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금강산(金剛山) 관광
금강산 앞 장전항(長箭港) / 해금강(海金剛) / 금강산 만물상(萬物相) / 금강산 상팔담(上八潭) 계곡
나는 우리나라에서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그 이듬해인 1999년에 외금강의 구룡폭포, 만물상과 상팔담 코스를 2박 3일간 관광할 기회가 있었는데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놀라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천하명산(天下名山)으로 일컬어지는 북한의 금강산(金剛山)은 계절에 따라 그 아름다움과 정취(情趣)가 남달라 옛사람들은 각각 이름을 다르게 붙여 불렀는데 봄은 금강산(金剛山), 여름은 봉래산(蓬萊山), 가을은 풍악산(楓嶽山), 겨울은 개골산(皆骨山)이라 하였다.
봄의 금강(金剛)은 쇠 금(金)에 굳셀 강(剛)이니 온갖 꽃이 만발하고 산수(山水)가 맑기 때문이요, 여름의 봉래(蓬萊)는 쑥 봉(蓬)에 명아주 래(萊)니 온 산이 녹음으로 물듦이요, 가을의 풍악(楓嶽)은 단풍나무 풍(楓)에 큰 산 악(嶽)이라 온 산이 단풍으로 물듦을 나타내었고, 겨울을 칭하는 개골(皆骨)은 다 개(皆)에 뼈 골(骨)을 쓰니 앙상한 나뭇가지와 눈 덮인 기암괴석이 뼈(骨)를 쌓아 놓은 것 같다고 붙인 이름이다.
또, 외금강(外金剛), 내금강(內金剛), 해금강(海金剛)으로 나뉘는 금강산은 동서 40km, 남북 60km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아우르는데 주봉은 비로봉(毘盧峰)이며,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이 어우러지고 계곡마다 절과 암자가 셀 수 없이 많아 예로부터 ‘금강산 일만 이천 봉 팔만 구 암자(金剛山 一萬二千峰 八萬九庵子)’라는 판소리의 가사도 있었다.
즉, 금강산에는 산봉우리가 1만 2천(12,000)개, 암자가 8만 9(80,009)개 있다는 의미이다. 사실일까??
금강산 구룡폭포 / 외금강 삼선봉 / 금강문(외금강 九龍淵 입구)
1999년이니 벌써 25년 전으로, 내가 한창 젊었던 50대 초반일 때였으니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후 등산광이라 부를 만큼 등산(登山)에 매료되어 국내는 물론, 세계 여러 나라의 명산(名山)들을 두루 누볐다.
내 고향이 강원도라 어린 시절부터 설악산, 소금강은 물론, 지리산, 한라산 등 우리나라 명산들을 두루 등산하며 즐겼는데, 사실 금강산을 향할 때 그다지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직장 동료들과 함께 즐기는 산행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너무나 아름답고 웅장한 금강산(金剛山)의 모습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로, 북한이 고향인 우리나라의 재벌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이 앞장서서 이룬 성과라고 할 것이다. 정 회장은 1974년부터 불기 시작한 중동 붐(Boom)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1976년, 우리나라 최초의 승용차인 포니(Pony)를 생산하였으니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함께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신화(神話)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후 정 회장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김영삼(金泳三)에 밀려 낙마(落馬)했고, 김대중(金大中) 시절이었던 1998년 6월과 10월에 소 1001마리를 북한으로 보내는 신기한 전략을 성공시킨다.
정주영 회장은 고향이 북한지역 강원도 통천(通川)이었는데 어릴 때 소를 판 돈을 들고 집을 나와 남한으로 월남(越南)했다고 한다. 그는 아는 사람도, 친척이나 친지도 없었지만, 빈손으로 우리나라 재계(財界)에 뛰어들어 억만장자가 되는 신화의 인물이었다. 그가 소를 끌고 북한으로 간 것은 북한에서 공산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월남할 때 송아지 판 돈을 들고 도망왔던 반성 때문이었을까?
소 방북은 2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2차 때 정주영이 직접 소 500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통과하여 북한을 방문하면서 국제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끌었는데, 당시 북한으로 간 소를 ‘통일 소’라고 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해(1998년) 김정일을 설득하여 금강산 관광사업을 성사시킨다.
1999년, 나는 강원도 묵호항(墨湖港)에서 관광유람선에 올라 북한 금강산 앞바다 장전항(長箭港)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금강산에 도착한 후 관광을 했는데 관광이 끝나면 다시 장전항 유람선으로 돌아와 배 안에서 자고, 다음날 다시 버스를 타고 금강산으로 이동하여 관광을 하는 2박 3일 코스의 여행이었다.
