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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
顯宗改修實錄
시대 | 조선 |
창작/발표시기 | 1683년 |
성격 | 실록 |
유형 | 문헌 |
권수/책수 | 28권 29책 |
분야 | 역사/조선시대사 |
요약 조선후기 제18대 왕 현종의 재위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현종실록』을 수정한 실록.
내용
28권 29책. 인본(印本). 정식이름은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개수실록(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改修實錄)’이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 판교(判校) 정감(鄭勘)의 건의로 실록개수청(實錄改修廳)을 설치하고 개수에 착수하였다.
즉, 3년 전에 편찬된 『현종실록』이 왕의 독촉으로 불과 서너 달 만에 급급히 편찬되어 기사에 착란(錯亂)·소략(疎略)한 부분이 많고, 또 남인 주도로 편찬했기 때문에 서인에 대해 편파적으로 기술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실록청은 대체로 실록 전체의 편찬을 담당하는 도청(都廳)과 시정기(時政記)를 산절(刪節)하는 1·2·3방(房)으로 조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현종실록개수청은 현종대의 시정기가 『현종실록』 편찬 당시 세초(洗草)되어 남아 있지 않으므로 1·2·3방을 설치하지 않고, 다만 도청의 당상(堂上)·낭청(郎廳)만 임명하였다.
이들은 사관(史官)의 가장사초(家藏史草)와 『승정원일기』·『비변사등록』·『추국일기 推鞫日記』 및 기타 각사(各司) 기록 등을 참고로 개수실록을 편찬해 3년 만인 1683년에 완성하였다.
편찬에 관여한 실록청 관원은 다음과 같다. 총재관(摠裁官)은 김수항(金壽恒), 도청당상은 이단하(李端夏)·신정(申晸)·이민서(李敏敍)·이익상(李翊相)·김만중(金萬重)·이선(李選), 도청낭청은 신완(申琓)·김진구(金鎭龜)·심수량(沈壽亮)·심유(沈濡)·이세백(李世白)·이숙(李塾)·신엽(申○)·박태보(朴泰輔)·권두기(權斗紀)·이사영(李思永)·임영(林泳)·박태보(朴泰遜)·오도일(吳道一)·이여(李畲)·서종태(徐宗泰), 등록낭청(謄錄郎廳)은 윤세기(尹世紀)·이굉(李宏)·한구(韓構)·김구(金構)·윤덕준(尹德駿)·조형기(趙亨期)·김호(金灝)·유득일(兪得一)·이선부(李善溥)·강석규(姜錫圭)·권항(權恒)·김절(金晢)·이동욱(李東郁)·이율(李嵂)·이언강(李彦綱)·유명일(兪命一)·김만길(金萬吉)·권지(權持)·정제선(鄭濟先)·고익형(高益亨)·정상박(鄭尙樸)·윤홍리(尹弘离)·이직(李溭)·임환(林渙)·양중하(梁重廈)·심평(沈枰)·황흠(黃欽)·조석주(趙錫胄)·정추(鄭推)·신명원(申命元)·김시휘(金始徽)·신계화(申啓華)·박세전(朴世𤎱)·이삼석(李三碩)·최석항(崔錫恒)·최규서(崔奎瑞)·윤지익(尹之翊)·서종헌(徐宗憲)·이이명(李頤命)·김우항(金宇杭)·양성규(梁聖揆)·김홍정(金弘楨)·유명웅(兪命雄)·김홍복(金弘福)·이덕성(李德成)·박태유(朴泰維)·김일성(金日省)·홍수헌(洪受瀗)·심권(沈權)·윤세희(尹世喜)·이두악(李斗岳)·이정겸(李廷謙)·김덕기(金德基) 등이다.
이 개수실록도 『현종실록』과 마찬가지로 현종 재위 15년 4개월 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담았다. 부록 1책에는 개수된 현종의 행장·애책문(哀冊文)·시책문(諡冊文)·숭릉지(崇陵誌)를 수록하였다.
따라서 개수실록은 『현종실록』과 함께 현종대의 사실(史實)은 물론, 조선 후기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 근본적인 자료의 하나가 된다. 1920년대 이후 조선 역대왕(태조∼철종)의 실록이 몇 차례 영인될 때, 이 실록도 함께 간행되었다.
