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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에게 태양왕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3대 국왕 루이 14세는 다섯살도 채 되지않은 어린 나이에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에는 왕가의 사냥을 위한 자그마한 여름 별장에 불과했던 베르사이유에 거대한 궁전을 건축하기로 결정한 커다란 이유는 프롱드 난 의 악몽 때문었다. 즉위 후 여러번 어려운 시절을 겪은 그는 파리에 별다른 애착이 없어서 국왕 친정 후 파리에 반드시 가야만 하는 일이 있어도 항상 교외를 전전했다. 루이 14세는 가능하면 파리에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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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를 통한 정치적 선전 – 왕의 춤
루이 14세가 취약한 자신의 입지를 위해 택한 수단은 발레를 위시한 공연 퍼포먼스였다. 이것은 당시 프랑스보다 훨씬 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경우와 대조된다. 스페인의 군주는 멀리서 군중 앞에 잠시 모습을 보이기만 해도 좌중을 압도했다. 국력이 약할 뿐더러 내란 때문에 심한 정치적 혼란기를 겪은 프랑스에서 십대의 젊은 왕은 좀 더 적극적으로 강한 인상으로 민중에게 호소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를 통한 정치적 선전과 왕실의 화려한 축제는 소학술원에 의해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 따라 기획되었다. | |
이런 퍼포먼스를 통해 루이 14세는 프롱드파를 제압하고 혼란을 평정한 신화적 영웅으로 그려졌다(그러나 실제 프롱드난 때 루이 14세는 10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반란 진압을 지휘하지 않았다). 또한 주피터 및 아폴론을 위시한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에 자신을 비유했고,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벌인 무훈, 영웅적 전사로서의 혁혁한 업적을 통해 국왕의 위대한 이미지를 널리 알렸다. 새롭게 건축된 호화롭고 장려한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태양’ 아폴론의 이미지가 곳곳에 새겨졌다. 발레와 무도극은 이미 루이 13세 때 시작된 것이었지만 루이 14세 시절에 절정에 달했다. 젊은 왕이 국민 앞에 ‘태양’의 현신으로서 직접 등장하는 순간 축제는 흥분의 절정을 달렸다. 루이 14세는 화려하게 장식된 무대 위에서 고대 영웅이자 신의 모습으로, 금빛으로 분장을 하고 멋지게 춤을 추었다.
루이 14세 = 태양신 아폴론, 황금의 빛
17세기 프랑스의 궁정 발레는 단순히 오락거리로서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구경하는 오락거리가 아니라 전례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젊은 루이 14세는 궁정 발레극에 직접 참여했다. 그는 전쟁광이었지만 고귀한 미와 의례 역시 중시했다. 궁정 조경사 르 노트르가 기획한 베르사이유 정원의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방사상 구도처럼, 왕이 참여한 발레는 국왕의 힘이 현전하여, 그 힘이 사방 천리로 뻗어나가는 것을 상징하는 전례적 의미가 있었다. 궁정 발레극에서 왕의 신체의 현전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는 이름답게 태양신 아폴론 혹은 영웅적 전사의 역할을 즐겨 맡았다고 한다.
당연히 왕이 참여한 궁정 발레에 학술적 연구가 뒤따랐다. 발레 상연의 당위성과 형식, 안무 방식에 대한 이론서, 그 이론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하는 책들이 당시 여러 권 출간되었다. 춤의 내용과 형상이 그대로 베르사이유 궁전의 기념비적인 장식미술 모티프로 구현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특히 발레극 [고귀한 춤], [전쟁], [펠레와 테티스 (펠레아스와 테티스의 결혼식)]과 같이 빈번히 상연되던 몇몇 레퍼토리는 그 안무와 형식이 고정되어 있었고 자주 무대에 올려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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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앙리 기시의 [밤의 춤]에서 ‘태양’으로 분한 루이 14세, 1653
펜과 과슈, 167cmx2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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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베르사이유 궁전 내 루이 14세 방의 태양 장식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
왕권을 드러내기 위해 루이 14세가 자신의 표상으로서 채택한 신성은 아폴론이었다. 태양신 아폴론은 조건없는 사랑와 합리적 이성, 음악, 의술을 상징했다. 또한 아폴론은 기원후 초기 기독교 시절에는 한때 그 도상이 예수와 혼동되기도 했고, 유럽 군주들이 군주의 표상으로서 빈번히 선택한 신이었다. 아폴론 즉, 태양이 뜻하는 조건없는 사랑은 본래 호혜적인 교환을 전제하지 않는 것이다. 조건부 교환이 아닌 무조건적이고 끝없는 은혜가 태양신의 사랑이다. 문명 이래로 바로 그런 은혜와 사랑이 왕권을 신권으로 정당화 시키는 이치였다(현실은 항상 이치와 달랐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근본적 에너지의 원천인 ‘태양’으로서 왕의 현신은 프랑스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이유적인 의미에서의 일반경제의 작동에 해당한다.
