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림푸스 알마티 대표이자 카자흐스탄 한인회 9대 회장을 맡아 교민 사회를 위해 봉사한 강병구 전 한인회장은 30대 초반 한국을 떠나 카자흐스탄에 첫 발을 내딛고 현지에서 28년 동안 다양한 사업을 펼치며 카자흐스탄 한인 진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 나가고 있다. 아내와 자녀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자택을 방문해 강병구 대표 인터뷰를 진행했다.
"내 인생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했던 유일한 2년"
한국에서는 군대 제대 후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정작 직장 생활을 한 기간은 모두 합쳐봐야 2년 정도밖에 안되고 30대 초반에 카자흐스탄에 오기 전까지는 사업만 했습니다. 2년 간 일했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은 의류 자재 유통과 서울 요지에 소형 마트 체인점을 운영하며 당시 일 매출 수억원을 올리는 제법 규모 있는 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에서 납품 거래처와 담당자들의 부정 사실을 알고, 뜻하지 않게 내부고발자가 모양새가 되어 퇴사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사실을 안 회사 사장님의 배려로 비식품 품목을 납품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일할 당시 구매 부서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어떤 품목이 많이 판매되는지 알고 있어서 납품 목록을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납품을 시작하고 첫달 정산을 해보니 당시 르망 한 대를 구입할 정도의 수익이었습니다. 이때가 군 제대하고 얼마되지 않았던 20대 중반쯤이었는데, 전라북도 김제 구석진 시골에서 태어나 물려받은 유산 한 푼 없이 그 때부터 같은 또래 나이에 비해 상상 이상으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고 1~2년이 지나자 납품했던 업체 지점장이나 거래처 관리자가 바뀌면서 납품 수량이 줄어드는 것을 보면서, 사업 방향을 바꿔 의류 부자재에 눈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의류 부자재 사업도 하루 납품 물량이 2.5톤 트럭으로 한 대 분량씩 팔리면서 그야말로 30대가 되기 전에 상상 이상의 경제적 여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여러 사업을 시도했는데, 어려움도 겪고 우여곡절이 많았죠.
"1달러에 3.5 텡게 했던 시절... 지천에 널린게 사업 기회로 보였다"
제 나이 33살이던 1992년에 아는 사람이 연락와서 '카자흐스탄에 가 보자'는 이야기에 무작정 비행기에 몸을 실었는데, 알마티에 도착하고 보니 모든게 돈으로 보일 정도로 사업 기회가 널려있었습니다. 한 예로 지금의 타쉬켄스카야 길을 지나는데, 트럭에 알루미늄, 구리, 새 건축자재를 싣고 구매자가 나타나기만 기다리는 운전자들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걸 싸게 사 놨다가 팔면 큰 돈이 될 것 같았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카자흐스탄의 92년은 심한 격변기 상태로 제대로 된 법도 체계도 없는 그야말로 손만 뻗으면 돈 벌 수 있는 것이 지천에 깔려 있었습니다. 당시 텡게가 1달러에 3.5 텡게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루블은 화폐 개혁 때문에 보따리에 싸서 들고 다니면서 생필품을 사야 할 정도로 가치가 폭락했었습니다.
이런 저런 모습을 보고 한국에 돌아 갔다가 93년에 다시 알마티에 오게 되었는데, 다시 오게 된 사연도 이야기 하자면 천일야화 수준을 될 것 같습니다.
"고작 500달러에 맨 몸으로 도착한 카자흐스탄 생활과 영화 같았던 삶..."
저는 한국의 보릿고개 마지막 세대가 우리 또래가 아닐까 생각하는데, 제가 살았던 시골에서는 봄철 춘곤기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지내왔지만, 한국의 과도기적 성장기를 겪으면서 세상의 흐름에 대해 더 눈을 뜨게 되고, 그런 경험이 '카자흐스탄에서 기회가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하고, 한국을 떠나야 했던 마음의 고민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이곳에 와서 돈을 벌게 된 것이 단지 운이 좋았다고 대부분 생각하지만, 저는 나름대로의 경험에 따른 선택과 도전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운영했던 회사는 열심히 하고 부양 가족이 많은 직원에게 거래처를 포함해 모든 것을 아무 조건 없이 물려주고, 500 달러를 손에 쥐고 카자흐스탄에 도착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똥배짱으로 카자흐스탄에서 맨 몸으로 시작해도 잘 할 자신감이 넘쳐났습니다.