1992년에 모두 9권의 번역본 『현종개수실록』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출간하였고,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번역본과 원문을 공개하고 있다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8월 21일 을사 1번째기사 1670년 청 강희(康熙) 9년
좌의정 허적이 공주 저택의 건축을 중지하도록 아뢰다
원문
.원본 보기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고 국가의 존망이 결판났습니다. 신이 밤중에 생각해 보니, 성상의 어질고 후덕하심이 결코 망국의 임금이 아니며, 신들도 볼품없으나 어찌 망국의 신하이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울먹이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또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백성이 모두 죽는다면 국가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하시면서, 이로써 자책하시고 또한 신들을 채찍질하여 격려하신다면 거의 가망이 있습니다만, 요즈음의 조처를 가만히 살펴보건대 크게 그렇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공주의 저택을 두고 말하더라도 그 전에 지은 것도 이미 제도에 지나쳤는데 숙경 공주(淑敬公主)의 저택을 이런 때에 새로 짓기까지 한다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더구나 병조가 역가(役價)로 갚아준 베가 30동(同)에 이르고 호조의 미곡도 이에 맞게 들어갔는데, 이것으로 구제를 하였다면 백성이 받는 혜택이 어찌 적었겠습니까.
옛날 우리 선왕께서는 자문(紫門)의 터에 만수전(萬壽殿)의 담장을 뒤로 물려 쌓으려고 하면서도 난처하게 여기시어 조정 신료들에게 물어 모두 옳다고 말한 뒤에야 넓혔는데 하물며 공주의 저택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숙휘 공주(淑徽公主)의 집터는 비록 공공의 땅이라고는 하나 철거시킨 집이 많았고, 숙경 공주의 집터에 있어서는 바로 여염의 소유입니다. 개인적으로 서로 계약하여 사들였다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어떻게 어디서 어디까지 널리 점령하고는 억지로 사들일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대원군 사우(大院君祠宇)의 앞이 매우 좁았는데 근처에 감종친(監宗親) 집의 빈 터가 있었습니다. 선조(宣祖)께서 5, 6칸[間]의 땅을 사려고 여러번 별감을 시켜 달랬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합니다. 사우란 지극히 중요한 것이고 그 땅은 매우 적은 것이었는데도, 선조께서는 억지로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 진안위(晋安尉)의 집을 짓기 위해 사대부의 집터를 사려고 하였는데, 옛날부터 전해온 터라고 거절하자 마침내 사헌부의 옛터에다 지었습니다. 그것도 그 앞에 한 채의 상놈 집이 있었는데, 시끄러움을 방지하기 위해 앞쪽의 담장을 높이 쌓도록 하였습니다. 인조께서도 잠저(潛邸)에 계실 때 옹주의 집을 찾아갔는데 터가 너무 좁은 것을 민망히 여겨, 즉위하신 뒤에 공공의 땅을 배로 주고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는 모두 근대의 일입니다. 이번 공주 저택의 집터를 상께서 자세히 모르시고 이렇게 억지로 사들인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 선왕(先王)께서 여러 신료들에게 의논하여 네 궁을 인경궁(仁慶宮) 옛터에 지어 주셨으나, 편히 살 수가 없어 이번의 역사가 있게 된 것이다. 하나의 저택을 다시 짓는 폐단이 과연 어떠한가? 완원군(完原君)과 한산백(韓山伯)의 사우가 있다는 말은 대간의 계사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인경궁의 옛터에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면 성상의 동기간의 지극한 정리로 어찌 다시 지어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숙휘 공주의 집터는 인가를 철거시킨 것이 매우 많았으나 그래도 그곳은 공공의 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숙경 공주의 집터는 억지로 사들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모두 ‘나라가 망하지 나라가 망하지.’ 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완원군은 바로 성종(成宗)의 왕자입니다. 어찌 현 공주의 저택 때문에 옛 왕자의 사우를 철거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성덕에 크게 누될까 두렵습니다. 