루이 14세는 즐겨 떠오르는 태양, 아폴론으로 분장했으며 때로는 기계장치 전차를 타고 무대 위에서 상승하거나 하강하곤 했다. 아폴론 주위에는 님프와 요정들의 무리가 몰려들었다. 일반적으로 궁전 발레의 무대는 관객들을 사로잡기 위해 보이지 않는 기계장치를 사용했다. 따라서 극의 흐름이 대단히 정교했고 스펙터클했다. 궁정 발레의 환상적이고 화려한 분장, 의상, 고귀한 인물들의 직접적인 참여, 스펙터클한 기계 무대장치와의 긴밀한 상호 협력은 관객을 사로잡아버리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루이 14세는 발레극 [밤의 춤](1653)과 [펠레와 테티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1654년 4월 14일)에서 아홉 뮤즈를 거느린 아폴론 역을 맡았다. 발레극 [펠레와 테티스]는 강렬한 비주얼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작품이었다. 영화 [왕의 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얼굴까지 온몸을 금빛으로 칠한 아폴론이 기계장치를 이용 구름을 뚫고 하늘에서 강림한다. 이어서 무대 위에서 장려한 춤을 추며 프롱드파를 상징하는 퓌톤(Python)을 처단하는 것이 [펠레와 테티스]의 주요 줄거리이다. 카오스를 상징하는 악한 힘을 물리치고 질서를 구축하여 광명을 가져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아래의 극중 대사는 그런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대사는 음악가 장 밥티스트 륄리의 유명한 오페라-발레 [카드무스]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세상을 혼란에 빠뜨린 이 퓌톤을 내가 쓰러뜨렸도다 악마와 프롱드가 위험한 독으로 이 끔찍한 뱀을 더욱 부추겼도다 하지만 이제 반란은 더 이상 내게 피해를 입히지 못할 것이다
파리 카루젤의 아폴론 – 초월적인 왕
루이 14세는 이처럼 왕의 춤을 통해 정치적 실체로서 자신을 드러내면서 초월적 존재임을 웅변했다. 당시에 기념할 만한 사건은 루이 14세가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실시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부패한 재상이었던 쥘 마자랭의 죽음(1661)을 기점으로 루이는 마자랭의 공조자이자 재무장관인 니콜라 푸케를 부패와 반란을 꾀한 대역죄로 감옥에 가두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시도한다. 그 기념비적 첫 시도는 1662년 파리에 위치한 카루젤의 거리 축제 참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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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에 걸친 이 거대한 행사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책과 텍스트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카루젤은 본래 위험하고 전투적인 기마 시합에서 유래한 축제였다. 그러나 이 날의 카루젤은 왕세자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연출된 일종의 연극 무대였다. 루브르 궁전 앞에 위치한 임시 극장에는 만 오천명의 관객이 기마 토너먼트 관람을 위해 모여 있었다. 먼저 화려한 의상과 문장으로 치장한 귀족들의 행렬이 지나갔다. 이어서 태양이 구름 속에서 환히 솟아오르 듯이 떠오르는 찬란한 금빛 ‘태양’으로 연출된 루이 14세가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각자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진 방패를 든 대귀족들은 하나같이 왕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1662년 6월 5, 6일). 이런 왕의 모습은 군중들에게 확실히 인상적이었으리라. 또한 루이 14세는 발레극 [마법에 걸린 섬의 쾌락](1664)과 [위장한 아모르(큐피드)의 발레](1664)에서 미녀의 유혹을 극복하는 아모르적 전사로, [비너스의 탄생](1665)에서 영웅 알렉산드로스로 등장해 관객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국가 전체를 하나로 묶는 왕의 퍼포먼스
우리는 영화 [왕의 춤]을 통해서 실제 루이 14세가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 그 일부를 엿볼 수 있다. [왕의 춤]은 루이 14세와 궁정 음악가 륄리를 그린 영화이다. 그러나 정치가 아닌 음악팬들이라면 보다 관심이 가는 쪽은 루이 14세가 아닌 궁정 음악가 륄리일 것이다(마찬가지로 보다 흥미를 끄는 인물은 베르사이유에 거처하던 귀족이 아니라, 궁전을 건축하고 장식한 수많은 창조적 예술가들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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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 [왕의 춤]에 등장하는 황금의 루이14세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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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장 브랭 1세 [루이14세 연극축제 의상] 17세기경
소묘, 루브르 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
