가 부엌 냉장고 위에 멈춘다. ‘결명자의 효능’이라는 한국어 인쇄물이 한복 입은 커플 인형 마스코트 매그냇으로 고정돼 있는 것이 마냥 정겹다. 그 옆으로는 너구리 면 한 박스가 보인다. 누구든 이곳을 찾은 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한 스님의 가슴 따뜻한 배려이리라.
불교국가인 스리랑카 중심부, 유명한 보리수나무가 있는 ‘아누라다부라’에서 평범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혜월스님. 그는 과연 어떤 인생여정을 통해 한국 선불교와 인연을 맺게된 것일까. 짙은 피부색, 시원스런 이목구비에도 불구하고 스님에겐 노랑색 남방불교의 승복이 아닌 한국식 잿빛 승복이 퍽 잘 어울린다. 구산스님이 내려준, 혜월(慧月, Hyewol) 스님이라는 법명을 이곳 미국에서까지 고집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스님. 한국 선불교에 매료돼 송광사 국제선원에서 수행 정진했던 그는 20년째 서구세계에 한국선의 우수성과 수행법을 지도하고 있는 전법사이기도 하다.
불교집안에서 자라나긴 했어도 소년 시절의 그에게 남달리 종교적인 면모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20대를 코앞에 둔 아름다운 나이, 태어나 처음으로 맥주를 마셔보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마냥 즐거웠던 그에게 삶의 뿌리를 뒤흔드는 혁명적 사건이 일어난다.
1979년 12월, 19세였던 그는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로부터 그의 마을을 방문한 데바난다(K. Devananda) 스님과 조우한다. 언뜻 보기엔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는 왜 사람들이 이처럼 복잡하게 살아야할까, 좀 더 평화로운 삶은 단지 꿈인 걸까, 하는 질문들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이런 의문을 갖고 있던 그에게 데바난다 스님은 인생의 목적을 묻는 질문으로 법문을 시작했다. 본래 우리들의 영혼을 오랜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은 긴 연설보다, 심장을 꿰뚫는 한 마디 질문이다. 데바난다 스님의 질문을 접하고 법문을 들으며 그는 가슴이 탁 트이는 경험과 함께 이제껏 알던 것과 전혀 다른 방식의 삶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렇게 청년기에 들어선 혜월스님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데바난다 스님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의 수행처가 있는 콜롬보로 되돌아갔다.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스승과 제자의 해우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혜월스님은 데바난다 스님이 계신 사원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7시간이나 떨어진 콜롬보로 스승을 찾아갔다. 그로부터 4개월 동안 콜롬보의 사원에서 스승과 함께 시간을 보낸 뒤, 그는 망설임 없이 출가를 결심하고 계를 받는다. 스리랑카에서의 법명은 ‘마음 착한 이의 행복’이란 뜻의 수구나난다(Sugunananda)였다.
그는 콜롬보에서 2년간의 불교과정을 마쳤다. 이로써 그는 불교 철학과 경전을 두루 섭렵한 교학적 이해 위에,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등의 출중한 어학실력까지 고루 갖추게 된다. 위파사나는 물론 선에도 조예가 깊었던 데바난다 스님은 그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남방과 북방의 수행법을 동시에 가르쳤다. 이때 처음 북방불교의 선을 접한 혜월스님에게 선불교는 점차 깊은 의미를 갖게 된다.
승가대학을 마친 그는 스리랑카를 떠나 동남아시아 각국을 무대로 불법공부를 시작한다. 타일랜드의 수도원에서 2년간 기거하며 수도와 명상에 깊이 빠져들었던 그는 이어 홍콩 랑따오 섬의 중국식 사원, 볼린지 템플에서 중국인 스승과 함께 1년을 정진했고 타이완에서도 또 다른 한 해를 보냈다.
혜월스님이 처음 계를 받을 때만 해도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이라는 곳과 이토록 깊은 인연을 맺게 될줄, 어디 짐작이나 했었을까.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랄 때 온 우주는 그 소망이 실현되도록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재배치를 시작하는 법. 데바난다 스님으로부터 처음 선을 접한 이후 선에 관심을 갖고 수행을 계속하던 혜월스님은 홍콩에서 만난 영국인 스님으로부터 선을 깊이 있게 배우고 싶다면 한국 송광사로 가보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1983년 6월, 그는 구산스님을 찾아 순천 송광사 국제선원에 첫발을 내딛었다. 경애하는 스승에 대한 추억을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구산스님은 매우 고매한 정신세계를 갖고 계신 분입니다. 국제선원의 수행자들은 구산스님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죠. 스님은 제자들을 진정으로 아끼고 챙기셨어요.”