한산백 이색(李穡)은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친구로서 대단한 은총을 받았는데, 지금 그의 화상이 있는 사우가 그 속에 들어있으며, 인목(仁穆)·인렬(仁烈) 두 왕후와 왕대비는 모두 한산백의 후예입니다. 어떻게 공주의 저택을 짓기 위해 그의 사우를 철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터는 쓸 수 없는 형편이구나."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부득이 하여 빚어진 일이었으나 곡절을 자세하게 아신 뒤에 이렇게 쓰지 않겠다는 하교가 계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73면
· 【분류】
역사-전사(前史) / 재정-국용(國用) / 왕실-국왕(國王) / 농업-농작(農作) / 주생활-가옥(家屋) / 구휼(救恤) / 군사-군역(軍役)
○乙巳/上引見大臣、備局諸宰。 左相許積進曰: "饑饉之慘, 八路同然, 民事罔極, 存亡已決。 臣中夜思之, 聖上仁厚, 決非亡國之主, 臣等雖無狀, 亦豈亡國之臣哉。" 因嗚咽不能言。 又曰: "自上若曰: ‘百姓皆死, 國何以存’, 以此自責, 而亦以策礪臣等, 則庶乎其可矣, 而竊觀近日擧措, 大有所不然者。 雖以主第言之, 前者所搆, 固已過制, 而至於淑敬公主之第, 此時新創, 尤甚未安。 況兵曹償役之布, 已至三十同, 戶曹之米, 稱此以入, 以此賑救, 則民之蒙惠, 豈其少哉。 昔我先王, 欲於紫門之基, 退築萬壽殿墻垣, 而猶以爲難, 問于廷臣, 皆曰可然後拓之, 況於主第乎。 淑徽家基, 雖曰公基, 尙多毁撤之家, 至如淑敬家基, 乃閭閻也。 私相約買猶可, 豈有從某至某, 廣占抑買之理哉? 臣聞大院君祠宇之前甚窄, 近處有監宗親家空基。 宣廟欲買五六間之地, 屢使別監諭意, 而終不聽從。 祠宇至重, 其地至少, 宣廟猶不欲抑買。 且爲營造晋安尉家, 欲買士夫家基, 而辭以故基, 遂於司憲府舊址營之。 而前有一常漢家, 避其喧擾, 高築前墻。 仁祖潛邸時, 往拜翁主, 悶其迫隘, 卽位後, 倍給公基, 換以賜之。 此皆近代事也。 今者主第基址, 自上或未詳形勢, 而有此抑買之擧耶?" 上曰: "昔者先王, 議于諸臣, 營給四宮於仁慶故基, 而不得安接, 又有此役。 一第再營之弊, 果如何也。 至於完原君、韓山伯祠宇之說, 於臺啓始知之矣
積曰: "仁慶故基, 旣不得安接, 則在聖上同氣之至情, 豈不欲更爲營給乎? 第淑徽家基, 人家當毁之數極多, 而猶是公基。 今此淑敬家基抑買之事, 聞者莫不驚駭, 皆曰: ‘國亡國亡。’ 且其所謂完原君, 乃成廟王子也。 豈可以今公主之第宅, 而毁撤故王子之祠宇乎。 誠恐大有累於聖德也。 韓山伯 李穡以太宗大王故人, 極被恩遇, 而今其畫像祠宇, 混入於其中, 仁穆、仁烈兩王后及王大妃, 俱是韓山伯外裔。 亦安可爲營主第, 而毁其祠宇乎?" 上曰: "此基勢將不可用矣。" 積曰: "當初雖出於不得已, 旣詳曲折之後, 有此不用之敎, 誠可幸也。"
현종개수실록 23권, 현종 11년 8월 21일 乙巳 1번째기사 1670년 청 강희(康熙) 9년
여러 신하와 공주의 집 건축 문제를 논의하다
국역
원문
.원본 보기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금년의 흉황은 신축년에 비하여 배나 심합니다. 신축년에는 양남(兩南)이 큰 흉년이 들었다고는 하나 전남좌도는 완전히 흉년이 들지는 않았고 양서(兩西)는 자못 농사가 되었기 때문에 관서(關西)의 곡식 10여 만 석을 운송하여 다른 도의 굶주린 백성들을 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팔도가 모두 흉년이 들어 다시 옮길 곡식이 없습니다. 신들은 재주와 지혜가 짧아 구제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상께서야 또한 어찌 백성들이 다 굶주려 죽게 되었음을 아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인후하시니 결코 나라를 망칠 임금은 아니시며, 신들이 비록 보잘것은 없으나 또한 어찌 어쩔 수가 없다고 내버려 두고서 망해가는 것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지금 한두 가지 앙품하여 변통할 일이 있는데, 공주의 집을 짓는 일을 가지고 전하를 위하여 먼저 진달하겠습니다. 근래에 공주의 집을 짓는 일이 매우 제도를 벗어나는데, 전일에 지은 것은 이미 말할 것도 없겠으나, 숙경 공주의 집은 이러한 시기에 새로 짓는 것이니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병조의 역포(役布)가 이미 30여 동에 이르렀고 호조의 쌀도 그만큼 들여갔습니다. 이것으로 진구를 한다면 백성들이 받는 혜택이 어찌 적겠습니까. 옛날 우리 선왕께서는 자문(紫門)의 터에 만수전(萬壽殿)의 담장을 물려 쌓으려고 하면서도 오히려 어렵게 여겨 조정 신하들에게 물어서 모두가 가하다고 한 뒤에야 넓혔는데, 하물며 공주의 집이겠습니까. 숙휘 공주의 집터가 비록 공기(公基)라고는 하나 그래도 근처의 집을 많이 철거하였고, 숙경 공주의 집터는 바로 여염입니다. 