이처럼 왕의 춤은 그자체 세계로 뻗어나가는 절대군주의 힘을 확인하는 권력의 수행이기도 했다.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이같은 퍼포먼스는 귀족들의 통합뿐 아니라 국가 전체를 하나의 사회로 묶기 위해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때때로 왕과 고위 귀족이 참여하는 퍼포먼스는 민중과 섞이는 가운데 치러졌다. 예컨대 루이 14세는 놀랍게도 여장을 하고 퍼포먼스에 출연하기도 했다. 발레극 [사계절](1661)에서 그는 ‘여름’이자 수확을 나타내는 세레스 여신 역할을 했고, [마을의 결혼](1663)에서는 고혹적인 마을 처녀로 분장했다. [마을의 결혼]은 파리 근교의 뱅센느에 있는 왕의 성에서 공연된 익살 발레극이었는데, 여장의 의미에 대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준다. 루이 14세가 신부인 마을 처녀로 분했고, 귀족인 보샹이 신랑 역을 했으며 라상 후작 또한 여자로 분장해 남성들과 춤추었다. 이와 같은 여성 분장은 왕에게 허락된 무한한 유혹적인 힘을 여장을 통해 과시하며, 왕의 절대적인 힘을 실현시키기 위한 일종의 제례적 성격마저 가지고 있었다. 이와 유사한 의미에서 발레극 [고귀한 춤]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불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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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사람이 사랑의 승리를 할 것이네. 그녀는 그녀가 보는 모든 것의 마음과 약혼하니 그녀에게 봉사하는 이를 부드럽게 바라본다네.
왕의 매력은 권력인 동시에 단순히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생식력이기도 했다. 왕이 지니고 있다고(혹은 지녀야만 한다고) 가정되는 섹슈얼리티를 보강하기 위해 일종의 전례의 형태로서 마을 처녀로 분장하는 여장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1650~60년대 발레극에서 왕의 신체는 반드시 그가 지닌 섹슈얼한 잠재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만 했다. | |
왕의 춤의 시연은 라 로슈푸코와 같은 문인이 지적했듯이 절대군주 힘의 광대함과 제한없음, 그가 지닌 강한 유혹적 힘을 내보이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1670년 2월 14일 온몸을 황금빛으로 감싸고 머리에는 태양관을 쓴 채 하늘에서 내려와 춤을 추고난 후 더 이상 직접 무대에 서지 않았다(당시 32세). 아마도 소기의 목적을 이룬 이상, 군주로서 더 이상 군중의 구경거리가 돼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사이유 궁에서 귀족들이 직접 참여한 발레와 연극 공연 및 무도회는 여전히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런 행사들은 귀족사회의 통합과 사회성 진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화가 이야생트 리고가 1694년에 그린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보면 루이 14세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마치 멋진 록스타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년의 초상화에서는 반대로 위엄있게 절제되어 있는 모습이다. 확고하고 내성(內省)적인 모습이다. 임종 때 루이 14세는 어린 황태자 루이 15세에게 자신은 지나치게 전쟁과 건축에 몰두했지만 너는 그리하지 말고 충신과 학자의 조언을 잘 듣고 현명한 군주가 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 |
관련링크 : 루이 14세를 그린 그림 루이 14세 연극축제 의상 더 보기
- 프롱드난
프롱드난은 콩데 공을 비롯 고위 귀족, 파리고등법원을 비롯한 관료들에 의해 발생한 내란이다. 이들은 루이 14세의 섭정인 안느 도트리슈와 재상 마자랭에 대항해 내란을 일으킨다. 당시 10세에 불과했던 루이 14세는 혼란스러운 파리를 탈출해 이곳 저곳을 전전해야만 했다. 어린 시절의 악몽과 같은 불안, 공포의 기억은 왕의 개인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이 14세는 귀족과 고등법원을 증오하고 인간을 불신하게 되었고, 파리라는 도시를 가급적 회피하게 되었다.
- 소학술원
1648년에 설립된 왕립 회화 조각 학술원(아카데미)과는 다른 기관이다. 소학술원은 경제뿐 아니라 여러 가지가 모두 취약했던 프랑스의 자급자족을 꾀했던 재무장관 콜베르 주도하에 루이 14세 신화를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적 연구원이었다. 소학술원이라는 명칭은 프랑스 학술원 회원 중 몇 명이 모여 회의를 시작한데서 유래한다. ‘짐은 곧 국가다’라는 태양왕의 치세를 전략적으로 고안해 실제로 구현해낸 것은 그들이었다.
- 글 최정은 / 미술 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에서 회화 및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주요 저서로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대한 책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동물, 괴물지, 엠블럼]이 있다.
발행일 2011.01.19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