구산스님은 그를 앞에 두고 선문답을 시작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냐?”
“마음입니다.”
“그래, 그러면 이제 너를 혜월(慧月)이라 부르겠다.”
스승과의 만남은 아름다운 기억이었고 가슴 벅찬 도전이었지만, 법명과 화두를 던져준 구산스님은 그가 송광사로 건너간지 6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갑작스럽게 입적하셨다. 당시 수행자들의 본보기이자 선지식이던 구산스님의 입적은 혜월스님을 비롯한 국제선원 수행자들의 존재를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혜월스님은 ‘목에 칼이 들이온대도 수행을 멈춰서는 안된다’는 스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며 부지런히 정진을 계속했다. 요즘도 혜월 스님은 마음밭의 끈이 느슨해지려 할 때면 ‘편하게 먹고 입으려 출가한 것이 아니라 일대사본문을 깨우치기 위해 출가했음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된다.’던 스승 스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지곤 한다.
당시 송광사 국제선원에서 함께 수행하던 수도자들은 하나같이 진지했다. 도반들의 뜨거운 열기와 평화로운 사찰 분위기는 혜월스님을 매료시켰고 그의 영혼에 수많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동안거, 하안거 기간 동안 머리 싸매고 오직 수행에만 용맹정진하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그의 영혼에 탄력을 주는 귀한 자산들이다.
비록 한국선불교에 매혹돼 제발로 찾아온 한국 땅이었지만 문화적 차이와 생소한 이국생활은 커다란 갈등의 이유가 됐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온 그에게 있어 한국의 겨울은 견디기 힘들 만큼 추웠던 것. 게다가 새벽에 일어나 얼어붙은 김치조각과 익숙치 않은 음식을 앞에 대할 때면 수행이란 것이 끝없이 어렵게만 보였다. 다리에 쥐가 나도록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참선의 시간들도 고역이긴 마찬가지였다. 함께 수행하면서 혼자라는 생각 역시 그를 많이 힘들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경하기만 한 언어도 문제였다.
처음엔 배우지 않으려 했는데 선불교의 깊은 세계에 빠져들수록 한국어를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단 공부를 시작하고 보니 도반들 중 누구보다 배움의 속도가 빨랐다. 수업을 따로 받지 않고 연세 한국어학당의 교재를 구입해 혼자 독학을 했는데 출가 전,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 타이어에 팔리어 산스크리어까지 이미 공부했던 내공이 있었던 지라 또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어렵잖았던 것이다. 그때 공부했던 한국어 사전을 그는 지금까지도 소중히 책꽂이에 간직하고 있다.
송광사에 계시던 한국인 스님들은 한 마디라도 더 배우려는 그의 학구열에 감동,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배우려 했던 뜨거운 열정이야말로 스스로를 발전시켰던 원동력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 한국어를 배우고 나니 의문 나는 것에 대한 질문도, 의견교환과 논쟁도 그렇게 명쾌할 수가 없었다.
스님과 공, 명상 등에 대한 말씀을 한두 마디 나누며 그의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표현력에 감탄한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명상이란 ‘예술적인 삶(Artful living)’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맞다. 그 어느 책에서도 접하지 못했던, 명상에 대한 기막힌 정의에 가슴이 전율이 인다. 그는 또 명상이란 마음의 실체를 이해하고 삶의 모든 문제들을 평화롭게 처리해 나가는 과정이라 말한다. 이 또한 시험을 대비해 요점 정리를 뽑아준 것처럼 핵심을 찌르는 표현이다.
“경험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해요. 사람들의 경험은 기쁜 경험, 슬픈 경험,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경험 등 한계가 있지만 그 경험에 대한 인식은 끝이 없죠. 그 경험들에 대해 언어라는 도구를 빌어 설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같은 경험이지만 긍정적으로 할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할 수도 있고 한 마디로 끝날 수도 있고 책 2권을 쓸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인식, 생각, 느낌, 이런 것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래서 공한 것이죠. 바로 여기에서 지금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에 집중해보세요. 이를 더 강하게 느끼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만약 당신이 고통당한다면 해탈한 것이 아니에요. 죽는다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건 아니죠. 머리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경험하려는 열정으로 삶을 알아간다면 순간순간 깨어 있으면서 모든 순간을 바라볼 수가 있을 거예요.”
구산스님의 뒤를 이어 송광사를 이끈 일각스님의 지도 하에 송광사 선방에서 일곱차례의 안거를 마친 스님은 오스트레일리아 불자 지식인들의 모임인 불교소사이어티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2년 동안 참선을 지도한 후 송광사로 되돌아갔다.