서로 약정하여 매매를 하지 아니하고 아무의 집에서 아무의 집까지 널리 점유하여 강제로 사들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은 들으니,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사우(祠宇)의 앞이 아주 좁았는데, 근처에 감종친(監宗親) 집의 빈터가 있어 선조(宣祖)께서 5, 6칸의 땅을 사들이고자 하여 누차 별감을 보내어 타일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우는 아주 중요한 것이고 그 땅은 아주 작은 것이었는데도 선조께서는 강제로 사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안위(晉安尉)의 집을 짓기 위하여 사대부의 집터를 사들이려고 하다가, 예로부터 물려내려오는 집터라고 하면서 거절을 하자, 드디어 사헌부의 옛터에 집을 지었는데, 앞에 상놈의 집이 하나 있자 그 시끄러움을 막기 위해 앞 담장을 높게 쌓았습니다. 인조께서 잠저에 계실 때에 옹주(翁主)에게 인사를 갔다가 그 집이 좁은 것을 민망히 여겨, 즉위한 뒤에 배로 공기(公基)를 지급하고 바꾸어서 하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근대의 일입니다. 오늘날 공주의 집터에 대해서 상께서 혹 형세를 자세히 모르셔서 이렇게 강제로 사들이는 일이 있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선왕께서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하여 네 궁(宮)을 인경궁(仁慶宮) 옛터에 지어주었으나 편안히 살 수가 없어서 또 이번 일이 있게 된 것이다. 하나의 집을 다시 짓는 폐단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완원군과 한산백의 사우에 대한 말은 대간의 논계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인경궁의 옛터가 이미 편히 살 수 없는 곳이라면 성상의 동기에 대한 정리로 볼 때 어찌 다시 지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번 숙경 공주의 집터를 강제로 사들이는 일은 듣는 자들이 놀라지 않는 자가 없으며 모두들 나라를 망하게 할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완원군은 바로 선조(宣祖)의 왕자입니다. 어찌 지금 공주의 집을 지으려고 옛 왕자의 사우를 철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한산백 이색은 태조 대왕의 친구로서 은혜와 대우를 아주 많이 받았는데, 지금 그의 화상(畵像)과 사우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인목(仁穆), 인열(仁烈) 두 왕후 및 왕대비가 모두 한산백의 외손인데, 어찌 공주의 집을 짓기 위하여 그 사우를 철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어찌 굳이 그 터에다가 짓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비록 부득이한 데에서 나왔으나 이미 그 곡절을 자세히 아신 뒤에 그곳을 그대로 쓰지 않으신다면 이것 또한 성덕의 일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형혹성이 남두성으로 들어갔는데, 이것은 예사롭지 않은 재변입니다. 일찍이 계미년·갑신년에 이 재변이 있었는데 심기원(沈器遠)이 원훈(元勳)으로서 반역을 하였습니다. 중국의 일로 말하더라도 나라가 망하는 것이 모두 그 응험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해에 또 이런 재변이 일어나 어좌(御座)를 범하였으니, 더욱 놀랍고 해괴하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근래에 백성들이 수없이 죽는데, 얼핏 들으니 연천(漣川) 아문 안에서 강도의 재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장리(長吏)를 죽이고 관고(官庫)를 터는 일이 일어날 조짐입니다. 서울의 백성들도 허둥지둥 겨를이 없어 아침 저녁도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강도(江都)의 쌀을 어찌 군향이라고 하여 아낄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어제 수상을 만나 상의를 하였더니, 그도 ‘공물주인(貢物主人)에게 단지 은포(銀布)만 지급하고 미곡을 지급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들 원망한다. 지금 만약 강도의 쌀을 옮겨다 지급하고 그 은포는 각 아문에 나누어 보관하였다가 풍년이 들면 곡식으로 바꾸어서 그 원래의 쌀을 보상한다면 편리하고 합당할 듯하다. 