2003년부터는 육로(陸路)관광도 시작되어 강원도 고성(高城) 화진포(花鎭浦) 출입국사무소에서 버스를 타고 직접 금강산을 가는 여행코스도 생기면서 총 100만 명에 가까운 남한의 관광객들이 금강산 관광을 했다. 대략 10년 정도 남북의 화해가 이루어지면서 개성공단 설립, 금강산 관광지 개발 투자 등 남북교류가 원활해지며 남북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희망에 부풀었는데 2008년 7월, 우리나라 관광객이던 한 여성이 새벽에 일어나 혼자 금강산 앞바다 해변을 산책하다 북한 초병의 총을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남북화해 관계가 하루아침에 악화(惡化)되는, 웃지 못할 우리의 아픈 역사이다.
<금강산 관광 여정(旅程)>
처음, 장전항(長箭港)에서 버스를 타고 금강산로 향하는데 비포장도로인 도로는 옆을 모두 철조망으로 높이 연이어 막아 놓았고, 이따금 초라한 행색의 북한 사람들 모습과 나뭇지게를 지고 신기한 눈으로 버스를 쳐다보던 젊은이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하다.
금강산 계곡 입구 온정(溫井)마을 이르면 북한검문소에 내려 검문(檢問)을 받는데 검문병 눈빛이 너무도 싸늘하여 등골이 오싹하던 기억이 난다. 제일 먼저 외금강 만물상(萬物相) 등산코스를 올랐는데 상상외로 바위산 모습이 신기하여 놀라웠다. 솔직히, 설악산과 소금강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신기한 금강산의 풍경이었다.
온정(溫井)마을은 온천이 솟아 나와 온천욕도 할 수 있었는데 등산이 끝나면 온천욕도 즐겼다.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곳곳에 감시원이 서 있었고, 산행 안내판과 경고판도 세워 있었는데 경고판에는 계곡물에 씻지 않기, 아무 데서 소대변(小大便) 보지 않기, 큰 소리로 떠들지 않기... 등이었다.
조금 오르다 보니 바로 옆을 흐르는 계곡물이 너무나 맑고 구슬처럼 반짝거려서 그냥 갈까 하다가 마침 길옆에 서서 지키고 있는 아가씨 감시원에게 ‘아가씨, 저 계곡물이 너무나 구슬처럼 맑고 아름다워요. 손을 씻지는 않고 조금 만져만 보면 안될까요?’ 했더니, 요 아가씨 감시원이 방긋 웃으며 ‘씻어 보시라요..’ 신기한 세상이다.
한참 오르다 내가 갑자기 소변이 생각난다고 하자 같이 가던 선배가 ‘벌금 1000원(?)이었잖아. 내가 대신 내 줄께 아무 데서나 싸’ 해서 마주 보고 웃던 기억... 중간 쯤 올랐는데 길옆에 소변(小便) 장소가 있었다.
나무로 엉성하게 기둥을 세우고 천으로 둘러막은 두 칸을 만들어 그 안에 플라스틱 통을 놓았다.
서둘러 들어가 플라스틱 통에 소변을 보았는데 옆에서 기웃거리던 북한 노동자가 지게에 지고 온 커다란 통에 오줌을 모아 붓더니 지게에 지고 산 아래로 내려간다. 아니, 옆에 있는 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고 붓고 흙으로 덮던지, 좀 떨어진 으슥한 계곡 나무 밑에 쏟아내면 될 텐데 산 밑으로 지고 내려가는 모습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물상은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이 가지가지 형상들인데 바위마다 이름이 붙어있었고, 엄청난 높이의 구룡폭포는 풍광은 물론, 폭포소리가 가슴을 뻥 뚫어주는 느낌이었지만 이따금 바위벽에 북한 공산당 구호(口號)들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상팔담(上八潭)은 구룡폭포 위쪽으로 올라가 보면 계속하여 폭포가 떨어지며 제법 깊은 소(沼/潭)를 만드는데 그런 소(못)가 8곳이나 되어 상팔담(上八潭)이라고 한단다.
만물상 등산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니 공연장이 있는데 평양 모란봉교예단의 공연을 보는 일정이 있었다.
국내에서도 다양한 쇼를 본 경험이 있던 나는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좌석에 앉았는데 이 공연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공연이었다. 나중 알아봤더니 북한의 평양 모란봉교예단은 세계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타기도 했던 기예가(技藝家)들의 집단공연일 줄이야.... 보는 공연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다음날은 삼일포와 해금강 관광이었는데 이곳 또한 기기묘묘한 형상의 바위들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나는 세계 곳곳을 배낭 메고 여행을 하였지만, 이곳 금강산 관광은 영원히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