불교의 다른 전통을 공부하고 싶다는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인도의 아난다 마르가 그룹에 대한 연구에도 적잖은 시간을 투자했다. 인도에서 가장 큰 수행 및 봉사 단체인 아난다 마르가 그룹은 구도와 봉사를 동일한 비중으로 강조하는 활동적인 단체. 깨달음의 수위가 깊을수록 자연스레 연민의 행위로 연결됨을 알고 있는 그에게 이 그룹은 선의 궁극적 해답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여 후, 스님은 LA 관음사의 주지 도안스님의 요청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다. 관음사의 청년회 지도법사로서 한국말을 못하는 현지인과 교포 2세들을 상대로 참선을 지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츰 그는 이 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바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알려주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미국에서 보낸 약 20년 생활 동안 그가 해온 일들은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에게 불법과 명상을 알리는 일로 요약된다. 때로 그 일은 선불교잡지를 펴내거나 책을 발행하는 것일 때도 있었고, 방송 출연인 시절도 있었으며 대학에서의 강의이기도 했다. 개인지도이든, 그룹지도이든 그저 인연을 따라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세상과 나눌 뿐이다.
스님은 1990년대 초, LA의 선랜드(Sunland) 지역에 개원한 ‘불교 명상센터(Buddhist Meditation Center)’에서 한국 불교의 전통을 알리기 시작했다. ‘위파사나’ 명상과 함께 참선, 붓글씨, 다도 등을 소개했는데 이에 대한 미국인 불자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배움에 열심이었다.
명상과 불교문화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은 스님으로 하여금 선랜드 지역 케이블 TV 방송에 참여할 기회를 갖게 했다. 약 2년간의 방송참여로 선랜드 지역의 불심은 후끈 달아올랐고 빠른 속도의 불교 포교가 이루어졌다.
그 후 스님은 선밸리로 옮겨 본격적으로 미국인들을 위한 명상그룹을 시작했다. 부처님오신 날이면 15~20명의 미국인들이 계를 받고 불자가 될 만큼 제자 농사는 풍년을 이루었다.
2005년에는 선밸리를 떠나 현재 그의 명상센터가 있는 페어블라섬 시로 옮겨왔다. 2명의 미국인 제자가 3에이커의 대지를 구입해 스님에게 헌사하면서 명상 수련원을 열자고 한 제안을 받아들여서다.
뒤쪽으로는 야트막한 산이 둘러싸여 있고 사방에 야생화가 만발한 대지를 바라보면 숨통이 확 트여온다. 명상센터는 침실 3개, 화장실, 거실, 부엌을 갖추고 있는데 여름철이면 앞의 널찍한 열린 공간에서 20여 명이 함께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수련을 하기에도 딱이다. 실제 25명 정도가 참가한 일일 명상 수련회가 벌써 4차례 이상 이곳에서 열렸다고. 스님은 앞으로 이 장소를 평범한 사람들이 주말에 방문해 함께 머물며 명상하는 곳으로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최근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불교를 배우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선랜드와 선밸리 명상센터에서부터 함께 해온 제자들이 불교 공부 모임을 주최하면 스님은 언제든, 어디든 찾아가 참선을 지도하고 불법을 전해준다.
“미국인들은 사실 불교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고 불안, 고통 등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해요. 그래서 미국인들에게 불교를 전파할 때는 어떻게 마음을 관리할 수 있는가를 우선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음 관리 법을 알게 되면 차츰 불교 문화 일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죠.”
가족 문제 등 매일 반복되는 생활 속의 고통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참선과 붓다의 가르침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하면, 깊이 있는 정신적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를 위해 명상과 불법을 알기 쉽게 소개하는 영어 소책자도 2권 썼다.
페어블라섬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도 일주일에 한 차례씩 명상모임을 계속해왔다. 미국인 제자 하나가 제공한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약 15명 정도가 모이고 있다. 누구든지 나와 조용히 참선하고 삶의 문제를 얘기하며 마음을 비우고 가는 자리이다.
그 외에도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웨스트우드에 있는 명상센터(1404 Greenfield Ave. Westwood.)에서 명상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는가 하면 헐리웃, 로스펠리츠 등지를 다니며 명상법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산타 크라트리아에서도 격주마다 명상 클래스를 가르치고 있으며 노스캐롤라이나 등 캘리포니아 외의 지역에서 2박 3일 정도의 일정으로 열리는 명상수련회에도 지도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가끔씩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불교에 대한 강의를 부탁해오면 그것 또한 기쁜 마음으로 해준다.