그리고 1만 석을 값을 낮추어 서울에서 팔되 호(戶)의 대소를 나누어 차등을 두면 도성 안의 굶주린 백성들이 조금은 구제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의 군량이 비록 중요하기는 하나, 달리 어떻게 해볼 방책이 없는데, 어찌 이러한 때에 도리어 아깝게 여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강화 유수 이완(李浣)은 병으로 부임하기 어려우니 체직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장단 부사(長湍府使) 이간(李旰)은 집이 경내에 있으니 또한 부임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모두 체직을 허락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1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농업-농작(農作) / 건설-건축(建築) / 주생활-가옥(家屋) / 재정(財政) / 사법-치안(治安) / 군사-병참(兵站) / 구휼(救恤) / 인사-임면(任免)
○乙巳/上御養心閤, 引見大臣及備局諸宰。 左相許積曰: "今年凶歉, 倍於辛丑。 辛丑則兩南雖曰大無, 而全南左道, 則不至全失, 兩西頗熟, 故運關西穀十餘萬石, 以賑他道飢民。 今則八路同然, 更無移粟之勢, 臣等才智淺短, 罔知攸濟。 上亦豈知民生之將至於靡有孑遺耶? 殿下仁厚, 決非亡國之主, 臣等雖無似, 亦豈諉於無可奈何, 而坐視垂亡乎? 今有一二事, 仰稟變通者, 而請以主第事, 爲殿下先陳焉。 近年主第營作, 殊甚過制, 前日所營者, 已不須言, 而至於淑敬公主之第, 此時新創, 尤極未安。 兵曹役布, 已至三十餘同, 戶曹之米, 稱此以入。 以此賑救, 則民之蒙惠, 豈其少哉? 昔我先王, 欲於紫門之基, 退築萬壽殿墻垣, 而猶以爲難, 問于廷臣, 皆曰可, 然後拓之, 況於主第乎? 淑徽家基, 雖曰公基, 尙多傍近毁撤之家, 至如淑敬家基, 乃閭閻也, 不爲私相約賣, 從某至某, 廣占抑買, 寧有此理哉? 臣聞, 德興大院君祠宇之前甚窄, 近處有監宗親家空基, 宣廟欲買五六間之地, 屢使別監諭意, 而終不聽從。 祠宇至重, 其地至少, 宣廟猶不欲抑買。 且爲營造晋安尉家, 欲買士夫家基, 而辭以故基, 遂於司憲府舊址營之, 而前有一常漢家, 避其喧擾, 高築前墻。 仁祖潛邸時, 往拜翁主, 悶其迫隘, 卽位後倍給公基, 換以賜之。 此皆近代事也。 今者, 主第基址, 自上或未詳形勢, 有此抑買之擧耶?" 上曰: "昔者, 先王議于諸臣, 營給四宮於仁慶故基, 而不得安接, 又有此役。 一第再營之弊, 果何如也? 至於完原君、韓山伯祠宇之說, 於臺啓始知之矣。" 積曰: "仁慶故基, 旣不得安接, 則在聖上同氣之情, 豈不欲更爲營給乎? 今此淑敬家抑買之事, 聞者莫不驚駭, 皆以爲亡國之擧。 且其所謂完原君, 廼宣廟王子也。 豈可以今公主之第宅, 毁撤故王子之祠宇乎? 韓山伯 李穡以太祖大王故人, 極被恩遇, 而今其畫像祠宇, 混入於其中。 仁穆、仁烈兩王后及王大妃, 俱是韓山伯外裔, 亦可爲營主第, 毁其祠宇乎?" 上曰: "若然則何必營造於其基也?" 積曰: "當初雖出於不得已, 旣詳曲折之後, 不爲仍用, 則是亦聖德事也。" 積又曰: "頃日熒惑入南斗, 此非常之變也。 曾在癸未、甲申年間有此變, 而沈器遠以元勳叛逆, 以中國言之, 則亦且覆亡, 皆其應也。" 上曰: "今年又出此變而犯御座, 尤可驚駭矣。" 積曰: "近來人民死亡無數, 而似聞, 漣川衙內, 有㤼盜之變。 此, 殺長吏、打官庫之漸也。 都下民人, 亦遑遑汲汲, 莫保朝夕, 江都之米, 豈可以軍餉而惜之耶? 臣昨見首相而相議, 則其意亦以爲貢物主人, 只給銀布, 而不給米穀, 故渠輩皆冤。 今若以江都之米移給, 而以其銀布, 分置各衙門, 待年貿穀, 以償其元米, 則似爲便當矣。 且以一萬石減價, 發賣於京中, 分戶之大小爲差等, 則城中飢餒之民, 可以少救矣。" 上曰: "江都軍餉雖重, 他無可爲之策, 豈可顧惜於此時也?" 積又曰: "江華留守李浣, 病難赴任, 宜遞; 長湍府使李旰, 家在境內, 亦不可令赴任。" 上皆許遞。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1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국왕(國王) / 농업-농작(農作) / 건설-건축(建築) / 주생활-가옥(家屋) / 재정(財政) / 사법-치안(治安) / 군사-병참(兵站) / 구휼(救恤) / 인사-임면(任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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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 제17권 / 묘지(墓誌)
홍문관 교리 이군의 묘지〔弘文校理李君墓誌〕
[DCI]ITKC_BT_0349B_0180_010_0050_2013_005_XML DCI복사 URL복사
인조 12년인 숭정(崇禎) 갑술년(1634)에 상께서 장차 예묘(禰廟)를 추숭(追崇)하려고 할 때, 간쟁한 사람이 잇달아 죄입었다. 당시에 이군 상질(李君尙質)이 홍문관 교리로 있으면서 차자를 올리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다른 사람과는 처지가 다르다. 자네의 외할머니는 연세가 80이 지났는데, 후사가 없어 오직 자네에게만 봉양을 받을 수가 있다. 그러니 자네는 그 점을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러자 군은 말하기를 “직임이 논사(論思)하는 일을 맡고 있는데, 어찌 사정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극력 간쟁하였다. 이에 상께서 진노하여 북도(北道)의 종성(鍾城)으로 유배하라고 명하였다.