처음 생각했던 사업 아이템은 소형 라면 공장이었는데, 계획이 무산되고 우연한 기회에 카지노를 운영하게 되면서 카자흐스탄에서 인생의 큰 시련을 맞보게 되었습니다. 카지노가 돈 벌이가 된다는 것은 알지만, 사업 특성상 마피아와 연관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인 것을 부인할 수 없죠. 아마도 카자흐스탄 대부분의 마피아를 만나 본 것 같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들의 이권에 제가 운영하는 카지노가 들어가 있었고, 이권 대립의 중간에서 납치만 5번 당하고, 생명의 위협도 여러번 겪었지만 지켜야 할 것도 물러설 곳도 없었기에 배짱 하나로 그 험난한 시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복병처럼 숨어 있던 난관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세법이었습니다. 당시 카자흐스탄 세법이 구체적으로 확립되어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법이 마피아 문제만큼이나 골칫거리였습니다. 올림푸스라는 카지노를 인수했을 때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총격적도 있었는데, 벽에 총탄 흔적, 주차장에 세워진 차가 벌집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카자흐스탄 격변기의 험난한 이면을 몸으로 절실하게 체험한거죠.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카지노 운영에 회의감이 들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가까운 지인이 카지노에 와서 돈을 잃으면 좋고, 따서 가면 기분 나쁘고, 그런데 밖에서 만나면 아무일 없는 듯 일상을 이어가는 제 모습이 심적 갈등으로 다가 왔고, 이런 일을 더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찾은 사업이 지금 바라홀까 시장 옆 '아뎀' 프로젝트였는데, 투자금 45만 달러가 없어지고 난 후에야 '난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사업을 하면서 제 전문 분야가 아니면 스스로 기준선을 정해두고 그 이상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은 욕심이고 그 기준선까지가 내가 역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뎀' 프로젝트도 기준선을 넘어가는 상황이 되자 어떻게 해서라도 투자금을 회수하려는 생각보다 정리하는 것으로 결정을 했습니다.
물론 '아뎀' 프로젝트가 무산되고 경제적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이 과정에서 부동산에 눈을 돌릴 수 있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습니다. 아마 이 때가 99년쯤 되었던 것 같아요.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우연히 미국 도시 계획 전문가를 만나 후진국의 부동산 발전 전망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미국에서 회계사로 일하는 친구가 미국 상무성에서 조사한 '카자흐스탄 경제 발전 동향' 자료를 보여 줬는데 카자흐스탄 경제가 어느 순간까지는 가파른 상승세를 나타낸다는 희망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 후 열심히 부동산을 찾아 다녔더니 주변에서는 정신병자라는 소리까지 하더군요. 그러다 찾게된 부동산이 현재 사말 '라이프 타운' 건물입니다. 완공된 것도 아니고 골조만 있는 상태의 매물로 65만 달러에 나왔는데, 저를 포함해 은행 두 곳과 3자 구도로 그 부동산을 매입하기 위한 물밑 작업이 치열했습니다. 하루 자고 나면 65만 달러 매물이 150만 달러, 200만 달러로 치솟던 상황입니다. 250만 달러까지 올라 갔을 때 건물주에게 365만 달러를 최종 금액으로 제시하고 이틀을 말미를 줬는데, 이틀 후 매매 계약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매입 1달 후 은행에서 매입가에 100만 달러를 더 줄테니 판매할 의향이 있는지 물어 왔습니다. 정말 그 당시는 부동산 시장이 거품 수준이 아니라 미친 널뛰기를 했던 시기 같습니다.이 때 교민 중에서도 부동산에 투자해 이윤을 남긴 사례가 제법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동산 사업이 일단락 되고 다음으로 눈을 돌린 것은 유전이었습니다. 이때가 아마 2004~2005년 쯤 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때도 주변 사람들에게 '미친놈', '정신병자' 소리를 들었죠. 한마디로 '네가 뭔데 유전을 한다는 거냐?' 이런 거였습니다. 당시 네 개 유전 광구를 한국과 연결하는 중간자 역할을 했는데, 1개는 성공하고 , 1개는 아직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석유공사와 아다광구 연결에도 제가 조력한 부분이 큽니다. 결과야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유전 후에 다른 사업도 진행했지만, 환율 폭락 등 여러가지 상황이 겹쳐 이전처럼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첫번째는 지금 지상사협의회의 시작을 저를 포함해 쌍용 박헌영씨와 3~4명이 만들었던 것인데, 지금 지상사협의회 연혁에는 어떻게 정리되어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당시 상사협의회에서 주관해 고려인 중 미스 카자흐스탄을 뽑아 한국에 보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가 아마 97~98년 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메인 후원자가 되어 몇 만 달러를 지원했는데, 당시 아파트 한 채가 3~5천 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시작했던 모임이라 기억에 가장 많이 남습니다.