그렇게 명상클래스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와 불안감과 우울증을 명상으로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얘기를 해올 때마다 스님의 가슴 역시 환희로 물든다. 스님과의 대화가 절실해 먼 거리 마다 않고 직접 거처로 찾아오는 사람들과 차 마시고 대화하고 참선하느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저문다.
스님은 미국인 제자들 가운데 법사가 배출돼 그들의 언어로 미국인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날을 꿈꾸고 있다. 단지 막연한 바램이 아니라 현재 4~5명의 제자들이 법사가 되기 위한 집중 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소수 정예부대인 이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들. 이들에게는 명상뿐만 아니라 금강경 등 불교경전 교육도 함께 병행하고 있다.
스님은 자신이 전하는 불교를 ‘생활불교’라 말한다. 스리랑카에서 출가를 하고 승가대학을 다녔으니 남방불교로 시작하긴 했지만 동남아에서는 북방불교(대승불교)를, 그리고 송광사 국제선원에서 지낸 7년 동안은 한국 선불교를 공부했으니 그의 내부에서 두루 두루 둥근 법의 실체는 더욱 구체화되었을 터.
“한국 선불교에 진 빚이 가장 크지만 스리랑카, 타일랜드, 중국 불교에서 역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지역은 달라도 결국 부처님의 말씀은 ‘마음의 지혜를 얻는 법’, 그리고 ‘자비행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법’이라는 두 가지 교훈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가르치고 있는 것 역시, 불교적 세계관을 통해 실생활에서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전 한 가지 종파에 제한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미국인들이 ‘스님이 전하는 불교가 어떤 것입니까? 한국 불교입니까, 스리랑카 불교입니까?’라고 물어오면 ‘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와서 들어보고 당신이 어떤 불교인지 결정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수행을 지도할 때엔 가르치는 사람과 경우에 따라 위파사나와 간화선 두 가지 방법을 모두 사용한다. 위파사나는 호흡을 바라봄으로써 삼매에 드는 선이고 간화선은 화두 명상이라 말할 수 있다. 방법이 다르지만 마음을 수련한다는 목적에 있어선 차이가 없다. 위파사나 수련을 하든, 간화선을 하든, 두 가지를 병행하든,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같다. 편안한 마음과 기쁨을 얻는 것, 깨달음에 이르는 것, 삼라만상을 버리고 마음의 평화와 지혜를 얻는 것, 성 안 내는 마음을 갖는 것,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 선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저 역시 두 가지 방법을 번갈아가며 수행해요. 요즘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스스로에게 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명상을 계속하다 보면 현재 내 삶의 위치를 알게 되지요.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기쁘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혜롭게 현재 내 앞에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라 생각됩니다.”
“처음 스님이 됐을 때의 목적과 지금 스님으로 생활하면서의 목적에도 많은 차이가 생겼어요. 처음에는 내가 나를 알고, 지혜를 얻기 위해 공부를 했었는데, 지금은 내가 알고 배운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소승에서 대승으로 가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사실은 그 구분조차도 옳지 않은 것이지만요. 지혜의 깨달음이 가득 차면 자연스럽게 자비의 행위가 나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선방에서 묵언정진하면서도 오직 자신만을 위해 하는 수행자들, 많습니다. 대승불교에서도 소승의 마음을 갖고 있는 셈이잖아요.”
스님에게 한국은 스리랑카와 함께 고향과 같은 곳. 매 2~3년마다 한 차례씩 한국과 스리랑카를 2주 정도의 일정으로 방문해 도반스님들을 만나고 온다.
“난 한국 스님들과 한국불교에 빚진 바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 스님들이나 한국 불자들이 오시면 언제나 이 거처를 내어드리는 것도 그 작은 보은의 몸짓이라 할 수 있고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경전 읽고 예불 올리고 명상하고 제자들 가르치다 보면 어느새 하루 해가 서쪽 하늘에 걸려 있다. 그러면 다시 예불하고 명상하고 잠자리에 드는 일과의 반복이지만 그 가운데 스님은 매 순간순간 깨어 있고 행복하게 살아가신다.
한국에서 오랜 기간을 살아온 내공이 있어서일까. 가장 좋아하는 한국음식을 물으니 된장찌개라 답하며 함박웃음이다. 호박 두부 송송 썰어 넣고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로 공양을 올리는 인연이 허락된다면 오늘 받은 따뜻한 만둣국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2010. 12>
▶ 13575 E- Ave. W13, Pearblossom, CA 9355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