그다음 해 가을에 사면을 받아 돌아오게 되었는데, 철령(鐵嶺)을 넘어오다가 회양(淮陽)에서 졸하였다. 실로 그해 10월 5일의 일이었으며, 향년은 39세였다. 이에 사림(士林)이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이거나 간에 모두가 애석해하면서 말하기를 “곧은 신하가 죽었다.” 하였다. 상께서 관작을 회복시키라고 명하였으며, 연로의 군읍으로 하여금 상구(喪柩)를 호송하게 하였다. 파주(坡州)의 고령산(高靈山) 아래에 있는 유향(酉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군은 자가 자문(子文)이고 호가 가주(家州)이다. 성종(成宗)의 셋째 아들인 완원군(完原君) 휘 수(𢢝)가 바로 5대조이다. 고조는 휘가 수강(壽剛)이고, 증조는 휘가 인(仁)이고, 할아버지는 휘가 몽우(夢禹)인데, 모두 종계(宗系)로서 대대로 군(君)에 봉해졌다. 아버지는 휘가 진(瑱)으로, 비로소 사적(仕籍)에 이름이 올라서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대과에 급제한 지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함안 이씨(咸安李氏)는 생원 이성(李晟)의 딸이며, 습재(習齋) 권벽(權擘)의 외손녀이다.
군은 만력(萬曆) 정유년(1597, 선조30)에 탄생하였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15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는데,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는 곡읍하기를 어른과 같이 하였으므로 본 사람들이 기특하게 여겼다.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바로 외할머니의 동생이었으므로 어렸을 적에 석주에게서 배웠는데, 문장이 날로 진보하니 석주가 크게 칭찬하였다. 수몽(守夢) 정엽(鄭曄)이 군의 이름을 듣고는 넷째 딸을 시집보내었는데, 군의 나이 17세 때였으며, 아내의 나이 역시 같았다.
수몽은 유림의 영수였으므로 군은 그에게서 학업을 익혔는데, 경전(經傳)의 여러 서책들을 배워 대의(大義)에 통하니, 수몽이 매우 사랑하면서 ‘나라의 그릇’이라고 칭하였다. 수몽이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나갔을 적에 군과 더불어 가서는 영동(嶺東)의 여러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면서 오대산(五臺山)을 찾아가고 낙산(洛山)에서 놀았으며, 금강산으로 들어가 비로봉(毗盧峯)에 올라 동해를 바라보았다. 장유서(壯游序)와 수창시(酬唱詩)가 있는데, 기운과 품격이 호방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재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바다와 산이 도움을 주었다.” 하였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폐조(廢朝)에서 조정의 정사가 혼탁하자 가솔을 거느리고 춘천(春川)의 산골짜기로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돌밭을 사서 삶을 마칠 뜻을 가졌다. 군이 진취하는 데 급급해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계해년(1623, 인조1)에 반정한 뒤에 비로소 태학(太學)에 들어갔다. 을축년(1625)에 금오랑(金吾郞)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뒤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다. 정묘년(1627) 봄에 북쪽 오랑캐들이 갑자기 쳐들어와 상께서 강도(江都)로 행행하였으며, 세자는 분조(分朝)하여 호남으로 갔다. 그런데 배종(陪從)하는 인원이 지나치게 많은 까닭에 군은 일행에 끼이지 못하였다. 대가(大駕)가 성 밖으로 나가자 공은 땅에 엎드려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평상시에 호위하다가 난리에 임하여 뒤처진다는 것은 의리상 차마 하지 못할 바입니다. 그러니 수행하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께서 그 자리에서 허락하였다.
세자께서 전주(全州)에 머물렀는데, 오랑캐들의 기세가 몹시 급박하자 바다로 들어가자고 의론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군은 상소를 올려 이를 통렬히 배척하였으며, 또 군사를 훈련시키고 곡식을 저축하여 적을 막을 계책을 진달하였다. 이보다 앞서 세자께서 대우해 줌이 특별히 두터웠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또다시 너그러운 답을 내리니, 일행들이 특별한 은혜라고 말하였다. 오랑캐들이 돌아간 뒤에 조정으로 돌아와 시직(侍直)과 위솔(衛率)로 옮겨졌으나, 얼마 뒤에 관직을 버렸다.
기사년(1629) 11월에 정시(庭試)에서 장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때의 시제(試題)가 ‘평치우송(平蚩尤頌)’이었는데, 문장이 매우 기이하고 장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시제와 더불어 잘 맞는다고들 말하였다. 곧바로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 그 뒤에 사간원 정언ㆍ헌납, 병조 좌랑, 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한 다음, 옥당(玉堂)에 천거되어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으며,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11)에 궁궐을 수축하라고 명하자, 군은 상소를 올려 변방의 걱정이 크다는 내용으로 극력 간쟁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대단하다고 하였다. 경시관(京試官)으로서 호남에 갔다. 앞서의 고관(考官)들이 더러 사사로운 정에 구애되었으므로 방(榜)을 내고 난 뒤에는 반드시 뒷말이 있었는데, 군은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하게 하였으므로 선비들이 흡족해하면서 칭찬하였다. 또 암행 어사가 되어 북로(北路)를 안찰하였는데, 어떤 수령이 세력을 믿고 탐오하게 굴었으므로 탄핵하라고 아뢰어 잡아다가 죄주게 하니, 온 도의 기강이 진작되어 엄숙해졌다.