두번째는 유전 사업을 통해 한국과 카자흐스탄 경제 협력에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인으로는 카자흐스탄에서 최초로 유전사업에 뛰어 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카자흐스탄 한인회 9대 회장으로 봉사했던 것인데, 지금에야 말씀드리지만 당시 상황은 한인회장에 출마하기엔 심리적으로도 주변에 정리해야 할 일도 있었기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500 달러 들고 거의 맨 몸으로 오다시피 카자흐스탄에 와서 경제적 여유를 얻고, 소위 살 만하게 된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되어, 기회가 주어져 교민을 위해 봉사 할 수 있다면 거절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어려운 상황을 급하게 정리하고 한인회장에 출마 했었습니다. 다른 나라 상황은 모르겠습니다만, 카자흐스탄에서 한인회장을 한다는 것은 명예나 부가적으로 얻는게 있기 때문에 아니라 자신의 시간도 경제적인 부분도 희생하고 헌신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앞서 한인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의 수고와 헌신이 값진 것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역시 한인회장을 역임한 분의 수고와 헌신보다 더 값진 것은 앞으로 드러나지 않고 뒤에서 물심양념 크고 작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교민과 기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한인회는 이러한 분들의 후원과 격려에 당연하다 생각지 말고, 감사의 마음과 인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네번째는 올해로 17년을 이어 개최하고 있는 '코리안컵 골프대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17년 이라는 시간 동안 한, 두번 다른 단체에서 주최하기도 했지만 시작부터 지금까지 17년의 명맥을 유지하며, 카자흐스탄에 골프를 좋아하는 교민과 현지인의 교류의 장을 만들어 오고 있습니다. 코리안컵 골프대회를 시작하게 된 취지는 한국인과 현지인 구분 없이 골프를 좋아하는 동호인이 모여 서로 교유하고 인맥을 쌓고, 나아가 행사를 통해 현지 사회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매년 행사는 어렵게 진행해 오고 있지만, 전체 후원 중 절반은 지역 사회를 위해 다시 후원하고 있으며, 남은 절반은 참가자에게 경품으로 나눠 드리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중국 기업이나 카자흐스탄 현지 기업에서는 후원에 적극적인 반면, 한국 기업은 문의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현실입니다. 자영업하는 교민께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후원 해주시는 것에 매번 감사드리고, 어렵게 행사를 개최해 오고 있지만 힘 닿는 한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이제는 한국 젊은 사업가의 카자흐스탄 시장 진출 시기라 보여져..."
저는 한국에서도 사업을 해 봤고, 최근에도 400만 달러를 투자해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다 쓴 맛을 경험하고 카자흐스탄에서도 오랜 시간 사업해 본 결과 아직 카자흐스탄에서는 틈새 시장을 공략할 부분이 많다는 생각입니다.
카자흐스탄 한국 교민을 상대로 사업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을 뿐더러, 카자흐스탄 현지 시장과 나아가 CIS 전체 지역을 겨냥한 사업 구상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진취적이고 현명한 한국의 젊은 사업가들이 카자흐스탄에 진출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한국에서 이미 검증 된 사업 모델을 현지에 접목 가능한 부분이 있는지 조사하고, 특히 IT와 금융을 융합한 모델은 앞으로 전망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금융이나 보험의 파생 상품을 개발해 현지 금융업체와 협업을 하거나 소형 프렌차이즈 사업, 화물 배송 시스템 등도 고려해 볼만한 사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래 있던 것을 다른 상황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은 실패 위험 부담을 줄일 수 있고, 얼마든지 적용 가능하기 때문에 시대 변화에 맞춰 젊은 사업가의 진출을 적극 권장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들의 진출 길잡이 역할에 기관과 한인회, 중기소기업연합 등 다양한 단체가 협력해 발판을 마련해 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카자흐스탄에 진출하려는 개인이나 기업에 관해서는 먼저 진출했던 개인이나 기업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분석하고 최종적으로는 '현지화 시켜야 살아남는다'라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조언은 마무리하겠습니다.
500달러를 들고 카자흐스탄에 도착해 카자흐스탄 한인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수없는 어려움과 사연을 겪은 강병구 대표의 이야기를 짧은 대화 몇 마디로 모두 전달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함을 느꼈던 인터뷰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눈에 들어 온 '글로벌 재외동포 대상' 기념패의 "민간 외교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셨습니다"는 문구가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인생을 수식하는 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근향(한인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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