군은 기개가 아주 뛰어났으며, 정직하고 강개하였다. 큰일에 임하여서는 뜻을 빼앗을 수가 없었다. 역적 김자점(金自點)과 친분이 있어 알고 지냈는데, 일찍이 김자점에게 책망하여 말하기를 “공은 의리상 마땅히 나라와 더불어 존망을 같이해야 하는데, 나라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이익만을 도모하니, 나는 어느 곳에서 그치게 될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김자점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는 단지 굽실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 뒤에 김자점이 역적으로서 주벌되었으니,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만하다.
군의 전부인은 정씨(鄭氏)이다. 후부인 강씨(姜氏)는 군수 강위재(姜渭載)의 딸이다. 정씨는 군보다 7년 먼저 졸하였으며, 강씨는 군보다 1년 늦게 졸하였다. 정씨는 부친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워 말과 행실이 모두 규문(閨門)에 합당하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이름이 훤(藼)으로,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훤은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5녀를 두었다. 장남 한익(漢翼)은 현감 남일성(南一星)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다.
나는 군과 한 번 만나 보고는 막역지우가 되어 형제의 의를 맺었는바, 유명(幽明)을 달리한 데 대한 감회가 지금 30년이 되어 간다. 군이 지은 여러 작품들은 모두 범상치가 않았는데, 난리를 겪는 중에 산실되었다. 이에 훤이 유고(遺稿)를 모은 다음 나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청하기에 서문을 지었으며, 또다시 명을 청하기에 드디어 명을 지었다.
명은 다음과 같다.
나이 보면 강사의 때 차지 않았고 / 年不滿疆仕
그릇은 또 낭묘에다 쓰지 못했네 / 器不施廊廟
천도 정말 아는 것이 있는 것인가 / 天道有知耶
어쩜 이리 돌봐 주지 아니했던가 / 何若是之不弔耶
아들 있어 그 업 잇기 족하거니와 / 有一子足承厥業
하나라도 적지 않다 하는 것이네 / 是所謂一不少耶
[주-D001] 권벽(權擘) :
1520~1593. 본관은 안동, 자는 대수(大手), 호는 습재(習齋)이며, 시인 권필(權韠)의 아버지이다.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으며, 시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 및 지제교(知製敎)를 오랫동안 지내며 문한(文翰)을 주관하였는데, 특히 명나라에 오가는 외교문서를 전담하였다. 저서로는 《습재집》 4권이 있다.
[주-D002] 장유서(壯游序)와 수창시(酬唱詩) :
장유서는 《가주집(家州集)》 권5에 〈배빙군장유서(陪聘君壯遊序)〉란 제목으로 실려 있으며, 수창시는 《가주집》에 각 시체별(詩體別)로 나뉘어 실려 있다.
[주-D003] 강사(疆仕) :
40세의 별칭이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이르기를 “40세에는 강건하여서 벼슬을 한다.〔四十强而仕〕” 한 데에서 나왔다.
>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25년 갑인 > 1월 7일 > 최종정보
성종 25년 갑인(1494) 1월 7일(정유)
25-01-07[04] 당령 수군이 역사하는 노고를 감하도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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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傳敎)하기를,
“말하는 자가 여러 번 말하기를, ‘당령 수군(當領水軍)을 여러 군(君)의 집을 영조(營造)하는 데 역사(役使)시키는 것은 매우 미편(未便)합니다.’ 하였는데, 그 뜻이 어찌 ‘이것은 나라의 일이 아니고 곧 군(君)들의 자기 집 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러 군(君)의 집 또한 조성(造成)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팽배(彭排)ㆍ대졸(隊卒)을 그 역사(役事)에 당하여 이바지하게 하였는데, 그 수(數)가 많지 않은 까닭에 부득이 보병(步兵)을 역사시켰고, 또 부득이하여 수군(水軍)을 역사시키는 것이다. 또 만약 문소전(文昭殿)을 개축(改築)하고 군자창(軍資倉)을 영조[營作]한다면, 역사하는 곳이 하나만이 아니어서 백성들이 노력(勞力)에 괴로와할 것인데, 어떻게 하면 공역(工役)의 마땅함을 얻을 수 있고 백성들을 쉬게 할 수 있겠는가? 승지(承旨)들은 선공 제조(繕工提調)와 상의(商議)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는데, 선공 제조(繕工提調) 한치형(韓致亨)ㆍ정문형(鄭文炯)이 아뢰기를,
“이보다 전에 완원군(完原君)과 공신 옹주(恭愼翁主)의 두 집을 영조할 때에는 군사(軍士) 5백 명을 주었는데, 너무 많다고 생각하여 2백 명을 헤아려 감했었습니다. 올해에는 봄ㆍ여름에 두 집을 짓고, 가을에 한 집을 지어야 하는데, 만약 또 감한다면 완성(完成)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올해에 비록 세 집을 짓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땅히 군사의 수를 감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자, 한치형(韓致亨) 등이 말하기를,
“반드시 군사를 감하고자 하시면, 세 군데에서 역사(役事)하는 군사를 각각 1백 명씩 감하였다가, 문소전(文昭殿)ㆍ자수궁(慈壽宮)의 일을 마친 후를 기다려 도로 역사시키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가하다.”
하였다.
【원전】 12 집 462 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재정-역(役) / 건설-건축(建築)
[주-D001] 당령 수군(當領水軍) :
번상(番上)의 차례가 되어 근무중에 있는 수군(水軍). 이에 비하여 하번(下番)한 수군은 하령 수군(下領水軍)이라 하였음.
[주-D002] 자수궁(慈壽宮) :
세종(世宗)이 승하한 뒤 세종의 후궁(後宮)만을 거처하게 하던 별궁. 옛 무안 대군(撫安大君)의 사제(私第)였음.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이상돈 (역) | 1986
이색李穡영숙, 潁叔, 목은, 牧隱, 문정, 文靖
출생사망국적
1328(충숙왕 15) |
1396(태조 5) |
고려, 한국 |
上曰, 牧隱麗末名臣耶。在魯曰, 牧隱當勝國末, 能守自靖之節矣。健基曰, 入我朝, 嘗奉使於天朝矣。在魯曰, 健基言失實, 牧隱奉使, 在麗朝, 我太宗, 嘗以故人召之, 牧隱以白衣來謁, 仍示不臣之心, 國初嘗躋祀文廟, 以多作佛家文字。故旋罷黜, 然實爲東方文學之祖矣。尙賓曰, 牧隱大節卓犖, 實無異於圃隱矣。上曰, 孔子曰殷有三仁焉, 正謂此也。在魯曰, 我朝士大夫, 無非爲牧隱子孫也。上曰, 然乎? 在魯曰, 在京諸大族, 亦多有爲子孫者矣。諸臣以次退出。
故人 :
사귄 지 꽤 오래된 벗.
승저원 일기 > 영조 > 영조 11년 을묘 > 윤4월 23일 > 최종정보
영조 11년 을묘(1735) 윤4월 23일(임진) 맑음
11-윤04-23[27] 선정전에서 주강을 행하는 자리에 지경연사 김재로 등이 입시하여 《시경》을 진강하고, 신진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일, 역관을 양성하는 일, 청에 바치는 방물의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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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巳時)에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갔다. 주강을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지경연사 김재로(金在魯), 특진관 이진순(李眞淳), 참찬관 홍상빈(洪尙賓), 시독관 윤휘정(尹彙貞), 검토관 유건기(兪健基), 가주서 이상정(李象靖), 기사관 정동열(鄭東說), 기사관 송유식(宋儒式), 종신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 무신 신사경(申思冏)이 입시하였다.
상이 전에 배운 대목을 읽었는데 〈정월(正月)〉 장(章)의 ‘호위훼척(胡爲虺蜴)’까지였다. 윤휘정이 엎드려 ‘첨피판전(瞻彼坂田)’부터 장이 나누어지는 데까지 음과 뜻을 갖추어 읽었다. 상이 새로 배울 대목인 ‘첨피판전’부터 장이 나누어지는 데까지 음과 뜻을 갖추어 읽었다.
....................
상이 이르기를,
“목은은 고려 말의 명신인가?”
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목은은 고려 말에 능히 자숙하는 절개를 지켰습니다.”
하고, 유건기가 아뢰기를,
“우리 왕조에 들어와 명나라로 사신을 간 적이 있습니다.”
하고, 김재로가 아뢰기를,
“유건기의 말은 사실과 어긋납니다. 목은이 사명을 받든 것은 고려조 때였습니다. 우리 태종(太宗)께서 친구로 부르신 적이 있었지만 목은은 백의(白衣) 차림으로 와서 알현하여 신하가 되지 않겠다는 마음을 보였습니다. 국초에 일찍이 문묘(文廟)에 올려 제사되었지만 불가(佛家)의 글을 많이 지었기 때문에 곧바로 파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실로 우리나라 문학의 비조입니다.”
하고, 홍상빈이 아뢰기를,
“목은은 큰 절개가 뛰어나 실로 포은(圃隱)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공자(孔子)가 ‘은(殷)나라에 세 명의 어진 이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대부 치고 목은의 후손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한가?”
하자, 김재로가 아뢰기를,
“서울에 있는 여러 대족(大族)도 후손이 되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하였다.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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